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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미국 남북전쟁- 게티즈버그 전투 6. 7월 3일 2부 [피켓 대공세 - 미국사의 절정]

작성자jager|작성시간08.02.10|조회수1,779 목록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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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사의 절정은 남북전쟁, 남북전쟁의 절정은 게티즈버그, 게티즈버그의 절정은 피켓 대공세

  

 

  피켓 사단장은 자신의 부대가 이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롱스트리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 부하를 전진시키겠습니다.’ 하고 나는 듯이 돌아갔다.

  여기서 공격 대형을 한번 살펴보면, 패티그루 사단과 트림블 사단은 7월 1일의 전투로 상당히 타격을 받은 상태였고, 피켓 사단은 7월 2일 저녁에 도착한 사단으로 공격의 주력은 자연스럽게 피켓 사단이 맡게 되었다. 이것이 이 마지막 대공세가 ‘피켓 대공세’라고 불린 이유이다.

 

   피켓사단은 본래 5개 여단이었지만, 롱스트리트가 남쪽 캐롤라이나 주에 가 있던 동안 5개 여단 중 2개 여단을 그 지역 사령관인 DH힐 장군이 보내지 않았다. 대신 시원치 않은 브로켄브로 여단과 데이비스 여단을 보냈는 데, 이들이 공교롭게도 패티그루 사단에 배치되었다. 즉 이날의 대공세에 북버지니아군의 정예 여단이 빠지고 그 빈자리를 변변치 않은 여단이 메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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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아미스테드 준장

 

 피켓 사단의 3개 여단은 가네트, 캠퍼, 아미스테드 여단장이 지휘했다. 3명다 우수한 여단장으로 필요한 경우 사단의 지휘까지도 능히 가능하다고 인정받는 장군들이었다. 캠퍼는 5번이나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성공한 정치인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대령으로 지휘를 시작하여 여단장까지 올라간 베테랑이었다.

 

  가네트는 과거 잭슨 장군의 밑에서 유명한 스톤웰 여단을 지휘하였는 데, 부하들이 잭슨 보다 가네트를 더 선호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퀸스타운 전투에서 잘못된 정보를 받고 공격하다가 불가피하게 후퇴하게 되었을 때, 잭슨은 비겁과 불명예를 이유로 가네트를 기소하였다. 비록 부하들의 증언이 가네트를 변호하여 재판은 가네트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잭슨은 자기 부하로 가네트를 두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사건은 가네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챈슬러슨빌에서의 잭슨의 전사는 가네트는 자신의 불명예 혐의를 완전히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앗아가 버렸다. 중세적 명예관이 강했던 당시 남군 군영에서, 이유여하를 떠나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명예로운 전사뿐이었다.

 

  아미스테드는 전쟁 전의 정규군에서 22년을 복무했던 매우 엄격한 장군이었다. 안티탐 전투 당시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헌병대를 감독하기도 했던 아미스테드는 웨스트포인트 시절 얼리의 머리를 접시로 내려쳐 유명해졌다. 정규군 시절 북군의 핸콕장군과 같이 근무를 했는 데 마치 형제처럼 친했다고 한다. 이제 두 장군은 서로 북과 남으로 갈라져서 사선에 서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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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맥군 최고의 군단장, 윈필드 핸콕 소장

 


 피켓의 사단 병력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5830명이었다. 패티그루 사단의 병력은 7월 1일 8000에 달했지만 격전 끝에 7월 3일 날은 4300명이 참가했으며, 트림블 사단은 2개 여단으로 불과 1700명이었다. 여기에 피켓 사단의 남쪽의 북군을 차단하기 위해 윌콕스 여단과 랑 여단을 투입하기로 했는 데 이들 역시 1700 정도였다. 즉 14000이 좀 넘는 정도였다.

  

  피켓사단장이 내려오고, 각 부대는 정렬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정렬이 끝나자 피켓 사단장이 진격 명령을 내린다. “저 고지를 점령하라,  오늘, 우리가 버지니아인 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각 여단장들의 진격 명령이 떨어지고, 마침내 1만 2천명의 남군이 진격을 시작한다. (윌콕스와 랑 여단은 나중에 출발한다.)

 

  남북군 모두 공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증언한다. 1만이 넘는 대군이 군기를 앞세우고 포대가 즐비한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다. 피켓 사단장은 말을 타고 이를 선도하고, 가네트와 캠퍼가 뒤를 이었다. 아미스테드는 후방에서 2여단을 보좌하였다.


