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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공화국과 파르티아의 전쟁- 카르헤(Carrhae) 전투(2)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0.09.06|조회수1,196 목록 댓글 13

마침내 기원전 53년 봄, 크랏수스는 7개군단 3만여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향해 출발했다. 그의 원정에 앞서 기원전 54년 겨울, 카이사르 휘하에 있던 자신의 아들 푸빌리우스 크랏수스가 원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줄 1000기의 갈리아 기병을 데리고 합류해주었던 덕분에 크랏수스는 그 어느때보다 자신감과 오만함에 가득차있었다. 2년전 로마를 떠나며 아티에우스가 퍼부었던 기괴한 저주의 꺼림칙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르타바스데스(Artavasdes)>

 
크랏수스가 원정에 나서자, 그와 동맹관계에 있던 아르메니아왕 아르타바스데스는 사절을 보내 6천기의 아르메니아기병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하면서 크랏수스에게 자신의 영토인 아르메니아를 거쳐 파르티아 북쪽으로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거친산악지대인 이지역이라면 파르티아군이 자랑하는 기병들이 제 역할을 못할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랏수스는 병력지원에 대한 감사만 표할뿐, 남쪽으로 셀레우키아를 침공하겠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훗날 카르헤의 비극을 부른 크랏수스의 실책이 다시 한번 드러난것이다.

물론 이런 실책투성이인 크랏수스였지만, 다행히도 그의 부하들중엔 크랏수스보다 유능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은 크랏수스의 고집과 자만이 부른 실책을 최악의 선택에서만큼은 벗어나게 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중 하나가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것으로도 유명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였다. 카시우스는 수자원보급에 용이 하다는점과 적의 습격에서 측면을 방어할수있다는 점을 들어, 셀레우키아까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진군 할것을 제안했다.하지만 크랏수스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 그의 안내역을 자청한 현지 부족장인 아리암네스(Ariames)-파르티아의 스파이로 기록되고 있다.-의 권유에 따라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작열하는 사막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크랏수스는 지리적 이점을 살릴수있는 기회를 두번이나 포기했다. 아무리 그가 자만심넘치는 인물이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대규모원정은 경험해본적 없다지만, 그래도 그는 내전 당시 술라의 장교였고,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진압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오로데스의 표현대로 그는 '노망이라도' 난걸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는 아마 매우 급했을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집어가서 손자재롱 볼 나이다. 하지만 손자 재롱이나 보기엔 그의 권력욕은 너무나 컷고, 권력을 잡기에는 그의 해외원정경력이 모자랐다. 그에게 선택은 빠른 시일내에 이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크랏수스는 이를 위해 아리암네스의 안내를 받아 파르티아의 수도인 최단루트로 사막을 횡단하는 쪽을 택했을것이다. 그게 함정이라고는 짐작도 못한체 말이다.

작열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사막너머에서 크랏수스와 그의 원정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레나(Surena)라고 알려진 인물과 그의 만여명의 기병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샤의 대관식 행사를 전담하는 일족에 속한 그는 오로데스와 그의 형제의 내전 당시 오로데스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덕분에 그는 파르티아 권력의 2인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막강한 권력자는 이동할때마다 1000마리의 짐낙타와 200대의 수레, 1000명의 무장한 경비병을 거느렸다. 흥미롭게도 로마와 파르티아의 최고위 권력자들이 맞붙게 된것이다.

<수레나로 짐작되는 인물의 조각상>


전투를 벌이게 될 양군의 전력을 비교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크랏수스의 로마군은 보병중심으로 편성된 7개군단에 갈리아 기병 1000여명을 포함한 4500에서 6000명의 기병대와 4,500명가량의 궁병과 경보병등 3만여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있었고, 파르티아군은 1000명의 중기병(cataphracts)과 9000명의 궁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르티아의 중기병과 궁기병>


수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로마군은 3:1이상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3만여명의 병사들은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가로지느라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무엇보다 현지안내를 약속했던 아리암네스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들은 이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병전력의 지원을 약속했던 아르메니아가 오로데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의 침공을 받아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서둘러 동맹군에게 진로를 바꿔 지원을 부탁했지만, 크랏수스는 파르티아를 격파한 후에 병력을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만약 이때 크랏수스가 병력을 돌려 아르메니아로 향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혹자는 원정의 성공은 아니어도, 원정군의 괴멸은 막았을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진로를 바꿨을때 수레나가 원정군의 배후를 공격해 더한 참극을 만들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 할수 없다.

마침내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은 메소포타미아 사막에 흐르는 발리서스(Balissus) 강 인근에서 마주쳤다. 크랏수스의 장교들은 병사들이 이곳까지 거의 휴식없이 행군해왔던 만큼, 물이 흐르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적의 공격을 기다릴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크랏수스의 공격적인 아들, 푸빌리우스는 이 '겁쟁이'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는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할것을 제안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군사적 재능을 신뢰했고, 그의 말을 따라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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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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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VOCARLOID 時代 | 작성시간 10.09.07 아, 그러고보니 스파르타쿠스를 따르던 일부 세력이 스파르타쿠스와 Bye Bye하고
    그 뒤, 무지하게 X 되고, 스파르타쿠스도 배타고 일단 로마(이탈리아 반도)에서 튀려고하다가 사기맞아서 결국 죽었다죠..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10.09.09 나중에 카시우스가 왜 크라수스를 배신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 답댓글 작성자VOCARLOID 時代 | 작성시간 10.09.10 그러게요. 저도 저런 노망난 늙은이와 함께 할 바엔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할 듯..,,
  • 작성자CrimPie | 작성시간 10.09.18 빨리 연재해 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예요
  • 작성자팽이 | 작성시간 10.12.23 연재해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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