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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타토,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해외진출- (상)

작성자팔랑기테스| 작성시간10.10.04| 조회수1686|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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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눈망울촉촉 작성시간10.10.04 교과서에 충실한나에겐 힘든내용이다..ㄷㄷ
  • 작성자 VOCARLOID 時代 작성시간10.10.04 뭔가 윗분처럼 교과서에 충실한 제게는 엄청 힘든 내용이지만..이상하게 사회책에서 봤던 무언가 '답답한' 것의 해결점을
    찾은 듯 합니다. 좋은 자료 ㄳ
  • 작성자 Von Wallenstein 작성시간10.10.04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1. 왜 17세기 이후에는 향신료 무역의 비중이 줄고, 섬유무역, 기호품 무역이 증가한 건가요? 18세기 경제의 침체 때문인가요? 실제 네덜란드가 향료제도의 정향나무를 뽑아버려 정향의 산출을 줄이려고 했던 것처멀요.
    2. 그리고 약간 네타이지만 포르투갈이 카르타스, 카레이라와 같이 완전한 지배의 형식이 아닌 해적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한것은 포르투갈 국력의 한계때문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6 1-> 17세기 중반 이후 향신료 무역의 비중이 줄고 직물 무역의 비중이 증가하는 이유는 경기 침체라기 보단 "향신료의 과잉공급으로 인한 가격 하락"과 "유럽내 인도산 면직물 열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후추등의 향신료는 수백년간 동-서 교역품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기 무역품입니다만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와 영국 동인도 회사(EIC)가 아시아에 자리를 잡고난 이후 공급 과잉 상태가 되어 그 수익성이 크게 떨어졋습니다. 1620~1638년 후추 수입량은 250만 파운드였으나 1664년엔 620만 파운드. 1670년에는 무려 920만 파운드까지 치솟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격을 꾸준히 하락하는데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4 1660년대에 1파운드당 0.8길더이던 후추가격이 1680년대에는 1파운드당 0.28길더까지 떨어집니다. 뭐..덕분에 후추는 더이상 최고급 사치품이 아니라 대중적인 소비품으로 전락하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VOC는 향신료의 생산과 공급을 독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등 동분서주하나 대부분의 향신료의 경우 워낙 넓은 지역에서 생산이 되는데다 현지인들의 반발,타국 상인들의 저항과 밀수등으로 정향등의 몇개 품목을 제외하곤 독점할수 없었습니다. 여튼 17세기 이후 향신료의 수익성은 이전만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4 더불어 향신료란 것이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니라 기호품이기에 다양한 향신료가 공급되면 수요가 줄어들기 마련이지요. 대중화된 인기를 얻어 필수 향신료로 자리 매김된 후추를 제외한 나머지 향신료들의 소비량은 꾸준히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는데 일례로 정향의 경우 1620년 45~50만 파운드였던 유럽내 정향 시장의 규모는 1655년 40만파운드. 1740년 30만파운드로 줄어듭니다. 여튼 향신료 무역의 비중이 준건 "과잉 공급으로 인한 수익성하락"과 "유럽 내 소비의 하락"이 2가지로 볼수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4 섬유 무역의 비중이 증가한것은 아시아산 면직물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산 면직물이 유럽에 들어오기 이전 유럽인들의 옷감은 고가의 견,모직물과 저가의 마직물이었습니다. 면직물이 존제하기는 하나 그 수익성으로 인해 대부분 목면과 아마를 섞어서 만든 푸스티안 직물이 대부분이었죠. 근데 17세기 이후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가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가격도 싸고(애초 인도내 구입가도 싸고 대량으로 들여오면서 운송비도 비교적 저렴) 가볍고 품질도 최고급(당시 인도산 면직물의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인데다 세탁하기도 편하니 굉장한 인기를 끈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4 고로 인도산 면직물의 수입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1660년 20만필이던것이 1670년 57만필, 1680년 70만 7000필로 늘어납니다. 전체 무역중 직물무역의 비중 역시 1660년대 36%에서 1670년대 57%로 절반을 넘기지요. 여튼 기존에 가장 큰 무역액을 차지하던 향신료의 경우 수익성하락과 소비시장의 축소로 인해 그 비중이 줄고 소비시장의 증가로 인해 직물 무역의 비중은 커집니다.
  • 답댓글 작성자 팔랑기테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0.04 2. 포르투갈의 국력의 한계 때문이라 볼수 있겟습니다. 포르투갈 같은 소국(인구가 100만 정도에 불과한)이 인도양 전체를 지배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 니까요. 인도양 무역에 처음 진출 한 유럽은 포르투갈이지만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이전 부터 이 지역 해상무역은 이미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미 기존의 무역 체계에 새로인 참여한 이방인이었지요. 기존의 잘짜여진 무역 체계속에 평화로운 방식으로 끼어들기는 힘들고 전체를 상대할 힘은 없기에 포르투갈은 그들이 지닌 무력을 효과적으로 집중 투입해 몇가지 거점을 확보하는 형식으로 인도양 무역에 참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Von Wallenstein 작성시간10.10.06 감사합니다.
  • 작성자 BACCANO 작성시간10.10.04 포르투갈 4계급이 단결! ㅋㅋ
  •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10.10.04 오오 이거슨 개년...아니 개념글. 풍악을 울려라!! 부왘!
  • 작성자 [Sir]크핫공 작성시간10.10.05 부..부왘!!!!!!!!!
  • 작성자 경기병여단 작성시간10.10.16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왜 일어났는지, 막연하게 '오스만이 길을 막아서 새로운 교역로를 찾으러..'라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알고보니 참 흥미롭군요. 다음 편도 기다려집니다^^
  • 작성자 팽이 작성시간10.12.23 우와...정말 좋은글이네요 자료 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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