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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오스프리-엘리트> "고대 앗시리아" (1)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7.11.01|조회수1,724 목록 댓글 9

에.. 다른분들은 별 관심없어 하시는 부분만 공략하는 투철한 환빠 근성을 발휘하여 번역해 보았습니다 ㅠㅠ

본문 내용중 오류나, 아니면 단순 번역 문제이든가.. 여튼 이상한 점이 눈에 띄시는 분은 리플로 남겨주시면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요거 번역하다보니 갑자기 앗시리아에 대해 없던 관심이 생기는데.. 제가 가진 앗시리아 관련 서적은 이것뿐이라...

앗시리아 역사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있는 좋은 책을 아시는 분은 부디 좀 연락주세요..ㅜㅜ

 

서문.

 

근동지방은 기원전 10세기 말엽부터 기원전 7세기에 걸쳐 앗시리아의 역동적인 군사력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절정일 때,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집트 국경에서 이란지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치하는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허나 그 절정의 시기에서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 제국은 기이할 정도로 급격하게 붕괴되었습니다. 지나친 영토의 확장과 이에 따른 물자의 결핍, 여기에 긴 국경을 따라 벌어진 외부의 적의 공격과 내부 피정복자들의 저항등에 기인한 압박이 앗시리아의 왕좌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원전 612년에 그 수도인 니네베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잔인하게 약탈을 당한 후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앗시리아가 붕괴함으로서 승리에 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러 민족중 하나인 히브리인들의 선지자, "나훔" 의 말이 니네베의 성벽이 무너진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로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니라. (성경, 나훔 3장 19절)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인 기록과는 별개로, 앗시리아는 후세에 제국으로서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바빌로니아 왕국과 그의 페르시아인 후계자들은 앗시리아의 예를 본받으며 근동지역을 분별있게 다스리면서 앗시리아의 제국주의적 모범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성경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인들이 앗시리아인의 질곡으로부터 풀려난 것은 해방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가진 위력을 고려할때 앗시리아인들이 도덕적, 종교적 견지에서 상당히 왜곡되게 묘사되어 잇는것이 대중에게 놀라울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놀랄일은 아닙니다. 이 우연한 해방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앗시리아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희석시키고, 단지 잔인하고 야만적인 침략의 본보기로서만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좀더 공정한 역사적 판단에 따르자면 앗시리아 문명의 수준은 높은 단계에 있었으며 이러한 제국의 문화적 유산은 오랫동안 근동지역의 문화적인 진보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제국주의는 그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육군이 중심이 된 군국주의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으며, 그 능률과 효율성에서 로마의 군단병 체제이전에 대적할 만한 라이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앗시리아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고학적인 증거들에 따르자면, 기원전 2000년경 즈음에는 두드러진 상업활동이 기록에 남아있는 좀더 평화로웠던 시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원전 1000년경부터 중간제국시기의 산물인 군사적 확장정책이 사실상 변화를 겪지 않은 채,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에까지 이어진 신 앗시리아에까지 계승되게 됩니다. 이 책의 주제인 앗시리아 군국주의에 근원에 대한 설명은 기원전 1000년경의 앗시리아 제국의 정책을 설명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아슈르의 고향.

 

샴시 아닷 1세 (Shamsi─Adad I, 기원전 1813-1781) 시대의 일관된 정책은 지리학적인 앗시리아의 실존을 처음으로 알리는데 공헌했습니다. 니네베와 아슈르 Ashur, 아르빌 Arbil 내부 트라이앵글 지역의 농업에 기초한 부는 이 강력한 군주가 왕국의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앗시리아의 심장부가 되는 이 지역은 앗시리아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앗시리아의 영토로 남았습니다. 이 짧은 "제국" 시기 이후,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앗시리아는 미탄니 Mitanni 왕국의 수치스러운 가신국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앗시리아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앗시리아의 비옥하지만 자연적 방어물이 없는 아슈르 지역은 약탈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이나 산악민족, 혹은 미탄니 왕국처럼 우월한 군사조직을 가진 민족들의 뜻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모욕을 면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되어 강력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앗시리아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공세를 펼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하여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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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군을 진압하는 아슈르나시르팔 왕. 앗시리아에서 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앗시리아의 군국주의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점점 강대해진 앗시리아의 군대는 국가의 심장부를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변 국가들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앗시리아의 성장을 두려워한 국가들이 앗시리아의 새로운 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앗시리아 병사들의 전투력을 연마하여 군사적 우세를 유지해야 할 필요를 야기했습니다. 언제나 효율성에 바탕을 둔 그들의 군대를 조직하면서 전장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전술과 무기를 발전시키는데 골몰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유연함이 앗시리아 군대가 그 제국을 3세기 동안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물질적인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약탈품 -금속, 목재, 생필품, 마필, 이주민들- 과 거대한 무역 루트를 주름잡으면서 이룩한 거대한 부의 유입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앗시리아의 물질적 번영과 안보를 위한 노력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함만으로는 앗시리아의 군국주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의 확장의 필요성이 있었으니, 즉 앗시리아의 왕들은 아슈르 신을 위해 전 세계를 신의 방패밑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동기는 툭 떨어져서 홀로 중시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기인 경제적, 정치적 필요성과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따라서 기원전 13세기경부터 앗시리아가 벌인 전쟁들은 그 확장경향에서 필요 불가결한 종교적인 뒷받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사르곤 2세 Sargon II 가 한 말에서 인상적으로 나타납니다. : "모든 신들의 아버지이신 아슈르는 앗시리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주위 인구들을 줄이거나 다시 번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셨도다."

