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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오스프리-엘리트> 독일 자유군단, 1918-1923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7.09.25|조회수1,664 목록 댓글 6

글에 앞서 :


1. 본인은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입니다.. 맑스께서 선포하신 신탁엔 흥미거리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직은.
2. 본인은 2차대전때의 독일군 (국방군, 친위대 모두) 을 혐오합니다..

3. 고유명사 (특히 부대명) 의 한글표기를 모르는 부분이 많아 많은경우 알파벳 그대로 적었습니다. 고수분들의 관대한 지도 부탁드립니다.

 

1918년 : 제국의 붕괴.

 

1914년 여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만 하더라도 유럽의 주요 대도시에는 열광의 물결이 휘몰아쳤습니다. 모든 참전국들은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영광스러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자원을 기꺼이 쏟아부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연령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징집이 이루어져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기계화된 대규모 도살장으로 보내졌습니다. 몇달 동안이나 계속된 일련의 잔인한 피의 전투에서 수백만의 병사들이 쓰러지는 참극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영원할 듯 보였습니다.

 

4년동안 최전선의 병사들은 일종의 지옥에서 생활했지만, 후방의 많은 시민들 역시 굶주림을 가져온 생활물자의 결핍 등, 산더미같이 불어나는 여러가지 고통을 받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열광적인 애국적 물결은 머지않아 당혹스러운 불신으로, 그 다음에는 좌절, 마지막으로는 분노로 변했습니다. 전쟁에 반대했던 정치 지도자들 -1914년 당시에는 미약하고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이 점점 대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난국을 해결할 수 없는 군사,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커져 갔습니다.

 

러시아는 이러한 불만을 실제 혁명으로 폭발시킨 최초의 국가였습니다. 전쟁 발발당시의 애국적인 열광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혁명의 물결을 분칠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3년간이나 계속된 전쟁의 비극은 차르 정부의 만성적인 무능함을 폭로했습니다. 1917년 2월, 차르는 온건한 정치 지도자이며,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케렌스키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10월, V.I 레닌의 볼셰비키 당에 의해 벌어진 쿠데타에 의해서 끝날 운명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레닌과 전 유럽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계급간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1차 대전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급격한 사회변동을 가져올 라이벌 자본주의 국가간의 싸움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이끌 노동자들의 필연적인 승리를 가져올 사회계급간의 내전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으며 이로써 국가의 압제적 권력은 마침내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잡은 레닌의 볼셰비키들이 지난하고 잔인한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봉기들이 일어났으나, 러시아가 겪었던것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으며 몇몇은 아직까지도 드라마틱하기까지 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 볼셰비키들에게 영향을 받은 극좌 정당들이 권력을 잡기위한 폭력 혁명을 시도했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대전은 끝났지만 총성은 멎을줄을 몰랐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휴전은 (격렬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로지 일련의 내부 투쟁만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혼돈은 몇몇 패전국과 몇몇 승전국 (이탈리아 등) 에서 유사한 사건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와 비교하여) 저강도 내전의 표본이라 할만한 분쟁이 독일을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내전과 함께, 1918년 중앙제국의 멸망 후 그어진 새로운 국경선은 많은 국경분쟁을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부활과 이에 따른 독일과의 갈등이 이러한 영토분쟁의 전형적인 예였습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저강도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인 자유군단 운동과 주로 폴란드인에 맞선 국경수비에 관한 내용을 다룰 것입니다.

 

독일 혁명.

 

1918년 11월, 독일제국 정부는 연합국과의 휴전을 결정했지만 많은 병사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독일은 비록 연합군의 대규모 물량공세에 서서히 후퇴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프랑스와 벨기에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핵심부분과 발칸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지휘부는 1918년 봄의 대공세의 실패 이후로 군사적인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에게 엄청난 대가의 정당성을 가져올 승리를 이루어야만 하는 독일 지도자들의  실패는 제2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혁명을 야기했습니다.

 

1916년부터 존재했던 Spartakusbund (스파르타쿠스 단) 이라고 불린 극좌 정치세력은 즉각적인 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며 공산혁명을 추구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의회역시 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는 동안, 그해 4월, 대규모의 파업이 독일에서 벌어졌으며 이어 여름에는 독일 대해함대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istische Partei Deutchlands, SPD) 는 정부에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며, 전쟁을 속행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1917년 4월, SPD의 중요한 부분이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USPD) 으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이 새로운 정당은 좀더 극단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평화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 정치적인 개혁까지 요구했습니다.

 

후방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었지만 루덴도르프가 지휘하는 독일군 지휘부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속해서 입안했습니다. 그러나 1918년 9월이 되자 중앙제국의 다른 멤버들 (터키,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은 연합국과의 휴전을 맺을 길을 찾기 시작했으며, 곧 독일역시 이들을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휴전협정에서 좀더 나은 위치에 서기위해 지난 2년간 비교적 잠잠했던 독일 대해함대는 출항하여 독일제국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말은 이렇지만  실상은 나가서 배째라...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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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린의 인민해군사단. 1918년 12월.

 

1918년 10월 28일, 킬의 독일전함부대의 승무원들은 출항하는 대신 자신들의 배에 적기를 내걸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뤼벡, 함부르크, 브레멘과 같은 다른 군항으로 급속하게 번졌습니다. 군함의 장교들은 이들에게 압도되었으며 몇몇은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곧 러시아의 "소비에트#" 를 모델로 하여 "노동자와 수병들의 평의회 (독일어로는 Rate)" 가 설립되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수병들은 "인민해군사단 Volksmarine -후에 동독해군의 정식 명칭이 됩니다.- " 을 조직했으며 혁명을 퍼뜨리기 위해 즉시 분견대들을 전 독일 -특히 베를린으로-  로 보냈습니다.

 

#내용추가 : 우리나라에서는 소비에트 = 볼셰비키, 이런 공식이 성립하는 듯 한데, 원래 양자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1905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병사등이 모여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 사회적 공동체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비에트입니다.  그 후, 아직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이름만 다수파인) 볼셰비키들이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이 소비에트를 이용하면서 유명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기만적인 구호를 채택, 양자가 같은 것처럼 인식되었습니다만.. 애초에 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소비에트와 강력한 당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볼셰비키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 소비에트는 비록 소련 헌법상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사멸합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오토 룰레는 레닌을 직접 만나본 후 이러한 레닌의 전략을 간파하고 극좌세력에서의 활동을 포기한 최초의 독일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독일 대중들이 그들의 정부가 휴전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혁명적 긴장이 전 제국을 휩쓸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들의 부대로 난입하여 적기를 계양하는 폭도들에 대한 발포명령에 거부했습니다. 전국에 "노동자의 병사들의 평의회" 가 세워졌습니다. 9월부터 정권을 잡고있던 독일사회민주당은 이러한 물결을 막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중 한명이었던 킬 Kiel 의 자사였던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는 자신이 담당하던 지역에서 혁명을 잠재우려는 시도에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만 이미 혁명의 물결을 잠재우기에 이런 시도들은 너무 늦었습니다. 11월 8일, 바바리아를 통치하던 비텔바흐 Wittelsbach 왕조는 뮌헨지역의 혁명세력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독일 황제이자 프러시아의 왕인 빌헬름 2세는 자신의 황좌를 포기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 황제직은 포기했으나 프러시아 왕으로는 계속 남겠다고 주장한 것이지만.. 무시된 것이죠.) 독일의 모든 중소 군주들 역시 폐위되었습니다.

 

혁명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독일 사회민주당 역시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11월 9일, 사회민주당의 당수인 샤이데만은 독일 "공화국" 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자였던 리프크네히트역시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습니다. 두 적대적인 정치단체는 곧 충돌할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있어서 카이저의 퇴위는 혁명의 성공적인 완성을 의미했으나,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독립민주사회당에게는 단지 혁명의 첫걸음에 불과했습니다.

 

임시정부.

 

독일 좌파세력의 주된 세력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차르제도가 붕괴됨으로써 민주정치의 탄생이 아닌 폭력에 의한 공산독재가 시작된 러시아의 전례를 따를 의도가 없었습니다. 독일공화국의 첫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독일 사회민주당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연립에 찬성했습니다. 동시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수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루덴도르프 대신에 참모본부장에 취임한 그뢰너 장군과 공산 폭동을 막는 동시에 새 정부를 지원하는 데에 합의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에베르트-그뢰너 협정입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선포되었으며 즉시 독일군들은 질서정연하게 그들의 원 국경까지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군대는 곧 붕괴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 병사들의 희망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때문에 11월 27일, 독일 지휘부는 지원자로만 구성되어 의심할 바 없는 충성심을 가진 새로운 부대들을 편성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볼작시면, 독일에는 191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두개의 정권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임시정부 (공식명칭은 러시아의 예를 따라 "인민대표 위원회" 였습니다.) 였으며 다른 한쪽은 약 10,000명의 위원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평의회" 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실권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독일의 미래는 이러한 "평의회 운동" (Raterbewegung) 의 행보에 달려 있었습니다.

 

1918년 12월 16일, 전독일 연방의회가 베를린에서 열렸습니다. 비록 여러가지 극단적인 주장들이 나왔지만,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소수파에 불과했습니다.- 새 의회의 주된 임무은 제헌국회를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 헌법은 1871년의 소위 "비스마르크 헌법" 을 개정한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정치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는 무장 투쟁으로 정권을 탈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혁명이 시작될 무렵, 퇴역 군인 -제국의 휘장대신 적군의 휘장을 부착한- 들과 적색 완장을 찬 민간인들을 주축으로 한 무장 민병대들이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을 "공화국의 전사들" (Republikanische Soldatenwehren)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립 사회민주당 출신이었으나 곧 스파르타쿠스단이 이들의 통제권을 장악했습니다. 그에 맞서 독일 민주사회당 에서는 임시정부에 충성적인 "공화국 수비대" (Republikanishe Schutztruppe) 라는 새로운 민병조직을 창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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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 혁명군 중 가장 강력했던 조직은 아직도 베를린에 머물러 있었던 인민해군사단 이었습니다. 독일군 지휘부는 이들 민병대들을 죄다 무장해제된 후 재편성되어 이들이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기를 바랬습니다. 1918년 12월 12일, 이러한 민병조직을 통합하기 위한 "인민 의용군" (Volunteer People`s Force) 이라는 것이 제안되었습니다. 비록 결코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 계획은 쿠데타에 필요한 무장부대를 스파르타쿠스단의 지휘 아래서 빼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그들은 더이상의 미룸없이 곧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유군단.

 

패배와 이어진 혁명은 독일군을 현실적으로 봉괴시켰습니다. 비록 부대가 그들의 병영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도 병사 평의회는 장교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퇴역군인들의 계급장과 훈장이 뜯겨 나가는 일이 매우 흔했으며, 장교들이 이러한 폭도들의 폭력때문에 감히 군복을 입고 공공장소에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인 취약성은 독일에 대한 또다른 혁명의 위협과, 국경문제의 불안을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폴란드인과 체코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독일의 혼란은 그들의 새로운 국가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요소들과 공산독재에 대한 위험성의 인식은 애국주의자들과 아직 애국적 감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군인들 -장교, 하사관, 병사들 모두- 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자극했습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가운데 "자유군단"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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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구스타프 노스케.

 

이들은 킬 Kiel 에서 구스타브 노스케 Gustav Noske 의 명령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사회민주당의 간부들은 충성스런 해군 장교들과 수병들을 모아 "강철의 군단" (Eiserne Brigade) 이라 명명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Maercker 장군이 지휘한 제 214 보병사단이야말로 그 후에 조직된 대부분의 자유군단들이 본받을 고전적인 모델이었습니다. 12월 6일, Maercker 장군은 자신의 사단에서 자유군단 부대원을 선발하기로 결심하고 이러한 명령을 12월 14일에 내렸습니다. 이 전원 지원자로 구성된 지방의용 소총군단 (Frewillige Landesjagerkorps) 는 혁명의 위협에 맞서서 임시정부의 권위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자신의 부하들에게서 차지하고 있던 명망 덕분에 Maercker 장군은 비록 무기와 군복조달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단기간에 수천명의 부대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구 제국군대와의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장교사회에 만연해 있던 경직된 규율상의 가면은 폐기처분되었으며 대신 Maercker 장군은 그들 지원자들간의 전우애를 강조했습니다. (사실 대전 중 최전선의 부대들에서 계급의 구분은 생각만큼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Maercker 장군 부대의 특징은 병과간의 통합이었습니다. 새로운 전투의 양상은 전통적인 보병, 기병, 포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습니다. 모든 병과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투에서 즉석에서 부대를 편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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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Maercker 장군.

