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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제 개혁 역사 (후반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시간07.11.30| 조회수1991| 댓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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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용병 문제는 개개인이 가진 충성심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자기들끼리 단결하고, 특히 자기 지휘관만 추종한다는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노르만같은 독자적 왕국을 바라는 지휘관과 결합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스트라테고스들도 그런 사례가 많았지만 타그마타 창설, 테마의 소규모 분할 이후 스트라테고스 자체 역량에 의한 반란이나 적전배신은 상당히 줄어들게 됩니다. 안정적인 병력 수급 및 토지에 대한 연대를 생각해 봤을 때, 전투 뿐만 아니라 전략, 혹은 대전략 단위의 불리함이 있는 경우라도 테마의 병사들은 용병들보다는 쉽게 조직되고, 신뢰할만한 군사들이라고 보여집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에도 테마의 약화는 제국 동방 방위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험지는 있지만 지킬 병사들이 없었다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르메니콘 테마는 1048년까지 투르크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만, 테마 해산 후, 1057년의 투르크 공세에 사순이 함락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자체적인 군사력 붕괴를 떠나 1059~67년까지 투르크군은 아르메니아 테마를 '통과'해서 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자 전술에서도 적군이 테마를 가로지르는 사태는 있었지만, 그 경우 테마는 후위 공격, 보급로 차단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59~67년까지 아르메니아 테마는 그 역할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만지케르트 이후, 알렉세이오스가 황위에 올랐을 때도 제국은 "군대"가 없어서 기스카르와 페체네그의 공세에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크룸, 시메온의 사례와 비교해 보았을 때 제국은 그와 비슷하거나 더 큰 패배를 수 차례 당했음에도 다수의 군대를 동원하며 방어선을 유지(일시적으로 밀려날지라도)하고 다시 병력 수급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됩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뒤집는다면, 알렉세이오스는 십자군이 올 때까지도(이를 당시 비잔티움 상황에 비춰보면 소수라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교회 금은을 녹이면서 용병들을 고용했는데도 그 군사력을 제대로 복구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즉, 순수 둔전병을 줄이더라도 상비군을 늘리거나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어느 단계'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1040년 이후처럼 비중이 지나치게 커진다거나, 반대로 테마 병사들의 권익을 상당히 깎아먹으면서까지 이루어졌다면 제국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문제는 9~10c의 반란이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에 의한 구조적인 반란이냐, 아니면 정치적인 문제냐에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요안네스 치미스케스는 스트라테고스라기보다는 한 명의 정략가로서 벌인 암살이고, 바르다스들의 반란은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와는 통제 문제와는 별개로, 그동안 쌓여온 권귀가문의 세력이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논의의 중점 중 하나인 테마와 스트라테고스에 대한 통제vs용병의 통제라는 점이란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용병의 통제가 둔전병의 통제보다 어렵고 심각하다는 근거를 뒤집기엔 부족하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노르만인들처럼 아예 작정하고 독립된 왕국을 요구하는 사례라면 더더욱이요.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물론 저는 위 리플에도 썼듯, [어느 시점]까지 용병과 상비군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시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 [시점]은 [둔전병의 권익이 명확히 침해되는 시점]까지겠죠. 니케포로스의 함단조 원정 당시, 상당수의 용병은 고용되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군대는 상비군과 아르메니아, 타르수스 일대의 테마의 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문제시 하는 것은, 이것이 뒤바뀌며 테마가 본격적으로 해체되는 1040년 이후의 상황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다양한 기마궁술을 활용하는 군대는 까다롭기는 하지만, 제국군은 수 차례 전투 경험이 있고 요안네스 치미스케스가 스뱌토슬라브와 싸울 때에도 스뱌토슬라브의 군대에는 상당수의 페체네그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제국군은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합니다. 