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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흥하고 망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

작성자캐리어|작성시간10.03.17|조회수2,173 목록 댓글 51

이 자료는 퍼온걸 다시 약간의 수정을 거친겁니다. 

 

 

 

- 역시 조악한 지도가 탄생했군요. 제대로 된 이미지를 찾지 못해서리 대충 말로써 설명드립니다.  포르투갈, 에스파냐 - 오스만투르크- 인도- 중국- 그리고 우측 상단이 몽골- 여진족 입니다. - 

  1. 신대륙 은광산 개발
  15세기 말 유럽은  인도와의 독자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포루투갈과 에스파냐 그리고 지중해 근해 교역의 마지막 황혼기를 누리고 있던 이탈리아 교역 도시국가들이 양 축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포루투갈과 에스파냐 양국가의 경쟁적 신항로 확보는 아프리카 남단, 서인도 발견, 인도항로 개척, 신대륙 개척등의 성과로 나타가게 됩니다. 그러나 인도와의 직접교역이 커다란 이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포루투갈의 경우 후추 함대를 겔리온 5대정도를 파견한다고 하면 후추를 싣고 리스본에 안착하는 함선은 1~3척에 불과 했습니다. 그나마 도착하는 함대의 후추등의 이익덕분에 약간의 국가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정도로 해석하시면 될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포루투갈과 에스파냐가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는 신대륙으로부터의 막대한 은의 유입때문일 것입니다. 
 멕시코와 브라질의 식민지 은광산으로 부터 들어오는 은의 양은 당시 전세계 은 생산의 80% 이상 이었으며, 한해 약 1만톤 이상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두 해양국가는 교역국가로서 발돋음 하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은의 상품화 
 지중해발 경제공황의 타개책으로 신항로 개척에 나선 두 해양국가는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을 기반으로 인도 항로에 대한 독점적 위치를 다지려고 합니다. 두 국가는 유럽상인들을 대표하여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오스만 투르크를 배제하고 인도와 동남아에 독점적 상권 형성에 성공합니다. 자연스레 두 국가는 유럽의 관문을 자처하게 되고, 지위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나 잉글랜드는 양국가의 오랜 분쟁과 국가내에서의 왕권이 성숙하지 못한 관계로 해양으로의 진출이 용이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두국가만이 대규모 함대를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도, 동남아에서 교역할 상품의 부재였습니다. 15~6세기의 유럽 문화, 기술수준은 중동, 인도, 중국에 비해 열등한 수준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들과 교역할 수 있는 상품이 없었습니다. 중동, 인도 인들은 자체적인 면직물 기술을 이미 기원전 부터 발전시켜 오고 있었으며, 기타 공업, 공예 기술은 유럽에 비해 차원이 다른 상품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해양국가는 신대륙에서 들여온 은을 기반으로 교역무역을 하였습니다. 즉, 당시 유럽의 화폐로 동용되던 은을 가지고 교역에 나선것입니다. 

 3. 은의 적체화 심화와 유동성 과잉

 두 해양국가 입장에서 넘치고 넘치는 은을 가지고 교역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베네치아의 초기 교역 상품이 제노바, 밀라노의 금, 은 이었고, 두 해양국가도 은을 가지고 교역해서 중계무역 한다면 엄청난 이익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던 것은 당시 세계 정치 상황이 베네치아의 발전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명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명왕조의 문제라는 것은 건국후 80년 가량만 주도적으로 몽골, 여진족과의 외교우위를 다졌던 것입니다. 영락제 사후 명왕조의 북벌은 모두 실패하였고, 황제마저 포로로 잡히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명왕조는 분쟁국가인 몽골과 굴욕적인 화친을 조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진족에 대한 엄청난 자금지원을 하였습니다. 게다가 몽골의 북경 침공에 경악한 나머지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도 병행하게 됩니다. 이 일련의 조치에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며 당시 명나라의 화폐였던 은이 대규모로 투입됩니다. 

 명 제국내에 은 광산이 있지만, 산출되는 양은 미미합니다. 즉, 은으로 경제를 지속하려면 외부로 부터 은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야 합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일본에서 은이 수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서쪽 국가로부터도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됩니다. 그 은의 산출처는 대부분 신대륙에서 건너온 은들이었습니다. 

 신대륙에서 건너온 은을 100으로 봤을때, 100 중에 95가 오스만 투르크, 인도로 건너가고, 그 중에 절반 이상이 다시 중국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즉, 당시 전세계 은의 7~80%가 중국으로 흘러갔다고 학자들은 설명합니다. 그리고 중국이 보유한 은의 80%이상이 북방 군비와 이민족 외교비용으로 들어갑니다. 학자들은 당시의 은의 분포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비유합니다.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는 교황도 아니고 술탄도 아니고 중국의 황제도 아니다. 몽골인과 여진족, 명 북부 군벌들일 것이다." 

