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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의 복합적 세계질서

작성자키신저|작성시간13.08.06|조회수1,314 목록 댓글 12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의 국제질서는 서구에서 출현한 '근대국제질서' 또는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하죠. 격렬했던 30년 전쟁 끝에 체결된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국의 '주권(主權)'을 인정하며 적어도 명목상의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편주의'에 맞서 "그의 영지에서는 그가 종교를 정하니라(Cuis Regio, Eius Religio)"라는 기치 아래 유럽 각국의 '지방주의' 내지 '분권주의'가 승리한 것이죠. 


하지만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국제질서가 존재했습니다. 


이른바 중화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가 바로 그것이죠. 이는 주周나라 때부터 지속되어온 중원의 독특한 화이(華夷)관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중원의 華가 우월하고 오랑캐인 夷는 열등하다는 사고에 입각했습니다. 華族은 중원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두 가지 전술을 구사했는데 하나는 무력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봉과 조공"으로 대표되는 禮였습니다. 


무력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장기적으로 손해가 되기 때문에 중원국가는 대부분 "책봉과 조공"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에 의존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모색했습니다.


소위 조공시스템이라 불리는 이 체제는 기본적으로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시스템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각 국가에 이득을 안겨다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중원왕조는 조공국의 수를 늘림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고, 조공국은 책봉을 받음으로써 국내에서의 권위를 높이고 동시에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였던 중원과의 합법적인 무역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는 '禮'를 통해 이민족을 교화하고, 큰 것을 섬기고 작은 것을 어여삐 여긴다는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공-책봉 시스템은 정치-경제-이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화이관념에 입각한 천하질서라는 트렌드에 예외적인 존재가 바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입니다. 


대청제국(大淸帝國, Dai Cin Gurun)은 굉장히 미묘한 외교를 구사했습니다. 


그들은 본래 만주족으로 화이질서에 따르면 분명 夷에 해당하는 집단이었지만 중국의 자생적 지도자들처럼 천명(天命)을 받고 천하를 바로 잡겠다는 슬로건 하에 중원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중원을 차지한 그들은 중원왕조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역을 넓히는 세계국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위 지도를 보면 세계제국 청국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그들이 차지한 중원은 노란색으로 색칠된 중원의 18개 성이고 이 영역 너머로 그들은 중원 본토만큼이나 넓은 영토를 획득했습니다. 


만주족은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제국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들의 독특한 외교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 對 중화세계 외교


중원을 차지한 만주족인 기존 중원왕조와 중원왕조에 조공을 하던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유가(儒家)적 사대자소와 조공-책봉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특히 조선은 예로부터 중원왕조와 이념적 문화적 친밀성이 상당했던 나라여서 만주족의 청국은 조선에 대해서 스스로를 중원왕조의 연속으로 어필하고자 했습니다. 


2. 對 몽골세계 외교


청국은 중원을 재패하기 이전에 이미 강력한 무사집단인 몽골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게다가 몽골족의 수장인 "칸"의 칭호까지 따내고, 대신 몽골족과 통혼을 장려했습니다. 그런데 중원을 재패하고 나서 청국의 명군 '강희제'는 몽골의 마지막 왕국이었던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몽골세계를 청국에 강제로 편입시켰습니다. 본래 '칸'의 지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청국의 황제는 몽골세계의 '칸'으로서 권위를 보이기 위해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무력시위를 할 필요가 있었고 황제의 별장이었던, 그리고 박지원이 방문했던 열하가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열하에서 정기적인 사냥시위를 함으로써 청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몽골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몽골인들은 그러한 '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對 티베트 외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변방에 위치한 티베트는 과거에 찬란한 문화와 국력을 뽐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티베트마저 강력한 전투민족인 몽골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청국은 이를 기회 삼아 티베트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서 만주족의 영리함이 돋보이는데, 청국은 티베트의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보호자를 스스로 자처하고 달라이 라마를 청국 황제의 왕사(王師)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티베트를 보다 쉽게 지배할 수 있었고 동시에 라마교를 믿는 많은 몽골인들을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4. 對 외부세계(러시아) 외교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정지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라틴어로만 작성된 문서로 유명합니다. 한족의 한문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외부세계와의 매우 중요한 외교과정에 한족을 배제하고 본래 자신들의 정체성인 만주인으로서 외교를 수행했습니다. 이는 청국의 복잡한 외교를 보여주는 또 한가자의 사례입니다.  


만주족의 황제는 이렇게 천명을 받은 중원의 황제로서, 그리고 몽골세계를 재패한 칸으로서, 그리고 티베트 라마교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역대 그 어느 중원왕조도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적인 것으로 중화문명의 활동범위를 비약적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삼중의 구조로 되어 있는 청국의 세계질서 덕분에 중국은 과거의 중원이 아니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 청국만큼 능숙하고 복잡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런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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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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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하스페르츠 | 작성시간 13.08.06 근데 그렇게 치자면 당나라도 서북방 유목민족에 대해서는 천가한을 칭했던 전례가 있고, 원은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외교를 보여주기도 했죠. ㅡㅡ;;;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3.08.06 오스만도 저런 역활했는데.. 공식직함에.. 로마황제도 있고,,,
  • 작성자메이벨 | 작성시간 13.08.07 음...대국치고는 그렇게 복잡하진 않은거 같아요... 신롬이 더 복잡하지 않을까 하는;;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3.08.07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휩쓸 당시 중국인들한테는 안된 일이지만, 지금 중국 입장에서는 청나라가 명나라 먹어준게 정말 대대로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냥 한족 정권이 그대로 이어져서 현대로 들어왔으면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저 지도에 진한 노란색으로 칠해진 부분만 지배했을겁니다. 만주 따로 놀고, 몽골 따로 놀고, 신장 따로 놀고, 티베트 따로 놀고... 순식간에 약간 잘사는 인도급으로 떨어지내요. 미국 뛰어넘는다는 포부는 상상도 못할듯.
  • 답댓글 작성자메이벨 | 작성시간 13.08.08 그렇다고 하나 달라이라마의 티벳도 그렇고 계속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있는걸 보아 언젠가 분리되지 않을까 하네요..
    일본의 류큐는 완전히 동화됐는데 중국에선 분리주의가 매우 강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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