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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켈트)인

작성자웰링턴|작성시간05.08.12|조회수1,059 목록 댓글 16

(갈리아의 병사들)

 




오늘날에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지만, 그들은 서구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그들이 등장한 2500여년전 그들은 유럽의 역사, 예술 및 종교 관습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들은 오늘날의 일상 생활에도 영향을 끼치고있다.

그들은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였으며 그들은 전성기에 대서양에서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북유럽에서 지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고대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켈트족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켈트족의 자취를 매일 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구 세계에 바지를 퍼뜨린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오크통을 발명한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이 역사에 남긴 뚜렷한 흔적은 많이 있다.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 아직도 언덕 위의 요새, 그리고 고대 무덤을 덮고 있는 봉분(封墳)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켈트족이 남긴 것이다. 오늘날 리옹, 보헤미아 같은 여러 도시 혹은 지역의 명칭도 켈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죽은 사람을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추모하는 관습(건배나 할로윈 데이 축제)이 있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면, 오래 전에 켈트족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영국의 아서 왕에 관한 이야기나 「빨간 모자」(Little Red Riding Hood) 및 「신데렐라」 같은 유명한 동화를 들어 보았다면 켈트 문명의 다소 직접적인 유산을 알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여러 민족의 경우처럼, 켈트족을 보는 견해도 묘사한 사람에 따라 달랐다. 플라톤(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인)은 그들을 음주를 좋아하는 호전적인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인)가 볼 때 그들은 위험에 감연히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이집트계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기원 2세기 사람)에 따르면, 켈트족이 무서워한 것 단 한 가지는 하늘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적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잔혹하고 미개한 야만인으로 묘사하였다.

오늘날에는 켈트족에 관한 연구의 발전에 힘입어, “켈트족에 대한 묘사는 불과 20년 전에 묘사된 것과도 판이하게 다르다”라고 켈트사 학자 "벤세슬라스 크루타"는 기록한다.

엄밀히 말해서 켈트족은 여러 부족으로 된 집단이다. 그들을 결속시킨 “공통 언어, 같은 형식의 공예 기술, 군 조직 및 신앙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일원화되어 있었다.” (「라 스탐파」 1991년 3월 23일자 부록 「켈트족」) 그러므로 일개 종족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켈트 문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갈리아인, 이베리아 켈트인, 세노네스인, 케노마니인, 인수브레스인, 보이인 등의 명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및 북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일부 부족들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한 부족도 있었다.

켈트족의 뿌리가 되는 부족이 시작된 곳은 중부 유럽인 것 같다. 그들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 기록에 나온다. 그들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 중 하나인 그리스 역사가 헤르도토스는 그들을 “유럽 극서 지방 거주자들”이라고 불렀다.

고대 역사가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군사적 업적에 주의를 이끈다. 여러 부류의 켈트 부족은 기원전 4세기 초에 북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로, 그 다음에 로마로 쳐들어가 정복하였다. 리비우스 같은 라틴 연대기 필자들에 따르면, 켈트족은 적당한 배상금을 받고 나서 켈트족 지도자 "브레누스(지도자를 지칭하는 호칭)"가 "바이 빅티스(패자에게 재난이 있을지어다) 하고 말한 다음에야 비로소 떠났다고 한다.

심지어 현대에도 여러 언어의 만화책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가상적인 갈리아 전사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의 모험담을 읽은 사람들은 켈트족을 기억하고 있다고 볼수있다.

그리스가 켈트족을 접하게 된 때는 기원전 280년경이었다. 그때 켈트족의 또 다른 "브레누스"는 유명한 델포이 신전 문 앞까지 가고도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인이 갈라타이라고 부른 일부 켈트 부족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가서 소아시아 북부에 정착하게 되었고 훗날 그 지역은 "갈라디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대에 켈트족은 강한 체력을 타고난 용감한 전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체격이 당당하였을 뿐 아니라, 적에게 겁을 주려고 석회가루 섞은 물로 머리를 적셔서 마르고 나면 매우 사나운 모습을 띠게 하였다.

그래서 켈트족을 묘사한 고대 조상(彫像)에도 그 모습대로 “머리가 석고형”으로 나타나 있다. 체격, 싸움에서의 정열, 무기, 머리를 꾸민 방식, 전형적으로 긴 수염 등,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갈리아인의 살벌한 자태야말로 그토록 적군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이고, 아스테릭스 모험담에 묘사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카르타고 사령관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군대가 켈트족 용병을 모집하였을 것이란 견해도 피력한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말엽에 켈트족의 힘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꺾이기 시작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기타 장군들이 이끄는 로마군의 갈리아 원정이 켈트족 군부를 굴복시킨 것이다.



                 (갈리아인의 장례의식을 묘사한 그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 민족이 남긴 직접적인 증거는 주로 수많은 무덤에서 발견된 제조품이 거의 전부다. 전문가가 볼 때 틀림없이 그들의 수공품인 장신구, 각종 그릇, 무기, 동전 등은 인근 민족과 대규모로 상거래되던 물건이었다.

