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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미국 남북전쟁- 불패의 군 (Invincible Army) 11.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구레나룻 (sideburns)

작성자jager|작성시간07.12.29|조회수1,206 목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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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전쟁 당시의 프레데릭스버그 시내
 

 1862년 10월 말이 되자 양군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렸다. 맥클레란의 북군은 라파핸노크강 북쪽 진지에 12만 5천, 워싱턴에 8만, 세넌도어 계곡의 하퍼스페리에 2만 2천이 배치되었다. 이에 맞서는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8만 5천의 병력이었다. 리는 이무렵 정식으로 남군을 2개의 군단으로 편성하고, 잭슨과 롱스트리트를 중장으로 승진시켜 군단장을 맡겼다.

  리는 여전히 전투를 희망하고 북군이 공격해오기를 원했지만, 맥클레란은 이 용감한 적장에게 3번씩이나 도전하는 것을 꺼려했다. 링컨 대통령이 직접 맥클레란을 찾아가 공격할 것을 강력히 언급했지만, 맥클레란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북군이 굼뜨게 움직이는 동안 리는 잭슨 군단 4만을 세넌도어 계곡으로 보내고, 롱스트리트의 4만 5천을 맥클레란의 진격에 맞추어 천천히 후퇴하였다. 북군의 움직임 여하에 따라, 잭슨은 세넌도어에서 북군의 후방과 워싱턴을 위협할 수 있고, 롱스트리트도 전방의 북군을 좌우로 우회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맥클레란은 남군 사이에서 어쩔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안티탐 전투 후 리의 남군은 단 하루에 건넌 포토맥 강을 맥클레란은 9일이나 걸려 건넜다. 북군이 남부의 3배였으니, 병력차이를 생각해도 3배나 느린 속도였다. 도하한 뒤에도 맥클레란은 부족한 군마를 징발하고 물자를 공급받는 데 관심이 있었지 남군을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침내 링컨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2차 불런전투 이후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맥클레란을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링컨은 이제 더 이상 “구멍 뚫기에 너무 뭉특한” 송곳으로 애쓰지 않기로 하였다. 맥클레란의 해임은 11월 7일에 사령부로 전달되었다.

 링컨은 맥클레란의 후임으로 최선임자인 번사이드를 임명하였다. 번사이드는 이미 두 번씩이나 같은 제의를 받았다. 맥클레란이 7일전투에서 패배한 때가 첫 번째였고,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에서의 수륙양용 작전을 매우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포프가 패배한 2차불런전투 이후로, 북군 중에서 그나마 포프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했기 때문이다. 두 번다 거절한 번사이드는 이후 사우스마운틴 전투에서 D.H 힐 사단과 전투를 치르고, 안티탐 전투에서는 남쪽 전선에서 다리를 돌파하여 리의 군대를 거의 패배시킬 뻔하였다. 확실히 행적을 놓고 보면 링컨이 기대해볼만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포토맥군 사령관으로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2번씩이나 고사했듯이,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북군의 핵심 군사령관으로서 남군을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맥클레란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친구가 해임된 빈자리에 가기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3번씩이나 고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번사이드는 포토맥군 사령관으로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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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포토맥군 사령관에 취임한 번사이드. 구레나룻을 의미하는 sideburns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임식은 1862년 11월 10일에 있었다. 번사이드는 친구를 위한 배려로 이임식을 성대하게 치렀는 데, 북군의 전반적인 정서는 매우 암울했다. 솔직히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북군은 역대 포토맥 군사령관 중에 맥클레란을 가장 좋아하였다. 맥클레란이 해임되는 순간 북군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는 사령관을 지켜보았다.

  병사들도 그랬지만, 맥클레란 본인은 특히나 억울하게 생각했다. 강력한 리의 군대가 북부 수도를 공략하는 것을 자신이 필사적으로 막았는 데 그 대가가 해임이라면서 매우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안티탐 전투가 ‘전술 상의 걸작’이라며, 이를 알아주지 않는 워싱턴의 정치인들을 원망하였다.