 

사르곤 왕의 이 말은 앗시리아에 있어서의 왕의 역활을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국가의 화신으로서, 군주는 앗시리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여했습니다. 따라서 왕은 아슈르신의 사절인 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국내외의 사무를 총괄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발전은 상당부분 국왕의 개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앗시리아 시절에 이루어진 앗시리아의 제국화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티글랏 필레셋 3세 Tiglath-Pileser III, 사르곤 2세 Sargon II, 센나케리브 Sennacherib 와 같은 걸출한 군주들의 출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앗시리아의 국력이 주변 세력과 비교하여 약세에 몰릴때, 무기력한 왕들이 등장하여 위태로운 왕국을 다스리게 만든 원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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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앗시리아 왕의 계보.

 

이러한 일들은 기원전 1076년에 벌어진 티글랏 필레셋 1세 Tiglath-Pileser I 의 암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정복군주가 정복한 넓은 영토는 그의 죽음후, 급격히 위축되어 불과 기원전 10세기 중반경에는 800년전 삼시-아닷 시절의 심장부를 간신히 유지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후대 왕들은 일찍이 티글랏 펠레셋 왕이 "알라무-아람인들 Ahlamu-Aramaeans" 라고 부른 이들 유목민들의 맹공에 버텨낼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연대기에서 "아람인" 에 대한 기록은 실제보다 축소되어 언급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사막에서부터 시작된 아람인들의 공격은 기원전 1100년경부터 티글랏 필레셋 왕이 죽을때까지 최소한 28회에 걸친 징벌작전에 의해 억눌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죽자 아람인들은 자지라 Jazhira 의 스텝에서 나와 서쪽의 유프라테스와 남쪽의 바빌로니아로 대규모로 쳐들어왔습니다. 이제 칼데아인 Chaldeans 으로 알려진 그들의 후손들은 앗시리아의 변경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이 되었으며 곧 앗시리아 자체를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앗시리아의 고난은 기원전 911년, 앗시리아의 번영을 가져다올 아슈르의 왕홀을 잡은 새로운 강력한 군주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유목민들의 물결은 점차 약해졌으며 이젠 시리아와 자지라, 유프라테스 유역, 티그리스 계곡등에 점점이 흩어진 지역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아닷 니라리 2세 Adad-Nirari II 치세부터 시작된 앗시리아의 부활은 앗시리아가 그후 2백년안에 절정에 다다라, 여태껏 세상이 보지못한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신앗시리아 제국 The Neo Assyrian Empire.

 

아닷 니라리 2세 Adad-Nirari II 와 그의아들 투쿨티-니누르타 2세 Tukulti-Ninurta II 의 26년간의 치세동안 앗시리아의 군사력은 다시한번 국경 밖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아닷 니라리왕은 앗시리아의 남부 국경지대와 접해있는 바빌론지역에 복수를 감행하여 아람인들의 도시인 Kadmuh 와 Nisibin 을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복속시켰으며, Habur 지역의 통제권을 탈취했습니다. 투쿨티-니누르타 왕은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더욱 굳건히 유지하여 후손들에게 서쪽으로는 Habur 강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자그로스 Zagros 산맥, 북쪽으로는 니시빈 Nisibin, 남쪽으로는 사마라 Samara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물려주었습니다. 투쿨티-니누르타왕의 업적은 아슈르의 왕홀을 잡은, 가장 가차없는 군주의 야망을 이룩하게 해줄 도약의 발판이 되었으며, 덕분에 그는 후대 사람들에게 제국의 진정한 설립자로 기억되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1845년, Austen Henry Layard 가  Nimrud 의 위대한 Tell 지역에서의 첫번째 발굴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발굴이 시작된지 채 24시간도 안되어, 아랍인 노무자들이 나중에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대궁전의 일부로 밝혀진 일련의 방들을 발견하였으며, 그뒤 계속 이어진 발굴에 의해 Tell 이 아슈르나시르팔의 수도였던 Kalhu (Calah) 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된 뚜렷한 석고조각들이 아슈르나시르팔왕의 24년간의 재위기간 동안에 벌어진 전쟁의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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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앗시리아의 진정한 창건자, 아슈르나시르팔 2세.

 

의심할 바 없는 기록에 의하면, 심장부를 방어하기 위해 벌어진 북, 동, 남쪽에서 계속된 원정은 그의 권위를 여실히 증명해 주었으며 이러한 전쟁은 점점 더욱 먼 지역에까지 번졌습니다. 이러한 정복이 아슈르나시르팔 왕이 치세 초기에 반란군들에게 앗시리아의 법을 가차없이 적용한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앗시리아의 서쪽, 유프라테스강의 서안지역에 위치한 아람인들의 도시들에 대한 정책으로 볼때 아슈르나시르팔 왕과 그의 아들, 샬마네세르 2세 Shalmaneser II 가 그곳을 "위대한" 앗시리아의 국경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 국경 안에서는 앗시리아의 속주통치가 직접적으로 행해졌으며 그 밖에는 앗시리아의 가신국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잠깐동안 행해진 상 티그리스 Upper Tigris 지역에서 벌어진 그의 원정은 하 하부르 Lower Habur 지역의 도시 수루 Suru 에서 터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포기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먼지 투성이의 "도로" 의 환경과 화씨 90도가 넘는 기온을 견뎌대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힘찬 행군을 속행했습니다. 수루 Suru 의 지도자들은 앗시리아 군대가 그토록 빨리 반응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별안간 나타난 진압군을 보고 큰 정신격 충격을 받았는데, 사실 이러한 작전은 아슈르나시르팔 왕이 하 하부르 지역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책략 중 하나였습니다. :

 

