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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 뉴욕 징병거부 폭동 (New York Draft Riots)

작성자왕마귀|작성시간09.05.12|조회수2,285 목록 댓글 20



1861년 4월에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뉴욕인들은 연방의 요청이 오기전에 신속히 모병에 응했으며, 약 100,000에서 250,000명 정도의 인파가 자원입대하기 위해 유니언 광장에 몰려들었다. 에이브러험 링컨이 연방을 위해서 싸워줄 75,000명의 지원병이 군에 입대하기를 요청할 당시 뉴욕시에서는 불과 열흘만에 8,000명이 자원입대하였다. 1861년 7월 첫번째 불런 전투 당시 뉴욕시에서 지원한 병력이 포함된 연방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자 낙관론이 수그러들고 비관론이 우세해졌다. 코퍼헤드(copperhead)- 남부에 동정적인 북부인들 - 로 잘 알려진 뉴욕시의 다수 민주당원 세력은 전쟁에 반대하고 남부와의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1862년에 선출된 뉴욕 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Horatio Seymour)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전쟁이 오래끌게 되면서 연방은 군사적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의회는 1863년 3월에 대통령이 18세에서 35세 사이의 시민들을 징집하여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만드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강제 징병제를 합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과시켰다. 코퍼헤드는 이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워했다. 코퍼헤드는 모든 종류의 국민병역에 반감을 보였지만 다분히 수사적이었으며 징병조건에 해당하는 남자도 300달러 (가난뱅이는 지불할 능력이 없는 금액)를 내거나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감면 사례금'을 주고 대리인을 입대시키는걸 가능하게 만드는 조항을 비난했다. 그 결과 "300달러짜리 사내"라는 조롱섞인 표현이 유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코퍼헤드 클럽을 조직한 당원들조차 자신들이 징병대상이 될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감면 사례금을 지불하고 대리 입대시키는 경우가 흔했다. 300달러를 내면 군복무를 면제시키는 법령은 전쟁을 계속하기위하여 필요할 융자금을 확보하고 인색한 부자들이 아들이 징병당하는 사태를 피하기위해서 큰돈을 내게 만들려는게 본래 목적이었지만 중간과 하층 계급 대중들 사이에서는 남북전쟁이 점차 "전쟁은 부자가 일으키고, 싸우는 건 가난뱅이가 한다."는 식으로 변질된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7월 21일 토요일에 첫번째 징병 제비뽑기가 무사히 시작되었다. 작은 종이에 징병대상자 이름을 적은 후 상자에 넣고 한명씩 쪽지를 꺼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제비뽑기에 걸린 사람 대부분은 주로 기술공과 노동자였으며 명단은 신문에 공개하였다. 뉴욕에서는 아직 폭동이 발발하지 않았지만 다른 도시에서는1863년 7월 6일에 일어난 버팔로 폭동을 포함하여 징병제도 반대자가 가담한 소요가 터진 상태였다. 뉴욕시에서도 징병에 대해서 비슷한 의견이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태머니 홀(Tammany Hall) - 뉴욕의 민주당 세력 본부 - 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선거인으로 등록시켜 지역 선거에서 투표를 하게 만들도록 부추겼다. 징병제 실시는 결과적으로 아일랜드계를 포함한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조국을 위해서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만들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연방측이 승리를 거둔 후 열흘뒤 인 1863년 7월 13일, 월요일에 두번째 제비뽑기가 실시되었다. 오전 10시경에 33명의 블랙 조크 엔진 회사 직원이 이끄는 500여명의 성난 군중들이 47번가 세번째 대로에 위치했으며 징병을 실행하는 제 9지역 헌병 사령관 사무소를 습격했다. 폭도들은 커다란 도로포장용 돌을 창문에 집어던지고, 문을 뚫고 폭발물을 던져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 폭도들 상당수는 아일랜드 노동자들이었고 해방노예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노예해방에도 반대하였다.







뉴욕주 민병대는 펜실베니아의 연방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상태였으므로 경찰이 단독으로 폭동을 진압해야했다. 경찰 총경 존 케네디(John Kennedy)는 월요일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케네디는 제복을 입지 않았지만 폭도 중 일부가 총경을 알아보고 공격을 가했다. 총경은 얼굴에 멍이 들고 칼에 그어졌으며, 눈을 다치고, 입술은 붓고, 손은 칼에 베였으며, 몸 전체에 수많은 멍이 들고 피로 얼룩진채 거의 기절한 상태에서 현장을 떠났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찰들은 곤봉과 리볼버를 뽑아들고 군중에게 돌진했으나 폭도들이 숫적으로 경찰을 압도해 버렸다. 뉴욕시 경찰국 병력은 숫적으로 심각한 열세였으므로 폭동을 진압하지 못했지만 유니언 광장 아랫쪽에 위치한 로워 맨하탄(Lower Manhattan) 밖으로 폭동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데 성공했다. 항구 주변에 거주하는 이민자들과 '블러디 식스(Bloody Sixth)'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1830년과 1850년에 지금보다 더한 폭력을 경험한 기억때문에 징병거부 폭동에 개입하는 행위를 꺼렸다.





