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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시리아의 역사 개괄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시간08.11.19| 조회수1295|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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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치우승천 작성시간08.11.19 뭔가 좀 복잡한 역사군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오랜 대립... 그리고 예외로 이스라엘은 강국이었던 건가요? 다윗 왕이 저런 강자일 줄이야... 성경에 나올 만 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넵먼칙힌. 애당초 이스라엘에는 다윗 이전까지 제대로 된 의미의 정치지도자가 없었습니다-_-;; 12지파간의 느슨한 혈연적 관계로 엮인 연맹체 정도였쥬. 걸출한 사사나 제사장들이 지도자로 등장할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들의 지배력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형태였습니다, 유명한 사무엘이나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리고 다윗이 바로 유다 세습왕조의 1세로 제대로 된 형태의 왕국을 세웠다지만 다윗 역시도 그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바가 큽니다.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마활님은 사울만해도 상당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을 견지하시는데 저는 좀 다른 의견인게-_-;; 일단 이스라엘의 생존에는 선민사상이 강한 유대교가 강한 보호기제로 작용했는데 이스라엘은 제정분리 사회였고(기본적으로 왕에게 신에대한 제사를 집전할 권리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선지자나 제사장 따위를 임명할수 있는 권한도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삐딱선 타고 여론을 호도하면 왕들이라도 좀 짜증나는 상황이 펼쳐지곤 했스빈다. (사무엘과 사울의 반목처럼)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그리고 애당초 이스라엘 12지파들은 [왕]이라는 물건을 그때 처음 가져보는지라 왕가에 대한 충성.. 같은 개념은 막장갤의 개념만큼이나 없었쥬. 12지파 내부에서도 반목이 더러 심해 수틀리면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그랬습니다 (베냐민 지파 몰매 사건이라던지) 다윗 생전에도 당장 압살롬의 반역사건에서 지파간의 분열의 단초가 보이고 솔로몬 사후에는 아예 왕이랑 쇼부쳐보다 안되니까 북부 10지파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쥬(..)
  • 답댓글 작성자 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8.11.20 이스라엘도 사실 제정분리가 아니었습니다.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선지자나 제사장을 마구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사항이지만, 이스라엘-유대 왕국의 제사장 집단은 페르시아 종교 제체를 본받아 체계화한 후기 로마 제국의 성직자 집단만큼의 조직화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 세력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8.11.20 무장공비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도 맞지만 그건 일반론에 해당할 뿐이지, 세부적인 면에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사울 같은 경우는 제사장이고 나발이고, 여론호도고 나발이고, 마음만 먹으면 심지어 사무엘조차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겨우 집권 2~3년만에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성서에도 나옵니다.) 이는 사울이 놀라운 빨치산 활동의 성공을 통해 플리셋에게 처음으로 완벽한 승리를 여러 차례 가져다준 전쟁 영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도시 하나를 반역죄를 뒤집어씌어 홀로코스팅했는데, 그랬는데도 제사장 집단이 사울에게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8.11.20 12지파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장공비님 말씀과는 약간 달리, 그들이라고 왕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울 이전에도 왕이라 할만한 자가 없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지지를 받는 임금이었고, (어쨌거나 초대 왕이었으니까), 유다 지파에서도 누명씌우고 쫓겨다니는 다윗을 도와주질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울이 살아있을 때는 그랬습니다. 사울과 그의 유능한 아들들이 다 죽고 바보 므비보셋이 임금이 되니까 그때는 얘기가 달라집니다만, 무장공비님이 말씀하시는 이유와는 약간 다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하여튼간에 한가지 확실한건 당시 초대 이스라엘의 왕권은 개인의 역량에 많이 의존하지 사회 시스템 자체에서 나오는 물건은 아니었쥬;; 그러다 보니 왕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 해주지 못한다거나, 능력이 없는 바보라거나(므비보셋 처럼..)하면 좀 쉽게 이탈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좀 다른 예지만 사무엘 같은 경우도 사무엘이 늙고 아들들은 똘끼 충만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사무엘에게 아예 왕을 추대해 달라고 부탁하쥬-.-;;; 그 결과물이 사울.