마찬가지로 테마가 본격적으로 유지되는 1048년까지, 아르메니아의 테마 군대는 투르크군을 저지하고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있었구요. 이 상황이 뒤바뀌는 것은 아르메니아 테마를 비롯한 군대 5만명의 해산 이후로 기마궁술이라는 전투법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요새선 확보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문제는 여기서 나오는 아르메니아의 사례, 즉 험준한 지형에서 둔전병이 효과적으로 투르크의 공세를 저지하던 경우와, 1050년까지를 기점으로 둔전병이 해산된 이후 아르메니아 일대와 유프라테스강 상류를 향한 투르크인의 공세에 제국이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것은 둔전병 해체와 동방 방어선 취약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봅니다. 부분적으로 중요 요새를 넘겨주더라도 다른 요새선을 지킬만한 다수의 군대가 소실된 상황에서는 적의 공세에 훨씬 심각하게 노출될 수 밖에 없지요. 식견이 짧아, 71년 이후의 장군들이 어떤 요새를 넘겨주었는지 목록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소아시아 전역의 요새선을 넘겨주지는 않았으리라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사키오스 1세의 시대에는 군대에서 테마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용병, 특히 노르만인과 프랑크인의 비중이 늘어나던 시기입니다. 이 때 페체네그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은,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테마와 종심방어 전술의 효용을 보여주는 반증으로 보입니다. 숙련된 병사 역시 테마의 군대로 조정할 수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테오필로스 개혁'과 레오 6세의 재조직 여기서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적 개혁을 통해 테마 군대의 효율성과 전투력이 증대되고 이는 863년 poson 전투, 파울라키안과의 전쟁, 그리고 니케포로스의 확장에도 상당수의 테마병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디라키온 전투의 패배도, 바랑기안을 제외하고는 노르만의 기병 돌격을 저지할만한 숙련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데 큰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존의 비잔티움 군대 체제대로라면 2선의 바랑기안 앞에 10c 이후 상당히 정예화된 보병대가 배치되어 있었을테니까요(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해산된 아르메니아 테마, 혹은 상비군들이었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제국은 '공세적인' 역할은 상실합니다. 훨씬 심각했던 불가르피곤이나 앙기알루스 전투 이후에도 제국은 어느 정도 공세를 펼칠 여력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노르만인들의 경우, 애초에 이들의 목적은 '땅'입니다. 예컨대 루셀 드 바이욀 이외에 Herve'라는 노르만 지도자가 이미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었고, 루셀 드 바이욀에 앞서 로버트 크리스핀 역시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려다 독살당합니다. 1017년에 일어난 롬바르드인과 노르만인의 연합,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원정시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 역시 "독자적인 땅"을 바라는 노르만인의 목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봅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콤네노스 왕조 이전의 내분은 지향점이 '황좌'라는 점에서 '아예 따로 살려는' 것과는 군대 통제에서 차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4 용병들이 방어시 가장 큰 문제는, 비용 문제로 국경 전체를 커버할만큼 다수의 군대를 운영하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전성기의 로마처럼 할 능력이 없는 바에야, 그 양상은 기본적으로 '기동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요새선과 같은 일정한 방어진을 지키는 때에는 다수의 병력을 싼 값으로, 그리고 지형이 익숙한 작전, 그리고 각 지역별로 종심방어를 제공해주는 테마가 용병보다 나으리라 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우선 제국군이 기마궁사에 대해 무기력했다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초기 페체네그인과 루스인 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왔을 때 바르다스 스클레로스는 훨씬 적은 병력으로 이들을 격퇴하였고(기록상에도 페체네그인들의 '무서운' 기마궁술 때문에 제국군이 500명의 전사자를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Haldon이 쓴 가상적인 이야기에서는 이 전투에서 테마 부대가 참가하여 중요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어떤 테마가 어떤식으로 참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바르인, 페르시아는 물론, 비잔티움 자신들도 적지 않은 수의 기마궁사대를 운영했습니다. 물론 방식은 투르크식과는 좀 다릅니다만.