최근에 영국 노퍽에서 금으로 된 갖가지 물건이 발굴되었다. 그중에는 휘지 않는 특색 있는 모양의 목걸이도 있다. 켈트족 금세공인은 기술이 탁월하였다. 어느 학자는 “켈트족이 특히 잘 사용한 예술 재료는 금속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금속을 더 잘 가공하기 위해서 그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발된 노(화로)를 사용하였다.

흥미롭게도 동시대의 그리스·로마 예술이 사실 묘사를 시도한 반면에 켈트인 예술은 주로 장식 예술이었다. 생물의 형체를 고유 형식에 따라 표현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상징적 요소가 많았으며, 용도는 주로 마술적이고 종교적이었다.

고고학자 사바티노 모스카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장식 예술의 표현 형식이야말로 유럽 역사상 가장 유구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찬란한 것임에 틀림없다.”

켈트 부족들은 심지어 "오피다(그들이 거주했던 요새같은 도시)"에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귀족 계급이 부족을 다스렸으며 평민계층과의 계급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기후가 혹독하였기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남쪽으로 이동한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득만이 아니라 보다 온화한 기후도 한몫을 하였을 것이란 견해도 보인다.

켈트족의 일상 생활에는 종교가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갈리아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갈리아 전기"에서는 알려준다. 라틴 역사학자 "카를로 카레나"는 “사후 생명과 영혼 불멸에 관한 신앙은, 지옥에서라도 갚아 준다는 조건을 수락하면서 아주 기꺼이 대여해 줄 정도로 대단하였다.” 그들은 내세사상을 믿었다.

모든 켈트 부족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인 사제 계급은 적어도 바르드, 바티스, 드루이드로 된 세 가지 부류로 조직되어 있었다. 처음 두 부류의 역할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거룩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나누어 줄 책임은 드루이드에게 있었다. 그 칭호는 “매우 현명한”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학자 얀 데 브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사제직은 드루이드 수장이 인도하는 매우 강력한 직분으로서 수장의 결정에는 누구나 순복해야 하였다.” 드루이드는 일정한 시기에 “거룩한” 숲속에서 겨우살이를 잘라 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드루이드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련 수사는 무려 약 20년이나 걸려서 그 계층의 종교적·전문적 지식을 암기하여 익혔다. 드루이드 사제는 종교적인 문제 일체에 관해 기록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전통은 구두로 전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켈트족에 관한 지식이 극히 적은 것이다.

그러면 드루이드 사제가 기록하는 일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얀 데 브리스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구두로 전수된 전통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갱신되었다. 근본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상황 변화에 맞도록 계속 조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드루이드 사제는 발전적인 지식에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서지오 퀸지오의 말에 따르면, “사제직만 거룩한 지식을 관리하였기 때문에 그 권위는 대단히 돋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드루이드 사제가 항상 지배권을 쥐고 있었다.

켈트족 신들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신을 묘사한 조각품이나 초상이 많이 발굴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다 이름이 없어서 각 공예품이 어느 신 혹은 여신을 묘사한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덴마크에서 발견된 유명한 군데스트루프 가마솥에 이러한 신 일부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루크, 에수스, 케르누누스, 에포나, 로스메르타, 토이타테스, 수켈루스 등의 이름이 오늘날에는 큰 의미가 없지만, 고대 켈트족의 일상 생활에는 큰 영향을 끼치던 신들이다. 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 제물(대개 전투에서 사로잡은 적)을 바치는 일은 켈트족에게 예사로운 일이었다.

희생자의 머리에다 흉측한 장신구를 씌우는 때도 있었고, 희생자가 죽는 방식을 근거로 길흉을 판단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에서 인간 제물을 바치는 때도 있었다. 지금 그들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그들의 글 그들이 섬겼던 신...그리고 행동과 모든것들이

하지만 그들은 현대 유럽의 모든 사람들과 세계의 모든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리들의 일상 생활과 사고 방식은 켈트족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아니 우리가 생각하는것 보다 더 많이 받고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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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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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엘 테무르 | 작성시간 05.08.14 저 그러면 갈라타도 켈트와 상관이 있는지...?
  • 작성자spicysoop | 작성시간 05.08.14 갈라타가 소아시아 중간에 있는 거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관계있죠. 켈트족이 소아시아에 우루루왔다가 그리스인들에게 깨지고 정착한 곳이고, 갈라틴 보병이 무슨 롬토 모드에도 나왔던것 같은데..
  • 작성자Hero_Style | 작성시간 05.08.15 ↑윗님 리얼리즘 6.0모드 입니다. ㅎㅎ
  • 작성자엘 테무르 | 작성시간 05.08.21 저 그게 아니라 이스탄불에 있는 갈라타 입니다~
  • 작성자skdud850914 | 작성시간 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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