"내가 수루 Suru 시에 주님이신 아슈르 신의 공포와 위엄을 보이며 다가오자 그들은 그 모습에 압도되었다. 도시의 지도자와 원로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의 발을 껴안으면서 빌었다. '만약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들을 베십시오! 허나 만약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부디 저희들을 살려주십시오! 부디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 가슴속의 용맹과 나의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그 도시를 쓸어버렸다. 모든 반란군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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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르나시르팔이 반란군에 대해 남긴 일련의 묘사에 따르면, 반란군들은 가죽이 벗겨지고 말뚝에 몸이 꿰뚫리고, 목이 잘리고, 산채로 태워지고, 눈이 뽑혀나가고, 코와 손가락, 귀가 잘려나가는 등등.. 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다분히 가학적인 처벌로 보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그러한 행동을 인정고자 한다면, 왜 그러한 처벌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적절한 연구또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슈르나시르필이 그들의 적들에게 가한 형벌에 대한 언급이 다른 왕들의 연대기에는 거의 언급되지않는 점을 보면, 이러한 처벌은 앗시리아 초기의 군주들에 의해 횡행했으며, 그 이후로도 앗시리아가 멸망할 때까지 앗시리아의 기본정책 중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선지자 나훔의 말은 신중하고도 고도로 발달된 앗시리아의 "공포에 기초한" 통치정책에 대한 귀중한 증거자료입니다. 비록 이러한 정책이 일반 대중에게는 앗시리아의 일반적인 정책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연대기의 기록을 잘 살펴보면 군주들이 이러한 정책을 상당히 절도있게 구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살은 가신국가들이 왕과, 아슈르신에 대한 엄숙한 맹세를 배신했을때 가해졌으며, 따라서 처벌은 반역자에 대한 정당한 응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현실적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어 앗시리아의 적들과 그 외 잠재적인 반란세력들의 행동을 억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전시에는 사려깊고 신중한 잔혹행위가 적들의 사기를 꺾어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기위해 수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주로 심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적들 사이에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아슈르나시르팔 왕의 정책이 가학적인 측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후에 시리아와 지중해 연안에까지 미칠 그의 야망의 기초가 될 그의치세 초기의 상황에서는 매우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진격로 중간중간에 적대적인 아람인들의 거주지가 늘어져 있는, 증가된 통신망이 필요한 전쟁은 만약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원정군이 자국영토 내부의 적을 진압하기 위해 후퇴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그 잔인한 정책을 계속 시행한 주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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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슈르나시르팔 시대의 공성전.

 

Bit Adini 의 강력한 아람인들의 왕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슈르나시르팔은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었으며 신-힛타이트 Neo-Hittite  와 북시리아의 아람인 국가들을 기습공격했으며, 기원전 877년에는 마침내 레바논과 동 지중해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앗시리아의 강력한 군대에 간담이 서늘해진 진격로상의 마을들과 페니키아인들은 황급히 앗시리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스스로 가신국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영토들을 합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 원정은 자신에게 투항할 이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물자에 대한 계산이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해안 -티레, 시돈, 비블로스, 마할라타 Mahallata, 카이자 Kaiza, 아무루 Amurru, 섬인 아르바드 Arvad (키프로스) 등지에서 온 공물에는 금, 은, 주석, 구리, 구리광물, 색색으로 물들어진 아마포, 여러 크기의 원숭이들, 흑단, 회양목, 해마의 엄니를 모은 상아, 그외 각종 바다에서나는 것들- 이것들이 저들이 내 발을 껴안으면서 내게 바친 공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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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퍼레이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들과 북부 시리아인들이 앗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함으로서 앗시리아는 엄청난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중해로 통하는 교역료를 통제하면서 아슈르나시르팔은 경제활동과 전쟁무기 제조에 필요한 금속 원석들의 공급을 보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부 시리아로 통하는 이 무역루트를 통해 아나톨리아의 금속과 마필, 레바논과 페니키아 지역으로부터 목재와 사치품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여기에 덧붙여 아슈르나시르팔 왕이 Kalhu 의 재건을 위해 필요로 한 각종 기술인력들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국가 경제의 중요부분을 차지한 시리아의 중요성 또한 상승했으며 그 때문에 앗시리아의 정책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지역이 완전히 제국의 속주로서 편입되는 것은 한 세기가 지난 Tiglath-Pileser III 왕의 치세때였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의 앗시리아 전사들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양" 에 도달해 자신들의 칼을 그 바닷물로 씻는 상징적인 의식을 치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실 현지주민들에게 있어서 매우 무시무시하고도 강한 설득력을 가진 의식이었습니다.

 

샬마네세르 3세 Shalmaneser III.

 

아슈르나시르팔의 후계자인 이 군주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그는 자신의 35년간의 재위기간동안 최소한 31차례의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앗시리아군대의 행군소리는 그의 부왕이 물려준 영토 훨씬 멀리까지 울려퍼졌습니다. 하지만 샬마네세르 3세가 엄청난 정복욕을 펼치긴 했으나, 그의 비현실적인 야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며 결국 앗시리아는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의심할 바 없는 이 재난의 근원은 그가 시리아지역을 상대로 다섯번이나 원정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무장시키지 않은 것에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한 까닭은.. 그는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한, 압제적인 앗시리아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면 그간 서로간의 해묵은 불신정도는 잠시 억누를 수 있는 작은 국가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샬마네세르의 야망은 동시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웅대했으며 그가 즉위하고 3년 동안 그의 군대는 비트 아디니 Bit Adini 의 가신국을체계적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상 유프라테스 Upper Euphrates 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틸 바르십 Til Barsip 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샬메네세르에게 있어 시리아로 돌진하는 교두보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결국 비트 아디니는 앗시리아의 속주로 합병되었으며, 앞으로 3년 동안 앗시리아 군대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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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841년, 이스라엘왕 Jehu, Son of Omri 로부터 충성맹세를 받는 샬마네세르 3세.

