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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제 개혁 역사 (후반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시간07.11.30| 조회수1991| 댓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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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굳이 노르만의 예시를 든 것은, 이들이 '어디서든' 자기네 왕국을 만들려는 시도를 벌여왔기 때문입니다. 노르망디, 잉글랜드,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 안티오크 공국 등 이들의 기본적인 문제는 독립적인 영지였으며 이는 바실레이오스가 생존하던 1017년에도 롬바르드인들을 끌어들인 반란으로 나타났습니다(이 때는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테마군대와 일부 바랑기안 부대가 출동, 노르만인들을 제압합니다) 즉, 이들은 정치적 반란이나 분리주의와는 별개로 어떻게든 독립적인 왕국을 노리려던 경향이 강했다는 뜻이고,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훨씬 심각하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런 정치적 혼란이 '왜' 일어났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테마의 권익을 약화시키면서 권귀가문의 권한이 확대되고, 이러한 사적 정치력을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지요. 7~8c에 테마와 스트라테고스들에 의한 반란이 있었지만, '스트라테고스'라는 공적인 지위를 이용한 반란은 설명했다시피 9~10c는 줄어들었으며, 10c의 반란은 스타라테고스라는 직책보다는, 사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어난 반란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이 모순이 더더욱 심하게 나타난 것이 바실레이오스 2세의 사후이고, 대립에 의해 황제 자리가 갈아치워지는 꼴이 더 자주 발생하죠.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두라초 전투에서 바랑기안이 격파되고 나자 알렉세이오스에게 남은 카드는 '보고밀 징집병'과 '투르크 용병대' 뿐이었고 이들은 노르만 기사의 돌격에 중앙이 격파당했습니다(굳이 바랑기안의 위치도 별다른 보병부대가 없어서 1선 전열로 궁병 보호를 위한 것이었지 어느 특정한 노르만 기사들을 노리고 배치된 것도 아니구요). 예전같은 1,2선 부대 하에서 바랑기안은 주로 2선에 배치되어 예비대의 역할을 맡았고, 혹여 두라초 전투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1선 보병부대의 지원, 혹은 적어도 노르만인의 돌격에 그렇게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었겠지요.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만약 기마궁술에 '무력'한 것이 전술적인 의미였다면, 이미 970년 1만~1만2천명의 병력을 이끈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대규모의(기록상 30만) 페체네그-루스인 연합군을 격파한 바 있습니다. 이 때도 분명히 동시대의 기록에 '페체네그인의 기마궁술'의 무서움과 그로 인해 제국군이 입은 큰 피해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다스 스클레로스는 이들을 완벽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즉, 기마궁술에 의한 불리함은 당시 제국군의 역량에 의해서도 충분히 보정될 수 있는 불리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신 대로 테마의 무력함이 기마궁술에 의한 것이었다면, 트레드골드와 카에기의 논지는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즉(스클레로스와는 달리) 야전에서는 투르크인의 기마궁술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1048년까지 제국 테마병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성공적'으로 투르크인을 격퇴했고, 이는 아르메니아의 험지와 요새, 제국에게 유리한 지형을 활용할 수 있는 보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그 이전까지 어느 시점에서 제국군이 투르크에게 대패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설사 카에기 교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테마가 해산되기 이전 시점까지 아르메니아 일대는 여전히 강고한 비잔티움의 세력권에 남아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어지는 유프라테스 상류 역시 제국 세력권에 의해 남아있었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발칸에서 비잔티움의 세력이 유지된 것은, 기본적으로 페체네그인들의 목적은 셀주크 투르크와는 달리(8c 중반 이후 이슬람군대와 유사하게) 정복보다는 약탈에 있었으며 우즈와 쿠만, 루스같은 적의 영향도 있고, 제국 서방은 상대적으로 만지케르트 전투에 입은 군사적 피해가 적었다는 점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기마궁술이 그렇게 치명적인 문제냐,라고 보기엔 David Nicolle은 Osprey 7-11c 이슬람 칼리프 군대에서 기마궁수들의 효율성을 설명하는 한편으로, 비잔티움과 전투, 특히 만지케르트에서는 투르크인 기마궁수보다 술탄 휘하의 중기병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합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테오필로스의 개혁같은 경우, 예로드신 카에기 교수도 byzantine military unrest에서 843년 전후로 제국군의 통제가 훨씬 나아졌다고 하며 동시에, 5c~9c 중반까지 비잔티움 군대는'불만'이 존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트레드골드는 이 불만의 해결이 바로 테오필로스의 '임금 인상'이라고 봅니다. 