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해외진출의 배경-
교과서적인 설명으론 흔히 "오스만 투르크가 기존 동-서 무역로를 단절했기에 서양은 새로운 동-서 교역로를 찾아 대서양으로 진출했고 대항해시대가 열렸다"라고들 합니다. 허나 이는 사실과 좀 다릅니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서양이 대서양으로 진출했다라고 하기엔 오스만 투르크의 교역로 차단시기와 서양의 해외진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시리아 진출은 1515년이고 이집트 진출은 1517년입니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서양의 해외진출이 시작됬다라면 서양의 해외진출은 그 이후에 일어나야 하나 서양의 해외진출은 그 이전입니다. 포르투갈의 엔리케에 의해 북아프리카 개척선이 처음 출발한게 1422년이니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1453년)하기도 전에 이미 서양은 해외진출을 시작한 것이지요. 하다 못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1492년이고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희망봉을 돌아 가는 인도 무역로 발견이 1497년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판도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에만 미쳣을뿐 주요 교역로인 시리아와 이집트는 차지 하기 전이지요. 즉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서양이 해외로 진출하였다"라는 설명은 틀린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슬람 세력 혹은 동양 세력에 의해 동-서 무역로가 차단되었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포르투갈을 위시한 유럽이 처음 해외진출을 시도한 시기인 15세기에 동-서 무역로는 차단되거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이는 베네치아의 후추무역으로 증명됩니다.
1380년 4차 제노바-베네치아 전쟁이 끝이 난 후 베네치아는 제노바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지중해 무역을 거의 독점합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후추는 베네치아가 독점하다시피 하지요.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후추를 독점하였다는건 동-서 교역로는 베네치아가 독점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동-서 무역중 가장 많이 거래가 되었던것이 후추이고(심지어 후추는 17세기에도 네덜란드의 동인도무역회사(VOC)의 교역품중 전체 50%를 차지할정도로 많은 거래가 이루어 졌습니다다. 후추 무역이 쇠퇴하는건 17세기 말부터) 교역로중 가장 활성화 되었던것이 인도양-아덴-수에즈-알렉산드리아 였으니까요. 다른 무역로도 많지 않으냐, 하시지만 15세기 당시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3가지 길중 사막길,초원길은 몽고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퇴가 완연한 상태였고 주로 바닷길과 바닷길-사막길을 경유해서 가는 루트가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이 루트는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페르시아만-호르무즈-이스파한-흑해. 페르시아만-호르무즈-이스파한-티브리즈-트라브존드or스미르나or알레포, 인도양-아덴-홍해-메카-시리아, 인도양-아덴-홍해-수에즈-알렉산드리아. 이 4가지입니다. 이중 페르시아만을 거쳐가는 루트는 페르시아 지역의 치안불안으로 그 안정성이 떨어지고 보호비용이 높았기에 당시 상인들은 주로 인도양의 거쳐 홍해로 들어가는 루트를 많이 이용하였지요.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 홍해루트 역시 베두인 약탈자와 홍해연안 이슬람 소국들로 인해 불안정한 면이 존재하였습니다만 1424년 이집트 맘루크가 아덴을 점령하고 홍해를 차지함으로써 안정성이 높아지고 보호비용이 낮아졌습니다. 이로인해 15세기 내내 이 지역 동-서 무역로는 크게 발달하고 활성되지요. 덕분에 간혹 맘루크 술탄의 변덕으로 후추가격이 변동되기도 하였지만(예를 들면 1430년에 이집트 술탄의 욕심으로 후추가격이 1칼리코-단위의 일종 10톤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당 100두카토로 올라갔습니다.) 15세기 내내 후추가격은 1 칼리코당 4~50두카토 정도로 유지 되었습니다. 이는 곧 "유럽이 해외진출을 시도한 15세기에는 동-서 무역로가 안정 되어있었으며 동-서 무역로의 불안으로 유럽의 해외진출이 시도 되었다. 라는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라는걸 보여줍니다.