 

Maercker 의 예를 잇는 시도가 잇달았으며 1918년 겨울동안 베를린 일대에서 다른 자유군단들이 창설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포츠담의 자유군단 Freikorps Potsdam (폰 스테파니 소령의 지휘), 근위기병사단 Garde Kavallerie Schutzen Division (폰 호프만 장군이 지휘), 헬트 자유군단 FK (Freikorps) Held (헬트 장군이 지휘), 휠센 자유군단 FK Hulsen (폰 휠센이 지휘), 그리고 독일군인사단 Deutsche Schutz Division (폰 비셀 장군이 지휘) 등등이 창설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기존의 정규 부대를 모체로 하여 조직되었습니다. Maercker 의 군단과 이제는 폰 로덴 대위가 지휘하는 강철의 여단은 12월27일 이젠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구스타브 노스케가 베를린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

 

베를린의 1918년 12월의 마지막 날들동안, 혁명의 기운이 온 도시를 휘몰아쳤습니다. 23일, 스파르타쿠스단과 인민해군사단은 베를린 지휘본부 Kommandantur 를 점령하고 제국 수상관처를 포위했습니다. 정부는 군대에 구조요청을 했지만 전방에서 베를린으로 온 부대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병영에 도착하는 대로 흩어졌습니다. 때문에 오직 소부대 단위로 파견하는 것만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차로 임시정부를 구원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대규모 세력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지원을 받는, 황궁을 점거하고 있는 인민해군사단을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병사들은 민간인에 대해 발포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공산혁명 세력에 대해 정규군을 보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사회민주당의 민병대 역시 이들에 맞서 성공적인 전투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12월 23, 24일간의 전투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이하 USPD) 은 임시정부에 사회민주당을 홀로 남겨둔 채 반대편과 손을 잡았습니다. 12월 30일, 스파르타쿠스단은 그들의 새로운 명칭으로 "독일 공산당"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을 채택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는 그들의권위를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유군단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19년 : 내전.

 

베를린 전투.

 

1919년 1월 5일, USPD (독립사회민주당) 와 KPD는 한 집회를 소집했습니다. 여기에 약 70만명의 사람들이 베를린의 거리로 뛰쳐나와 적기를 흔들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도시의 중심부의 통제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는 기존의 자유군단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면서 지원자들에게 법과 공공질서와 국경선을 수호하라고 명했습니다. 1월 9일, KPD는 그 추종자들에게 무력투쟁의 시기가 가까워졌음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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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린덴슈트라세에서 MG08 중기관총을 조작하는 스파르타쿠스 단원들. 1919년 1월.

 

1월 10일, 모두 여덟개의 자유 군단 부대들이 도시 외각지역을 장악했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시내 중심가로 진격했으며 관공서와 신문사들을 점거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격퇴했습니다. 전투는 매우 잔인했으며 기관총과 야포,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습니다. 많은 바리케이드와 건물들이 공격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자유군단 지원자들 중 많은 숫자가 이전의 스톰 트루퍼와 같은 엘리트 부대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비록 숫자는 훨씬 많지만 통일된 군율이 없는 좌파 무장세력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12일까지 자유군단 부대원들은 도시 전역을 장악했으며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저격수들, 과격주의자들과 무기의 은신처를 소탕했습니다. 15일, 사회계급간의 전쟁을 선포했던 스파르타쿠스 단의 지도자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군단 부대원들에게 체포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이상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임시정부 -자유군단 대원들이 공산주의자 만큼이나 공화주의자와 사회민주당을 증오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는- 는 자유군단에게 베를린을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1월 19일,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은 납득할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독일이 러시아의 경험을 따르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베를린에서 이 새로운 의회를 위협할 만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새 국회는 Maerker 장군의 보호아래 수비하기 좋은 바이마르 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치체제는 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역사에 남게 됩니다.

 

자유군단 운동의 확장.

 

1919년 봄, 독일 전역에서 수백을 헤아리는 자유군단 부대들이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들의 규모는 중대규모에서 보병뿐 아니라 기병, 수색대, 포병, 심지어 항공대까지 보유하는 사단규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당시의 정규부대를 모체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퇴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지원병들은 스스로 부대를 조직하여 믿을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자신들 부대의 전통적인 위수지역을 고수했습니다. 몇몇 부대들은 자신들의 제국시대의 기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군단군 Freikorps V.Armeekorps.) 다른 부대들은 군대나 민간을 포함한 다양한 배경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지도력을 보인 존경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이들 지도자들은 카페나 혹은 개인집 등, 편리한 곳에 모병관을 설치하고 충분한 인원이 모이면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많은 정규 병영들에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군복과 무기, 탄약의 조달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의 인기는 당시 중부 - 동부 유럽을 휩쓸고 있던 혼돈과 혁명적 분위기에 의해 설명됩니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는 발트해안의 국가들을 거쳐오면서 동 프러시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헝가리에서 상당한 세력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심각한 폭동을 주도했습니다. 아직도 확정되지않은 독일 - 폴란드간 국경지대에서는 군사적 충돌이 빈발했습니다. 독일 국내에서는 바바리아와, (그보다는 좀더 낮은 단계로) 작센지역과 라인란트에서 분리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비록 1월 19일, 베르사유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연합국들은 해상봉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전역에 실업과 굶주림이 횡행했으며 이는 KPD와 USPD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좋은 토양이 되었습니다. 탄탄한 국경의 보호를 받는 한 국가로서의 현재 독일의 존재가 이제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공화국의 무기력한 제도들이 극좌무장세력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지자 많은 독일인들은 그들의 국가제도의 남아있는 것을 방어하는 군대의 움직임을 감수하는 것이 정당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애국적인 의무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선거에서의 SPD의 승리와 자유군단의 12월의 승리는 국가의 통제권이 정부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직 실권은 거리에 있었으며, 정부는 극좌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지방과 도시들을 탈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북서와 중부독일.

 

국방장관인 노스케는 국가의 통제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하고 맨 먼저 혁명첫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 정부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일 북서지방의 항구들인 브레멘, 쿡스하펜 Cuxhaven, 빌헬름스하펜, 함부르크을 첫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폰 뢰더 Von Roeder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지방의용소총군단 (Frewillige Landesjagerkorps)에게 세 수병부대를보충 (이제는 제 1해병여단이라 불리는 옛 강철의 여단, 제 2해병여단 -에르하르트의 지휘-, 제 3해병여단 -폰 뢰벤펠트의 지휘) 하여 보냈습니다. 베를린에서처럼 좌파세력들은 숫적으론 우세한 민병조직을 보유했으나 2월 4일, 자유군단이 브레멘을 공격하자 격렬한 교전끝에 그들의 저항은 무너졌습니다. 이 승리는 좋은 선전효과를 가져와서 며칠안에 다른 항구들도 정부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혁명의 기운은 독일의 공업, 석탄산업의 심장부인 루르지방에서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KPD와 USPD는 대대적인 파업을 일으켰으며 지방의 "병사 평의회" 가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북서해안의 자유군단의 지원을 받은 루르의 FK Lichtschlag 가 결성되어 소위 "루르의 붉은 군대" 에 맞섰습니다. 몇몇 잔인한 전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극렬분자들의 사보타지에 의해 광산이 파괴되어 초래할 경제비극을 두려워한 SPD의 지도자들은 그들과 타협을 했습니다.

 

이제 포커스는 스스로 "자유혁명도시" 를 선포한 중부독일의 몇몇 산업도시로 옮겨갔습니다. 정부로서는 다행히, 이 반란들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기에 자유군단은 그들을 하나하나 분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전은 Maercker 장군에 의해 지휘를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부대 (제 1여단, 지방의용군 소총군단) 를 직접 이끌고 참가했으며 이에 다른 퇴역군인으로 구성된 자유군단 (이전에 강철의 연대라 불린 제2 해병여단, FK 휠센) 과 최근에 편성된 FK Gorlitz (Faupel 대위의 지휘), FK Von Oven (Oven 장군의 지휘)가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쟁 중 최전방에서 근무한 군인들로 구성된 초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인 철모단 (Stahlhelm) 역시 이에 참가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일련의 힘든 전투끝에 Maercker 의 부대는 Halle 를 공격했습니다. Maercker 의 지휘하에 벌어진 "봄 작전" 은 5월 중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베를린에서의 새 전투와 바바리아의 "침공" 이 그의 부대의 일부를 철수시켜 이들 새로운 위험에 맞서게 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특기할 만한것은 자유군단이 브룬스빅과 작센 지역으로 진공하여 혼란중에 전권을 잡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극좌 지방정부를 몰아내려한 것입니다. 이 두지역에서 공산주의 정부는 제국과의 인연을 끊고, 그들 독자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이 프러시아에 속하지 않는 두 지역에 대한 "침공" 은 SPD와 독일자유군단 모두 어떠한 종류의 분리주의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자유군단은 4월 10일에 마그데부르크, 4월 14일에 드레스덴, 18일엔 브룬스빅, 5월 11일엔 라이프치히를 성공적으로 점령했습니다. Maercker 장군은 이들 도시들을 점령한 후 이들 도시에서 "시민군" (Einwohnerwehren) 을 조직하여 일종의 "자유군단의 예비군" 으로 편성했습니다. 자유군단과 시민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전자는 이전의 최전방에서 근무한 퇴역군인으로 구성되었던 것에비해 후자는 민간인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베를린 : 인민해군사단의 패배.

 

Maercker 의 부대가 중부 독일에서 새 지방정부를 조직하고 있을 무렵, KPD와 USPD는 3월 3일, 대대적인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론자들이 다시한번 도시의 중심을 장악하고 자유군단이 외각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정부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5일, 인민해군사단이 극좌 혁명론자들과 합류했습니다. 격렬한 전투가 온 도시에서 벌어졌으며 13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정부측의 부대는 12월에 배치된 자유군단 그대로였으나 이제 그들은 과격한 에르하르트여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차를 포함한 중무기들이 거리에서 거리낌없이 쓰였습니다. 자유군단은 사기와 전투경험에서의 우세함을 다시한번 증명했으며 인민해군사단은 마침내 소멸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약 1500명이 죽고 12,000명이 다쳤습니다. "붉은 군대" 는 무자비했으며 자유군단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자비한 분쇄는 적어도 훨씬 거대하고 잔인할 내전의 확산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바리아.

 

바바리아는 오랜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지방으로, 왕국으로서의 그 역사는 프러시아의 그것보다도 오래되었습니다. 제 2제국시절, 바바리아 왕국은 독자적인 정부를 가지고 심지어 국방문제까지 포함한 광대한 자율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의 헤게모니는 많은 바바리아 사람들을 격분시켰습니다. 1차대전의 참혹한 결과는 일부 바바리아 사람들에게 프러시아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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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에서와 마찬가지로 뮌헨역시 독일혁명의 첫번째 포커스가 되었습니다. 1918년 11월 2일, Kurt Eisner 가 이끄는 대규모의 좌파세력은 왕족의 퇴위에 자극받아 뮌헨의 병영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바바리아 정부의 수뇌가 되어서 베를린의 중앙정부와는 확연히 대립되는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1919년 2월 21일에 극우활동가들이 Eisner 를 살해한 것이 좌파세력에 의한 폭력적인 반응을 불러왔습니다. 4월 7일, 좌파 극단주의자들은 독일내에 러시아의 "소비에트" 스타일의 "바바리아 평의회 공화국" (Bayerische Rateerepublik) 을 선포했습니다. 바바리아의 SPD조직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연을 끊고, 바바리아의 SPD총수인 아돌프 호프만Adolf Hoffmann 을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 를 세웠습니다. 뮌헨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바로 도착한 사람들을 포함한 KPD와 USPD 세력들이 전반적인 통제력을 획득했습니다. 4월 12일, SPD의 무장민병대는 그들 과격론자들을 몰아내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4월 말, KPD/USPD 연합정부는 거의 25,000명을 헤아리는 "바바리아의 붉은군대" 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뮌헨의 상황은 굶주린 사람들과 실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왔으며 (주로 대학교수들과 법관들로 이루어진) 인질을 사살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수반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국방장관인 노스케가 호프만에게 뮌헨을 탈환할 자유군단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바리아에서의 프러시아 군인의  출현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도시로 소규모의 무장군인들을 진격시켰으나 이들은 4월 16일, 다하우 Dachau 전투에서 "바바리아의 붉은군대" 에게 패배했습니다. 이제 노스케는 무력을 요청하는 수 밖에 없었으며 국방장관은 바바리아 작전을 에른스트 폰 오펜 Erenst Von Oven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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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30,000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뮌헨주위에 집결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에르하르트 여단과 괴를리츠 자유군단 FK Gorlitz, 새로 편성되었지만 강력한 제2 근위보병사단 (Friedeburg 장군의 지휘) 하스의용군 (Haas장군의 지휘) 등의 강력한 충격군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Franz Von Epp 대령이 지휘하는 바이에른 군단 Bayerischen Schutzenkorps (FK Von Epp로 더 잘 알려진) 과 고지 자유군단 FK Oberland 등의 명성높은 바이에른 자유군단부대들도 공격의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자유군단 부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많은전투들을 이 한권의 책에 모두 담을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서술할 뮌헨 전투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1919년 4월 27일, 자유군단 부대들이 바바리아 경계를 넘어 뮌헨으로 빠른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공격군은 대규모의 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몇몇 자유군단 부대들이 인접한 뷔르텐부르크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몇몇 바바리아출신 소부대의 보충을 받아 Haas 의 기동부대를 형성하여 뮌헨을 서쪽으로부터 포위했습니다. 이 부대의 전투서열에는 뷔르텐부르크의 용병연대 Wurt. Freiw. Regt. 와 Wurt. Freiw. Regt. Graeter, 바바리아에서 온 Von Epp 의 Bayerischen Schutzenkorps, Bayerischen

Schutzenkorps Herrgot, Bayer.Freiw.Abt. Von Bogendorfer, FK Werdenfels 와 FK Schwaben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뮌헨 북쪽에서 주로 프러시아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구성된 두 기동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도시의 북서쪽에는 제 2근위보병사단과 괴를리츠 자유군단 FK Gorlitz , 헤센-튀링겐-발데키아 자유군단 Hessiche-Thutingische Waldekische Freikorps 를 포함한 프리데부르크 Friedeburg 장군이 지휘하는  기동부대 (프러시아 의용단 Preussische Freiwilligen) 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북동쪽에는 프러시아 기병군단 Preuss. Kavallerie Schutzenkorps, 에르하르트 여단을 포함하는 Deetjer 장군의 부

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기동부대의 4분의 1가량은 도시의 동쪽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시베르트 Siebert 장군의 부대는 주로 바바리아인 자유군단으로 구성된 다음과 같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샤드" 바이에른 의용군 부대 Bayer.Freiw.abteilung schad, "하인츠만" 바이에른 의용군 부대 Bayer.Freiw.Abt. Heinzmann, Bayer.Freiw.Abt. Voithenleitner(사람 이름인지?), Bayer.Freiw.Abt.Schaaf, FK Oberland.. 이들 중 유일한 프러시아인 부대는 뤼초우 자유군단 FK Lutzow 뿐이었습니다.