 

기원전 853년, 앗시리아 군대는 유프라테스를 건너서 알레포를 지나 중앙 시리아의 평원지대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오론테스 강 Orontes 의 카르카르 Qarqar 라는 지역에서 아닷-이드리 Adad-idri (벤 하닷 2세 Ben Hadad II) 가 이끄는 다마스커스와 하맛의 이르훌레니 Irhuleni of Hamath 에서 온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강력한 연합군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이 혼성군대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으로부터 보병과 전차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샬마네세르왕이 대승리를 주장했지만, 실상 간신히 이긴 전투였습니다. 기원전 849년에서 845년 사이에 수행된 세 차례의 서쪽으로 향한 원정또한 카르카르에서 저지되었습니다. 그러자 샬마네세르왕은 기원전 841년에 다른길을 통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비록 다마스커스에 대한 공성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대신 북 팔레스타인의 티레와 시돈을 점령했으며 이제는 앗시리아의 가신이 된,피터지는쿠데타끝에 이스라엘왕의 자리에 오른 "이스라엘 왕의 공물 Tribute of Iaua (Jehu), son of Omri" 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838년에 있었던 다마스커스에 대한 마지막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샬마네세르왕은 남부 시리아로의 진출을 단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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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마네세르 3세에 의해 수도 칼루에 건설된 병기창.


경제적인 계산에 따라 실리시아 Cilicia 의 철광석 산지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기원전 832년, 그의 군대는 아마누스 Amanus 산맥을 넘었습니다. 이 시대에 철은 앗시리아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특히 무기를 만드는데 있어 더욱 그랬습니다. 앗시리아 영토자체에는 철광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전원 수입에 의존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동 타우루스 산맥의 실리시아 동북지방의 우라르투 (아라라트)  Urartu 가 자신들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변했습니다. 기원전 840년에 있었던 샬마네세르의 원정으로 인해 수구니아 Sugunia 와 아르자쉬쿤 Arzashkun 의 왕궁들이 박살났습니다. 하지만 연대기엔 앗시리아 병사들이 그들의 약탈품의 무게 때문에 결국 귀향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우라르투는 후에 재건되어 기원전 8세기경 앗시리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으며..이로서 샬마네세르의 원정에 의해 상황이 본질적으로 변한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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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시리아 군주들에게 있어서 자그로스 Zagros 산맥으로 들어가 그곳의 산악민족들을 징벌하는 것은 일종의 전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치세 마지막 기간동안, 샬마네세르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자그로스를 넘어 아예 북서 이란에까지 앗시리아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 했습니다. 이미 왕이 너무 늙었기 때문에, 야전원수 "Turtan" 다이안-아슈르 Daian-Ashur 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쿠르드인들의 지역을 넘어, 그는 앗시리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민족들과 접촉했습니다.  Manneans 의 우르미아 Urmia 호수의 남부지방은 중요한 마필 생산지로서, 다음세기에 앗시리아인들과 우라르투간의 주요분쟁 지역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곳에는 하마단 Hamadan 근방에서 거주하고 있던 메디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르미아 호수 서쪽과 남서쪽에서 계속된 이주에 의해 점점 그 수가 불어나고 있던 페르시아인 (Parsua) 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스 Fars 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몇 세대가 지난 후,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이 기원전 639년에 엘람왕국을 멸망시키자 페르시아인들은 그곳으로 넘어와서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민족들과 앗시리아인들의 만남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특히 메디아인들과의 만남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인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샬마네세르 왕 이후, 전쟁을 즐기는 왕들의 모든 연대기들에는 이들의 이름이 반드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메디아인들은 중요한 정치 주체라기보다는 그냥 그저그런 한 민족에 불과했으며, 기원전 8세기까지는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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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눈을 돌려, 샬마네세르는 기원전 851년, 바빌로니아 내전에 개입합니다. 왕으로 포고된 마르둑 자키르 슘미 Marduk-zakir-shummi 는 고대 수메르지역에 분포하는 아람인 부족들의 지원을 받는, 자신의 동생이 이끄는 반란군들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이젠 칼데아인 Chaldeans 이라 불리는 이들 민족에게 앗시리아 왕이 응징을 내린것이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 바빌론에서 자리를 잡으려는 계속된 시도로 칼데아인들은 앗시리아 남쪽의 골치아픈 가시가 되었으며 제국의 힘을 소진시키고 결국 제국이붕괴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평생에 걸친 군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샬만네세르는 부왕인 아슈르나시르팔이 물려 준 영토에 그다지 많지않은 영토만을 새로 가져왔으며, 기원전 824년에 그가죽자 앗시리아는 4년간 내전에 들어갑니다. 후계자가 된 그의 아들 샴시-아닷 5세 Shamsi-Adad V 이후로 앗시리아의 국운은 80년이 넘게 쇠락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기울어가는 앗시리아.

 