그럼 유럽은 왜 해외로 진출한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외진출을 시도한 포르투갈에 대해 알아봐야합니다. 유럽의 해외진출의 시발점은 포르투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해외진출을 시작하지요. 에스페냐는 그 후발주자이고 베네치아등 이탈리아 국가는 이미 기존 지중해루트가 활성화 되어있었기에 해외진출에는 관심이 적었습니다.(물론 당시 이 지중해 무역은 베네치아에 의해 거의 장악되어 있었고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제노바,피렌체등은 다른 상업에 중점을 두고있었습니다. 제노바는 서지중해 무역에, 피렌체는 교역보다 금융업에 중점을 두고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해운국이라 하기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이탈리아에 비해 뒤쳐져있는 상태였지요.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왜 해외로 진출한것일까요? 원인으로는 기존 교과서적인 설명대로 "이탈리아의 지중해 무역 독점으로 인한 새로운 무역로 개척의 욕구" "지중해와 대서양 경계면에 있던 포르투갈의 지정학적 위치" "오래전부터 지중해-대서양과의 중개무역이 발달해 해상무역과 해운업이 발전되있던 것" "15세기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제노바,이탈리아 상인들의 대서양-지중해 무역 강화로 인해 많은 이탈리아 자본이포르투갈로 유입된 것" "전과 동일한 이유로(베네치아와 경쟁의 패배) 이탈리아의 선원,모험가들이 포르투갈내로 많이 이주해온 것"등등을 꼽을 수 있겟습니다.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포르투갈 내부의 해외 진출 욕망" 때문 입니다.
15세기 포르투갈은 참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존재하며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사이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포르투갈은 상이한 세계 사이에 존재했었습니다. 그런고로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지배를 종식,기독교영토 회복 및 확장을 한다는 군사,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강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슬람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하고 이슬람과의 무역을 확대하길 원했습니다. 8세기 부터 지속된 "레콘키스타"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교도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라는 종교적,군사적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상태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그들 이교도와의 무역과 교류에 익숙하고 또 그들과의 무역을 확대하길 원하고 있던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되는 욕구는 포르투갈 내의 각기 다른 세력들의 이익을 충족시키 위해 발생되었고 그들의 욕구는 포르투갈이 해외로 진출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을 주도한 세력들은 누구이고 또 그들은 왜 해외진출을 꽤한 것일까요?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을 주도 한 세력으론 "국왕""성직자""귀족""상인"이 4가지 세력이 꼽힙니다. 이중 "성직자"는 카톨릭의 주교,사제들로서 이들이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던것은 종교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백년간 지속된 "레콘키스타"운동을 북아프리카로 확장하길 원했지요. "국왕"(국왕 개인이 아니라 국왕파의 세력)이 해외진출에 적극적이었던것은 이러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영토확장"의 욕구,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차지 함으로써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가 기독교-이슬람,유럽-아프리카로 굳어져 분리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는 "상이"하면서도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베리아-북아프리카는 한몸이었던 것 이지요. "후 옴미아드 왕조" 이후 "알모라비드" "알모하드" "무와히드"등 여러 이슬람 왕조는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에 걸쳐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고 이를 기독교 세력은 지난 수백년간 조금씩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여 이슬람 세력을 남쪽으로 몰아낸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소멸"당한 것이 아니고 단지 "남쪽"으로 밀려난 것 이었지요. 