    어쨌든 맥클레란이 떠나고, 포토맥군 12만 5천과 350문의 대포는 이제 번사이드의 손에 들어왔다. 번사이드는 잭슨과 롱스트리트가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곧장 남쪽으로 진격하다가는 잭슨의 군에 배후가 차단될 것이라 생각했다. 북군의 보급선인 오렌지 -알렉산드리아 철도는 형편없는 상태였으며, 다른 보급수단이 필요했다.

   남군의 측면공격과 보급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하여, 번사이드는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라파핸노크 강 연안의 팔머스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북군의 막강한 해군력은 팔머스까지 안정적인 보급을 제공할 것이며, 팔머스에서 마주보는 프레데릭스로 건너가면 보다 양호한 철도를 이용하여 남쪽 파문스키강까지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강을 하나하나 건너 남군 수도를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의 관건은 남군이 대처하기 전에 신속히 기동하여 도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레데릭스버그를 연결하는 다리가 모두 절단되었기 때문에 번사이드는 주교가 필요했다. 워싱턴에 작전의 복안을 설명하고 주교를 신속하게 팔머스로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워싱턴에서는 포토맥강 상류에 있는 주교를 보낼 것을 번사이드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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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릭스버그로 이동하는 리와 롱스트리트


 

  11월 15일, 번사이드는 기동을 시작했다. 빈틈없이 정찰하고 있던 스튜어트는 즉각 리장군에게 북군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리장군은 대번에 북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칼페퍼에 주둔하고 있는 롱스트리트 군단을 프레데릭스버그로 이동하도록 지시하였다.

 

  11월 17일 오후, 최선두 부대인 섬너군단의 보병이 팔머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직 남군 부대는 프레데릭스버그에 리가 급히 보낸 1개 연대와 1개 포대 뿐이었으며, 섬너는 기병대를 프레데릭스버그에 보내어 본군이 올때까지 확보할 것을 번사이드에게 간청했다. 당시는 강물이 적어서 걸어서 도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번사이드는 가을비에 강물이 범람하는 본군과 고립되기 때문에 주교가 올때까지 도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문제의 주교는 포토맥강 상류에서 꾸물거리다가 증기선에 싣고 현지부대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다. 주교가 완전히 도착한 때는 북군이 도착한 지 10일이나 지난 11월 27일이었다.

  이 때는 롱스트리트의 전군이 프레데릭스버그 뒤편의 고지를 점령한 뒤였다. 번사이드가 주교를 기다리는 동안, 4만 5천의 남군이 북군의 도하점 뒤편의 거점을 장악한 것이다. 당시 잭슨의 부대는 세넌도어 계곡에서 서부와 연결하는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를 파괴하고 있었다. 리는 잭슨의 부대로 번사이드의 측면을 공격하고자 11월 23일에 명령했지만, 계곡의 폭우로 인해 기동이 어려워지자 11월 27일, 명령을 변경하여 롱스트리트와 합류하도록 하였다.

  롱스트리트가 점령한 프레데릭스버그 뒤편의 고지의 이름은 메어리스하츠였다. 약 50미터 높이의 고지의 앞에는 완만한 경사의 700미터의 벌판이 있었으며, 고지의 정상에는 돌담까지 있었다. 너무나 강력한 진지였기 때문에 이무렵 남군은 북군이 공격해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쪽이나 북쪽 측면으로 우회할 것이라 생각하고 대비를 하였다.

  실제 번사이드도 남쪽으로 20킬로 정도 떨어진 스킨커스넥에서 도하하고자 하였다. 12월 1일에 도하점에 도달했지만, 잭슨의 군대가 건너편에 도착하였다. 리가 명령을 내린 지 12일만에, 잭슨의 군단은 280킬로를 주파한 것이다. 얼리사단과 D.H 힐 사단이 배치되어 번사이드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이번에는 남군 사이에서 강을 건너 잭슨과 롱스트리트를 분리시키려고 했지만, 잭슨이 신속하게 이동하여 역시 좌절시켰다.

