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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비잔틴 이야기 2

작성자겨울달|작성시간04.02.22|조회수209 목록 댓글 4

<태동, 그리고 재앙>

인류의 문화는 밤과 낮을 기준삼아 정반대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낮은 신의 은총 그 자체였다. 정의가 살아있으며 이성이 빛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낮은 건축, 상업, 학문이 발전하는 시간이었으며 햇빛이 있는 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인간의 정복 대상이었다.
신의 은총이 대지로 스며들면 인간도 그 행위를 멈추고 쉬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밤은 인간의 또다른 활동 무대였다. 모든 것이 어둠에 쌓이는 그 시간은 악마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둠의 정적은 갖가지 악마, 괴물, 악당, 미스테리와 미신 등을 만들어냈다. 이성보다 본능이, 신앙이 아닌 근원적 공포가, 현실을 넘은 추상이 펼쳐지는 세계가 밤이었으며 그만큼 사람들은 밤에 대해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께 복종해야 하므로 사람들은 밤에 나가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 시간에는 잠을 통해 악마의 저주를 피하는 것으로 여겼다. 물론 낮의 피곤함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오리온이 황소를 잡기위해 하늘 정 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에도 아직 잠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신의 규칙을 어긴 이 무엄한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대리인으로서 만인을 이끌어야 하는 교황이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희미한 촛불들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는 벌써 비잔틴 황제의 동맹제의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두 번째의 사자는 먼저 번과는 달리 어느정도의 위압감을 내보였다. 황제의 기분을 은연중에 전하려 했음이리라.
신의 대리인은 고민이 깊었다. 동로마의 교리는 분명 이단이었다. 신의 아들인 자신이 어찌 인간의 아들로서 속세의 권력밖에 갖추지 못한 황제보다 아래이겠는가. 황제의 교황 임명권은 그 자체가 모순덩어리였다. 따라서 교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잔틴의 황제도 그가 계도해야할 ‘인간의 자식’일 뿐이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과 신의 가교역할을 해야하므로....
서방의 게르만인들은 자신의 교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황은 서방에 관해서라면 어느정도의 권력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제국은 아직도 서방을 야만인에게 양도했을 뿐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럼에도 교황이 비잔틴과 확연하게 절연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서방세계가 불안함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동방세계에 대항해 그가 비빌만한 언덕을 찾지 못했음이다. 독일이 강성한 세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것은 국가라고 하기에 너무도 단순한 구조였다. 그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몰랐다. 서방의 통치관계는 충성을 대가로 영지를 받는 ‘거래’가 그 본질이었다. 따라서 그는 서방세계 전체를 하나의 기독교권으로 묶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끼리의 갈등도, 연합도 교황의 앞에서는 무력해야 했다. 교황은 신앙을 통해 서방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크리스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위해서 우르반 2세는 동방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크리스트라도 동방교리에 영향을 받으면 교황은 황제의 임명을 받으므로 허울좋은 상징적 존재만 될 뿐, 실체적 권력은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슬람과의 성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교도들과 마찰이 없는 동로마와 동맹을 체결한다면 십자군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권위가 약화될 수 있다. 신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비잔틴과 대립각을 세워야 그의 명분이 살아나고 권력을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비잔틴의 동맹제의를 거절한 배후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교황은 탁자앞에 놓인 문서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시칠리아에서 온 그 편지는 교황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교황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신의 은총이 그의 얼굴 가득히 쏟아지고 있었다.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정무를 보고 있었다. 소아르메니아와 트레비존드에 홍수가 났으나 피해는 경미하였고 노브고르드의 군주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정찰나간 밀정들이 실종되었다는 내용과 얼마전까지 우쭐하던 헝가리는 왈라키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패퇴하였다는 보고도 있었다. 확실히 그 지역은 다스리기 힘든 지역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로 진격한 태자 알렉시우스는 그 곳의 반란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주둔중이라는 승전보가 어제 도착했다. 보고에 의하면 태자는 3성의 반군지도자를 생포하여 처형하고 나머지 반군은 용서했다고 한다. 관용과 결단력을 갖춘 태자, 황제는 알렉시우스 2세가 로마의 지도자에 오르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태자가 남색을 선호한다는 소문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신경을 써야할 업무가 있었다. 알모하드 칼리프의 사자가 동맹을 제안하러 온 것이다. 황제는 며칠 전의 보고서를 다시 꺼내었다. 교황은 두 번째의 동맹제의도 거절했으며 이튿날 클리어몬드의 마을에서 평의회를 소집, 성지탈환과 기독교 수호를 위해 십자군에게 설교했다는 내용이었다. 십자군이라면 분명 이슬람을 향해 갈 터, 황제는 이슬람과의 동맹이 매우 민감한 부분임을 인식했다. 명분상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세계의 수호전쟁에서 그 반대편과 동맹을 맺는 것은 황제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알모하드 밀사에게 동맹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면서도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알모하드의 밀사가 물러가자 기다리고 있던 독일의 밀사가 들어왔다. 역시 동맹을 제안하러 온 것이었다. 독일은 폴란드와 전쟁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비잔틴은 스페인, 폴란드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황제는 독일과 폴란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론은 독일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서로마를 잠식한 게르만인에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수가 난 소아르메니아 지역의 세금을 감면하고 무너진 국경수비탑 재건을 명하면서 황제는 집무를 마쳤다. 당분간은 서방세계와 이슬람의 충돌이 상당히 볼 만할 것 같았다. 비잔틴은 그것을 관망하면서 천천히 경제발전과 군사양성을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거인이 싸움에 지쳐있을 때 비잔틴은 다시한번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킬 것이다. 모처럼 기분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밤은 황후와 동침하면서 쾌락을 향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수레바퀴는 비잔틴을 결코 제쳐놓지 않았다.

예기치못한 재앙은 1095년에 닥쳐왔다. 터키이슬람세력이 침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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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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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베싱 | 작성시간 04.02.22 역시나... 투르크가 짠지를 걸어왔군요...-ㅂ- 비잔틴의 군대가 워낙 강력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어서 쉽게 밀릴것 같진 않지만...그래도 투르크도 만만치는 않을듯...
  • 작성자파란안개 | 작성시간 04.02.22 투르크의 소아시아는 많은 조세를 거둘수 있는 지역.. 이라서 일찍 먹어[;] 버린다는; // 그리고 비잔틴이라.. 개인적으로 제일 맘에드는 팩션; 프로노이애의 유지비용이 비싼건 유감이지만[쿨럭;] //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편 기대할께요;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04.02.22 -__ㅋ 저는 몰다비아까지 진출하고 바로 투르크작살내죠-_-ㅋ 투르크를 얼랑 작살내야 편안하다는-_-'
  • 작성자asdfsaf | 작성시간 04.02.25 작가로서의 능력이 아마추어라고는 믿기 어렵군요.. 그동안 많은 습작을 해오신듯.. 존경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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