고로 이베리아내 왕국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이베리아 내의 기독교 세력을 확대하고 보존하기 위해 "레콘키스타"는 북아프리카로 까지 확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로 진출할수도 있으니까요. 포르투갈의 국왕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영토확장","자국안보"를 위해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세력인 "귀족"과 "상인"들은 당시 어떤 입장 이었을까요? 왜 이들은 해외진출을 지지하였을까요? 이들의 입장을 파악하려면 먼저 당시 포르투갈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비스 왕조 성립이후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 상인계층이 성장하고 귀족 계급은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1358년 포르투갈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왕 돈 페르난도가 사망하는데 그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었고 외동딸인 베아트리스 공주는 카스티아의 국왕 돈 주앙1세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카스티아의 '돈 주앙1세'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주장하고 나서지요. 귀족층은 이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상인계층은 이를 반대합니다. 포르투갈보다 훨씬 봉건적인 카스티아와 포르투갈이 결합하여 포르투갈내에 봉건적인 규제가 강화되면 상인계층에게는 손해니까요. 그래서 상인들은 국왕의 이복 동생이던 아비스 기사단장 '돈 주앙'을 지지합니다. 그후 권력 다툼(1385년 궁정회위에서 아비스 기사단장 돈 주앙이 왕으로 선출되고 이에 반발해 카스티아의 돈 주앙1세가 군대를 동원하여 알주바호타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아비스 기사단장 돈 주앙이 승리를 하여 왕으로 등극) 끝에 상인층이 지지한 돈 주앙이 왕위에 오르고 아비스왕조가 들어서지요. 아비스 왕조는 태생이 귀족들의 반대와 상인들의 지지하에 생겨났기에 자연히 상인들이 권력을 쥐게됩니다. 이를 토대로 "상인"들은 "왕"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강화, 굳건한 절대왕정이 포르투갈에 들어서고 1446년 기존의 봉건적인 법전대신 새로운 아퐁수 법전이 편찬되어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납니다. "상인계층의 상승과 기존 봉건 귀족층의 몰락." 이것이 당시 포르투갈내의 계급15세기 포르투갈 내부의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이 해외로 진출하는 주요 원인이 되는데 바로 타국이었다면 해외진출에 미온적이었을(예를 들면 당시 프랑스의 경우 귀족이 상업에 관여하면 벌금형에 처해졌다) 귀족계층이 대거 해외 진출에 참여하게 된것이지요. 국내에서 지위를 상실한 귀족계층들이 지위 상승을 노리고 해외 모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또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해 상인 계층의 지위가 상승되어 재정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 상인 계층이 "상업이윤을 찾아 북아프리카로 남하 하는 것을 적극 지지" 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오래전 부터 북아프리카의 중요 산물들, 예를 들면 금과 은, 상아와 노예, 말라게타 같은 향신료등을 교역하면서 이익을 보고있었는데 권력을 잡게된 상인 계층들이 북아프리카의 무역확대를 위해 해외진출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알주바호타 전투 전개도
원군으로 온 프랑스 기사들의 성급한 돌격으로 기병과 보병이 각개격파 당해 카스티아군이 패배하고 만다.-대항해시대 (2008, 주경철)
-바다의 도시 이야기 상,하권 (1981 시오노 나나미)
-금과 화폐의 역사 (1974 피에르 빌라르)
-스페인 포르투갈사 (2005 강석영, 최영수)
------------------
더러운 쿠닌이다 보니 2편은 언제 쓸지 막막하네요. 쩝.. 2편에선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의 전개와 포르투갈 특유의 무역방식인 "카레이라"와 "카르타스"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만....언제 쓸지...ㅜ.ㅡ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BACCANO 작성시간 10.10.04 포르투갈 4계급이 단결! ㅋㅋ
-
작성자▦무장공비 작성시간 10.10.04 오오 이거슨 개년...아니 개념글. 풍악을 울려라!! 부왘!
-
작성자[Sir]크핫공 작성시간 10.10.05 부..부왘!!!!!!!!!
-
작성자경기병여단 작성시간 10.10.16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왜 일어났는지, 막연하게 '오스만이 길을 막아서 새로운 교역로를 찾으러..'라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알고보니 참 흥미롭군요. 다음 편도 기다려집니다^^
-
작성자팽이 작성시간 10.12.23 우와...정말 좋은글이네요 자료 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