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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인들은
자신의 노예들이
우리의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다.
자유로운 노동에는 희망이 있다.
완전한 노예제엔 희망이 없다.
한번은
루이빌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지루한 증기선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배엔 서로 쇠고랑으로 묶인
십여명의 노예가 타고 있었다.
그 광경은
날 계속해서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든다. “
1861년,
일리노이주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여정중 에서.
에이브래햄 링컨
(16대 미합중국 대통령 당선자)
-출처: 다큐멘터리 ‘링컨의 딜레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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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노스아스터 작성시간 22.02.20 노예의 노동효율성은 고용된 노동자의 노동효율성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떨어지죠.
농경지는 자영농=자작농한테 분배하는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고요.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작성시간 22.02.20 이 사람이 대단한게 자기의 공약을 실천하려면 당시 국론이 극도로 분열된 분위기상
전쟁이든 뭐든 큰 일이 터지는 걸 감수해야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걸 밀어붙였고,
거기다 끝까지 실천을 해냈다는 것 같죠
물론 남북전쟁 발발 당시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남부에 쉽게 붙어버릴 줄 예상 못했으니
그 전만 해도 남부연합이 모든 면에서 달리니 전쟁 걸어오더라도 연방군이 비교적 손쉽게 물리칠 거라는 인식도 있었던듯 합니다만.
19세기 후반에는 링컨과 그의 유지를 이은 뒤의 대통령 그랜트 말고는 그 어떤 정치인도 굳이 흑인의 권리 향상에 진정성을 가지려 하진 않앗던 것 같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노예제 폐지를 굳이 밀어붙이지 말고 남부와 적당히 타협하자는 스탠스였어서
남북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많은 인명피해에 지친 여론도 그쪽으로 많이 기울어서
링컨의 재선도 위험했을 정도니까 리스크가 큰 도박이었던 것 같음요.
만약 그가 전쟁을 1865년 내에 끝내지 못하고 미얀마처럼 양쪽 모두 결정적 우위를 취하지 못한채 고착화되거나 했다면 지금의 미국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타협하고 변화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면 현재는 멕시코 같은 나라가 되엇을지도... -
답댓글 작성자young026 작성시간 22.02.20 링컨이 분열을 무릅쓰고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인 건 아닙니다. 물론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최우선은 연방 유지였죠. 노예 해방 선언도 전쟁 3년차에 나온 거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