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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으로 흥하고 망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

작성자캐리어| 작성시간10.03.17| 조회수2142| 댓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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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오로쿠트 작성시간10.03.18 원래 전근대 사회에서 국제 교역상 중요한 상품군이 주로 기호품, 의류가 주축이고 공산품은 비중이 미약하죠. 그런데 유럽은 기후환경상 다른 문명권에 먹힐 기호품이 자랄 턱이 없고, 의류 역시 대규모 수공업이 가능한 인도나 중국에 경쟁력없음(ㅡ,.ㅡ) 그나마 유럽만의 특산품이랄만한게 모직물인데 이것도 안먹힘;; 남은건 공산품인데 이건 문명 수준이 대등한 인도나 중국, 아랍등에는 역시 안먹히죠. 총이나 대포는 팔만하지만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니;;
  • 작성자 오로쿠트 작성시간10.03.18 당시 은의 수채구멍은 중국, 금은 인도로 흘렀죠. 사실 유럽이 아메리카라는 은셔틀(ㅡ,.ㅡ;;)을 그렇게 열심히 털었던 것도 이들 문명권과 교역할 상품이 없어서 현찰박치기 하는 수 밖에 없었기에 ㅡ,.ㅡ;;;;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중국과 교역할 상품이 없어서가 아니라 중국이 끝내 은만을 기축으로 고집했기 때문에 중국내의 은수요는 항상 모자랐고 고로 중국내의 은시세가 다른 지역보다 높았기 때문에 상인들 입장에서 중국으로 은을 들고 가는게 무조건 이익이었기 때문이죠.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은의 구매력 기준으로 치면 중국내에서 은의 구매력은 타지역보다 최소 30프로이상의 구매력을 거의 전시대에 걸쳐 확보할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차이조차 은시세 절상을 거의 하지 않은 중국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였다랄까요. 은부족현상을 해소할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은 중국정부가 은화의 가치를 실질적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 것은 먼저 중국정부의 조세수입(=은화획득량)의 절대적 감소를 의미하고 둘째는 화폐가치 상승으로 인한 디플레, 자세히 말하면 은자를 지금을 보증으로 발행된 민간신용화폐(무협지의 전표같은 것)들의 발행인 또는 발행기관으로의 은자지급압력에 의한 일시적 전황(실지로 몇번 발생했음)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에 대한 우려와 그러한 신용화폐를 발행하는 상인들의 로비에 의해서(=은자의 소폭상승이라도 후에 채권청산시 실가손실발생) 은화의 가치는 필요한 절상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억제되었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중국으로 세계의 은이 몰리는 것이었으니 당시의 중국은 꽤나 대단했었다고 말할수 밖에요.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사족으로 그러한 중국정부의 비현실적인 방만한 재정운용이 결국 청몰락의 이유가 됩니다. 내부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끝내 하지 않은 은가치절상에도 불구하고 은가치는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었고 고로 청의 고위관료들은 일단 가지게 되면 알아서 재산을 불려줄 은을 가지기 위해 조세시 은자의 가치재평가를 끝내 해주질 않습니다. 이 것이 중국의 최대교역국이었던 영국의 금본위제채택으로 인한 패러다임변화에 직면하자 급격한 상황악화에 직면한 것인데, 그 전개과정은 이렇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통사의 동양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편무역이 중국을 흔들었다거나 영국이 아편무역을 통해 중국을 흔들었다는 관점은 청말기 청정부의 공식적 입장(우리가 새된건 저 백인놈들 때문임)과 하등차이가 없는 관점이구요, 금본위채택을 채택해 은본위하에서 중국의 공산품(=직물)이 전세계의 공산품을 구축해버리는 시스템을 극복하려한 영국의 시도는 자국산업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었죠. 문제는 아편인데 실상 이문제는 이렇습니다. 영국이 금본위를 채택하기 전에는 은자의 근본적 시가차이에 의해 중국의 농산물과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진작되어 경기상승이 유발되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은자는 둘째치더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라도 경기상승으로 인한 신용의 증가로 인해 중국경제의 화폐수요를 (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충당할수 있었던 것이 영국의 정책변화로 무역수지에 의한 은유입의 감소+경기축소로 인한 신용의 축소로 이어지자 실물은에 대한 급격한 수요라는 현상에 직면, 경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화폐조차 부족해져 폭삭 내려앉은 것이죠. 그리고 아편에 대한 청의 비판은 그런 은부족현상에 대한 변명을 비겁하게 외국에 돌린 것밖엔 되지 않은 것으로 실제 아편으로 인한 중국에서 외국으로의 은유출이 있었다하더라도 그 폐혜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중국내에서 은자의 시세를 현실화하여 은자당 아편의 구매량을 늘려줌으로써 은의 유출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청정부는 그 것을 끝내 하지 않았거든요. 이는 상품수지의 악화역시 줄일 수 있는 길이었는데 청정부는 그 것을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 혹은 거시경제야 어찌 되건 말건 이미 중국인이 가진 그 것을 털어먹으려구요. 