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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셀루시드에관해 알고싶어요

작성자웰링턴|작성시간05.09.27|조회수896 목록 댓글 6
이야기 하자면 좀 길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왕조의 경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의 기반을 충실이 닮아있던 군대중에 하나였죠. 셀레우코스왕조가 우리가 알고있는 제국으로써 성장하게된것이 소아시아를 담당했던 장국 리시마쿠스를 제압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 셀레우코스는 "니카토르(전승왕)"이라는 닉네임까지 받게됩니다...실제 전투에서 셀레우코스보다는 리시마쿠스가 한층 돋보였던 장군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중 한명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후 가장 강력한 후보로 손꼽혔던게 안티고노스 장군인데 그를 제압한것도 리시마쿠스 라면 이해하실듯합니다.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쿠스가 같이 공모했던 카산드로스의 죽음과 함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을 흡수시키면서 불화가 싹트게 되고요...이후 기습전을 통해서 리시마쿠스를 제압하면서 소아시아까지 영역을 확대시킵니다.

아마도 그 후부터 일것입니다. 시리아의 군대의 군제개혁이 이루어진것이 그후 시리아 전쟁을 통해서 시리아의 군대는 보다 중무장, 보다 긴 장창을 같게되었으며 이것은 결국 기민성을 잃어가면서 전투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으로 오리라는점을 간과하게 된것이죠...

안티오쿠스 대왕이라 말해지는 안티오쿠스 3세의 군제개혁당시 이미 시리아 군대는 40킬로를 압박하는 중장갑에 5.5 ~ 6미터 가량의 장창을 든 군제로 바뀌면서 로마의 보병들에게 유린당하게 되죠...

그 첫번째가 마그네시아 전투입니다. 군인의 숫자에선 단연 압도적이었던 시리아군대와 로마군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기록은 어쩌면 보다 중장화 보다 긴창이라는 슬로건을 무력화 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패배한 안티오쿠스 대왕은 자신의 점령지에 대한 막대한 세금과 시설물들에대한 약탈에 가까운 강탈, 그리고 그리스의 신을 모실것에 대한 문제로 결국 유대왕국과 마찰을 일으키게되고요...하스몬가(家)와의 전쟁으로 결국 유대지방을 잃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티오쿠스도 신전약탈도중에 죽으면서 끝을 맺게되죠...

다음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경우 그리스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심때문에 결정적으로 그나마 붙잡고있던 유대의 나머지부분을 잃게되고요. 결국 자국적으로 막대한 세금때문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후 로마의 폼페이우스의 원정에서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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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웰링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9.29 음 갑옷의 중량도 중량이지만 당시 시리아의 중무장 보병들이 지녔던 장비들을 토탈 계산한다면 35~40킬로그램했다는 말을 하려했는데...오류가 들어간듯하네요...그들이 입고있던 판갑의 경우도 무게가 상당한데다. 투구와 팔과 다리를 감쌌던 경갑의 경우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 작성자웰링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9.29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 리넨퀴레스라 해서 리넨으로 만든 경갑에 속한것에 트라케식 투구를 이용하였고 방패패용을 하였기때문에 중량에서는 시리아의 셀루시드보다 상당히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시리아전쟁속에서의 전쟁양상과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원정의 차이는 상대를 얼마나 잘 아느냐의 차이였습니다. 결국 시리아
  • 작성자웰링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9.29 중장보병이 개혁을 맞게된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맞아떨어졌다는것, 특히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대왕은 젊은시절부터 뼈아픈 패배를 2차례 격었기에 이집트와의 전쟁속에서 대응방법을 강구하고 그에 대비한 전력을 원했다는것 그것을 토대로 본다면 시리아의 중무장에 대한 이유가 되겠지요.
  • 작성자카이사르씨 | 작성시간 05.09.29 흠... 어찌보면 그것은 지휘관의 병기운용의 부재 즉, 전술력이 딸렸기 떄문이 아닐까요?
  • 작성자skdud850914 | 작성시간 11.04.24 ㅍㄱ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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