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페체네그는 물론, 아랍인 기병대에 대해서도 제국군의 기본 전술은 '약탈'은 허용하지만 이를 '격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기동군 비중이 증가하는 니케포로스가 쓴 프리아켑타 밀리타리아에도 아랍인의 기동성을 직접 따라잡을 수는 없으니 돌아가는 적을 기습하는 방식이었고, 이는 전부터 내려온 shadow tactics의 기본 전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페체네그인들이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서 약탈을 하더라도, 제국의 기본적인 지배권을 흔들지 못한 이상, 유목민 군대에 대한 무기력을 의미하기는 과장된 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마찬가지로, 투르크인에 대해서 테마 병사들이 '쓸모없'으며 '기동군'이 더 나으리라 말씀 하셨지만 저는 이미 그 전에 반례를 제시했습니다. 즉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1048년까지 테마가 유지되는 시점까지 비잔티움 군대는 성공적으로 투르크인을 격퇴하고 있었고, 콤네노스님 말씀대로 이 군대가 '해체'된 이후 역으로 아르메니아의 방어진이 격파당함은 물론, 아르메니아를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 상류, 바스푸르칸 일대가 투르크인에게 점령당한 사례 말입니다. 당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테마의 해체와 용병의 확대는 제국 동방 방어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아니, 당대인들도 이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습니다. John Skylitzes, Michael Attaliates, Cecaumenos를 비롯한 11c 동시대의 기록들은 대개 동방 테마병 해산을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전체를 넘겨주는 요새선이 투르크의 손에 들어간 것이 아닌 이상에야, 도시들이 그렇게 빨리 '패닉에 빠진' 것은 지켜주는 '군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전 둔전병제가 유지되는 동안 제국 방어는 깊은 종심방어 형태를 띄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요새가 넘어갔다고 소아시아 전체가 붕괴되는 것은 종심방어체제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전히 상당수의 요새는 남아 있었을텐데, 그렇다면 부족한 것은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병사입니다. 그 예시가 계속 들고 있는 동방테마 해산 후의 사례라고밖에 할 수 없겠군요. 적어도 테마가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험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투르크의 지배가 그렇게 '영속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제국의 무정부 상태는 예전에도 몇 번씩 있었지만, 동방이든 서방이든 그 때 제국 방어선이 그렇게 빨리 붕괴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동방 방어선의 붕괴는 몇몇 요새가 협상으로 넘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지역 방어를 담당할 부대가 해산되었고 그나마 남은 군대는 내전에 동원되어서 일어난 '병력 공백상황'으로 보는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테마의 병사들 또한 단순한 수세적인 역할만을 담당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한 테마가 험지나 요새가 버티는 사이에 다른 테마의 상비군 및 동원병력이 달려와 적을 격퇴하는 것은(물론 이 군대의 비율은 둔전병보다는 테마 상비군이 더 높지만요), 7c 이래 테마의 가장 기본적인 방어형태 중 하나입니다. 863년 poson 전투가 가장 모범적인 방어전술 발동 사례이지요. 물론 이들이 단지 '기동군'의 역할만 따진다면 타그마타와 용병부대만 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훨씬 다수의 군대를 인접 지역에서-즉 더 빠르게- 동원할 수 있었던 점을 보면, 방어의 효율은 용병부대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테마의 전투력 증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트레드골드가 '테오필로스 개혁'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조치는 840년, 즉 838년의 아모리온 함락 이후의 문제 해결 대책으로 등장한 조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대 명령 체계를 재정비하고 편제를 보다 유연하게 바꿨으며, 무엇보다 테마 병사들의 봉급을 늘려 무장과 훈련을 충실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842년 이슬람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을 시작으로 863년 결정적인 poson전투, 파울라키안과의 전투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쇄신된 테마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레오 6세의 기병대 증가도 테마 자체의 전투 능력을 증대시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굳이 따지자면, 공세적인 능력을 비교할 때 니케포로스의 개혁이 보다 공세적 능력을 증대시키는데는 효율적이었겠지만, 테마 병사들의 상당부분은 그저 잡병 수준을 벗어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음은 사실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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