 이들의 목표인 세미터리 리지를 담당한 장군은 핸콕 장군, 전날의 위기에 기민하게 반응한 이 장군은 이날도 최상의 지휘를 하였다. 좌우 측면의 북군을 서서히 전진하여 공격하는 남군 대오의 측면을 감쌌다. 전진하는 남군은 서서히 북군의 화망에 걸려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처참했던 것은 120문이 넘는 북군의 대포였다. 2시간의 준비포격 때 거의 포탄을 소진한 남군과는 달리, 북군은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고 우수한 시계를 확보하고 있었다. 남군과 북군 사이의 1마일은 전진하기에는 너무 먼거리였지만, 세미터리힐과 리틀라운드탑의 북군 포대에게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남군 정면의 세미터리 리지에서는 맥길리버 포대의 포만 39문이나 되었다. 이들은 탄종을 장거리탄에서 서서히 산탄, 이중산탄으로 바꿔가면서 남군의 대오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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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마일을 가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 20분 동안 남군은 북군의 120문의 포와 전방의 북군 8000명이 쏘는 소총탄을 견디면서 진격해야 했다. 벌판 중간을 가로지르는 애미츠버그 로드에서 많은 남군의 이탈자가 발생했다. 울타리를 넘어 더 진격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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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츠버그 로드의 울타리. 이 울타리를 넘으면서 많은 사상자와 탈주자가 발생했다.
 

  마침내 최좌익의 브로켄브로 여단이 무너졌다. 패티그루 사단의 최 좌익에서 전진하던 이 시원찮은 여단은 세미터리힐의 사격을 못 견디고 여단장과 기수가 모두 도주해 버렸다. 피켓 사단장은 즉시 전갈을 보내 롱스트리트에게 증원을 요청한다. 나머지 여단은 계속 전진한다.

  에미츠버그를 넘어, 이제 북군 보병의 라이플 사정거리에 도달하였다. 앞서 핸콕이 전진시킨 북군 부대가 측면을 위협하여, 피켓 사단의 최우익인 캠퍼 여단이 위험하였다. 캠퍼는 즉시 배후의 아미스테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아미스테드는 구보로 진격시킨다.

 이제 가네트와 캠퍼 여단이 북군 진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하지만 북군 돌담 근처에서 두 여단장은 중상을 입는다. 가네트는 말을 타고 북군 돌담을 거의 돌파하려는 순간 머리에 치명상을 입는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켰다. 캠퍼도 돌담 근처에서 북군에게 중상을 입었지만, 북군의 포로가 되기 직전에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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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트 여단장. 이 전투에서의 전사로 비로소 '비겁하다'는 불명예스런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여단장 아미스테드. 아미스테드는 모자를 군도에 꽂고 부하들을 돌아봤다. “가자, 버지니아인! 놈들에게 총알 맛을 보여주자!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면서 돌격하였다. 이때 아미스테드를 뒤따라 북군 진지까지 돌파한 부하들은 겨우 150명. 하지만 이들은 그 혹독한 상황에서도 분연히 앞으로 나아간 투사들이었다. 아미스테드를 선두로 돌격한 그들은 마침내 북군 진지를 넘어 포대 하나를 노획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순간을 흔히 피켓 대공세의 절정이라 하여 ‘High Water Mark'라고 부르며, 남군의 필사적인 돌격의 상징이자 게티즈버그 전역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혹자는 이 때 아미스테드에게 800명 정도라도 남아있었으면 세미터리 리지의 북군 진지를 돌파해버리고 증원군이 올 때까지 (만약 온다면)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 완벽한 살상공간에서 이 이상의 병력이 쫒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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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스테드 여단장의 쿠싱포대 노획. 흔히 피켓 대공세의 절정 (High Water Mark)라고 불린다.

 

 

 아미스테드의 용감한 부하들이 북군 진지에 머문 시간은 불과 10여분. 적의 포대를 돌리려는 아미스테드는 결국 3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10분 뒤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안 부하들은 후퇴하고 만다. 일부 병사는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 사격을 하는 놀라운 투혼을 보인다.

 

  아미스테드는 적의 포대 옆에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서서히 의식이 흐려가고 있을 때, 북군 군의관이 달려왔다. “나는 핸콕 장군과 무척 친한 사이다. 지금 장군님을 보고 싶은 데, 어디에 있나?”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미스테드가 중상을 입은 것과 거의 동시에 핸콕도 남군의 사격에 중상을 입었다. 핸콕은 중상을 입고도 전황이 확실해 질 때까지 후송을 거절했다. 그 소식을 알자 “핸콕에게 이 아미스테드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주게.”라고 말한다. 아미스테드는 조국을 등진 사실보다 친구를 저버린 것이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패티그루와 트림블 사단은 피켓 사단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서 더 멀리 있는, 더욱 높은 지역의 북군 진지를 향해 돌격해야 했다. 당연히 처참한 피해를 입고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놀라운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이 공세에서 가장 멀리까지 돌파한 부대가 패티그루 사단의 데이비스 여단에서 나왔다. 하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이 물러나고 만다. 패티그루 사단장은 팔에 부상을 입었고, 트림블 사단장은 발에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다. 트림블 사단장은 "오늘 나의 영예로운 부대가 점령하지 못한 진지는 누구도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출발한 윌콕스와 랑 여단의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눈송이가 난로에 녹듯이, 북군의 화망에 녹아버렸다. 다만 앞서 분투한 피켓사단의 생존자들이 후퇴할 수 있게 북군의 주의를 끌어준 것이 그들이 한 용감한 공격의 유일한 의미였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리에게 있어 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이 공세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7678명. 총 공격자 중 55퍼센트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장군들의 피해는 더욱 컸다. 3명의 사단장 중 2명의 중상. 11명의 여단장 중 3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했다. 피켓 사단에 15명의 연대 장 중 6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이 엄청난 참극에 공격 전에 그토록 흥분했던 피켓 사단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거의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통곡을 하면서, 죽은 부하들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어떤 장교가 생존자들을 정렬하여 북군의 역습에 대비하려고 하자, 피켓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숙영지까지 후퇴하라고 한다. 이로써 공격했던 북군 전방에 위치한 남군은 사라지게 되고, 공간이 발생한다.