쉽게 예를 들어 말하면 만약 청말에 은자의 가치를 10배정도 절상했다면 먼저 경제에 필요한 은의 최소수요가 10배로 줄어 은부족의 근본적문제가 해결되며 아편시세역시 은자대비 매우 싸져버려서 은의 유출이 줄거나 아니면 수지에 맞지 않는 아편의 공급이 줄던지 둘중하나가 됐을겁니다. 더불어 설사 금본위하의 영국상인이라 하더라도 중국으로의 은무역을 계속할 큰 매리트가 생기는 것이었겠죠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그리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정부는 그 어떠한 절상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ㅠ.ㅠ 왜? 은화가 10배로 절상됨가 동시에 세수가 주니까요. 은자 10냥 세금으로 내던거 1냥만 내면 되니까요. 농민이라면 농산품생산량을 은자로 책정하는 것이니 쌀 1가마니 1냥이 10분의 1냥되는 것이니 세금은 10냥내던거 1냥이 아니라 10분의 1냥만 내면 되는 것인데 그걸 못견뎌서 개혁을 안한거죠. 그 것을 단지 절상을 하냐 안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절상이 순리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청말의 주민들은 상인이라면 본래됬어야 할 은가치와 당시은가치 차액분만큼 1차산업종사자라면 자신들의 생산물가치액의 실가차로 그 차액분을 제곱하여 청조의 화폐정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책의 실패를 세금으로 다 내뱉았단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상인은 1냥만 내도 될꺼 10냥내고 농민은 1냥낼꺼 100냥뱉어낸거죠. 고로=>청은 망한거고 아편은 정말로 비겁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아편무역과 관련한 객관적인 관점은 당시 영국 및 서방의 언론등에서 다루었던 바와 같이 아편무역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 아편전쟁의 발발과정의 추악함에 있는 것이지 아편무역자체의 해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되려 이 문제에서 청과 영국의 복잡한 입장차를 고려하면 아편전쟁은 아편이 전황(=돈부족)의 원인이며 나아가 외국인이원인이라는 청정부의 관점이 당시 중국인들에게 씨알이 먹히게끔 한 성격을 지니게 되기 때문에
  • 답댓글 작성자 DireK 작성시간10.03.21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은 경제실패의 모든 원인을 아편에 돌릴수 있게한 청조로서는 최고의 생명연장샷이고 그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뻔한 갈등을 예측하고도 임칙서가 임관된 점이라든가 전쟁기 청조의 미지근한 대응이나 전쟁발발과정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하게 제시된 외교적해결책등은 청조가 오히려 전쟁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하는 심각한 시사점을 남기게 되죠.
  • 작성자 사탕찌개 작성시간10.03.20 이와같은 상황을 현대에는 어떻게 적용할수 있을까요?
  • 작성자 도시의유목민 작성시간10.03.20 지금 그 은들은 어디에?
  • 답댓글 작성자 앨런비 작성시간10.03.20 지금 그 은들은 헐값에 장신구로, 또는 각국의 은행에 수면.
  • 답댓글 작성자 ▦무장공비 작성시간10.03.20 소모재가 아닌 은을 너무 파내서 은값이 떵ㅋ값ㅋ 된거죠. 단 은은 전기전도도가 굉장히 높고 전성과 연성(잡아 늘이는 성질과 두들겨 펴는 성질)이 우수하며 오염물을 분해하고 살균을 하는 능력(이걸로 은나노 후라이를 까기도 하지만-_-)도 있기때문에 공업적 의학적 응용 범위 또한 오늘날에는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0.03.22 아편이 은을 청나라의 은을 빨아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편중독자의 증가추이를 보면 확연해집니다. 1800년도 초반의 중독자는 약 10여만이었지만, 1900년도 초에는 무려 4천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청나라의 아편수요와 유출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ㅡㅡ; 1814년부터 1850년까지 약30여년간 중국에서 유출된 은의 양은 중국 전체화폐량의 11%에 달했고, 이런 화폐부족으로 중국의 경제는 몰락합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은과 동전의 교환비율을 안정화하면서 경제를 지탱했는데, 대량의 은이 유출되면서 은의 가치가 '폭등'한 반면 일반인들의 주요한 지불수단인 동전의 가치가 '폭락'하게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0.03.22 동전가치의 폭락은 물가의 '폭등'을 유도했고, 이로 인해 서민경제가 파탄났으며, 동전경제를 기반으로 돌아가던 청나라 인민들의 실질소득이 감소로 이어지는 한편, 이 여파가 조정의 재정규모 감소의 결과를 낳게 되죠...ㅡㅡ; 청나라 말의 인구가 거의 5억정도 되는데, 그중 4천만이 아편중독자였으니, 이로인한 청나라의 사회, 경제적 폐해가 청의 몰락에 일조했음이 너무나 확연하고, 아편으로 인한 은의 대량유출은 청나라 경제의 교란과 파탄을 유도하면서 중국적 경제모델의 매커니즘을 박살내버렸으므로~ 아편으로 인한 청의 몰락을 거론하는 것이 '엄살'로 보이지는 않습니다...ㅎㅎ;;
  • 답댓글 작성자 델카이저 작성시간10.03.22 태평천국 진압한 증국번이 상소 올리면서 동화화 은화의 가치 차이를 줄이지 않으면 태평천국과 같은 반란이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했더군요..ㅡㅡ;

    4,000만이라.. ㅎㄷㄷ하군요.. 전국민의 10%가 중독자인가;;;;;
  • 답댓글 작성자 ★海東天子☆ 작성시간10.03.22 델카이저// 원래 아편은 진통제로써 상당히 귀한 '약재'였습니다. 그러나 1818년에 영국이 값이 비교적 저렴하고 중독성이 강력한 '파트나 아편'을 개발하여 중국에 풀어놓음으로써, 중국의 아편수입량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집니다! 이미 1839년 한해동안 들어온 물량이 [약1천만]의 중국인 중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어요...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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