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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럽]영국 VS 줄루 전쟁에 대한 잘못된 전설들

작성자왕마귀|작성시간06.06.11|조회수2,695 목록 댓글 15



역사와 전설은 어떤관계가 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은 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수십년의 기간을 거쳐 힘들게 축적한 증거들을 외면한채 피라미드는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엉터리 주장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왜냐하면, 전설이란 복잡한 과학적 이론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호기심을 이끄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설은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현 시대의 사람들에게 왜곡된 형태로 전달하기 십상이다.





영국-줄루 전쟁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 전쟁은 민간전승으로 전달돼서 남아프리카와 세계를 걸쳐 특히 영국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시대의 관점으로 상징화된 날조된 전설을 만들어냈다 -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의 영웅들이 넒게 펼쳐진 제국의 국경선을 수호한다는 식의 이야기들. 이런 관점들의 한계는 이미 명확하게 밝혀졌다. - 1879년의 줄루란드에서 영국군은 침략자라는 걸 기억하라 - 하지만 이런 제국주의적 관점들은 영국-줄루 전쟁에 관련된 전설들이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지난 120년을 통해 생성된 이 전설들은 특히 영국군의 불패 전설을 변명하고 수호하기 위한 의식적, 무의식적인 도구로서 사용되어 왔다. 물론, 영화 또한 전쟁에 대한 민간전승들을 다시 재현하고 더 많은 현대의 대중들에게 새로운 형태로 서비스하고 있다. - 이런 과정을 거쳐, 절반의 진실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고, 새로운 전설들을 창조하기도 했다.


*** 이산들와나(Isandlwana)의 탄약 상자 ***





위의 사진: 이산들와나에서 사용되던 타입의 실탄상자.


이산들와나를 수비하던 영국군이 전멸하게 된 원인으로 방어를 담당하던 병력 -특히 24연대 - 에 실탄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곤한다.


특히 이 신화의 변형된 형태들 중에서 가장 흔한 것중 하나는 문서로 된 명령사항을 받지못한 병참하사관의 탄약불출 거부와 탄약상자를 개봉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점 - 아마도 구리 띠로 단단히 묶여있엇을 것이다. - 심지어 스크루 드라이버가 없었기 때문에 상자를 열수없었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사실, 이산들와나 전투를 분석한 어떤 주의깊은 연구에서도 위의 주장들을 뒷받침할수 있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몇몇 식민지 부대 - 던포드 대령의 독자적인 명령을 받던 부대들 - 은 탄약을 너무 빨리 소비하는 바람에 지속적인 사격에 어려움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탄약부족으로 인해 24연대의 지휘관들이 전술전 결정을 내리는데 지장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크게 보려면 그림을 클릭 ***


이산들와나의 캠프에는 엄청난 양의 탼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 아마도 40만발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챔스포드 장군은 정찰을 위해 24연대의 2대대를 이끌고 나갔지만, 자신들이 지녀야 할 여분의 탄약은 캠프에 놔두고 나갔으며, 만약 자신의 요청이 있을시 즉시 공급될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떠났다. 24연대의 1대대가 캠프를 수비했으며, 1대대의 탄약도 캠프에 보관해두고 있는 상태였다.


탄약은 튼튼한 나무판자에 테두리에는 양철이 입혀져 있고,2개의 구리띠로 묶여있는 마크 V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탄약상자 들은 전장에서의 거친 취급을 견뎌낼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 상자를 떨어트릴 때마다 탄약이 밖으로 터져나오는 일이 없도록 - 하지만 탄약을 꺼낼수 있도록 상자 중심부위에는 옆으로 열 수 있는 나무 덮개가 달려있었다.


이 덮개는 나사를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도 열수있었고, 비상시에는 덮개의 가장자리를 강하게 후려치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도 개봉할수 있엇다. 이런 방식을 쓰면 나사 주변의 나무판자들이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전투가 시작되자 지휘관 중 한명이 몇몇 병사들을 불러모아 전투에 참가시키는 대신, 사격 대열에 탄약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겼다. -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전투방식이었다.


얼마 후, 겁에 질린 젊은 장교 한명이 24연대 2대대에게 배당된 탄약을 요구했으나, 챔스포드 장군에게서 부여받은 자신의 임무를 확실히 명심하고 있는 병참하사관의 항의를 받고 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에 캠프는 아직 위험에 빠지지 않은 상태였고 24연대 1대대분의 탄약은 방어병력 전원에게 골고루 공급되고 있었다. 얼마 후,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24연대 2대대 분의 탄약 또한 불출됬으며, 그와 같은 시기에 - 전투의 클라이막스 시기 - 24중대는 전방의 위치를 포기한 채, 뒤로 후퇴하면서 여전히 엄청난 사격공세를 퍼부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 당시 전투에 참전한 줄루족들도 포함해서 - 은 이 시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줄루족이 영국군의 대열을 파고든후, 캠프를 휩쓸고 다닐 때, 영국군 병사들에게는 탄약을 새로 장전할 시간이 전혀없었다. 24연대의 예하부대들 - 그리고 타부대 소속들도 - 줄루족이 거리를 좁혀드는 와중에도 뒤로 계속 후퇴하면서 몸에 지닌 실탄을 계속 발사했다.