 

비록 작전에 참가한 자유군단 부대들의 배경이 다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합동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 중 옛 군대로부터 기원된 두 뷔르템베르크 연대같은 일부 부대들은 거의 정규군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머지 부대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군단" 으로서 공권력에 의함이 아닌 자발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비록 이전엔 최전선에서 싸웠던 병사들이 이들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바바리아 자유군단은 민간인 출신들이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바리아는 원래 보수적인 지역이었으며 뮌헨에서의 혁명은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중산층과 농민들의 적대를 받았습니다. 자유군단 병사들은 그들의 다양한 출신지역 -노병이나 새 지원병, 바바리아인, 프러시아인, 다른 지역출신까지- 과 상관없이 그들은 지휘를 맡은 정규군 장군들의 권위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바리아의 붉은 군대는 자신들의 군세가 60,000명에 달한다는 호언장담을 했으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옴에 따라 그들의 숫자는 급격하게 감소했습니다. 4월 28일에서 30일까지 자유군단 부대들은 뮌헨의 포위망을 점점 죄면서 시 외각지역을 하나씩 점령했습니다.  도시 안에서 KPD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들을 무더기로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자유군단 부대들의 뮌헨 공격은 5월 2일로 계획되었으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에르하르트 여단과 FK Oberland 등 몇몇 부대에 들려왔고 결국 공격은 5월 1일에 벌어졌습니다. 동시에 시내의 반공주의자들이 자유군단의 접근에 용기를 얻어 도시의 몇명 중요한 거점을 탈취했습니다.

 

자유군단 부대들은 뮌헨의 모든 방향으로 집중공격을 가했습니다. 먼저 비행기가 항복을 종용하는 선전문을 투하했습니다. 병력의 집중과 공격의 강도 덕분에 승리는 금방 이루어졌습니다. 전투는 이틀동안 계속되었는데 비록 몇몇 지역은 전투없이 점령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불가피했습니다.  몇몇 공산주의자들의 저항거점이 화염방사기로 불살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뮌헨에서의 "적색 테러" 는 6개월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까지 좌익주의자들이 저지른 것과 똑같이 가차없는 보복이 자유군단 부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바바리아에서의 자유군단 부대들의 작전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큰 작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가장 위험한 분열조짐의 뿌리를 뽑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분열운동은 다소나마 대중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뮌헨에서의 승리는 자유군단 부대들의 명성을 하늘 끝까지 높혀 주었습니다. 그들 덕분에 베를린의 폭도들 역시 격멸되었으며 북독일의 항구들 역시 정부의 통제하에 들어왔습니다. 루르와 중부독일 역시 평정되었습니다. 브룬스빅, 작센, 바바리아의 분리주의 움직임 역시 진압되었습니다. 자유군단은 바이마르 국회의 회의를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과 같이 독일의 동부국경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휴전이라는 증발점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옛 군대를 기반으로 강력한 민병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제한을 받았습니다.

 

임시 독일 국방군 (Vorlaufigen Reichswehr).

 

1919년 3월 6일, 바르마르의 독일 국회는 새로운 독일군, 즉 독일 국방군에 대한 법률을 선포했습니다. (정밀한 의미에서, 이것이 진정으로 처음 만들어진 통일 독일군이었습니다. 제 2제국하의 군대는 프러시아, 바바리아, 작센,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군대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왕국은 자신들만의 국방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공화국의 영토는 두 거대한 군사 지휘부에게 분할되었습니다. 북쪽과 동쪽을 관할하는 제 1집단군 GruppenKommando 1, 서쪽과 남쪽을 관할하는 제 2 집단군이 그것이었습니다. 각각의 지휘부는 몇개의 군관구 Wehrkreis 로 나뉘어졌습니다. 독일 국방군의 전투서열은 24개의 여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자유군단 부대들은 새로운 독일 국방군으로의 통합을 유도하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등 중 몇몇 가장 거대한 집단들은 그대로 새 정부의 여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휠센 자유군단은 독일 국방군 제 3여단으로, 본 뢰더의 지방 의용군 군단은 제 4여단으로, Maercker 의 Freiw. Landesjagerkorps 는 제 16여단, FK Von Epp는 제 21여단 등등이었습니다. 다른 자유군단 부대들은 그 규모에 따라 중대나 대대로 편입되었으며 몇몇 작은 자유군단들이 통합되어 새로운 부대들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5월, 노스케는 자신의 지휘하에 약 400,000명의 군대가 있다고 밝혔는데 그 중 150,000명이 자유군단 출신이었으며 나머지는 세계대전의 생존자였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필드그레이 유니폼 위에 자유군단 부대원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부대휘장을 부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독일 전역에서 수천명의 전직 군인들이 직업도 없이 옛 군복을 입은 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독일 국방군은 옜 군복색을 유지한 새로운 군복과 휘장들을 새로 재정했습니다. (일러스트 J를 보십시오.)

 

그러나 임시정부의 국방군은 연합국들이 독일에게 허용할 규모보다 훨씬 컷습니다. 1919년 1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으나 독일은 5월까지 참가조차 허락받지 못했으며 그들은 전혀 협상에 참가하지 못한 채 회담 결정만을 통보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일방적인 조건이 독일에 알려지자 독일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당황했으며 ("너희 원수들, 기억해 두어라. 죽은자들이 복수할지니!") 국방군 장군들과 자유군단 지도자들은 그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느니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조약은 군대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줄이고 전차와 항공기, 참모본부의 보유를 금지했으며 소규모의 해군만을 허용했습니다. 1919년 6월 28일, 독일은 최종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많은 자유군단 부대원들은 SPD정부의 이러한 "수치스러운 항복" 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국경분쟁.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적인 조항 중에는 독일로 하여금 국토의 손실을 요구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두 슬라브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여기에 부활한 폴란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토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이 그어진 스트리아와 카린티아,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된 슈데텐란트, 실레지아, 포메라니아, 서, 동 프러시아등에서 독일어 사용민족과 슬라브어 민족간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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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조국방위대 Helmwehren.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은 소위 "조국방위대" Heimwehr 혹은 비슷하게 Heimatbund, Heimatschutz 또는 Heimatwehr 라고 불린 민족적인 민병단체에 의해 수비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자유군단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이들 조직또한 같은 적 (공산주의자들과 슬라브 민족주의자들) 과 싸웠습니다.  티롤의 조국방위대는 오스트리아로의 진입을 시도한 바바리아의 붉은 군대와 대치하기도 했습니다. 케른트너 조국방위대와 스트리아 방위대는 유고슬라비아 인들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국경이 이러한 조국방위대에 의해 수비되고 있을때 독일의 국경은 자유군단에 의해 수비되고 있었습니다.

 

제 1차 동부국경 작전.

 

1918년 11월 8일,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인들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리더인 요세프 필수드스키를 석방시켰습니다. 그는 곧 명백한 폴란드인 지역을 통치하는 폴란드 임시정부를 바르사바에 조직했습니다. 독일군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폴란드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은 곧 1914년 이전에 독일제국 영토였던 독일인/폴란드인 혼재지역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지역 중 바르테란트와 포즈나니아, 포센 (폴란드어로는 포즈난) 에서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대평의회를 조직하여 해당지역의 독일군대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같은 문제들이 동, 서 프러시아, 실레지아 부북등의 다른 국경제역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독일군 지휘부는 전통적으로 프러시아 왕국의 영토였던 그 지역을 폴란드인에게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이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는 동부국경방위대 Grenzschutz Ost 가 창설되어 지원병들을 모집할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많은 자유군단 부대들이 이 호소에 부응하여 창설되었습니다. FK V.Armeekorps 와 같이 정규 수비부대를 모체로 한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부대들은 FK Paulssen, FK Von Aulock, 로스바흐 돌격대 Strumabteiling Rossbach 등과 같이 (그들을 이끈 중위들의 이름들을 딴) 여러 초급장교들에 의해 편성된 부대들이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은밀하게 육성한 폴란드인 민병대인 폴란드 민병조직 (Polska Organizajca Wojskowa, 이하 POW) 의 기초위에 스스로의 무장단체를 조직했습니다. 많은 지방 독일인 거주지또한 자신들의 민병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러한 자유군단 부대들은  폴란드 농촌 주민들에의해 포위된 독일인 거주지역의 마을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브롬베르크 국경수비대 Grenzschutz Bromberg 등..) 포즈나니아에서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마침내 1918년 12월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베를린은 스파르타쿠스단의 손에 넘어간것 처럼 보였으며 독일군들 역시 폭동과 대략탈영등으로 문란해진 상태였습니다. 포센의 독일 전규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SPD가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하자 동부국경방위대는 자유군단 부대를 동원하여 포센 지역을 탈환할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Von Below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군단 부대들이 북쪽에서부터 공격해왔으며  Von der Borne 장군이 이끄는 다른 자유군단 부대들이 실레지아를 토해 남쪽으로부터 진군했습니다.

 

1919년 2월 2일에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에서 로스바흐 돌격대 Sturmabteilung Rossbach 부대에 의해 서프러시아의 체름노(Culmsee, Chelmno)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공세는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며칠후 연합국들은 베를른에게 사프러시아의 포센과 북 실레지아로의 진격을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2월 20일, 공세는 중단되었으며 자유군단 부대들은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발트지역 작전.

 

자유군단 역사의 가장 놀라운 부분은 1919년의 발트해 전역에서의 활동입니다. 1918년 11월 당시 독일육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황급한 철수는 연합국이 결코 바라지 않는 러시아 붉은군대의 진출의 좋은 토양이 될 진공상태를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연합군부대를 이곳에 보내자니 연합국 국내여론이 좋지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신생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힘만으로는 붉은 군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독일은 연합국으로부터 제 8군을 이 지역에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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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되기 시작한 독일군 부대들이 예전의 공산주의들로 구성된 병사들의 위원회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중 일부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Bischoff 소령의 지휘를 받는 "강철의 여단" Eiserne Brigade 을 구성했습니다. 이것이 발트해안 국가에서 붉은군대의 진공을 박을 수 있는 유일한 독일군 부대였습니다. 이 외에 튜튼기사단 시대때부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에서 지주계급을 형성한 독일인 귀족들에 의해 조직된 "발트 지방군" Baltische Landeswehr 등이 있었습니다.

 

독일 귀족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붉은 군대를 도왔습니다. (사실 라트비아 라이플 연대는 붉은 군대의 부대들 중 최고의 부대였습니다.) 이 때문에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울마니스 Ulmanis 는 소규모의 민족주의 군대만을 편성할 수 있었으며, 어쩔 수 없이 1918년 12월에 독일의 지원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를 수락했으며, 1919년 1월 1일,  폰 데르 골츠 Von der Goltz 가 라트비아의 독일군을 지휘하기 위해 리에파야 Liepaja 에 상륙했습니다. Von der Goltz 는 이 지역에서 경력을 쌓은 적이 있었으며 만네르하임이 핀란드 독립전쟁에서 1918년 4월 승리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파견된 독일군 사령관을 지낸바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놀라울 정도로 야심찬 작전을 입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해서 (..ㅡㅡ;;)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시키고 (!) 러시아에 친독일적인 정부를 앉히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중세때부터 그래왔듯 독일의 식민지로 편입시키기 위해 가능한 많은 자유군단 부대들을 라트비아에 집중시켰습니다.

 

임시정부의 국방군과 자유군단 부대들이 발트지방군과 (곧 강철의 사단으로 개칭되는) 강철의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속속 라트비아에 도착했습니다. 멀리 베를린의 독일정부가 알기로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제 4 예비군 VI. Reserve Armeekorps 이었으며 단지 동프러시아에서 붉은 군대를 막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Von der Goltz 는 재빨리 제 8군의 병사평의회를 해산시켰으며 독일 정규군의 군율을 회복시켰습니다.

 

2월 말경, 독일군 부대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오직 리에파야 지역만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모두 볼셰비키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3월, Von der Goltz 장군은 그의 부대를 동쪽의 (리가의 남쪽에 있는) Jelgava 로 진격시키고 동시에 북쪽의 쿠를란트 Kurland (Courland) 로 진격시켰습니다. 붉은 군대는 큰 패배끝에 약간의 혼란속에서 후퇴했습니다. 이제 볼셰비키에 대한 반전의 기운이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독일군과 라트비아인간의 관계는 최악이었으며 4월 중순의 대립을 촉발시켰습니다. Von der Goltz 는 라트비아 정부각료들을 체포했으며 이에 울마니스는 영국 왕립해군의 발트함대가 제공한 군함을 타고 탈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구 제국들은 라트비아의 주권을 존중하려고 했습니다만 국내여론상 군대를 파병할 수 없었으며 독일의 베를린 정부역시 독일 내부의 혼란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Von der Goltz 장군은 자신의 계획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국방군 고급 지휘부의 명령에 반하여 그는 5월 25일, 그의 부대를 리가로 진격시켰고 재빨리 붉은 군대를 일소했습니다.