1830년에 설립된 불스 헤드 호텔(Bull's head Hotel)은 폭동으로 전소되었다.





44번가에 위치한 불스 헤드 호텔(Bull's head Hotel)은 폭도들에게 술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불에 탔다. 5번가에 위치한 시장 자택과 제8, 제5 지구 경찰서와 그밖의 건물들도 공격을 받아 불에 타버렸다. 또 다른 목표물은 진보적인 공화당 신문사인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 사무실이었다. 폭도들은 2정의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직원들 때문에 뉴욕 트리뷴 사무실에서 물러났다. 몇몇 소방관들은 폭도들에게 공감하였는데 이들도 토요일에 징병당했기 때문이었다. 오후가 되자 경찰은 21번지 2번가에 위치한 무기고를 공격한 남자를 총으로 쏘아죽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폭도들이 지닌 분노의 표적이 되면서 희생양 신세가 되었다. 수많은 이민자들과 빈민들은 해방노예에 대해서 부족한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로 보았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때문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고 생각했다. 폭도들에게 붙잡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두들겨맞거나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했고, 군중에게 공격받은 어느 흑인남자는 곤봉과 도로포장용 돌로 400번 이상을 맞은 후 나무에 목매달려 불에 태워졌다. 폭도들은 수백명의 아이들을 보살피기위한 보호소로 5번가에 세워진 흑인 고아원도 습격했다. 경찰은 고아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충분한 시간을 벌도록 고아원을 수비하는데 성공했다.


월요일 저녁에 폭우가 퍼붓는 바람에 화재가 가라앉고 폭도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다음날에 군중은 다시 몰려나왔다. 노동자들이 폭동에 가담하면서 도시의 상거래는 정지되었다. 폭도들은 에비게일 호퍼 기번스(Abigail Hopper Gibbons)를 포함한 유명한 공화당원들의 저택으로 몰려갔다.


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는 화요일에 도착한 후 시청에서 군중들에게 강제징병 조례는 위헌이라는 연설을 하여 폭동을 진정시키려 시도했다. 존 E 울 장군은 뉴욕항의 요새와 웨스트 포인트에서 약 800명의 병력을 현장으로 데려왔다. 또한 장군은 민병대에게 뉴욕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이 신문에 실리면서 몇몇 폭도들은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선발로 도착한 민병대원들은 남아있는 폭도들의 저항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진압명령이 확산되면서 목요일에는 152 뉴욕 의용군, 제26 미시건 의용군, 제30 인디아나 의용군. 강행군을 마치고 메릴랜드주 프레데릭에 주둔하던 제 7 뉴욕주 민병연대가 포함된 더 많은 연방 부대가 뉴욕으로 돌아왔다. 또한 주지사는 아직 연방 병력에 소속되지않은 제 74, 제65 뉴욕주 민병연대와 스로그스 넥(Throgs Neck)의 스카일러 요새에서 뉴욕 의용 포병대 예하의 제 20 독립 포병중대를 폭동현장으로 파견했다. 7월 16일 수천명의 연방군이 뉴욕시를 점령했다. 목요일 저녁 그러머시 공원 근처에서 마지막 대결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수많은 폭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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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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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입닥제국 | 작성시간 09.05.15 근데 신문사에서 개틀링 기관총 2정으로 물러나게 해....ㅎㄷㄷ 신문사같은 기관들이나 공식기관들은 중무장했나보죠?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09.05.15 폭동이 뭐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고 분위기 꽤나 험악했으니 정부에 호위병을 요청한 뭐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유~.~
  • 답댓글 작성자리카르도 | 작성시간 09.05.16 서부극의 모든 내용은 거짓이 아닙니다. 도시가 저 정도였는데 변경이야 ㅋㅋㅋ
  • 작성자난 어른이 되어도 | 작성시간 09.05.17 왕마귀님 남북전쟁에 관한 글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글 봅니다. 반갑습니다.
  • 작성자creios | 작성시간 09.06.15 정말 경악스러운 시대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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