내전을 끝내기 위해 샴시-아닷 5세는 바빌론의 손을 빌릴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앗시리아를 사실상 가신국의 처지로 떨어뜨린 수치스러운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샴시 아닷은 남쪽으로 복수를 위해 떠났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의 내전으로 이득을 본 이들 앗시리아의 가신국들에게서 다시금 앗시리아의 종주권을 확인하기 위해 떠났으나, 그의 때이른 죽음은 앗시리아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앗시리아의 국력과, 아슈르의 왕홀을 붙잡은 재능있고 역동적이며 비젼을 가진 군주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기원전 811년에서 745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허약한 군주들의 후계자들은 그러한 지도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내전의 기간동안, 북부 시리아의 국가들은 공물덕분에 행동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그들의 자신감은 우라르투에 의해 더욱 고무되었으며 샴시-아닷 왕의 죽음은 그들의 영향력을 앗시리아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까지 미쳤습니다. 티글랏-필라셀 3세 Tiglath-Pileser III 와 같은  강력한 왕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그러한 인물의 부재는  우라르투의 거침없는 확장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앗시리아의 멸망이 머지않은 듯 보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라르투는 많은 방면에서 앗시리아의 발 밑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중간" 제국시절의 강력한 앗시리아의 군주들은 이곳의 주민들이 기껏해야 부족수준의 연합체만을 이루고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타우루스 산맥으로 들어가 약탈행진을 벌일 수 있었지만, 기원전 840년 경부터 우라르투라고 알려진 통일왕국이 출현했습니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잘 견뎌냈으며 결국 앗시리아역시 이들을 주권국가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장부는 높은 산으로 둘러쌓이고, 겨울에는 폭설로 뒤덮이는 등, 방어자들에게 있어서 천해의 환경이라 할 만한 반 호수 Lake Van 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정, 군사적 모델은 앗시리아의 모델을 충실히 따랐으며, 이 젊고 강력한 왕국은 경제적으로 핵심적인 지역인 남쪽 이웃들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앗시리아 군대와 그 명성의 쇠퇴를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아르기스티스 1세 Argistis I 치세 (재위 : 기원전 780-756년) 때에 우라르투는 우르미아 Urmia 호수지역의 모든 영토를 합병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 청금석과 같은 귀중품이 이란지역을 통해 앗시리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더욱 앗시리아에게 위협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만네아 Mannea 지역의 마필 생산을 위협하여, 마침 군대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대하고 있었던 앗시리아군에 타격을 준 것입니다. 이렇게 군대의 기동성이 위협받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르기스티스는 자신의 권위를, 여태까지는 앗시리아의 가신국이었던 소아시아의 소국들에까지 강요했습니다. 이 왕의 지도 아래에서 우라르투는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겨우 20마일 떨어진 곳까지 세력을 떨쳤으며, 이제는 현실적으로 "대" 앗시리아의 서쪽변경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금속과 기타 필수품의 강탈은 앗시라아의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필연적으로 왕국의 주요도시에서 사회불안이 증가되었습니다. 허약해진 왕권은 지방정부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났으며, 강력한 중앙 통제력의 부재는, 지방 봉토들의 사실상 독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지방 총독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벌인 작전들이 비록 국경을 수비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이는 결국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강조할 뿐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앗시리아의 국력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745년에 터진 피로 얼룩진 쿠데타로 인해 기존의 왕가는 전멸당했으며, 칼루 Kalhu 의 총독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왕홀의 주인이 된 이 새로운 군주의 이름은 티글랏 필라셀 3세 Tiglath-Pilaser III 였으며, 이로서 앗시리아는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앗시리아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제국으로의 행보를 밟을 수 밖에 없다는 식견을 가진 군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개혁가 : 티글라스-필라세 3세.

 

앗시리아가 급속도로 예전의 쇠락를 치유하고 근동지방의 통치력을 회복한 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왕이 주도한 기초가 탄탄한 개혁 덕택이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곧장 앗시리아의 기본 국가구조와 정책을 바꾸었으며, 여기서 생긴 에너지는 앗시리아를 왕국의 마지막인 동시에 가장 위대했던 제국의 시대로 안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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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글랏-필레셀의 부조.

 

새로운 군주에게는 앗시리아의 국익이 더 이상 아슈르나시르팔이나 샬마네세르 3세 시절로부터 물려받은 국가 모델로는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티글앗-필라셀 3세는 여태껏 "대 앗시리아" 의 국경 밖에 있었던 가신국들을 합병하거나 속주로 만들면서 제국의 국경선을 확대시켰습니다. 비록 가신국으로 남아있도록 허락받은 곳에서도, 그곳에 남겨진 앗시리아의 관리들이 가신국의 충성심을 세심하게 보고했습니다. 만약 가신국들이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못했다면 신속한 조치가 취해지고 -더 큰 전략적 이익을 위해- 그 지역은 직접 속주로 편입되었습니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평화를 조속히 정착시키고 반항적인 신민들을 억제하기 위해 티글랏-필라셀은 좀더 오래된 정책인, 초기 군주들이 즐겨 사용했던 대규모의 강제이주등의 정책을 재도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정책은 그 중대함에 있어, 지금껏 사용되었던 정책과는 다른 면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그는 이란지역에서 기원전 744년에 6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강제이주시켰습니다. 그후 2년동안 그는 시리아의 하맛의 30,000명의 거주자들을 동쪽의 자그로스 산맥지대로 이주시켰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반란군들의 후원자로 간주된 듯 하며, 이러한 정치적인 "파면" 은 주민들로 하여금 앗시리아의 군주에게 좀더 순종적이게 만들었으며, 남아있거나 이주한 백성들 모두에게서 반항의 의지를 앗아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제국과 그 자원의 통치를 위해 기존의 속주들을 좀더 잘게 나눔으로서 효율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왕좌에 오른지 7년 후, 제국에는 80개가 넘는 속주가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 지방의 "지도자" 들의 권력을 많이 약화시켰습니다. 그들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총독으로서 "내시들" Sha reshe 들을 임명했으며, 이들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로지 국왕에게만 충성을 받쳤습니다. 좀더 작은 행정조직들이 군주에게 총독들의 행동거지와 그들의 충성심을 보고했습니다. 제국을 가로지르는, 마필에 의한 통신망은 신속한 왕명의 포고를 가능하게 했으며,  속주로부터 올라온 보고, 특히 그중에서도 앗시리아의 국경바깥의 국가들에 심어놓은 스파이들의 보고서의 빠른 수송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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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을 일으킨 주민들을 강제이주시키는 티글랏-필레셀 3세.

 

이전의 쇠퇴의 시기는 군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는 바, 이전의 군제는 더이상 정복에 필요한 군대의 대규모 수요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티글랏-필라셀왕은 제국의 행정시스템 만큼이나 미래의 앗시리아에 요구될 군사적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군대의 개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전엔 사실상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으로만 존재했던 군대가 기원전 745년 이후에는 100년 전과는 아주 달라져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군대.