 

이 소식은 독일의 자유군단 전사들 Freikorpskampfer 에게 경이롭게 들렸습니다. 독일군은 아직도 싸울수 있으며 아직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곧 라트비아에 완편 부대 (예를 들면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 Franz Pfeffer Von Salomon -후에 SA사령관이 되는- 대위가 지휘하는 PK Pfeffer 등..)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출신의 개인적인 의용병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스파르타쿠스단원들과 본국의 분리주의자들에 대적하여 기꺼이 싸웠으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휴전을 받아들인 SPD정부 역시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독인들에게 있어서 수백년간 계속된 동부로의 확장 -Ostsiedlung (동부 식민화) 혹은 Drang nach Osten (동부로의 행진)- 은 미국의 서부개척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서사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독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후예로써 발트해에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은 Baltenland 를 독일의 전초기지 -그곳의 패배를 용납하지않는 전사들이 언젠가는 독일을 패배시키고 욕보인 자들에게 복수 할- 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Von der Goltz 의 5만명에 달하는 자유군단부대원들은 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에서 온 슈데텐란트 대대를 포함하여) 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연합국과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야만적 야망에 불안감을 느꼈으며 1919년 5월, 베를린은 Von der Goltz 의 부대를 반으로 축소하고 독일인 의용병의 보충을 금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리가를 점령한 자유군단은 계속 진격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붉은 군대뿐만 아니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처럼 한때 튜튼 기사단의 지배를 받은 모든 지역으로 진격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그들의 국민군은 이미 다소간의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6월 21일, Von der Goltz 의 침략에 저항하여 그들을 격퇴했습니다. 그들은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리가로 퇴각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독일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라트비아인들에게 대량의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서부 제국들은 베를린에 8월까지 발트지역이 주둔한 모든 독일군들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으며 이 소문이 Von der Goltz 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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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lov-Bermondt (Bermondt Awaloff) 대령.

 

"강철의 사단" 과 몇몇 좀더 소규모의 자유군단 부대는 이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비록 많은 의용병들이 독일로 귀국했지만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그들 정부의 서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이젠 아예 독일을 떠나 발트로 진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의 십자군 원정을 계속하기 위해 Von der Goltz 와 그의 부하들은 스스로 라트비아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Avalov-Bermondt (Bermondt Awaloff) 왕자 대령이 이끄는 러시아 백위군에 지원했습니다. 다른 백위군들처럼 Avalov-Bermondt 역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분리주의자들을 증오했습니다. 게다가 수백년간 독일어계 발트지역은 차르의 러시아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습니다. Avalov-Bermondt 는 Von der Goltz 의 부대들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서 받아들였습니다. 강철의 사단과 다른 작은 자유군단 부대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독일인 연대를 포함한 기묘한 독일-러시아 연합군이 1919년 9월경 편성되었습니다.

 

10월 8일, 이들은 라트비아인의 손에 있는 리가를 다시 공격했습니다. 도시가 거의 함락될 무렵, 영국왕립해군이 도착하여 독일군들에게 함포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일부터 라트비아인들은 공세를 시작했으며 자유군단을 리투아니아 국경지대로 내몰았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했던 리투아니아인들도이제 자유군단에 대한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Von der Goltz 의 운도 거의 다 끝나가는 것처럼 보일때 그는 독일로부터 병력보충을 받았습니다. 폴란드인과의 전투에서 놀라운 감투정신을 부여준 로스바흐 돌격대 Strumabteilung Rossbach 는 임시정부의 제 37 예거 대대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Rossbach 와 그의 부하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정부에 충성을 맹세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독일 - 폴란드 국경의 그들의 병영에서 나와 거의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고달픈 도보 행군끝에 1919년 11월 9일, 라트비아인들에게 포위된 강철의 사단과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11월 말까지 라트비아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자유군단 부대원들을 몰아냅니다.

 

리투아니아를 가로질러, 패배한 의용군들이 마침내 동프러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참한 절름발이가 된 독일로 돌아오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버린 정부와, 승자들이 부과한 조항들을 받아들인 공화국에 분노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목표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파괴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1920 : 공화국에 맞서다.

 

당시 독일정부는 자유군단이나 옛 제국군의 후계자인 독일 국방군 모두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후, 우익측의 음모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1 집단군 Gruppenkommando 의 사령관이었던 폰 뤼트비츠 Von Luttwitz 는 자유군단의 도움을 받아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계획했으나 자유군단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즉 Maecrcker, Von Hulsen, Hofmann, Von Oven, Von Lettow Vorbeck 등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가 극좌 세력에 넘어가거나 연합군

세력이 독일 군부의 명예를 공격하려 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습니다. Von Littwitz는 자유군단 부대들중 가장 과격하며 막 발트지방의 모험에서 간신히 귀가한 에르하르트 여단에 손을 뻗쳤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1920년 1월 1일부터 발효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 국방군은 자유군단을 포함한 약 450,000명의 군대를 100,000 명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새로운 정부의 새 총사령관인 폰 젝트 Von Seeckt 는 자유군단의 지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베르사유 조약을 증오하며 언젠가는 독일이 그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폰 젝트였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정치적인 과격론자들이 아닌 고급 군사기술을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자유군단 부대들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카프 - 뤼트비츠 반란. The Kapp - Luttwitz Putsch.

 

Von Luttwitz 는 해산명령에 대해 선추를 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그는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있어 보수적인 정치 지도자인 카프 박사의 지원을 믿었지만 그의 주된 희망은 바로 에르하르트 여단이었습니다. 에르하르트 여단은 1920년 3월 13일,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여  정부 기관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폰 젝트의 명령에 복종하는 독일 국방군은 그들에 대해 맞서지 않았습니다. 폰 젝트는 독일군끼리의 싸움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Von der Goltz 와 같은 예상할 수 있었던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자유군단 부대들은 비록 그들이 개인적으로는 쿠데타에 동조했을지라도 카프-뤼트비츠의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반란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으며 정부는 3월 18일, 수도로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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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뤼트비츠 반란당시 베를린 시내를 행군하는  에르하르트 여단.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단순히 조직자들이 다른 자유군단 부대들에게 거사일을 제대로 알려주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몇몇 수규모의 부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오로지 폰 뢰벤펠트 Von Lowenfeld 의 제 3 해병여단만이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이동을 개시했습니다. 실레지아에서 폴란드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이 부대가 지방수도인 브레슬라우 (Wroclaw) 를 점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한 주된 이유는 SPD정부가 즉각 국민들에게 대규모파업으로 저항하길 호소했으며 이에 많은 독일인들이 정부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부에 복종하는 독일 국방군 안에서는 반란을 지원한다고 의심을 받은 일부 장교들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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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는 해산된 해군 수병들이 그들의 장교들을 채포하고 배에 적기를 게양하기도 했습니다.

빠른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월 13/14일 밤 사이에 바바리아에서는 바바리아 자유군단부대원들이 지방 SPD정부를 전복시키고 보수주의자이자 왕정주의 정치가였던 구스타프 폰 카 Gustav Von Kahr 에게 정권을 넘겨줬습니다. 그러나 사실 Von Karh 에게 있어서 카프-뤼트비츠 반란은 그가 참여하길 원하지 않는 "프러시아놈들의 문제" 였을 뿐이었습니다.

 

바바리아에서 우익세력이 정권을 쥐는동안 독일의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이 음모자들에 대한 반동적 분위기에 의해 극좌세력이 이득을보았습니다. 총파업을 악용하여, 공산주의적인 폭동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할레, 킬, 라이프치히, 마그데부르크, 켐니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에서는 경찰력이나 국방군, 혹은 자유군단 부대원들이 그들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으나 루르에서의 공산주의 봉기는 성공했습니다. 비록 독일은 정치적 안정성을 위한 어려운 길을 감내하려 했지만, 중앙 정부의 권위는 여전히 약했으며 거리를 지배하는 세력에게 휘둘렸습니다. 게다가 국방군에게 자신의 동향인들에 대항하여 발포명령을 내리는 것에는 언제나 항명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산민병대에 대항하여 정부가 실제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상 자유군단을 동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루르지역의 붉은군대.

 

1919년 봄, 독일의 주요 광산, 공업지역에서의 자유군단의 작전은 전술한 이유때문에 부분적인 승리만을 가져왔습니다. (사민당은 경제붕괴를 막기위해 타협을 했지요..) 노동자의 혁명운동의 핵심지역인 이곳에서는 KPD와 USPD의 세력이 여전히 강했으며, 이 지역의 많은 SPD 당원들은 베를린의 온건한 SPD의 지도력보다 이쪽 세력에 점점 더 기울어져 갔습니다. 게다가 루르지역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군에 의해 비무장지역으로 선포된 곳이었습니다. 아직 이 지역에서 국방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은 주둔군은 반란을 막기에는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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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자들과 경찰, 국방군간의 무력충돌이 1920년 3월 15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몇몇 소규모 지방 자유군단들도 이에 참가했습니다. 곧 승리가 공산반도들에 의해 선포되었는데, "루르의 붉은군대" 는 도르트문드와 에센과 같은 중요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기실 이곳의 공산주의자들은 잘 조직되고 하나로 통합된 지휘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기간에 그들은 약 50,000명의 세력을 규합했으며 화포를 포함한 갖가지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루르는 독일 군수산업의 가장 큰 중심지였습니다.) 새로운 패배를 막기 위해 경찰과 국방군, 그리고 자유군단 부대들은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 를 반란군들의 손에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이 용기를 북돋아주는 빅뉴스와 (카프 - 뤼트비츠) 반란 와중에 들려온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성과, 그리고 튀링기아와 작센에서 동시에 일어난 봉기등에 힘입어 혁명론자들은 그들의 반란이 페트로그라드의 레닌의 쿠데타 다음으로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3월 24일, SPD의 지도자들이 루르의 붉은 군대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국방군과 자유군단 역시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협상테이블에 나선 양측 모두 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자신들의 전력을 축적했습니다. SPD정부는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최근에 일부 자유군단 부대들에 의해 위협을 받은일이 있긴 했지만, (군사적 외교적 이유등으로) 현실적으로 자유군단만이 루르의 자유군단과 대적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다시한번 자유군단 -비록 그들 중 일부 부대들은 즉시 해산되어야 마땅한 것처럼 보였지만- 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6군관구의 지휘관 Von Watter 장군은 투입가능한 모든 자유군단 부대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북쪽에서는 퐁 뢰벤펠트 Von Lowenfeld 의 제 3해병여단을 주축으로 FK뒤셀도르프, FK Von Aulock, 로스바흐 Rossbach 돌격대등의 부대가 모여 Wesel 사단을 이루었습니다. 중부에서는  FK 힌덴부르크, FK 괴팅겐, FK Gabcke, 하스 의용단 Freiw.Abt.Haas, FK Severin 기타 등등이 모여 뮌스터 사단을 구성했습니다. 남부에서는 FK Von Epp, FK Oberland, FK Von Oven, 기타 다른부대들이 모여 Von Epp 사단이 편성되었습니다. 루르의 붉은 군대역시 그 수가 불어났으며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수가 80,000명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1920년 4월 3일, 불안정한 휴전이 깨지고 자유군단 부대들이 총공격을개시했습니다. 그들은 공격 중 비정상적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예전처럼 자유군단 부대들은 자신들보다 훌씬 숫자상으로 우세한 적군들을 전투경험과 단호한 공격정신으로 분쇄했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처럼 -사실 모든 내전이 다 그렇지만- 양측은 서로에게 온갖 거친수단을 다 발휘했습니다. 이것은 자유군단과 독일 공산주의자간의 긴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장이 될 것입니다.

 

5일후, 루르지역의 전투는 자유군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비무장 지역에서의 이러한 독일 무장집단의 집결은 베르사유 조약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연합군 역시 루르에 군대를 보내어 자유군단부대들을 동쪽으로 몰아냈습니다.

 

검은 국방군.