   맥클레란이 소극적인 작전으로 인해 해임되는 것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에, 번사이드는 무척 초조해졌다. 빨리 어떤 형태로든 대규모 작전이 필요했다. 남군을 우회하려는 시도가 여러번 실패하자 그는 정면의 프레데릭스버그를 도하하여 남군을 돌파해버리려고 결심하였다.


  이 무렵 잭슨은 리장군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본래 리와 잭슨은 북군이 공격해 올 경우 결전장으로 노스안나강의 남쪽으로 정해둔 바 있다. 노스안나강의 남쪽 언덕은 높은 지대였고 강에서부터 거리가 있기 때문에 패배한 북군을 우회하여 섬멸할 충분한 공격이 있었다. 노스안나강에서 적을 패배시키면, 포토맥군을 강가에서 섬멸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리가 이 계획을 리치먼드로 타전하자, 남부의 정치인들은 반대하였다. 노스안나강은 라파핸노크강보다 40킬로나 남쪽으로, 막을 수 있는 북군을 전투없이 수도에 가깝게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스안나강과 라파핸노크강 사이의 보급물자도 문제가 되었다. 늘 명령에 충실했던 리장군은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북군을 상대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잭슨은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잭슨이 보기에, 프레데릭스버그는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는 있지만, 북군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남군 진지를 공격하고 패주하는 북군을 타격할 우회공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강 너머의 스테포드하이츠 고지로, 이 고지에서는 전 전장이 관측되기 때문에, 북군이 이 고지에 대포를 배치하면 남군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잭슨은 북군을 강타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며, 완전히 파괴하여 포토맥군을 섬멸해야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리는 이미 결심을 굳혔으며, 번사이드군을 프레데릭스버그에서 상대하도록 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동안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던 노스안나강과 라파핸노크 상 사이의 주민들을 배려한 결정이기도 했다.


  어쨌든 리의 북버지니아군 전체가 프레데릭스버그 배후 진지에 배치되었으며, 방어공사를 하였다. 프레데릭스버그를 마주보는 메어리스하이츠 고지에 롱스트리트 군단이 배치되고, 남쪽 해밀튼 교차로에 잭슨 군단을 배치하였다. 양군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는 후드 사단이 배치되었다. 잭슨 군단은 남쪽에서 전투를 끝내고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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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교건설이 실패하자, 직접 도하를 시도하는 북군

 

  번사이드가 프레데릭스버그에 대한 공격을 결심한 것은 1862년 12월 11일이었다. 섬너군단장은 시의 항복을 요구했지만, 주민들은 남군의 요청에 의해 시를 떠났다. 주민들이 떠난 시가지에 리장군은 바크스데일의 미시시피 여단을 배치하였다. 바크스데일은 요소요소에 저격병을 배치하고 북군이 주교를 가설하기를 기다렸다.

   번사이드가 부교를 가설한 지점은 3군데로, 프레데릭스버그 정면에 2곳, 그리고 남쪽 개활지에 1곳이었다. 이 중 남쪽의 부교는 후드 사단의 정면이었지만 스테포드 하이츠에 배치된 150문의 북군 포로 인해 공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2곳은 곧바로 바크스데일의 사정거리에 들었다.

                

                                

 새벽에 북군 공병대가 부교를 건설했지만, 남군은 일찍 간파하였다. 강의 중간까지 건설하도록 놔 둔 바크스데일 장군은 사격을 명령했다. 북군 공병대는 도주했다. 북군이 응사하자 남군의 사격은 멈추고 다시 부교를 가설했지만 역시 남군이 공격했다. 이것이 무려 9번이나 반복되었다. 어느덧 공병 50명이 죽었다. 새벽 2시부터 부교 건설을 시작했지만 정오가 될  때까지 남군 저격수 때문에 실패하였다. 참다못해 북군 포병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스테포드 하이츠의 150문의 포는 2시간 동안 500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오후 2시경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됬으리라 생각하고 다시 부교건설 작업을 했지만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남군이 살아있었다. 마침내 번사이드가 1개 여단을 보트에 탑승시켜 강을 도하시켰고, 상륙한 북군이 남군에게 응사하였다.