 

개혁전의 앗시리아 군대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근동지역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여름동안의 작전만을 위해 소집된 군대였습니다. "적절한" 작전 계절이라는 개념은 병사들의 대부분이 영세 소작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앗시리아의 경제는 농업에 가초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농민들은 경작과 추수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군대에복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추수가 5월에 끝나면, 6월달에 징병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전차를 탄 귀족들과 보조부대의 지원을 받는 왕의 소규모 군대가 덧붙여졌습니다. 이러한 관념이 아슈르나시르팔의 "대 앗시리아"의 전략적인 고려요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국경내의 작전과 국경밖의 "약탈"은 경제적인 붕괴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농사시기를 넘어서까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샬마네세르 3세의 치하에서와 같이 앗시리아의 군사작전이 좀더 빈번해지고 멀리까지 이루어지게 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감수하고 점점 원거리 작전이 빈발해지자 본국의 인력손실이 심대하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앗시리아의 연대기들은 이러한 손실은 별거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병으로 인한 손실과, 정복지에 주둔시켜야 하는 수비병력, 그리고 전투에서의 사상자수의 증가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한정된 앗시리아 본국인의 숫자와 강제적인 동원은 그 군대의 조직이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시사했으며 티글라스-필라세의 시대에 이르자 뭔가 대처방안이 강구되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군대"

 

티글라스-필라세 왕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군대의 성격을 확 바꾼 것입니다. 그는 계절의 영향을 받는 징집병으로부터 제국의 어디에서나 계절에 가리지 않고 투입할 수 있는 새로운 군대를 제시했습니다. 중요한 점으로는 이 군대의 인력은 제국내의 속주에서 양성되어 필요시 가신국의 보충을 받았다는 것인데, 아들 가신국은 공물로서 물자대신 병사들을 왕을 위해 바쳤습니다.

 

"kisir sharruti" 혹은 상비군이라 불린 이 군대는 이전의 군대와는 여러 상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이민족 군대들이 이 정예 앗시리아 본국부대를 근간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앗시리아의 군복과 장비의 개혁을 가져왔으며 같은 계급의 군인들의 장비는 모두 통일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 Sargon II는 언젠가 50개의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자신의 군대안에 편입시켰다고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인 외에 지방색이 뚜렷한 부대로는 하맛 Hamath, 카르케미쉬 Carchemish, 그리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거주지에서 모집된 부대가 있었습니다. 아람인으로 구성된 부대또한 많은 수를 차지했는데, 그중에서 "Itu'a" 그리고 "Gurra" 라는 지역에서 모집된 부대들은 현대 영국군에서 구르카병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kisir sharruti" 의 거대한 규모의 아시리아인들이 특히 기병과 전차부대에 편입된 것 또한 확실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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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글랏-필레셀 3세 당시의 라멜라 갑옷과 청동 흉갑을 착용한 정예 기병대.

 

이 상비군은 "Qurubti sha shepe" 즉 국왕의 친위대와 같이 복무를 했는데, 이 최정예부대는 기병과 전차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sha shepe" 와 "kisir sharruti" 는 국왕의 속주 총독에 의해 징집된 "sab sharri" 의 보충을 받았습니다. 그의 잡다한 출신지와 다양한 유니폼은 후기 앗시리아 왕조시대에 만들어진 돋을새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능력으로 볼때 "kisir sharruti" 는 상비군으로서 운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sab sharri"의 보조를 받지않는 "sha shepe" 가 필요시에 추가되었습니다.

 

총사령관으로서 앗시리아의 왕은 자주 직접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각각 군대의 좌우 양일을 담당하고 있는 두명의 투르탄 "Turtan" (야전원수) 에게 작전을 위임할 때도 있었습니다. 좌익을 담당한 원수는 왕의 부재시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이안-아슈르의 뒤를 이은 샬마네세르 3세때의 샴수-일루 Shamsu-ilu 와 센나케리브 Sennacherib 의 형제인, 많은 전쟁을 이끈 신 아 유수르 Sin-ah-usur 등등이 이러한 예에 속합니다.

 

이들 밑에는 대부분의 근동지역의 국가들처럼 1000, 500, 100 명의 책임을 진 지휘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 군대의 편제에 대해서는 아직껏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군대의 병종.

 

전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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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공격력은 상당부분 전차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3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차는 아슈르나시르팔 시대의 두명의 승무원이 타고 두세마리의 마필이 끄는 형태에서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시대의 네사람이 타고 네마리의 말이 끄는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초기 전차의 가벼운 구조는 그들이 주로 정찰이나 연락등에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들은 점점 다양한 전장에 투입되었다는 추정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군사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기병대에 의해 잠식되어 갔으며 기병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전차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국의 마지막 100년간, 전차는 발사무기 플랫폼으로서나, 적군의 전열을 돌파하기 위한 무기로서의 지위를 많이 빼앗겼습니다. 적군의 전열을 돌파하여 적군에게 전신적, 물리적 충격을 가한다는 역할은 의심할 바 없었으며, 기병대가 이들을 지원하여 전차대가 만든 혼란을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차의 무거운 무게는 기원전 691년의 Halulue 와 655년의 을래강 Ulai 에서와 같이 전장에서의 운용에 제약이 되는 요소였습니다.

 

기병대.

 

기원전 9세기경, 투쿨티-니누르타 Tukulti-Ninurta II 시대에 처음으로 기병대가 시범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시대의 벽의 부조는 두 기병이 조를 짜서 한명이 양쪽의 고삐를 잡고 말을 통제하는 동안 다른 한명이 활을들고 사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기병대의 한쌍으로서의 운용은 비록 이젠 그들이 각각의 말을 통제하면서 긴 창을 아랫쪽으로 던지는 전술을 구사하는 티글랏-필라세 시대에도 여전히 발견됩니다. 기원전 7세기경의 아슈르바니팔의 시대에 기병전사는 효율적이고 극단적으로 잘 무장했으며 좋은 보호구를 갖춘 군인들이었습니다. 모직으로 된 갑옷은 제한된 범위에서 화살과 접근전에서 날아오는 창등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수는 상체에 별도로 라멜라 갑옷을 착용했으며 활과, 찌르기 용도의 창을 소지했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기병대는 의심할 바 없는 군대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점차 전차대의 역할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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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 라멜라 갑옷의 일부분.