 

카프-뤼터비츠 반란이 실패한 후, 독일정부는 자유군단을 지휘하는 대부분의 장군들, 예를 들면 Maercker, Von Oven, Von Lettow Vorbeck 등을 국방군에서 몰아냈습니다. 다른 자유군단 장군들은 투옥되거나 (Von der Goltz), 추방되었습니다.(에르하르트) 폰 젝트장군들은 자신이 원하는 군인에 대한 매우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되 높은 군기을 유지하며,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장교단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국방군에는 자신들의 지휘관

의 명령에만 명목적으로 복종하고 총사령부 혹은 국가의 명령에 저항하는 "란츠크네히트" 들을 위한 자리는 없어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한편 1920년 초부터 독일에 파견된 연합군 군사조정위원회는 반란과의 관련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자유군단의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1920년 8월, 독일정부는 모든 단체나 개인이 소지한 군사무기는 정부가 수거한다는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오로지 국방군만이 전쟁무기를 소지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일부 자유군단 부대들은 국방군에 편입되었지만, 새로 편성된 전투서열에 의해 그들의 농도는 희박해졌습니다. (모든 부대들은 해체되어 새로 편성된 사단들에 분산배치되었습니다.) 이제 자유군단이 낄 공식적인 자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한스 폰 젝트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사실 연합군에 의해 허락된 단지 100,000명의 군인만들로는 국경분쟁, 특히 독일과 러시아라는 오랜 적의 혼란을 틈타 "대 폴란드 (Wielkopolska)" 를 목표로 움직이는 폴란드인들을 막기 힘들다는 것이 자명했습니다. 1920년 4월, 폴란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폰 젝트는 독일이 그 다음차례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우려에서 국방군은 유사시 쉬운 동원을 보장해주는 예비군 훈련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7-1813년간의 나폴레옹시대에 폰 샤른호스트가 비밀리에 개혁한 프러시아군의 메아리라 할 수 있는 소위 "검은 국방군" 이 탄생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태클을 피하기 위해 일련의 준군사조직들이 편성되고 유지되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19년 4월 경부터 많은 도시들이 Einwohnerwehren (시민군) 이라고 불린 민병대를 보유했습니다. 비록 군복이나 본격적인 전쟁무기는 보유하지 않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그들은 퇴역한 고참 장교나 고참 하사관들에 의해 이끌어졌습니다. 부대의 편성은 지역에 따라 다양했으며 각각의 부대는 자신들의 출신지역이나 주둔지의 이름을 따 붙여졌습니다. : 에센 시민군, 뮌헨 시민군, 함부르크, 베를린 schutzenburgerwehr, Hanauer burgerwehr, 파사우 시민군 등등...

 

다른 준군사조직으로는 Volkswehren (국민군) 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이는 내무부의 지휘를 받는 일종의 전투경찰이었습니다. 그들은 소화기로 무장하고 필드그레이 유니폼과 다양한 지방색을 가졌으며, 이론상으로는 자신들의 주둔 도시 밖으로는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이외에 Technische Nothilfe (긴급기술구호단) 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술자들과 기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혼란이나 재난에 대처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Verkehrswehr (교통경비대) 는 모든 종류의 통신수단 (철도, 전화망 등) 을 지키기 위해 창설되었습니다. 그리고 Kustenwehren (해안 경비대) 는 해안과 항구의 방어를 책임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준군사조직은 혁명의 위험시기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국방군의 방어력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전시에 시민군과 국민군은 보병부대로 전환될 예정이었습니다. 긴급기술구호단과 교통경비대는 공병대로 전환될 것이었으며 해안경비대 역시 수병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Zeitfrewilligen (거칠게 말해서 '임시의용병') 은 한번에 단 3개월만 군복무를 하는 부대였습니다. 이런 편법을 통해 실제로는 100,000명의 제한을 능가하는 훈련된 인적자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론적으로 이들 부대는 치안불안에 대해 국방군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였습니다. 최초의 Zeitfrewilligen 부대는 1919년의 중부독일 캠페인 와중에 자유군단 지휘관들에 의해 편성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Zeitfrewilligen 부대들은 연대나 대대 사이즈로 편성 (라이프치히 임시의용병, 렘샤이트 의용병부대

등등..) 되었기에 비상시 쉽게 정규군으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Arbeitkommando (노동자부대) 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단순히 국방군에 고용되어 일하는 민간인 노동자였지만, 사실 그들역시 위장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필드그레이 군복을 입고 병영에 주둔하면서 국방군 장교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 노동자부대는 폴란드 국경지대에 배치되었으며 그 수는 약 20,000명 가량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검은 국방군" 을 구성한 이런저런 준군사조직은 국방군이 흡수할 수 없엇던 인력 -특히 많은 자유군단 고참병들- 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지하 자유군단.

 

모든 자유군단 퇴역병들이 민간인으로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경부터 그들중 과격한 무리들이 정치판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합법적, 불법적 인 다양한 조직들을 만들었습니다. : 청년조직, 군소정당들, 스포츠 사격클럽, 재향군인회, 지방노동회 등등..   일부 사람들은 1921년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지하테로조직을 결성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발터 라테나우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와 같은 거물정치인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의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많은 이러한 "지하" 자유군단 부대원들은 무기와 훈련을 국방군 장교들로부터 지원받고 있었습니다.

 

바바리아에서는 국방군과 이러한 비밀조직간의 관계가 특히 가까웠습니다. 바바리아 시민군과 함께 작전을 펼치기 위해 편성된 에쉐리흐 Escherich (Orgesch) 조직은 (1920년 Von Karh 에게 정권을 넘겨준) 1920년의 바바리아 SPD정권에 대한 폭동에 필요한 무장병력을 제공했습니다. 그 후 바바리아 국방군과 이들 전직 자유군단 지휘간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바바리아 정치지도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바리아군관구의 지휘관인 Von Lossow 장군은 베를린의 명령에 반발하면서 자유군단 퇴역병들을 보호했습니다. 바바리아 지역의 자유군단부대중 가장 유명한 KF Von Epp 는 바바리아에 주둔한 국방군속으로 쉽게 스며들어갔습니다. Von Epp 의 참모장이었던 에른스트 룀 -그의 이름은 후에 더욱 널리 유명해질 것이지만- 은 자유군단의 퇴역병들을 보호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많은 정치단체들이 독일의 다른지방에서는 이미 금지되어있는 자유군단 운동에서 탄생했습니다. 한 젊은 과격주의자인 아돌프 히틀러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NSDAP) 이라는 정치단체가 많은 과격한 자유군단 퇴역병들을 끌여들였습니다. 그들의 군사조직은 여러 이름들을 거친끝에 "돌격대" (SA, Sturmabteilung) 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게 되는데, 그들역시 초창기에는 그저 많고 많은 자유군단 부대중 하나로 간주되었습니다.

 

바바리아 국방군 사령관들은 이들 조직들에게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표면상으로 이들은 임시의용병으로  보였으며, 필드그레이 유니폼을 입고 군사 퍼레이드나 여러 군사활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자유군단 출신의 과격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제 더이상 공산혁명론자들과 싸우거나 독일국경을 수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베르사유의 멍에로부터 해방된 독일" 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적색 위협" 이나 폴란드인들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 중반부터 SPD는 정치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상실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극좌쪽으로 이동했습니다. 1920년 12월, USPD는 KPD에 흡수되었으며 그들은 예전의 극우세력들 보다도 의회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는 정치세력을 형성했습니다.

 

1921년 : 3월행동. The Marz-Aktion.

 

그들 조직상 KPD는 코민테른 (국제 공산주의 조직) 을 통해 모스크바의 명령을 거의 다 따랐습니다. 1921년 3월에 크론슈타트에서 터진 수병반란은 소비에트 지도력에 실로 중대한 위협을 가져왔습니다. 국면전환을 위해 모스크바는 전유럽의 공산당 조직에게 무장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KPD는 3월 17일부터 4월 1일까지 소위 "3월 작전" 을 발동시켰습니다. 이는 전독일의 총파업을  불러왔으나 무장폭동은 (특히 중부독일에서는) 지역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들은 1년전과는 달리 자유군단의 지원도 필요없이 경찰력에 의해서 분쇄되었습니다.

 

이제 자유군단의 세월은 지나간 것 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그들은 1921년 봄에 해산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그들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북부 실레지아.

 

독일과 폴란드간에 재설정된 국경은 이미 1918년 11월 당시부터 큰 긴장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폴란드에게 포센과, 북쪽으로는 발트해로 통하는 단치히를 포함하는 서프러시아를 건네줬습니다. 복잡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남동 프러시아와 북부 실레지아의 주민들은 독일과 폴란드 어느쪽에 속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민투표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남동 프러시아는 1920년, 독일로 남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북부 실레지아는 1918년에서 1921년까지 수많은 무장충돌을 포함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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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포센지역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인들은 베를린의 혼돈덕분에 여러 민족이 뒤섞여 있는 경제중심지인 북부 실레지아를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자유군단 부대들이 독일어권 지역에서 창설되었습니다.  그 중 Von Velsen 중령이 지휘하는 북부실레지아 의용국경수비부대 Oberschlesisches Freiwiligenkorps 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진출을 차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포센지역과 마찬가지로 북부 실레지아 자유군단 부대들은 1919년 2월에 폴란드인들에게 반격을 가했는데 이는 연합군의 최후통첩에 의해 중지될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주민투표가 열릴때까지 임시국경이 그어졌습니다. 아마도 실레지아는 두 나라에게 분할될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연합군에게 모든 지역이 자신들에게 포함되어야 한다고 설득시켰으며 그들에게 이것이 빼따꽁쁠리 (기정사실) 인것처럼 설명했습니다.

 

POW는 이 두번째 시도를 위해 거의 22,000 명의 민병조직을 편성했으며 여러 정치적 책동과 태업작전 후, 1919년 8월16이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들과 그전부터 싸워온 이곳의 지역 자유군단 부대들은 이제  유명한 에르하르트 여단과 Von Lowenfeld 의 강력한 제 3해병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FK  Dohna (Dohna 대위가 지휘), 헤센-튀링기아-발데키아 자유군단 FK Hessische-Thuringische-Waldekischen (Von Kornatzky 대령이 지휘), 튈만 의용병연대 Freiw.Regt. Tullmann (Tullmann 대위의 지휘) 등도 이에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14,000명 가량이었으며 Hofer 장군 밑에서 통일된 지휘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8월18일에 반격을 시작했으며 23일까지 폴란드인들이 점령했던 지역을 모두 탈환했습니다.

 

1920년 2월, 연합군 위원회가 주민투표를 위해 북부 실레지아 지역의 통제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이 지역의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프랑스군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이탈리아군과 영국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주둔했습니다. 주민투표는 1920년 3월에 열렸으며 60%의 주민들이 독일에 남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 결과에 따라 연합국들은 국경을 재조정했는데, 이는 도시지역의 독일인들과 주로 시골지역의 폴란드인들을 분리해야 하는 아주 까다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한달이 지나갔으며 양측 사회는 모순되는 소문들에 의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1921년 4월 초, POW는 그 전부터 계속된, 그 지역 전체를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주로 세계대전의 퇴역군인들에 이끌어진 Selbstchutzen 자위대 가 편성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Selbstchutz bataillon bergerhoff, Selbstchutz Kompanie Beuthen, Selbstchutz Btl. Lublinitz, Selbstchutz Btl. Wolff, oberchlesisches Freiw.Btl.May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4월말, 자위대의 중요 간부들은 모두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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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5월 2일, 폴란드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총파업의 지원아래서 POW는 모든 도시의 통제권을 탈취했습니다. 동시에 온갖종류의 무기들 -장갑열차를 포함하여- 이 폴란드에서 도착했는데, 정규 폴란드군의 몇개 대대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통신설비에 대한 사보타지는 독일로부터 북부 실레지아를 고립시켰으며 독일 증원군의 도착을 지연시켰습니다. 250명의 사상자를 낸 이탈리아군을 제외하면, 연합군들은 이 폭동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방관했습니다. 5월 5일이 되자, POW는 자위대에 의해 수비되고 있는 3개의 교두보를 제외한 오데르강 동쪽의 모든 북부 실레지아지역의 통제권을 탈취했습니다.

 

폴란드인들의 움직임에 놀란 베를린 정부는 오로지 연합국들에게 연합국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주민투표와 새로운 국경선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호소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군은 개입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독일의 무력 답변은 이미 공식적으로는 1년전에 해산된 자유군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그들 부대원들은 비공식적으로 혹은 재향군인회를 이용하여 서로간의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자유군단 부대들은 표면적으로 정치단체로 탈바꿈하기도 했습니다. (예를들면 FK Oberland 는 Bund Oberland (고지당)로 바뀌는 등등..) 마지막으로 많은 자유군단 군인들은 Arbeitgemeinschaft (일종의 직업공동체) 에 가입하여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거나, 토지의 지력을 향상시키거나, 농사를 짓거나 임업에 종사하거나 하면서 다시금 전장으로 돌아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이렇다할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옛 자유군단 부대원들이 조직으로서나 개인 자격으로나 속속 북 실레지아로 몰렸다는 것입니다.  베를린, 발트, 루르전투를 겪은 퇴역병들이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무기를 손에 들고 북부 실레지아 자위대를 지원하기 위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자위대와 합류했으며 나머지는 재빨리 그들의 옛 중대나 대대를 편성하여 자위대로 위장했습니다. 이들의 행렬은 예전엔 오스트리아 영토였으며 이젠 이탈리아로 넘어간 남부 티롤과 같이 먼 곳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역 자위대들은 세 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성했습니다. 남쪽 부분은 오데르강 강변을 따라 설치되었습니다. 중앙 지역은 Oppeln (폴란드어로는 Opola) 의 양쪽에 걸쳐 있었으며, 북쪽 방어선은 Oppeln에서 베를린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 방어는 초기 자유군단 운동의 퇴역군인이었던 폰 휠센 Von Hulsen 장군에 의해 지휘받고 있었습니다. 남부지역의 치열한 전투가 Cosel (Kozle) 과 Ratisbor (Raciboz) 에서 벌어졌습니다. 반면 중앙지역은 연합군 조정본부 지휘본부가 Oppeln 에 있었으며, 양측모두 이들을 열받게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조용했습니다. 북쪽의 울창한 산림지내에서는 어느쪽도 우위를 가지지못한 게릴라전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자 북부 실레지아에 도착한 자유군단 사령관들은 부대들을 지휘할 총사령관을 뽑기위해 만났습니다. 참석한 이들은 Heydebreck, Rossbach, Von Arnim, Von Velsen, Horadam, Hauenstein, Magnis, Von Chappuis, Hubner, Von Aulock 등 가장 활동적인 자유군단 지휘관들이었습니다. 1918년 당시에 그들 대부분은 단지 중위나 대위였지만 이제는 개인 명령에만 헌신적으로 충성하는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Hofer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휘하의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Von Hulsen 장군이 계속 지휘를 맡은 남부군은 오데르강을 따라 전개되었습니다. Gruntzen 중령의 지휘를 받는 북부군은 폴란드 국경부근에서의 산림지대에서의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비록 Hofer는 좀더 신중한 전술을 선호했지만 Von Hulsen 은 바바리아인으로 구성된 FK Oberland 가 주력인 자신의 부대에 공격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작전은 폴란드인이 차지하고 있는 오데르강 동쪽 대안의 안나베르그 Annaberg 고지를 휩쓸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그 정상부분은 지형적 특징상 오데르강 유역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전술적인 중요성과는 별개로 Annaberg 는 중요한 선전효과를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언덕의 꼭대기에 있는 종교 유적은 실레지아의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설득력있는 민족적 상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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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5월 21일에 자유군단에 의해 점령된 안나베르그 언덕위의 성지.

