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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파르티아는 페르시아가 아니었다 (2) 대신라 혹은 원나라가 오버랩되는 분리 정책

작성자마법의활|작성시간13.03.20|조회수810 목록 댓글 16

   여러 책들에서

 

사산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이민족, 페르시아 아닌 놈들이라고 욕한 걸 그냥 프라퍼갠다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데 이거 상당히 잘못된 견해라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일단 그 반례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요.

 

 

  유목 민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러시아 학자의 책을 읽어보니,

 

파르티아인들이 초기에 옛 페르시아 지역을 점령할 때 자기네는 따로 유목민 관습처럼

 

막사 지어놓은 다음 거기서 살고 나머지 피정복민들은 도시에 살게 했다고 하더군요.

 

 

 마치 원나라가 초반에 중원 지역 들어왔을 때 했던 방식하고 오버랩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아 출신이 아니면 왕중왕 및의 왕은 절대로 못하고,

 

당연히 중앙 관직에도 진출을 못하며,

 

파르티아인 아닌 자가 노릴 수 있는 데란 기껏 일종의 지방 향리 자리..... 이걸 "기사"라고 합니다만

 

솔직히 제가 보기엔 지방 향리 딱 고정도입니다.

 

 

   뭐 이전 셀레우코스조 때와는 달리 그리스인들이 거들먹거리는 행태는 확실히 사라졌습니다만

 

 파르티아인들이 딱히 옛 페르시아인들을 같은 이란계라고 특별 대우해줬던 예도 없습니다.

 

 

  여하튼 요즘 있는 몇 안 되는 책들과는 달리, 파르티아인들이 어느 정도 완전히 동화되는 건 거부하거나,

 

비파르티아계가 정권의 핵심에 들어오는 걸 막거나 했다는 여러 정황들이 보입니다.

 

 이러니 파르스 지역을 비롯한 각지의 페르시아인들이 이를 갈 수 밖엔.

 

  .........

 

  여기서 연상되는 게 있는데, 다름아닌 신라 - 고려의 관계.

 

  백제, 고구려 유민들은 대신라의 치세에서 물론 신라화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칸막이 치는 정책 탓에

 

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고, 지방 VS 중앙 정부의 양상이 되자 아예 독립 운동을 하는 쪽으로 나가버리게 되죠.

 

  마찬가지로 파르티아에서도 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정통 페르시아계임을 자처하는 사산 가문이 파르티아를 타도할 때 어느 정도 호응이 있었고

 

또 그만 못했지만 반발도 컸던 건 이런 상황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흔한 주장으로 파르티아 귀족 7가문과 사산조 페르시아 귀족 7가문이 거의 일치한다 고로 파르티아-사산조는

 

그냥 왕조 교대일 뿐이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솔직히 이런 주장은 완전 틀린 얘기 같습니다.

 

  사산조 시절의 귀족 7가문 중 정말로 파르티아 때부터 뿌리가 올라가는 가문은 기껏 둘 밖엔 없거든요.

 

 그럼 나머지 다섯 가문들은 죄다 교체기 때 올라온 가문들이고 기존 파르티아 7가문 중 5가문은 고대로 작살이 나버렸다는

 

얘긴데,   아걸 두고 단순한 왕조 교대일 뿐이다?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다른 얘기로 파르티아가 저평가되는 현상도 바로잡을 필요를 느낍니다.

 

파르티아가 로마에게  늘 수세적이었다곤 합니다만, 파르티아가 지배했던 영토는 로마만은 못해도

 

상당히 크고 생산력도 대단한 수준입니다. 

 

 적어도 전성기 로마의 절반 수준은 된다는 거죠. 헤헤 겨우 절반?   비잔티움 제국은 전성기 로마 절반 정도의

 

국력만 가지고도 지중해 최고의 강대국 자리를 이백 년 동안 유지했습니다. ;

 

  비잔티움 제국이  비록 지형 빨이었다곤 하나  경제나 국토 규모가 거진 4배에 달하는 이슬람 제국의 맹공도 잘 견뎌내고

 

가끔은 이슬람 제국이 버거울 정도로 몰아치기도 했다는 점을 미뤄보면, 파르티아가 전성기 로마에 비하면

 

본디 캐쩌리에 불과했다는 것도 영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로마가 잘 싸우기도 했지만

 

파르티아 자신들한테 문제가 더 컸던 듯.  뭐랄까, 좀, 파르티아도 저 원나라나 신라처럼 어떻게 좀 체계적으로 규모 있게

 

지방 통치 제도를 잘 만들었어야 되는데....(모 작가는 이렇게 관료주의 하면 나라가 망한다죠? ㅋㅋ)

 

 망하는 순간까지 그런 걸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튼 요약하자면, 파르티아는 이란사에서 대강 신라 정도 위치라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이민족 몰아내고, 공동의 문화적 요소로 이란족이 통합될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나  결국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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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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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3.03.20 마법//오죽하면 톱카프사라이도 건물배치가 유목민 냄새가 난다고 하죠 ㅎㅎ
  • 답댓글 작성자코쟁이24 | 작성시간 13.03.21 셀레우키아가 정복된 게 BC 130년경이고, 크테시폰에 성벽이 건설된 게 AD 1세기쯤이니 늦기는 좀 늦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최하늘 | 작성시간 13.03.22 몽골 제국 내부의 울루스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카안 울루스(원조)의 황제들만 해도 궁궐은 지었지만 막상 생활, 회의 따위의 일은 모두 궁궐 정원에 세워놓은 거대한 막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지요.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3.22 훨씬 후대에 청 러시아 중개무역으로 재산을 모으던 사하족도 마찬가지

    요즘에 구리세공으로 돈좀 만졌다는 한 집시일족도 마찬가지


    확실히 뭔가 공통분모가 있긴 합니다-_-;;;;;
  • 답댓글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22 어쨌든 결론은 하나입니다. 파르티아는 페르시아가 아니고, 하카마니시야 제국의 중추를 이뤘던 파르스인들은 파흘라바를 결국은 타자로 여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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