 

기병대의 형성과 무장등등은 의심할바 없이 이란지역 민족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자그로스 지역을 넘어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앗시리아인들은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기병운용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후에 앗시리아인들이 이지역으로 대규모로 쳐들어왔을때 그들은 오로지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란인들의 거주지를 점령하고 불태우고 약탈을 수행했습니다. 티글랏-필라셀 시대에 이러한 약탈행렬은 이란 깊숙이까지 자행되었으며, 테헤란 근처의 데마벤드 Devamend 산에 까지 도달해 앗시리아 기병대의 숙련도를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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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는 한번에 1,000명의 단위로 작전을 펼치기도 했으며 단독, 혹은 전차대와 합동으로 작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전을 위해서는 마필을 쉽게 보충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아마 이러한 공급원이 없었다면 앗시리아 제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위대한 군주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대략 세가지정도의 마필조달 방법이 기록에 의해 확인됩니다. 첫번째는 약탈에서 얻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는 가신국에서 기르고 있던 마필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시했던 방법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Musarkisu" 라 알려진 고위 관리들이 속주에서 말을 공급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이와 관련된 보고를 왕에게만 올리고 지방 총독에게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 의해 마필의 품종과 산지등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적힌 통계가 작성되었습니다. 몇몇 바깥 속주에서는 마필이 대규모로 사육되어 "Ekal Masharti" 라고 불린 병기창에서 앞으로 있을 작전을 위해 훈련되었습니다.

 

보병.

 

하지만 앗시리아 군대의 근간을 이룬 것은 다름아닌 보병이었습니다. 간단히 "Zuk", "Zuk shepi" 라고 알려진 이들은 목적에 따라 궁병, 창병, 슬링어 혹은 방패병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중 궁병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앗시리아 군대가 사용한 활은 주된 공격무기였으며 보병이 투입된 모든 작전에서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궁수들은 일반적으로 대열을 이루어 배치되었으며 아슈르나시르팔의 시대부터 제국의 멸망때까지 짝을 이루어 그중 한사람은 방패수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방패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티글랏-필라셀 치세때의 부조에 묘사된 것만 보자면 방패는 한사람의 키보다 더 컷으려 끝부분이 두사람을 화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깍여져 있습니다. 이 방패들은 꼬은 갈대를 짜서 만들어졌으며, 기록에 의하면 방패를 생산하기 위해 강가의 특별한 지역에 갈대를 생산하기 위한 지역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활은 앗시리아식 이름으로 여러가지가 기록에 남아 있는 바, 앗시리아, 아카드 스타일 Akkadian, 키메르 스타일 Cimmerian 등등의 유형이 기록에 나타납니다. 그것들의 많은 수가 기병과 전차대가 애용한 복합궁 스타일의 활이었지만, 좀더 단순한 형태의 활들도 많이 쓰였습니다. 이러한 발사무기들의 사정거리는 250미터에서 650미터까지 다양했습니다. 비록 전쟁이 벌어지기전에 엄청난 숫자의 화살이 만들어졌지만, 전쟁 중에도 그 엄청난 화살을들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화살을 만들어낸 생산시설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궁수들이 슬링어들과 같이 운용되었기 때문에 궁수들은 뒷줄에서 슬링어들과 평행으로 위치했으며, 적의 방패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높은 각도로 화살을 발사하여 적들을 낮은 각도의 발사에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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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경의 돋을새김을 보면 각각의 병사들은 각각의 장비에 따라 군대에서의 역할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zuku sa sheppe"  즉 "kisir sharruti" 의 엘리트 보병부대의 부대원들은 상체에 라멜라 아머를 입고 아마도 접근전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갑옷은 일반적인 보병부대에는 부족했으며 징집되어 군대에 편성된 사람들은 단지 가벼운 투구와 방패만을 소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본국의 징집병들은 경 스커미셔 용도로도 종종 사용되었는데, 특히 칼데아인들과 아람인들이 이러한 역할에 그만이었습니다.  또한 티글랏-필레세는 보병에 창을 도입시켰습니다. 이것은 근접전에서 투사용 병기로서 사용되었으며, 이는 그 사용자에게 장검이나 단도보다 좀더 긴 공격거리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공성무기.

 

이미 이 시대엔 사실상 모든 라지타운이나 시티급 정도되는 동네는 모두 방어용 성벽을 갖추고 있었기에 만약 앗시리아인들이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제국의 건설은 요원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성전은 앗시리아인들이 원해서 벌어지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보다는 빠른선택을 필요로 하는 야전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의 "공포심" 에 관한 기록들은 적들이 성벽뒤로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하며 용기를 얻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전술로 이해되었습니다. 일단 공성전이 시작되면, 앗시리아인들은 그것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빌론과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아르파드 Arpad 의 강력한 방어시설들은 앗시리아로 하여금 귀중한 자원들을 대량으로 소모시켰습니다.

 

도시의 성곽에 대한 공성전과, 이어진 돌격은 모든 신앗시리아 군주들이 보여준 작전의 특징 중 하나이자 그들의 돋을새김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이며, 동시대의 여러 시방의 군대들의 작전 중 가장 정교하게 이루어진 공격이었습니다. 여기에 묘사된 다양한 공성무기들은 공성전을 위한 최적의 설계에 필요한 그들의 경험을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앗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군주였던 아슈르바니시팔을 묘사한, 현존하는 부조들을 보면 이 시기에는 공성전과, 뒤이은 돌격에 있어 이렇다 할 공성기의 사용이 눈에 띄이지 않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은 매우 조직적으로 성을 포위했습니다. 공성전이 벌어지는 곳의 지형과 방어시설 등등은 그들의 전략에 반영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을들과 도시들은 흙무더기나 언덕위, 또는 강으로 둘러쌓인 성벽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나 공성전이 벌어질 지역은 도시주위에서 수행되는 토목작전에 의해 고립되었습니다. 도시를 단단히 포위함에 따라 포위자들은 도시내에서 굶주림과 역병의 내원을 받았습니다. 언덕에 위치한 도시에 대한 공성전의 장면은 센나케리브 Sennacherib 에 의해 벌어진 기원전 701년의 공성전을 묘사한 라키시 Lachish 벽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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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시리아의 공성기. 조작원중 한명이 거대한 국자로 화기를 진화하고 있습니다.