그리고, 전투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모든 문헌에는 24연대가 "라이플의 실탄이 바닥난 것을 알았을 때, 당혹감에 휩싸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 크게 보려면 그림을 클릭 ***


물론, 현대적이며 산업화, 공업화된 군대가 어리석은 실수 때문에 패배했다는 주장이 원시적이며 창으로 무장한 비정규적인 군대, 게다가 검은 피부의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에게 참패했다는 정설보다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들은 인종차별적이며 기술적 우월감과 전술적 현실에 대한 그릇된 추측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이산들와나 전투의 승리는 줄루 인들의 전술적 기량,규율,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용기에 의거해서 성취한 결과일 뿐이다. 이산들와나에서의 영국군대의 패배를 변명할 구실을 찾는 일은 그만두고 대신 그 전투를 줄루족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줄루족은 로크스 드리프트(Rorke's Drift)전투에서 영국군의 라이플을 사용했다.***





위의 사진: 승리를 거둔 줄루전사가 영국군 시신에서 노획한 라이플을 치켜들고 있다.


영화 "줄루(zulu)" 중의 한 장면






줄루족이 이산들와나 전투에서의 승리직후, 캠프에서 수백정의 영국제 마르티니-헨리(Martini-Henry)라이플과 수천발의 실탄을 노획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있다. 이산들와나 전투 직후, 바로 벌어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에서 줄루족은 노획한 라이플을 이용해 영국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영화 "줄루"에서 마이클 케인은 "입맛이 쓰군", '우리의 빌어먹을 라이플이라니!"라고 말한다.


이산들와나에서 승리를 거둔 줄루군대가 캠프에서 값나가는 모든 물건을 약탈한 것은 사실이며, 특히 약탈품 중에는 현대식 총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줄루족이 노획한 영국제 라이플은 전쟁 후반부에 벌어진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 특히 캄불라 언덕 전투에서 (1879년 3월 29일)






그러나, 로크스 드리프트를 공격했던 줄루군대는 이산들와나 전투에 참가하자 않은 예비병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마르티니-헨리 라이플을 사용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이 예비병력들은 이산들와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크스 드리프트로 진격하기 전에 어떤 라이플도 노획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창으로만 무장한 "전사들의 국가"라는 강력한-또한 일상적인- 줄루족의 이미지는 이 경우에는 보다 복잡한 진실이었다. 줄루군대는 영국-줄루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수천정의 총기를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총기는 백인 무역업자들에게 구입한 것들이었다.






이 총기들은 대개 20년에서 30년 정도 지난 것이었다-유럽군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페기처분된 것들- 그리고 수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로크스 드리프트를 공격한 줄루족이 마르티니-헨리 라이플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영국군 수비대에게 보다 큰 피해를 입힐수 있었을 것이다, 이 라이플은 그들이 예전에 사용하던 무기보다 더 강력하고 정확했으므로.


*** 줄루족은 로크스 드리프트(Rorke's Drift)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경의를 표했다. ***


이 이야기는 영화 "줄루(Zulu)" 속에서 위대한 시네마적 장면으로 나타난다. , 낮부터 밤까지 로크스 드리프트의 수비병력을 압도하는 전투를 벌이던 패배한 줄루군대가 진지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의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낸 후, 자신들과 맞서싸우던 적들의 용기를 칭송하는 우렁찬 노래를 부른 후,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장면.






아니,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크스 드리프트에서 싸운 양측은 체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싸웠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방어군은 초췌해지고,멍들고,피투성이 였으며, 방어군의 지휘관 차드 중위는 만약 한번더 줄루족이 공격해온다면 막아낼수 있을지의 여부가 의문이었다. 줄루족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여서 후퇴할 당시에도 방패를 들고가기가 힘들어서,땅에다 질질끌고 가야했다. 경의를 보냈다는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1월 23일, 전투가 끝날무렵, 후위에 있던 줄루군대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이다. 그들은 선교회 건물 맞은 편에 있는 콰싱퀸디 언덕의 경사면에 자리잡은 후 침묵을 지킨 채 수비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들은 일어나서 영국군의 시야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사실, 줄루족의 후위부대는 강을 건너 공격을 가해볼 의도였으나 그들이 자리잡은 위치의 반대방향에서 챔스포드 장군이 이산들와나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후 철수해버린 것이다.


전쟁의 초반기에 - 이산들와나, 로크스 드리프트, 은예자네 - 영국군과 줄루족은 서로의 전투 능력을 접하고 새삼스러운 존경심을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의 마무리는 로맨틱한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전투가 끝난 후, 수비대와 구원부대는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줄루족을 발견하는 즉시 총으로 쏘거나 대검으로 찔러 죽여버렸다.





"줄루족의 경례", 영화 "줄루"중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社,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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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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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06.06.12 으흐흐 우라~는요 . . . 대충 쏴재끼는 아군의 지원포격을 받으시면서 모신나강에 총검꽂고 동무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세운체 MG42기관총 내걸린 독일군 진지로 자박자박 걸어가셔야죠 (무장공비 : "콤므린 한교!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Victory or Death!"
  • 작성자Fain | 작성시간 06.06.11 '야만의역사' 읽어보시면 이런거 제대로 나옵니다 이것도 나온걸로 기억하는데
  • 답댓글 작성자왕마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6.12 그 책에 이산들와나 전투에 대한 내용은 안 나옵니다.
  • 작성자왕마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6.12 1898년 수단의 옴두르만에서 영국군과 마흐디 군대간에 벌어진 전투 당시 마흐디측은 1만명이 전사하고, 1만 5천명이 부상당했으며, 5천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반해, 영국군은 48명이 전사하고, 382명이 부상당하는데 그친 사례도 있지요.
  • 작성자왕마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6.12 마흐디 병사들 중 영국군 대열 앞 2백미터까지 접근해서 죽은 병사는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맥심 기관총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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