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댓글

뒤로

로마 군제 개혁 역사 (후반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시간07.11.30| 조회수1991| 댓글 62

댓글 리스트

  • 작성자 지고의황제 작성시간07.11.30 유스티니아누스2세가 썩기한건 처음 알았네요. 이사우리아족과 아르메니아계가 왜케 왕조를 잡았을까 했는데 썩여서 중앙부까지 갔군요 흠흠 ㅇㅇ
  • 작성자 투창병 작성시간07.11.30 만지케르티에서 비잔틴이 이겼다면?
  • 답댓글 작성자 모에시아 총독 작성시간07.11.30 그래도 별로 달라질 건 없지 않을까요? 만지케르트의 패배는 군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문제들이 터진 것이니까요. 잘해봐야 만지케르트의 악몽을 몇년 더 미룰 수 있을 뿐, 쌓여왔던 모순점은 언젠가 폭발했을 거라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농민반란 작성시간07.11.30 모에시아 총독님의 말에 동감입니다. 일단 '비잔틴이 만지케르트에서 이긴다'라는 명제가 충족되려면 1.비잔틴 족벌귀족들이 황제폐하만세(모에)를 외치며 셀주크군을 향해 반자이도쓰게키 해야하는데 2. 이게 이뤄지려면 바실2세처럼 황제가 몸소 족벌귀족들을 갈구거나 3. 알렉시오스처럼 황제페하의 처갓집 빽이 든든해야 하는데 로마누스에겐 어느것도 없었기 때문이지요'ㅁ'
  • 답댓글 작성자 농민반란 작성시간07.11.30 여기서 족벌귀족들이 For the Emperor를 외치게는 못하더라도 싸그리 근절(죽여!찟어!태워!의 무한반복)하려면 황제권이 강해야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미카일-조에-콘스탄티누스 이 The십장생 삼위일체가 제국군을 작살내버렸기 때문에 불가능하죠. 거기다가 국가특성상 겨울철 인플루엔자처럼 증식하는 교회-수도원세력이 제국재정을 냠냠하는 문제까지 덤으로 얹혀있으니...뭐, 그저 답이 없죠. 제국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쓰거나, 아님 캐리어가야지요'ㅁ'
  • 답댓글 작성자 농민반란 작성시간07.11.30 아, 만약 바실2세가 좀더 으쌰으쌰붕가붕가에 관심을 가졌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군요.(무념)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1.30 워낙 뿌리깊게 박혀있던 문제라서요. 바실레이오스 2세가 애를 낳아도 집안 유전을 살펴보건대 보건대 대개 학자풍+놀자풍이고 바실레이오스1,2가 변종이지 말입니다(그나마 미카일 3세로부터 내려왔으면 바실레이오스 2세만 변종이로군요;;) 일단 테마제도의 붕괴와 권문세족의 확장은 비잔티움의 근간 체제에 관련된 모순인데다가 워낙 뿌리 깊은 문제라, 황제 몇 명이 힘쓴다고 간단히 해결될 문제도 아니긴 합니다만...그래도 1025~71년까지 황제들이 워낙 막장테크를 타는 바람에 만지케르트 전투가 훨씬 뼈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농민반란 작성시간07.11.30 그러고보니 바실레오스-바실리우스-바실레이오스 엄청헷갈리지 말입니다. 머리는 바실레이오스하는데 귀차니즘3skill master손가락은 그냥 바실로 쳐버리게되지 말입니다.(묻힌다)
  • 답댓글 작성자 라인하르트 작성시간07.12.01 농민반란// 그냥 아예 러시아 식으로 바실리(...) /// 그리고 만지케르트 이후엔 알렉시우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제위에 올랐음에도 샌드위치 신세인데다가 병력도 변변치 않아서 결국 베네토 뱃놈들에게 달마티야 공작위를 선물하면서 기스칼을 막아줄 것을 청하게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카이사르 마그누스 작성시간07.12.02 비잔틴이 이겼다 하더라도 그동안의 문과무의 내부 분열 당시의 해외정세 및 군편제 제도와 연달아 강림하시는 돌+아이 황제들과 그뒤에 이을 십자군으로 인해 결국엔.. 파멸로...
  • 작성자 Floyd 작성시간07.12.01 패치패치패치 시스템 다운이라니 님다 바이러스 먹은 Windows NT 4.0 보는 것 같군요. (orz)