혹은  " 당시의 중국 북부는 은의 블랙홀이다" 
 
  여기에 흘러들어간 은은 들어갈뿐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은의 적체화는 심각해집니다. 여기에 모인 은은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 한 이후에 풀리게 되죠. 청나라의 건국주체가 만주족과 중국 북부 군벌이니 말이죠. 

 은 적체화의 심각화는 화폐경제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결국 유럽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유동성 확보에 실패합니다. 결국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경제공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신대륙의 은은 그것이 도달한 모든 곳의 물가를 큰 폭으로 뛰어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가격혁명'을 일으킨 거지요. 돈은 그 자체로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회 전체에 존재하는 상품의 양은 일정한데 사회 전체에 존재하는 돈의 액수만 늘어난다면 결과적으로 당연히 상품의 가격이 올라가게 됩니다.

 귀금속도 마찬가지죠. 당시엔 금, 은이 곧 돈이었으니까요. 신대륙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온 결과 유럽의 물가는 큰 폭으로 뛰어올랐습니다. 특히 에스파냐에선 빵 한조각도 은화를 내고 사야 할 판이었죠.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고갈되고 가진건 은밖에 없는 에스파냐로서는 이런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쓰면서 외국 상인들(특히 네덜란드)에게 은을 고스란히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신대륙의 금은보화는 에스파냐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단지 물가만 올려놓고 빠져나가버린 거지요. 이렇게 물가가 올라버린 상황에서 은 수입이 중단되자 에스파냐는 꼼짝없이 파산하고 맙니다. 수 차례의 파산을 반복한 끝에 반세기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최강대국 에스파냐는 쭉정이만 남은 채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도 에스파냐만큼 심하지는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물가상승을 겪게 됩니다. 이는 유동성 과잉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결과로 경기과열이 생겼구요. 아무튼간에 화폐가 넘쳐나게 공급되면서 유통이 빨라지고 또한 상인계급의 자본축적이 가능해져서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 고전적인 자본주의 기원설의 하나입니다.

4. 잉글랜드의 성장과 신대륙에서의 후퇴
 잉글랜드의 사략활동은 익히 알고 있을것입니다. 신대륙으로 부터의 은 유입이 막힌 두 해양국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두 해양국가 대신 잉글랜드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되고, 그 들 역시 은 적체화 현상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두 해양국가와는 다르게 중국이 청나라로 바뀌면서 적체화 현상이 풀리게 된다는 점이죠. 시대의 흐름이 아마 잉글랜드의 편이었던거 같습니다.

 

출처 - http://dhoguide.com/age_discovery/1372561/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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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10.03.23 조선의 조세를 석으로 하면 250~350만 석 정도입니다. 은과 석의 변환은 기억이 까리하니 패스. 대동세, 전세, 삼수세 등을 다 포함했을 때의 이론상 수치이고, 궁방전 그딴거 생각안했습니다. 그거 빼면 좀 더 떨어질듯효.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10.03.23 중국식으로 환산하니 은으로 1천만냥정도 되는군요. 물론 중국식으로 변환시. 16세기경 은가로 계산이고, 18세기 19세기는 까먹었다능... 군대에 있으니 머리가 굳어가는 것은 좀 용서해주시고; 잡세는 귀찮아서 모두 제외임다. 그리고 이론상이고 실제 연구는 읽기 귀찮고 군대라서 패스. 군바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떠넘기지 말라능...
  • 답댓글 작성자오로쿠트 | 작성시간 10.03.23 16세기 통상 은대 미곡비는 은 1냥- 미곡 2석가량이 평균이었습니다. 조세수입의 경우 쌀 4석을 은 1냥으로 대납하도록 했는데, 쌀에 비해 운송비등이 소모되지 않은것을 감안하는 듯 합니다. 순수하게 16세기 기준이면 조선의 조세 300석은 1:2로 계산하면 150만냥 즈음입니다.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10.03.23 조선인삼 국산화는 솔직히 필요했던것은 사실이나, 그당시 인삼의 무역비율은 20%임다. 대부분 중국산 생사던가, 직물인가 까리한데, 그거 판매로 60%임다. 20%도 솔직히 상당한 수치지만 중계무역의 비율과 비교하면-_-;;; 뭐 인삼의 재배가 본격화되지 않은 17세기 후반 기준이니 18세기는 또 다르겠죠. 인삼은 베트남에도 건너가서 황제께서 성은(?)을 베푸는(?) 수단중 하나로 활용된 센스. 인삼도 그냥 인삼이 아닌 고려인삼으로-_-;; 인삼무역은 생각보다 무섭습니다.;
  • 작성자캐리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7.16 헐.. 내 글이 요기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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