 

  이 때 피켓은 리장군과 만났는 데, 부대를 정비하여 역습에 대비하라는 리장군에 대한 피켓의 대답은 너무도 유명하다.

 

    "장군님, 저는 이제 사단이 없습니다. 가네트도 죽고, 아미스테드도 죽고, 켐퍼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북군이 역습할 지도 모르는 위급 상황에서, 롱스트리트 군단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전방의 포진지로 달려간다. 북군의 역습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포대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스스로 앞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북군은 공격하지 않는다. 당시 총사령관인 미드는 상황 판단이 너무 늦어 남군의 공격이 격퇴된 것을 늦게 알게 된 데다가, 예비 공격을 할 5군단과 6군단이 너무 멀리 있거나 분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군의 130문이 넘는 포가 너무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공격하면 똑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포대에 탄약이 거의 떨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군단장인 힐과 롱스트리트 그리고 사단장인 피켓이 처참한 결과에 질려 넋을 잃고 있을 때, 총사령관인 리가 정면에 나선다. 이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알리면서,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생존자들을 다독여서 북군의 역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영국군 관전장교인 프리멘틀은 ‘그 모습이 너무도 장엄해서,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생존자들은 이 처참한 상황에서도 리 장군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오늘의 일은 저 영감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졌지만 장군님은 언젠간 우리를 이끌고 워싱턴으로 진격하실 것이다.” 한 중상을 입은 생존자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오다가 리 장군이 있는 것을 목격한다. “장군님, 중상입니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손을 잡아 볼 수 있을까요?” 리 장군은 그 병사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내가 죽은 뒤 저 영감을 부탁하네.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주변의 동료들에게 그 병사가 한 말이었다.

 

   또한 리장군은 중상을 입은 켐퍼 장군이 들것에 실려 오는 것을 보았다. "장군, 좀 어떤가?" 켐퍼가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하였다. "다들 치명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럴리 없어, 그렇지 않을거야."  리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재차 물었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나?" 

 

   이 떄 켐퍼의 대답은, 이 돌격에 참여한 모든 대원들을 위한 리장군의 최소한의 의무였다.

 

    "오늘, 제 부하들이 어떻게 싸웠는가를 기억해주십시요 (Do full justice to my man)."


 

  리는 이 패배의 결과가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알고, 이를 부하들에게 상기시켰다. 윌콕스 여단장이 울면서 자신의 여단이 파괴되었음을 알리자 “울지마시오, 장군. 이 패배는 모두 나의 책임이고 여기서 패배한 것은 나요. 당신은 이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도와주시오.”라고 하였다. 리는 그 당시는 물론, 전후에도 게티즈버그의 책임이 자신에 있으며 부하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흔히 피켓 대공세를 남군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한다. 즉 비할바 없는 용기, 서전의 승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최종적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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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 대공세가 실패한 후의 리 장군. 리는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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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08.02.11 그런듯...
  • 작성자Fallen Templar | 작성시간 08.02.10 난 이래서 남군을 좋아한다는....
  • 작성자Balian de Ibelin | 작성시간 08.02.12 가네트준장같은 경우는 상당히 불행한 경우인듯합니다...개인적으로는 가네트를 높게 평가하고 잭슨의 처사가 너무 심했단 생각도 드는군요(잭슨과 가네트의 불화는 ㅡㅡ;;) 제가 남북전쟁사에서 헤어날수 없는 가장큰 이유는 바로 지도층의 저 희생정신과 의무이행이 아닌가 합니다. 무수히 많은 장군들과 고위장교들이 병사들과 함께 사선에 서서 전투를 치르다 장렬히 전사하는것...정말 많은것을 느끼게 해주는것 같습니다(물론 전술자체와 그당시 전쟁양상에 의한것이기도 하겠지만 이들의 희생을 깎아내릴순 없을겁니다)
  • 작성자truebard | 작성시간 08.02.15 남북전쟁 최고의 클라이막스가 지나갔군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09.19 정말 피켓의 대공세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엄청난 피해 속에서도 돌격하더군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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