 

1921년 5월 21일 여명무렵, Von Hulsen 의 부대는 Annaberg 의 가파른 비탈을 따라 공격을 개시했으며  치열한 전투끝에 정오경 정상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이 성공은 자유군단 부대원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습니다. : 이 승리는 "1918년 11월 이래 독일의 첫번째 승리" 로 간주되었습니다. 그후 23일에 있었던 폴란드군의 대규모 반격은 끝내 격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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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베를린 정부는 이 문제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5월 24일에 북부 실레지아에서의 모병을 금지했으며 누구든지 해산된 자유군단을 재건하려는 자는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연합군들이 실레지아의 자유군단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면 루르지역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택할수 있는 선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연합군 부대를 보내 자유군단과 POW를 갈라놓자는 안이 논의되는 동안, Von Hulsen 장군은 6월 4일, 또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폴란드인들을 다시한번 패배시켰습니다. 그러는 동안 북부에서는 게릴라전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는데, Rossbach, Von Aulock, Huber 의 부대를 포함하는 자유군단들은 폴란드인들을 자신들의 출발지로 천천히 몰아냈습니다.

 

마침내 7월 마지막 날, 연합군이 평화유지군으로서 독일인과 폴란드인 사이로 진입했습니다. POW 와 자유군단 모두 전투를 중지하고 동시에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연합군 조정 위원회가 다시 전지역의 통제를 시작했으며 주민투표에 따라 영토는 최종적으로 분할되었습니다.

 

POW가 일으킨 1919년에서 1921년간의 연속적인 세번의 도발에서 자유군단 부대들은 연합군에 의해 결정된 독일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 정부는 의용병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 지역을 떠나 같은길로 몰래 돌아와야 했으며 심지어 이 와중에 지방 자위대까지 해산되었습니다. 또다시 의용병들은 그들이 공화국정부에 분노해야 할 이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922-1923년.

 

1922년동안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SPD의 세력은 계속 축소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혁명에의해 정권을 잡는 꿈을 꾸는 KPD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극우 테러리스트들 또한 정부에 대한 지하투쟁을 계속했습니다. 바바리아정부의, 모든 왕정주의적 활동을 금지하는 정책은 보수주의자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경제는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엄청난 전쟁배상금때문에 휘청거렸으며 설상가상으로 1922년 8월부터 통화가치가 대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자유군단 퇴역병들은 1922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로마진군" 을 통해 권력을 잡는 과정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파시스트당 역시 사나운 반공주의자이며 국수주의자이며 독재정권의 추종자였던 많은 퇴역군인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독일에서도 "베를린 진군" 을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 프랑스가 루르지역을 점령하다.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와 벨기에 부대들이 전쟁배상금 지불연기를 구실로 루르에 진입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이 모험에 참가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프랑스군이 루르에 진입한 첫번째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 5월, 루르의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유군단이 이 지역에 주둔했을때 프랑스군이 진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21년 3월에도 독일의 전쟁배상금의 지불독촉을 위해 진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프랑스의 야망은 좀 더 컸습니다. 라인란트에서의 그들의 점령지에서 프랑스는 분리주의를 퍼뜨렸습니다. 프랑스의 선동으로 1919년 6월, 소위 라인란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민중의 호응을 얻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이 세번째 침공에 독일정부는 즉각 "소극적인 저항" 을 호소했으며 이는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점령군과 지역민과의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지하" 자유군단 부대원들이 루르지역으로 건너와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프랑스 협력자" 들이 그들의 주요 목표였으며 3월 31일, 라인란트-라인강 이서지방의 분리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예상된 일이지만 이에대해 프랑스는 시설을 파괴하고 암살에 대해 보복과 처형으로 답했습니다. 5월 26일, 프랑스는 시위대에 발포를 하고, 다리를 폭파하려고 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 Albert Leo Schlageter 라고 알려진 자유부대원을 총살했습니다. (NSDAP당원이라고 하는군요.) 프랑스의 점령에 충격을 받은 독일에게 슐라게터는 민족적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나치공군의 JG26의 명칭이 이사람의 이름을 따 명명됩니다.)

 

결국 1923년 9월, 독일정부는 소극적인 저항운동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으나 지하투쟁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0월 21일, 프랑스의 사주를 받아 라인란트 공화국이 다시한번 선포되었으며 곧 "라인강 이서 공화국 (팔츠 공화국)" 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 여단의 행동대원들이 후자의 대통령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프랑스인들이 그후 몇달동안 계속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부 독일에서 분리주의 움직임을 선동하는데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1918년으로의 퇴보?

 

루르의 공업지대가 프랑스군에게 점거되어 생산이 중지되고 이에 대한 독일인들의 소극적인 저항이 계속되는 동안, 독일 정부는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냈으며 이는 경제를 파괴하는 초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습니다. 1923년 11월이 되자 담배한갑의 가격이 4,000,000,000마르크로 뛰어올랐습니다. 경제의 붕괴는 자연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비극과 공포와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동시에 소극적 저항을 중지하는 정부의 방침 -정복자들에 대한 항복- 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분노시켰습니다. 라인란트지방에 대한 위협과 바바리아 왕정주의자들의 분리 움직임에 덧붙여 1923년, 괴로움을 받고있는 정부는 또다시 우익의 반란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의 가능성에 직면했습니다.

 

이시절의 독일은 마치 1918년 당시의 혼돈의 상태로 돌아간 것만 같았습니다. 우익세력으로부터의 위협은 아직 자유군단의 세력이 강하게 남아있으며 "검은 국방군" 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노동자 부대 Arbeitkommando 에서 야기되었습니다. 정부가 루르에서의 저항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 퍼졌으며 그들은 스스로 국방부의 지휘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장군들은 단호하게 그들을 거부했으며 점점 흔해빠진 폭동으로 변해가던, 1923년 9월 30일 로 계획된 쿠데타는 단 한발의 총성도 없이 분쇄되었습니다. 이제 폰 젝트 장군은 "검은 국방군" 을 해산하는 명령을 내릴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좌절한 극렬 민족주의자들은 "군대가 독일을 구원할 것이다" 라는 믿음을 마침내 버렸습니다. 이제 앞으로 그들의 희망은 히틀러와 같은 정치적 선동자들로 넘어갔습니다.

 

정지권에서의 다른 축인 공산주의자들 역시 결코 아주 강해지지는 못했습니다. 사회 경제적 혼란은 KPD에게 호의를 보내왔으며 그들은 튀링기아와 작센의 지방정부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9월, 슈트레제만이 이끄는 새로운 정부는 기존의 독일정부가 추구했던 모든 정책을 포기했습니다. :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친교 (예를 들면 1922년의 라팔로 조약) 의 중단, 서부 열강과의 대립 중단 등등.. 모스크바의 입장에서 이러한 변화는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위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소위 "10월 독일" 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코민테른은 KPD에게 거리를 점거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10월 말, 총파업이 선포되었으며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무장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경찰력과 국방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으며, 비슷한 상황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한 튀링기아와 작센에서도 벌어졌으며 같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달도 채 못되는 기간동안 정부군과 경찰은 이전과는 달리 자유군단의 도움 없이도 자유군단 퇴역병들과 연관된 노동자부대가 일으킨 폭동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모두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군단과 국방군의 이별은 이제 곧 뮌헨에서 벌어질 예정이었습니다.

 

라스트 에피소드.

 

뮌헨에서는 구스타프 폰 카 의 보수적인 정부가 바바리아의 자율성과 비텔바흐 왕가의 복귀를 주장했습니다. 1919년 4월의 "평의회공화국" (Raterrepublik) 시절부터 보수주의자들은 좌파 혁명론자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반공 단체와 손을 잡아 자신들을 보호하러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 독일주의자" 들과 바바리아 "분리주의자" 들 간의 연합은 애당초 불안했습니다. 자유군단 부대들은 독일에서는 유일하게 바바리아에서 어렵게 위장을 하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예를들면  Bund Oberland 등등..) 그러나 히틀러의 NSDAP 와 그들의 사병조직 (돌격대, SA) 이야말로  바바리아 정치계의 가장 큰 변수였습니다. 비록 1920년에 그들 멤버들이 임시의용병으로 편입되고, 1921년에 에르하르트 여단의 퇴역병들을 간부로 영입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SA가 지나치게 군사조직화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비록 히틀러가 전형적인 자유군단 지도자인 에른스트 룀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그 둘이 추구하는 바는 매우 달랐습니다. 결국 1921년에 룀은 자신만의 군사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물인 "군기 Reichskriegsflagge" 는 자유군단의 전통아래에서 굳게 단결하고 있었습니다. 1923년 1월, 프랑스가 루르를 점령하면서 사회불안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으며 Bund Oberland 와 "군기", 그리고 NSDAP는  연합하여 급진민족주의세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해방전쟁" 이 촉박한 것으로 보였기에 히틀러는 그의 SA에게 군사훈련을 받도록 허락했습니다. 9월 경, 이 연합은 "Kampfbund (전투당)" 로 개칭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이미 그들의 주적으로서 베를린 정부가 프랑스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진군" 에 관한 신나는 이야기들은 로스바흐 Rossbach 대위와 같은 과격한 자유군단 퇴역병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바바리아 왕정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계획이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이 두 세력에 대한 대책마련에 고심하는 동안 뮌헨의 이 두 라이벌 우파세력은 각자의 계획을 추진하여 상대방을 앞지를 것을 시도했습니다.

 

11월 8일 밤, Von kahr 와 그의 추종자들의 회동장소에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이 들이닥쳐서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할것을 주장했으나 아무런 반향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바리아의 독립 대신에 "민족적 혁명"을 선언했습니다. 그 다음날, Bund Oberland 와 "군기", 그리고 NSDAP 는 베를린으로의 진군의 첫 단계로서 뮌헨의 통제권을 탈취하려 시도했습니다. 이 1923년 11월 9일의 소위 "맥주홀 폭동" 의 그 엉성한 계획과, 역시 엉성한 실행덕분에 경찰은 그들을 쉽게 분쇄하고 모욕을 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혁명이 시작된지 실로 5년만에 자유군단의 잔존자들은 그들 역사의 마지막 장을 마쳤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유군단에 관한 것.

 

일부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자유군단은 군사사 분야가 아닌 정치사 분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20세기의 많은 내전들이 일반적인 전쟁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유군단 부대원들과 같이 정치적인 동기부여에 의해 총을 잡은 병사들은 러시아 혁명당시의 적위군에서 1950년대의 베트민,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분쟁에서 결정적인 열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 (자유군단) 은 거대한 혁명적 좌파세력을 패배시켰으며 국경지역에서 국토의 손실을 최소하시키고 국가의 분열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의 케말 아타튀르크 (케말파샤) 의 "터키 국민군" 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대들.

 

혁명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탄생했으며, 원래 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각각의 자유군단부대들은 자신들의 세력, 보유한 자원, 목적등에 따라 자신들만의 고유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로, 심지어 대략적으로라도 "조직과 장비" 라는 타이틀 하에, 이들 부대들을 정형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부대들은 1919년의 첫달에 탄생하여 그해 말에 해산했습니다. 일부 부대들은 더 큰 부대밑으로 통합될때까지 단지 몇주일밖에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특수지역의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위협이 사라지면 해산되곤 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자유군단을 특정 카테고리를 통해 분류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첫번째 카테고리로는 장군이나 대령들에 의해 조직되어 거의 여단이나 사단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대한 부대들이 있겠습니다. 이들 부대에는 자신들만의 화포나 공병부대와 기타 지원부대들까지 보유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옛 정규 제국군을 모체로 만들어졌습니다.  예를들어 Badischen Volksheer, 바바리아 군단 (FK Von Epp), 독일 군인사단, 근위기병사단, 하스의용병부대, 헬트 자유군단, 지방의용병소총군단 Freiw. Landesjagerkorps, Freiw. Landesschutzenkorps, Schutztruppen Regiment von

Lettow-Vorbeck 등등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군세덕분에 전독일에서 다양한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으며 공화국에 대한 어떠한 열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건한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 분열위기가 지나간 후 그들의 부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들 부대원들은 주로 국방군에 편입되면서 그들의 활동을 끝마쳤습니다. (예외로는 Von Lettow-Vorbeck 장군이 있는데, 대전동안 그는 오늘날에는 탄자니아로 불리는 동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에서 뛰어난 과감성과 지략을 발휘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을 맺은 독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명성덕분에 곧 자신의 이름을 딴 대규모의 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결국 1922년 4월의 카프-뤼트비츠 반란을 통해 몰락합니다.)