 

목재로 만든틀과 흙으로 만든 누벽들이 성벽에 대항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면, 바퀴가 달리고 커다란 가죽에 의해 보호받는 많은 공성무기들이 이 경사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빽빽히 늘어선 방패수들에 의해 단단히 보호받는 궁수들과 슬링어들의 무시무시한 일제사격이 흉벽의 총안에 늘어선 유대인들을 직격했습니다. 여기에 적들의 주의가 집중된 틈을 타서 창모양의 충각이 달린 공성기들이 효과적으로 성벽에 접근했습니다. 공성기들을 화염에서 보호하기 위해, 공성기 조작원 중의 한명은 커다란 국자;;를 가지고 화기를 진화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아슈르나시팔 시대에 쓰인 초기의 공성기들은 공성목표인 성벽을 이루는 돌이나 건조된 진흙벽돌을 파괴하기 위해 넓은 칼날을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성벽이 강을 끼고있는 경우에는 앗시리아인들은 물에 둥둥 뜨는 공성탑을 건조하여, 성벽위의 적들에게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광부들 또한 동원되었는데 그들은 철이나 구리연장으로 성벽의 약점을 공략하여 성벽에 균열을 만드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었습니다. 성벽이 상당히 약해진 것으로 판단되면, 돌격조가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들고 돌진했습니다. 이러한 돌격와중에 입는 피해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앗시리아인들은 이러한 작전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습니다. 라키시 Lachish 에서 발견된 대규묘 묘지에는 약 1,500명의 앗시리아 군인들이 뭍혀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원정에 들어가며.
 
새로운 캠페인의 시작은 작전의 기초가 될 부대의 조직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일은 앗시리아에서는 칼루 Kalhu 의 "ekal masharti" 나 니네베 혹은 코르사바드 Khorsabad 에서 행해졌습니다. 제국 전체범위로 보자면, 여기에 이러한 목적을 위해 특화된 상유프라테스의 틸 바르십 Til Barsip 이 추가됩니다. 지방총독들에게는 원정에 대비하여 곡물과 기름과 각종 전투장비들을 축적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한편 다른 총독들은 자신들의 지방에서 동원령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가신으로서 앗시리아의 원정을 돕겠다는 맹세를 한 앗시리아의 동맹국들은 적시에 증원군을 보내와야만 했습니다. 국경에 국왕과 "Sa sheppe" 부대와 "kisir sharruti" 부대가 도착하면서 원정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앗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원할때면 언제나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게끔 보장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845년에 샬마네세르 3세가 시리아로 떠날때에는 그의 뒤에 120,000명의 군대가 뒤따랐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행군대열은 고정된 순서에 따랐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대열의 앞에는 신상과,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섰으며 그 뒤에 국왕의 전차가 이어졌습니다. 국왕은 대부분 전차와 기병으로 이루어진 "sa sheppe" 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필요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기동부대 뒤에는 정규군과, 속주와 가신국에서 징모된 병사들의 대규모 집단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전투병력 뒤에는 공성무기들과 수송마차들, 야영담당 부대원이 뒤를 따랐습니다. 기록들을 바탕으로 추측해보면 이러한 행렬은 날이 좋은때에 하루에 약 30마일가량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연대기는 우리에게 앗시리아군대의 세부적인 작전에 대해서 거의 알려주지않지만 추론에 의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장에서의 우선권을 위해, 앗시리아 군대는 공격받는 것보다 공격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보병전열은 궁수와 슬링어, 창병으로 구성되고 그들 양 옆에는 기병들과 함께 전차들이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기병들은 자신들 스스로, 혹은 전차대를 보조하면서 적군 대오에 생긴 균열을 확대할 것입니다. 긴 사정거리를 가진 화살과 돌팔매병들의 돌들은 적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차대와 기병대가 적군양익에 돌격하기 전에 많은 사상자를 야기시킬 것입니다. 이제 주의는 전차대가 적 전열에 돌진하여 균열을 만드는데 집중됩니다. 여기에 기병대가 가세하여 적군전열을 후방에서부터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로써 적군의 대오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보병전체가 돌진하여 적군의 균열을 확대시킬 것입니다. 만약 전투를 위해 치밀한 작전이 수립되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즉, 기습을 당했다거나..) 앗시리아 군대는 놀라운 유연함을 과시하며 서로 다른 전장과 전투상황에 자신들의 전술을 유연하게 응용했습니다.

 

...(2) 부에서 계속됩니다^^

 

부디 리플 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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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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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리카르도 | 작성시간 07.11.01 군대 개혁 방향이 로마의 그것과 유사하군요. 농민징집병->상비군, 이민족 부대의 증가, 단일한 군장으로 통일...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1.02 진셍티님// 잘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드립니다^^ 근데 수메르 등등은 저도 자료가..ㅡㅡ;; 앨런비님// 시간날때 천천히 보세용~ 쑤레빠님// 제 3세계사에 넣으려다 그냥 동양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전, 예전에 출처가 좀 불명확한 문헌에서 기병만 10만 이상(...)이었다는 글도 본적이... 타마누님// 14시간동안 꼬박 밤새워 했습니다 ㅠㅠ;;; 호응이 좋아야 할터인디 ㅜㅜ 리카르도님//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역시 서문에서 "군단병 이전에 적수가 없었다" 라는 언급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작성자Lathander | 작성시간 07.11.06 맥브라이드 화백의 최근 작품 같은 기분이 드네요.. 작화 퀄리티가 대단해요.
  • 작성자숀니 | 작성시간 07.11.07 들어는 봤으나 아무것도 몰랐는데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꾸준히 보겠습니다~감사해용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0.11.26 아, 아시리아에 관심이 있어서 뒤적거리다 먼저 올리셨군요. 좋은 글을 이제야 보게 되어서 부끄럽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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