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제정분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은 약간 의아한게-_-;; 이스라엘의 왕들은 제사를 집전하거나 종교지도자(제사장,선지자)을 임명할 권리가 공식적으로 '전혀'없었습니다. 그런 경향이 보이는건 최소한 북왕국 유다가 떨어져 나간후쥬. 그나마도 아무렇게나 입맛에 맞는대로 제사장을 세웠다가는 상당한 여론의 압박을 받습니다(제사장 가문은 레위 지파 뿐이었으니까유) 심지어 훨씬 후대인 아합왕대에 이르러서 조차 선지자 후보생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한 명의 스승에게 교육을 받는 일종의 사설 학원 생활을 했습니다.(켈트문화권의 드루이드나 바드와 비슷한 교육방법이쥬)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물론 마활님이 말씀하신대로 유대교의 종교 조직이 좀 허술한지라-_-;; 왕들이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해서 상당수 종교지도자를 회유하거나 어용 선지자를 만들순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초기 이스라엘에서 신권(神權)이 왕권에 귀속 된 적(앞서서도 강조하지만 왕이 선지자를 임명한다거나.. 말이쥬..)은 없는것 같습니다. 사울의 경우에도 신권이 왕권에 귀속 되었다기 보단 사무엘은 늙었고 사무엘 아들은 바보샛키들이고 사울의 능력이 워낙 걸출하다보니 신권이 왕권에 압도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 하겠지융
  • 답댓글 작성자 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8.11.20 그마저도 점점 체계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는 이미 사울 왕때부터 단초를 보이던 사항이었지요. 제정 분리라면 저도 단어 사용을 좀 잘못했습니다만, 제가 말하고자 햇던 점은 어디까지나 고대 이스라엘 왕국기의 사제 조직은 로마는 고사하고 중세 서양의 그것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힘이 미약했다는 그겁니다. 신권이란 것 자체가 존재치 않았고, 대놓고 임금 면전에서 삿대질해가며 임금을 욕했던 엘리사나 엘리야는 신권 조직 체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민중 운동가나 비밀 결사 우두머리에 가깝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물론 사울 왕가가 계속 내려오면서 계속 왕권을 강화했다면 모르겠지만 사울은 아들과 전사해버렸고... 그나마 세습왕조를 연 다윗왕가도 3대만에 반란크리 맞았으니 좀 안습이군요-_-;;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음 확실히 이스라엘의 사제 조직의 중추는 레위 지파이지만 애당초 가나안 정벌이후 지파마다 땅을 분배 할 때 레위지파 몫은 없었쥬..; 그리고 조각조각 나눠서 11지파에 흩은후 사제업무를 보게했고. 댓가로 지급반은것이 바로 십일조였으니까요..... 이런 시스템이니 사제 계급들이 한 곳에 모이거나 경제력을 쌓거나 하는 일도 힘들고-_-;; 역시 돈과 권력은 정비례하니.. 고대 이스라엘 사제계급이 그런면에서는 힘이 미약했다는데는 동감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08.11.20 ps. 아 참 위에서 3번째 리플에서 충성에 대한 얘기는 [왕]개인이 아닌 [왕가] 즉 가문에 대한 충성이란 의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섬기던 왕의 아들이니 충성한다라는 세습왕조의 기본적인 필요조건 말이즁) 그리고 선지자를 가르치는 사설학원 얘기는 [그런 고도의 조직이 있었다]가 아니라 [그런 조직이 수십개가 산재해 있어서 일일히 왕권으로 구속하는게 힘들다]라는 의미로 거론한 얘기였습니다. 엘리야 학원이 진짜 막가파였습죠 ㄲㄲ
  • 작성자 롱기누스 작성시간08.11.19 혹시 궁금한게 있는데 기병이 아시리아에서 최초로 창시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 게이볼그 작성시간08.11.20 그런 설도 있습니다. 앗시리아 부조 중에 전차부조->말 한필에 두 사람이 타는 부조->기마병 부조가 등장하는데, 이를 전차에서 기병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상태로 보는 의견이지요. 물론 이것만 가지고 앗시리아가 기병을 최초로 사용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유목민들도 있으니까요. 단, 유목민들도 앗시라아에서 영향을 받아 기병을 사용했으리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적어도 정주국 중에서 기병의 효용을 깨닫고 활용하기 시작한 초기국가 중 하나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롱기누스 작성시간08.11.20 으음... 그렇군요. 어느 책에서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최초로 말을 길들였는데 그게 타는 용도로도 쓰인 것 같다 해서 의문점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부조라면 무려 궁기병 부조도 있습니다. 제가 직접 대영박물관에서 봤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Τιταυιζ 작성시간08.11.21 앗시리아의 첫 기병사용의 증거가 투쿨티-니누르타 2세때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기원전 9세기의 물건이라니 기병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군욥... 스키타이인들과 앗시리아 사이의 관계는 에사르하돈의 딸과 스키타이인들의 지도자였던 바르타투아 Bartatua 와의 혼인.. 그리고 앗시리아의 멸망등등에서 여러 갈래로 드러난다지요;;
  • 작성자 크라테로스 작성시간08.11.21 갈대아 인들이라는 명칭이 함무라비 시절에도 있었던가요? 전 이후 신 바빌로니아 나왔을 때 생긴 명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답댓글 작성자 Τιταυιζ 작성시간08.11.21 제가 읽은 책에는 칼데아인 Chaldeans 라는 명칭은 신앗시리아 이전부터 쓰였다고 합니다만...함부라비 시절엔 없었던 듯... 출처: http://cafe.daum.net/shogun/1Db/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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