  강가에서 용감하게 북군에게 응사하던 미시시피인 중에 6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 여단은 프레데릭스버그 시가로 도주하면서 북군에게 사격하였다. 연이어 북군 4개 여단이 상륙하여 시내의 남군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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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릭스버그 시가지에서 전투하는 북군


 

   부교가 완성되고 바크스데일 여단을 시가지에서 밀어내자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부교를 가설하는 데에 하루를 써버린 것이었다. 아직 잭슨의 군단이 전선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날 중에 공격이 이루어졌으면 남군 전선의 남쪽이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바크스데일 여단의 분전으로 북군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바크스데일의 미시시피 여단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복숭아 밭을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바크스데일은 전사한다.)

                   

    다음날인 12월 12일, 번사이드는 북군을 부교를 통해 상륙시켰다. 12만이 넘는 북군의 도하였기 때문에, 부대가 도하하고 전선에 배치하는 데 또 하루를 써버렸다. 아직 잭슨군단의 D.H 힐과 얼리 사단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북군은 또 기회를 놓치게 된다. 마치 안티탐 전투 전날의 맥클레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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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교를 건너 프레데릭스버그로 이동하는 북군


 

   이날 북군은 프레데릭스버그 시가를 행군하면서 숱하게 약탈하였다. 주민들이 떠난 시가지의 수많은 주택과 상점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그 동안의 패배로 인한 보복심리까지 겹쳐서, 북군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고 남은 것은 불태웠다. 뒤늦게 헌병사령관이 도착하여 이러한 약탈행위를 저지하였고, 여러명이 체포되었다.


  12일 저녁, 번사이드는 남군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웠다. 공격의 주 방향을 잭슨의 진지로 잡았다. 좌측에서 프랭클린의 군단이 주공이 되어, 잭슨의 진지를 격파하고 롱스트리트가 이를 지원나가면 섬너 군단의 1개 사단이 수월하게 메어리스하이츠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미드와 기본의 우수한 사단이 프랭클린의 공격의 선봉이 될 예정이었다.

  번사이드의 계획의 핵심은 북군 군단장 프랭클린이 잭슨의 우익을 격파하고 측면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해밀턴 크로싱이 북군의 손에 들어오면, 남군의 우익이 파괴되고 북군이 리치먼드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그리고 롱스트리트의 군단이 이동하도록 만들어서 강력한 남군 진지를 피를 흐리지 않고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프랭클린이 남군 우익에 대한 공격을 실패한다면, 남군 좌익을 공격하는 북군은 대참사가 발생할 것이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의 승패는 북군 좌익을 맡은 프랭클린의 두어깨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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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리와 잭슨은 직접 북군 진지 근처까지 내려가서 배치 상황을 정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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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07.12.30 아... 영화 [신과 영웅들]에서 북군을 저글링으로 묘사하던 그 전투로군요;;
  • 작성자부여 | 작성시간 07.12.30 영화로만 볼때는 번사이드가 완전 단세포무식으로 보이던데 그래도 나름 유능한 장군이었군요 무모한 돌벽공격도 나름 작전도 있었구요 영화에선 요새화된 돌벽으로 왜 저리 병력을 진격시키는지 참 답답했는데 전쟁은 역시 타이밍인것 같네요
  • 답댓글 작성자부여 | 작성시간 07.12.30 jager님께 하나만 어쭈어도 될까요 남군의 주력이 리가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이라고 하신걸 본적있는데 북버지니아군이라고 해도 버지니아군만 편성된건 아닌것 같은데 북버지니아군은 어떻게 편성된부대였나요?또 버지니아주군대가 남군의 주력이었나요 그렇다면 버지니아주가 남부주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주였던겁니까?
  •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2.30 남북전쟁에서 가장 참전병이 많은 주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로 알고 있습니다. 북버지니아군이라고 명명한 것은 반도전역 당시에 조셉 존스턴과 뷰리가드 등이 모여서 상의한 것으로, 최전선을 버지니아 북쪽에 두기를 희망하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주의 포스가 강한 것은 아무래도 명장들이 버지니아 출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리, 잭슨, 스튜어트, AP힐, 조셉 존스턴.. 심지어 북부의 명장 토마스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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