만약 이러한 임금인상이 상비군 육성에만 집중되었다면 둔전병에 의한 이러한 '불만'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군대 조직 개편과 명령체계 개혁이 그 자체로 상비군화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레오 6세의 개혁은 테마 내 '기병 수'를 늘린 것이었구요.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음, 그리고 제 설명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사적 군사력'은 단순히 가문의 사병 외에, '사병화된 공병'으로서의 동방 일부 군대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 경우라도 권귀가문의 세력을 키워주는 가장 큰 문제는 상비군과 용병의 비중을 늘리는 한편으로 '둔전병'들의 토지를 권귀가문이 먹어치운 것 때문입니다. 권귀가문과 그 정치적 불안에 앞서, 근본 원인으로 둔전병의 몰락을 짚어보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이 점에서 군부가 상당히 권귀가문에게 넘어간 시점에서, 이들이 둔전병들의 해산에 크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만큼 권귀가문에서는 이들의 토지를 뺏기 쉬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테마 해산은 어느 시점에서 제국의 재정 부담이 커졌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 합니다. 더 늘어나는 용병 부담과 이전 황제들의 사치, 교회건설 열풍, 자영농 세력의 몰락으로 인한 세수 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도 바보는 아니라서, 세금을 높여 용병과 타그마타를 고용, 아르메니아에 배치시켰습니다. 대신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54년의 아르메니아 방어선이 붕괴, 1057년 사순 함락, 1060년경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제국령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카에기 교수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방어선이 붕괴된 것은 동방 테마 해체와 이를 용병과 타그마타로 대체한 이후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5 마지막으로, 동시대 그리스인이 페체네그인의 기마궁술에 '감탄'과 '경악', '두려움'을 표시했는지 '무력감'을 표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페체네그처럼 약탈당하고 공세에 노출된 유사한 사례는 이슬람과의 전쟁에서도 반복됩니다. 9c 중반 반격기는 물론이고 탁티카에서도 일단 타우로스에서 저지하는데 실패한 이슬람군은 제국령 깊숙히 약탈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이는 사이프 앗 다울라와 함단조에서도 반복됩니다. 이를 두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무력하다는 말까지 붙이려면 이전시대 비잔티움 군대도 이슬람 군대에게 무력하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으니 지나치게 무리한 추측이 아닐까 싶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이베리아의 군대는 '놀고 먹는 군대'가 아니라 최근 투르크인과의 교전을 통해 '실제로 싸우는' 군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일단 트레드골드 역시 병사 해산조치는 '필요하다'라고 했지만, 콘스탄티노스의 방식은 '무엇을 해산해야하고, 무엇을 해산하지 말아야할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거죠. 즉, 이미 상비군이 군의 주력이 된 국경 테마, 해군 테마, 타그마쪽에는 적용했어야 했지만, 이것이 남부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동방과 서방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한 투르크인의 규모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메소포타미아 자체가 주력 테마도 아니고(규모도 썩 많지 않고, 이 지역은 오랜 평화로 군대 훈련도 떨어졌으며), 아르메니아에서 테마 병사들이 받았전 지형적인 이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지세도 아닙니다. 테오도시우스 때부터 상류 유프라테스는 제국 방어의 약한 고리를 이루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따져보면 투르크인을 가장 잘 저지할 수 있었던 지역은 아르메니아이고, 이 아르메니아 방어선이 붕괴한 시점은 1054년, 즉 1053년 테마병사들을 해산시키고 그 지역 방어를 타그마타와 용병부대에 위임한 시기와 맞물립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정리하자면, 1048년의 성공적인 방어사례의 예시로 볼 때, 이미 아르메니아의 테마 둔전병들은 실제로 군역을 지고 있었고 이를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평지라면 몰라도, 산지가 많고 요새가 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제국 최정예 테마를 제공하는 아르메니아의 사정은 메소포타미아와는 다르게 봐야합니다. 