 

그들의 규모와 조직, 활동범위를 고려할때, 이 첫째 카테고리에 에르하르트가 지휘한 제 2해병여단과 Von Lowenfeld 가 이끌던 제 2여단 -실제 행동으로 보인 것보다 훨씬 과격했던- 을 포함시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번째 카테고리는 대부분의 자유군단 부대들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다양한 도시와 지역에서 편성되어 혁명시도에 대항하여 사회질서를 수호했습니다. 이들은 첫번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부대들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며 대대나 연대규모를 넘는 경우는 별로없었고 대부분 수백명에서 천여명 정도였습니다. 첫번째 카테고리와는 달리, 이들 부대는 고참병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사상을 같이하는 민간인들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대 대부분은 "자유군단" 이라는 명칭에 그들의 출신 도시나 지역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예는  하나하나 들기엔 너무 깁니다. : FK Bamberg, FK Bayreuth, FK Bodensee, FK Chiemgau, FK Dusseldorf, FK Erlangen, FK Oldenburg, FK Passau, FK Resensburg, FK Schleswig Holstein, FK Schwaben, FK Thuringen, FKWurzburg 등등.. 일부의 경우 이들은 "자유군단"  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예에는 함부르크의 바렌펠트 근위분견대 (Wachabteilung Bahrenfeld), 베스트팔렌소총군단(Westfalisches Jagerkorps) 등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시작한 몇몇 자유군단 부대들은 원래 좀더작은 소규모 부대를 토대로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뷔르템부르크 경비 "중대" Wurttemburgisches Sicherheits Kompanie 는 전성기에 8개의 포병중대와 3개의 항공중대를 포함한 최소한 10개 대대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대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출신지역에서 너무 먼 곳까지 나가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역시 여기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악명높은, 북부바바리아에서 편성된 FK Oberland 는 자신들 고향지역에서 아주 먼곳까지 가서 싸웠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예외도 아닙니다. FK Hessische-Thuringisch-Waldekischen (바덴돌격대대) 는 발트해안 전역에서 가장 격전을 치룬 부대일 것입니다.

 

이 두번째 카테고리의 하위 그룹으로서, 국경지역에서 조직된 지방 자위부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들면 북부 실레지아 의용소총병군단 Oberschlesien Freiwilligen  Jagerkorps, 작센 국경소총여단 Sachsische Grenzjagerbrigade, 동부프러시아 의용소총병군단 Ost Preussische Freiwilligen  Jagerkorps, 쾨니히스베르크 자유군단 FK Komigsberg (이 두부대는 동프러시아 출신병사로 편성됨.), 그리고 서프러시아에는 지금은 폴란드의 Torun 시가 된 Thorn 에서 편성된 Festung Freikorps Thorn 가 있었습니다.

 

세번째 그룹은 초급장교들에 의해 조직된 자유군단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대대규모였으나 이보다 작기도 했고 (좀 큰 중대규모), 좀더 크기도 (좀 작은 연대규모) 했습니다. 장군들에 의해 지휘되며 온건한 목표를 가지고있던 첫째 카테고리나 지역방어를 목표로 편성된  두번째 카테고리와는 반대로, 이들 세번째 그룹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가장 과격한 무리였습니다. 이들 장교와 병사들은 최전선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역전노장들로서 독일이 전장에서 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등뒤에서 칼로 찌르기" 궤변을 받아들여 좌파 정당을 증오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불명예스러운 독일" 공화국 정부 역시 증오했습니다.

 

독일에서 혁명이 터졌을 때 독일의 많은 고위장교들이 폭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있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진공상태를 이용하여 젊은 중위와 대위들이 아직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충성스런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대들이 구체적으로 "고전적인" 자유군단 운동의 열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의 배타적인 군대정신 -이스쁘리 드 꼬어 esprit de corps- 야 말로 자유군단 운동의 내적 취약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면서 대부분 자신들의 부대장 이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유군단 운동은 소규모 부대들의 얼룩덜룩한 성좌지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둘 중 일부가 군사적 무정부 상태의 청사진을 보여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투가 다가오면 이러한 사납고 독립된 그룹들은 목표가 성취될때까지 (주로 국방군 장군에 의한) 좀더 상위 명령체계에 편입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부대 중 일부는 근위연대처럼 그들 명칭의 기원을 옛 제국군대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는 것과, 그들이 주둔한 도시의 이름 (FK Postdam, FK Haccketau 등..) 을 따서 지은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의 지휘관 이름을 따서 붙여지는 것이 좀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부대를 조직한 유명하고 카리스마넘치는 지휘관과 그의 부하들간의 깊은 유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자유군단 명칭의 실례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  FK von Aulock, FK von Brandis, FK von Brause, FK Brussow, FK von Diebitsch, FK Dohna, (이전에 FK Gorlitz라고 불린) FK Faupel, FK Gabcke, FK Hubner, FK Hunicken, FK von Klewitz, FK Kuhme,FK Lichtschlag, FK von Libermann, FK Lierau, FK Liftl, FK Lutzow, FK von Medem, FK Negenborn, FK Osterroth, FK von Oven, FK Paulssen, FK von Petersdorff, FK Petsch, FK Pfeffer, FK von Plewe, FK Severin, FK Thummel, FK Wolf 등등..

 

때때로 명칭의 지휘관의 이름은 다른 단어뒤에 오기도 했습니다. Bulow, Dorthenleitner, Glasser, Henke, Schaaf, Schad, Von Schauroth, Voighleitner, Von  Waltzen, Wildermut 등이 지휘한 부대는 Abetilung (분견대), Freiwilligen Abteilung (의용대), Freiwilligen Bataillon (의용대대) 등의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Regiment (연대) 라는 명칭은 의외로 드물게 사용되었는데 그 한 예로는 튈만 의용연대 Freiwilligen Regiment Tullmann 이 있겠습니다. Sturm (돌격) 이라는 단어는 Sturmabteilung Rossbach, Sturmabteilung Schmidt, Sturmabteilung Heinz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Schar (대략 "부대" 라는 뜻을가진 고풍스런 단어) 라는 단어도 종종 쓰였습니다. 예를들면 Freischar Lautenbacher, Berthold 대위가 지휘한 유명한 Eiserne Schar 등등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이름을 쓰되, 그들 지휘관의 이름이 아닌 1차대전 당시 총사령관의 이름을 붙인 부대들이 있었는데 이 예로는 "힌덴부르크 자유군단" 이나 "야전원수 힌덴부르크장군 자유군단" 등이 있었습니다.

 

모든 자유군단의 지도자들이 육군출신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보트 에이스였던 Arnauld de la Perriere 는 나중에 제 1해병여단으로 편입되는 돌격대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명하고 카리스마넘치는 지휘관으로는 항공대에서 복무했던 Rudolf Berthold 대위가   있었습니다. 44기의 적기를 떨어뜨려 Pour le Merite (블루맥스) 를 수여받은 그는 전쟁 중 여러번 격추당했으며 그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를위해 개조된 포커 DVII 기를 몰면서 자신의 부대를 떠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조직한 "강철의 부대 Eisrne Schar" 는 발트해안 전선을 포함한 여러작전에 참가했습니다. 카프-뤼트비츠 반란시기에 그의 부대는 함부르크 근처의 Harburg 에서 대규모의 좌파 민병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Berthold 는 결국 사로잡혀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의 "블루맥스"의 리본에 의해 목이 조여지고, 참수당했으며 몸의 나머지 부분도 절단되었습니다.

 

이 세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자유군단의 발전과정은 부대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몇몇 부대들은 금방 낙심하여 해산했으나, 다른 부대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후에 지하조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많은 부대들이 해산되면서 한때 수천명의 세력을 자랑한 로스바흐 돌격대 Sturmabteilung Rossbach 처럼 여전히 남아있는 부대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장비와 군복.

 

그들이 참가했던 대부분의 전투의 성격 (시가전) 상, 그들 대부분의 무장은 기관총과 박격포와 화염방사기를 포함한 보병무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대포와 전차의 사용은 흔한일은 아니었지만, 대규모의 부대에서는 전혀 목격되지 않았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옛 제국육군의 무장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영국제 탱크와 같은 노획품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옛 항공대 역시 자유군단의 일부를 구성했지만, 그 사용은 항공정찰이나 "프로파간다 폭격" 등과같은 선전물 투하 정도로 한정되었습니다.

 

그들의 군복은 옛 제국군당시의 군복에 "평화군" Friedensheeres, 임시제국군 Vorlaufigen Reichswehr 등의 정규계급장을 부착하여 착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자유군단부대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표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대 뱃지는 여러 부류가 있었습니다. 옛 문장에서 유래한 출신지역의 문장을 쓰거나 독일 고유의 군사적, 민속적 상징을 쓰기도 했으며 자신들 지휘관의 첫머리 글자를 따기도 했습니다. 에르하르트 여단처럼 좀더 복잡하게 바이킹 군함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도 있었습니다.

 

몇몇 부대는 "하켄크로이츠 (스바스티카) "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나치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토텐코프" (망자의 두개골) 문양도 널리 쓰였는데 원래 이것은 수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프러시아와 브룬스빅의 엘리트부대나 1차대전 중 돌격대, 전차부대, 조종사들의 표장으로 쓰였던것이었습니다. 깃발얘기를 하자면, 대부분의 자유군단 부대들이 옛 독일제국의 깃발이었던 Kaiserlischenmarine 의 깃발을 주로 사용했습니다만, 로스바흐 돌격대처럼 그들 자신만의 깃발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원자들.

 

이러한 자유군단 부대들은 지원자들로 이루어졌기에 자유군단에 관한 모든 연구는 그들의 이러한 동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 많은 병사들의 정확한 수를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패배를 해명하기 위해 일부 좌파 역사가들은 자유군단의 수를 웃기게도 1백만명 이상으로 잡곤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실제로는 15만명 정도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4년간의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독일병사들의 소망은 그저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가 그들을 계속 싸우게 만든 것일까요? 종전직후, 두 활동적인 소수그룹이 전쟁으로 지친 대중의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참호에서의 지옥같은 삶과 그들 가족의 빈곤과 굶주림을 가져온 체제를 비난하는 좌파활동가들에    의해 설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조국과, 군대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무한한 산뢰를 보내며 그들을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치루었으나 이젠 그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정치, 사회체제에 대한 완전히 환멸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그들 중 다수가 파시즘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더욱 폭력적으로) 전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공산당에 이끌려 그 민병조직에 이름을 올린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전 독일에 퍼져있던 인민해군사단과 다양한 "붉은 군대" 는 엄청난 수의 옛 "최전선의 전사들" 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사 실은 한가지 의문점을 던져줍니다. 이들 역시 풍부한 전투경험과 게다가 숫적우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유군단의 퇴역병들에게 패배한 것인가?  그에대한 설명으로는 자유군단 병사들이 군율과 복종이라는 소위 "군사적 미덕" 을 잘 유지하고 드높혔으며 이것이 더욱 높은 전투능력을 가져왔다는 것이 타당할겁니다. 반면 혁명쪽에 참가한 퇴역병들은 구속적인 명령체계를 거부했기에 결국  이들의 움직임은 거의 무장강도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두번째 소수파가 바로 자유군단 운동을 이끈 이들이었습니다. (비록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전쟁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군율과 신뢰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때때로 신비적인 레벨로 승화된 애국심과 군사적 영광과 임무에 관한 집념..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많은 생명의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요구, 전우들과 야전지휘관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 등이 이러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화로운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단절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세상에서는 감투정신과 영웅주의, 전우애만이 유일한 가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국가의 분쟁지역에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배출구를 찾았는데, 독일에서는 자유군단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공통적인 증오심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등뒤에서 군대를 칼로 찌른" 후 불구자가 된 독일을 위협하는 공산혁명론자들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쟁동안 후방에 편안히 앉아 전쟁을 이끌고 있었던 정치가들이나 경제적 착취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공통된적에 대하여 이들의 생각은 출신에 따라 두가지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교육울 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학문적인 이데올로기적 회의없이 단순히 충동적인 동기에  이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반공주의가 이들을 이끈 쌍두마차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카이저시대의 "좋았던 옛날" 을 동경하고 호헨쫄레론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이 권위를 유지하고  법령을 명령을 내리고 독일의 이익과 명성을 수호하는 한 공화국을 보호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1915년 이전에 SPD는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대부분의 독일군을 배출한 노동계급의 시민들에게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많은 자유군단 부대원들이 이전의 SPD 지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은 결국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공화국은 혁명의 혼돈시기에  생겼으며 첫 일년동안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자유군단 부대원들에게 있어서 수치스런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유군단 부대 중 숫자는 적지만, 가장 과격한 부대들은 옛 지배체제나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둘다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독일의 통일과 힘을 되찾고 외국영향에 의해 더럽혀진 독일을 정화시킬 민족주의적 독재정권을 고대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향해 떠났습니다...

 

전투에서의 성과.