  • 작성자 바르티겐 작성시간07.12.01 하지만 저 테마제도의 근간이 농민인디.. 641-780년 동안 습격해오는 아랍애들을 테마에서 자생적으로 처리해야하니.. 농민들 부담이 심해서.. 니케포루스 패치가 나온거 같습니다.(하지만 마활님 말씀처럼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_-;;)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1 그게 문제가 심각해 지는건 오히려 9c 중반 이후, 즉 비잔티움이 공세로 넘어가면서부터라서요. 물론 그 전부터 지주들이 자영농의 토지를 빼앗는 경향은 있었겠지만, 본격적으로 나타난건 비잔티움의 공세시기에 두드러집니다. 개인적으론 스트라테고스가 민정까지 총괄하게 되면서 거대 귀족 가문들과의 커넥션 및 연계가 얽혀들어가고, 국경 지방에서 자체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적과 싸우는 호족의 세력이 커가면서 둔전병의 토지를 빼앗는 일이 점차 늘어난게 아닌거 싶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1 니케포로스 2세는 애초에 자기 자신이 대호족 출신인데다가, 시대가 방어적 시대가 아니라 공세적 시대이다보니, 기본적으로 토지에 매인 테마 둔전병들에게 시큰둥했죠. 한철 싸우다가 농사지으러 돌아가는 테마 병사들의 권익을 보장하느니, 훨씬 더 원정에 동원하기 쉽고 장기간 운영할 수 있는 타그마타나 용병, 권문 세족이나 소지주 출신의 병사들을 육성하는게 낫거든요. 즉, 공세적으로 특화된 것이 니케포로스 패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수비적으로 워낙 구멍을 뚫어놔서 결국엔 무너지는 원인이 되긴 합니다만...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2 그 시기에 비잔티움의 기본 전술은 search&destroy가 아니라 shadow tactics입니다. 8c 중반까지 비잔티움의 기본 전략은 테마의 둔전병들을 긁어모아서 전면전으로 나서기보다는 요새수비, 후방 기습, 보급로 끊기, 적 영토 공격 등이었으며 테마는 다수의 병력 및 토착 방어 체계에서 shadow tactics를 수행할 때는 소수의 상비 테마병들만으론 수행할 수 없는 다양한 전략을 담당합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달아나는것은 어느 군대든 마찬가지고(아모리움이 점령당할 때 테마의 병사들이 달아난건, 전황 자체는 유리했는데 '황제가 죽었다'라는 거짓 소문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2 굳이 테마 출신 병사들이 전면전에서 활약한 전투로는 863년 Poson 전투, 파울라키안들과의 전투에서는 테마의 병사들이 선두에 서서 공세를 담당, 적을 구축해낸 사례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테마 병사들이 담당하는 shadow tactics에서 일반 토착병사들의 역할까지도 평가절하하는건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3 물론 공세적 입장에 있을 때 용병 부대의 확대가 둔전병의 활용보다 나았으리라는데에는 동의합니다만, 그것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병력 통제, 국고 고갈은 물론 제국의 내적 방어력을 심각하게 갉아먹습니다. 테마의 중요성 감소는 둔전병에 기초한 지역 방어시스템, 특히 그림자 전술의 폐지로 이어졌고, 이는 지역 방어력에 심각한 손실을 끼쳤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용병들이 통제에 불응해 폭동을 일으킨 것은 물론, 단 한 번의 전투로 제국의 동방 방어선이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린 상황은 용병 부대가 주력을 차지한 이후 명암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3 만지케르트 전투 자체도 심각한 패배인건 맞습니다만, 제국은 그에 못지 않은 패배를 수차례 당했음에도 방어선을 유지하고, 원래 방어선 밖으로 적을 밀어내는데는 성공해 왔습니다. 이에 기본이 되는 병력 수급도 문제가 될 뿐더러, 용병으로 들어온 노르만인, 페체네그인들은 통제도 어려울뿐더러 제국 내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목적도 컸고, 이미 바실레이오스 2세의 치하에서도 수 차례 반란도 일으켰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국 내 상비군과 별개로 용병 동원을 긍정적으로 보기까지는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제국이 영토 안에 외국인을 정착시키고 이들을 잘게 쪼개 활용한 사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테마가 붕괴하는 1040년을 넘어가면서 국경 연대의 절반을 차지한 노르만인들의 사례를 그냥 넘기기에는 문제가 큽니다. 이탈리아에서 노르만 용병들의 반란 및 루셀 드 바이욀처럼 토지와 독립적 왕국을 노리는 야심가에게까지 제국 방위력이 맡겨졌습니다. 테마에 의한 반란과 폭동은 독립적인 목표 혹은, 상시적으로 위험이 존재했었다기 보다는 지휘관의 정치적 야심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 8c말~9c 이후에 테마의 통제는 안정궤도에 올라섭니다.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카카오 이모티콘
사용할 수 있는 카페앱에서
댓글을 작성하시겠습니까?
이동시 작성중인 내용은 유지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