이 상황에서 콘스탄티노스가 해산시킨 둔전병은 [놀고 먹는 병사] 외에 [실제로 싸우는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세금을 높여 용병대를 고용한 뒤, 아르메니아 수비를 맡겼으나, 결과는 테마가 수비하던 때와는 다르게 아르메니아 방어선 붕괴와 그에 따른 일련의 동방 테마 붕괴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테마 둔전병으로서 아르메니아 방어를 맡았을 일부 군대들은, 로마노스 4세의 시기까지도 아르메니아에서 싸우면서 투르크와 제국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서방 페체네그의 위협도 1026~27년까지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의 지휘하에 제국군은 이를 격파한 바 있었습니다. 32~36년까지 페체네그의 침입도 있지만, 페체네그의 침입이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온 것은 토르니키오스의 반란과 그에 따른 서부 테마가 타격을 받은 이후입니다. 양쪽 모두 테마의 붕괴가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죠.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콤네노스님 말씀대로 테마의 전투력 향상, 그리고 상비군의 증강 요구가 꾸준히 이루어져왔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시에 어느 정도의 훈련과 경험만 있다면 테마의 둔전병들은 '최소한' 방어전에 있어서는 자기 능력을 잘 선보여 왔습니다. 아르메니아나 아나톨리아의 테마 병사들은 꾸준히 공격에도 동원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나 레오의 개혁 이후에는 테마의 병사들도 용병보다는 못해도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효율성이라면, 분명 전투력 자체는 테마는 용병보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든, 전쟁에서 '머릿수' 자체가 주는 장점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만큼 '머릿수'를 동원하는것 만으로도 쓸데가 많으니까요. 최대한 병참을 줄여야 하는 공격전이라면 몰라도, 방어전에서 이들은 여러 요새에서 배치되기도 하고, 이들 덕분에 깊은 종심 방어와 다양한 작전수행도 가능합니다. 1054년 용병에 의존한 아르메니아 방어선이 붕괴되자 2,3차 방어가 불가능해진 제국은 순식간에 상류 유프라테스까지 쫓겨났고, 평상시 같으면 패배했더라도 후방에 남아있는 둔전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shadow tactics 역시 좌절되었습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굳이 사이프의 예를 든 것은, 페체네그인이 발칸까지 내려왔다고 하여 그것이 제국군 방어체계의 무력함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슬람, 사이프는 물론, 사무엘의 군대는 펠로폰네소스까지, 클레이디온 전투 이후에도 불가르 약탈대의 일부도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위 사례가 제국 방어체계가 총체적으로 무력했다고 할만한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요. 페체네그인의 습격은 빠른 기동과 약탈에 의한 것이지, 이 전투에서 특별히 제국군의 대군을 격파했다거나 하는 실적이 없고, 본질적인 지배권을 흔들지도 못했다면, 이를 '방어체계의 무력함'과 연관짓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메소포타미아와 1071년 붕괴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를 띄고 있습니다. 콤네노스님께서 이야기하신 정치적 불안정과 요새 넘겨주기도 큰 문제가 맞지요.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경우를 볼 때, 테마가 보다 잘 조직되어 있고(지형상, 그리고 평화와 권귀의 세력확대로 무력화된 메소포타미아, 혹은 기타 테마와 차별되게),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계획했던 대로 테마를 재조직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역으로 테마 둔전병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면) 동방 방어체계가 그리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7.12.06 마지막으로...음, 이제 곧 기말고사라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고해서-_-;; 한 번 논쟁을 하려면 한 시간이 넘어가는 이런 고급 논쟁을 계속하기는 힘이드는군요;; 콤네노스님의 고견은 잘 들었고, 제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드문 토론 자리를 만들어주신데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작성자 유틸라이넨 작성시간07.12.07 배...백플이다... 귀찬싸 공께서 두분 모두 궁형에 처할지도...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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