 

다른 부대들이 쿠를란트에서 루르에 걸쳐 전투에 참가하는 동안 몇몇 자유군단들은 거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18-1923년 사이에 독일내부의 사이벌 정치세력끼리의 대립은 약 25,000명의 사상자를 가져왔습니다. 비록 결코 적은 수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러한 사상자의 수는 전간기의 다른 유럽국가의 내전에 비해 매우낮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핀란드 독립전쟁" 이라 불린 내전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사상자가 났습니다.)

 

자유군단의 승리는 대부분의 그들과 대적한 붉은민병대에 대한 그들의 군사적 우수성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베를린과 뮌헨, 루르 등지에서 그들은 훨씬많은 적들과 싸웠으나 그들은 높은군율과 높은 전투동기, 훨씬 우수한 지도력과 전술경험의 잇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옛 제국군의 훈련대상이 아니었던 시가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적들은 힘차고 잘 조직된 돌격에 의해 분쇄되었습니다.

 

자유군단 부대들이 국경지방에서 대치한 폴란드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들의 부대는 일반적으로 정규군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며 국민군으로 발전해 나가는 애국적 민병대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싸운 자유군단 부대들은 정규군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들이 부족했기에 간신히 적과 맞설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전쟁에서 비록 자유군단 부대들이 언제나 승리하지는 못했으나, 폴란드인에 대해서는 놀라운 전과를 보여주었습니다. 폴란드의 POW 민족주의 민병대들은 투지만만했으며 높은 전투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잘 조직되었으며 거기에 대전당시 여러군대에 참전한 유능한 장교들과 하사관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자유군단을 능가하는 승리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발트전선에서 자유군단부대들은 백위군들을 심각하게 패배시켰으며, 계속 그 군세가 불어나고 있던 러시아의 붉은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베를린에서 안나베르크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공격정신과 유연성, 기회를 잘 포착하는 전술을 물려받은 1차대전 당시의 스톰트루퍼들이었습니다.

 

스톰트루퍼에서 무장친위대에까지.

 

1914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완벽한 군대였던 독일군은 신묘한 전술과 그들의 기계와도 같은 우수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라이벌들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참모본부가 입안한 기동전은 4백마일이 넘는 참호의 수렁속에 빠졌으며 그곳에서 한세대의 남성 전체가 적들에 맞선 수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무시무시한 전투에서 집중포화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1915년 초, 최전선의 부대 사이에서 이러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충격군" (Strosstruppen) 혹은 "돌격대" (Sturmtruppen) 가 그 해답이었습니다.

 

충격부대는 각 사단에서 모인 용감하고 호전적인 지원자들로 편성되었습니다. 소규모이지만 잘 조직된 이들은 나이프에서 권총, 수류탄, 박격포, 화염방사기, 경포등을 포함하는 여러 종류의 무기를 지급받았으며  독립적으로 공격훈련과 적군의 최전선을 돌파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한 기동전술을 교육받았습니다. 이러한 돌격대의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1918년 봄 독일군의 대공세의 선두를 맡았습니다. 이들부대에서는 뻣뻣한 전형적인 프러시아 스타일의 군율이 신뢰에 바탕을 둔 정교와 병사간의 전우애로 대체되었습니다. 전쟁초기의 과학적인 전쟁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군은 이러한 소규모이지만 우수하고 높은 전투동기를 가진 병사들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대에 관한 출판물로는 병사출신의 지식인인 Ernst Junger 의 회고록인 "Storm of Steel" 이 있습니다.)

 

많은 전직 돌격대의 퇴역병들이 자유군단에 참가하여 그들의 충격전술과 군율을 전수했습니다. 일부의 경우 "옛 모델" 을 따른 정규군은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는 광신적인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모델"의 군대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했습니다.

 

국방군이 재건되었을때 폰 젝트 장군은 다시 한번 전통적인 프러시아군의 기풍 -고도로 훈련된 군사전문가이자, 시계와도 같은 정확성을 자랑하는- 을 강조했습니다. 나치 독일국방군 Wehrmacht 은 이러한 유산위에 서 있었으며 1939년과 1942년 사이에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군사적인 통설에 따자르면, 2차 대전이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유산들은 사멸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경부터 일종의 돌격대 정신이 무장친위대 부대의 엄청난 확장과 그에 수반한 특권과 함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차대전때의돌격대와 무장친위대 사이의 역사적 고리는 자유군단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은 SA와 SS가 에 의해 신봉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승리란 히틀러가 패배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비난했던 참모본부의 신중한 작전이 아닌 광신적인 전사들의 공격정신에 의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고로.. 제 1무장친위대 부대였던 "아돌프 히틀러 (총통기) Leibstandarte Adolf Hitler" 부대가 왕년의 안나베르크 전투에 참가한 자유군단 부대원이었던 요제프 "제프" 디트리히 Josef "Sepp" Dietrich 의 지휘를 받았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광신은 최종적인 패배를 막을 수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가 다시 한번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원한을 품은 퇴역군인들이  미래를 재형성하기 위해 무기를 손에서 놓지않는 일이 벌어지는, 주인없는 독일이 들어서는 날은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계급장, 인시그니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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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단 부대들의 뱃지.

 

1 : 라인하르트 의용병연대 Fweiwilligen Regiment Reinhard 의 암뱃지.
2 : 바이에른 병사군단 (FK von Epp) 의 암뱃지.
3 : 빌헬름스하펜의 제 2해병여단 (에르하르트 여단)의암뱃지. 두번째 패턴은 "빌렐름스하펜: 대신 지휘관인 "에르하르트" 의 이름을 도안한 것.
4 : 고지 자유군단 FK Oberland 의 옷깃과 모표, FK von Medem의 옷깃..
5 : 휠센 자유군단 FK von Hulsen 의 옷깃.
6 : 뢰벤펠트 제 3해병여단의 옷깃.
7 : 베르덴펠스 자유군단 FK Werdenfels 의 암밴드.
8 : 근위기병사단의 옷깃.
9 : 바이에른 자유군단 FK Bayeruth 의 옷깃.
10 : 오펜 자유군단 FK vom Oven 의 어깨 스트랩.
11 : schutztruppen Regiment 1 von Lettow-Vorbeck 의 암밴드.
12 : Minenwefer abteilung Heuschkel (참호 박격포부대) 의 암밴드.
13 : 제네티 의용 포병대 Freiw. Batterie Zenetti (포병) 의 암밴드.
14 : 강철의 사단 Eiserne Division 의 모장, FK Brussow의 옷깃.
15 : 발트지방군의 어깨스트랩.
16 : 로스바흐 돌격대.
17 : 하이데브렉 자위대대 Selbstschtz Bataillon Heydebreck 의 팔에 부착.
18 : Freiw. Russosche Westarmee 의 팔에부착.
19 : 북부 실레지아 자위대 Selbstschtz Oberschlesien 의 팔과 가슴에 부착.
20 : 페퍼 자유군단 FK vom Pfeffer 의 팔에부착.
21 : 에를랑겐 의용유격대 Freiw. Jagerkorps Erlangen 의 옷깃과 모표, 검은 자위대대 Selbstschtz Bataillon Schwarze Schar 의 팔에부착, (FK Hasse 소속의) Bataillon Reinchenbach 의 모표.
22 : 고글린 자위대대 Selbstschtz Bataillon Goglin 의 팔에부착.
23 : 포츠담 자유군단 FK Potsdam 의 팔에부착.
24 : 야전원수 힌덴부르크 자위대대 Selbstschtz Bataillon Generalfeldmarschall von Hindenburg 의 커프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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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단의 깃발과 매달과 철모표식.

 

1 : 옛 제국의 "해군기 .Reichskriegsflagge)" 는 대부분의 자유군단의 깃발이었습니다. 흑색, 적색, 황색으로 구성된 새 공화국의 깃발은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2 : 강철의 사단 Eiserne Division 의 깃발, 1919년.
3 : 실레지아 자위연대 Selbstschtz Reiment Schlesien (실레지아에서의 로스바흐돌격대의 위장명칭) 의 깃발, 1921년.
4 : 제2 쿠를란트 보병연대 (Freiw. Bataillon vom Libermann) 의 제 1대대의 깃발, 1919년.

메달.

5 : 발트 십자가.
6 : 실레지아 독수리.
7 : (오스트리아의) 카린티아 독수리.
8 : 강철의 사단 Eiserne Division 의 메달.
9 : 로스바흐 십자장.
10 : 동부국경 수비대의 튜튼기사단 방패장.

철모표지.

11 : 란도프 자유군단 FK Randow, 1919-1920년.
12 : 뮌헨 시민군,1919년.
13, 14 : 바바리아 자유군단의 많은 변형 중 일부, 1919-1920년.
15 : 히엔츠 자위돌격부대 Selbstschtz Sturmabteilung Hienz 의 슐라게터 중대의 많은 표지중 하나, 1921년.
16 : 토텐코프 마크는 비록 원래 특정부대의 뱃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자유군단 부대들에 의해 쓰인 인기있는 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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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평화 유지군 Friedensheeres, 1919년 1월.

 

1919년 1월 19일의 육군명령 Nr.85호에 의해 평화를 맞은 독일육군의 정규복장이 정해졌습니다. 제국 당시에 쓰인 전투모는 폐지되고 군관구의 색이쓰인 전투모만 착용이 허락되었습니다. 25년간의 현역근무를 마친병사들에게는 세이버가 지급되었지만 대부분의 장교들과 하사관들의 보조무기는 보병용 총검이었습니다.

 

제국당시의 군복은 계속 쓰였으나 전통적인 독일군의 것이라기보다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계급장이 채택되어 쓰였습니다. 하사관에서 장군들은 그들 팔의푸른 띠를 통해 계급을 구분했으며 장교들은 핀으로 고정하는 금속으로 된 부대마크를 계급장 아랫부분에 달았습니다.푸른띠의 진한 정도는 부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국스타일의 어깨 계급장의 병과장과 부대넘버 표시는 병사들과 하사관사이에 계속 쓰였으나 장교들의 군복과 코트에 부착하는 금속으로 된 금몰장식은 착용이 금지되었습니다.

 

1 : 고참하사관들을 포함한 모든 계급의 군인들의 어깨 견장.
2 : 하사.
3 : 중사.
4 : 상사.
5 : 야전상사와 준위.
6 : 소위.
7 : 중위.
8 : 대위.
9 : 소령.
10 : 중령.
11 : 대령.
12 : 소장.
13 : 중장.
14 : 대장.

 

임시 국방군, 1919년 5월.

 

평화군 Friedensheeres 의 존속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1919년 5월 5일, "임시 국방군" 편성에 관한 국방부 명령 Nr.604/5.19 B3 에 기초한 육군명령 Nr.811 에 따라 편성된 군대가 이들을 대신했습니다.

 

계급장은 이전보다 좀더 공을들인 물건으로, 땋은 은사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들은 대령에 이르는 군인들이 착용한 "Armscheibe" 와 함께 양측 군복소매에 부착했습니다. 이것은 병과에 따라 다른 색으로 수놓아졌으며 부대넘버가 적힌 80mm X 50mm 크기의 타원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깨 계급장은 병졸에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재질과 색상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15 :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견장.
16 : 일등병, 상등병. (보병)
17 : 하사.
18 : 하사 이상의 하사관의 견장.
19 : 중사.
20 : 상사 (철도).
21 : 야전상사 (정찰대).
22 : 준위 (경포병).
23 : 은사로 만들어진 장교견장.
24 : 소위.
25 : 중위.
26 : 대위.
27 : 소령.
28 : 중령.
29 : 대령.
30 : 장성급의 견장.
31 : 소장.
32 : 중장.
33 : 대장.

 

J(III) : 제24 경포병연대의 중위, 1919년 여름.

 

출처 : 오스프리 출판사의 엘리트 시리즈의 "The German Freikorps 1918-23"  불법날림번역입니다..

          이 외에 바이마르공화국(격동의 역사)  (오인석 외 저, 삼지원) 을 군데군데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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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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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lbrecht Wenzel von Wallenstein | 작성시간 07.09.25 글의 내용은 좋군요, 하지만, 볼세비키가 무조건 독재주의와 당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기졌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레닌-트로츠키가 중심이되던 시절에는 볼셰비키가 비교적 당=나라=인민이라는 사고 방식이 약했지만, 적백내전이 격렬화 되자, 이러한 경향을 잃고, 당의 이익이 국가, 인민의 이익과 동일시되었으며, 이점은 뒤에 아이작 도이처가 말하였듯이 스탈린이 권자에 오를수 있던 한 요인이 되지요.
  • 작성자last-charisma | 작성시간 07.09.25 흠... 1차대전이후 각국의 혼란상과 적백내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많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9.25 흑태자 에드워드님, last-charisma 님// 감사합니다. 저도 이거 읽으면서 그동안 애매몽롱했던 이시기에 대해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Albrech... 님// 설명해주신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공부가 너무 부족하기도 하고, 또 시시각각 변한 러시아 혁명과정을 다 첨부하는 것도 글의 주제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대략적으로만 써놓았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리카르도 | 작성시간 07.09.25 썩어도 준치라고 전쟁에서 패배해도 전투 능력면에서 주변국에게 전혀 딸리지 않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나욱 | 작성시간 07.09.25 패하긴했어도 독일 본토에 피해는 미미하지않았나요? 제가 알기론 주변국의 영토에서만 전쟁을 한걸로 알고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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