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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Forum

비잔틴 이야기 8

작성자겨울달|작성시간04.03.06|조회수167 목록 댓글 6

<세르비아 학살>

아나톨리아의 황량한 고원에서 삭막한 바람을 맞으며 한 장군이 벌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부진 체격에 갸름한 얼굴, 곧게 뻗은 눈썹 밑으로는 에메랄드색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의 용모는 한눈에 보아도 고결한 가문의 일원임을 알게 하였다. 마뉴엘, 비잔틴의 제 3황자이자 알렉시우스 2세의 동생인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자신의 군대가 전멸시킨 투르크군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스에서 그가 끌고올 수 있었던 병력은 고작해야 160명. 280에 달하는 투르크군은 정규군과 농민병이 혼재된 비잔틴군을 비웃고는 성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그러나 마뉴엘은 6성 장군으로서 군사적 재능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그의 용맹과 지략은 농민병조차도 정예로 만드는 것이었다. 적이 성을 나오는 것을 본 마뉴엘은 일부러 전열을 허물어뜨리며 후퇴하는 척했다. 황자의 전략은 성공했다. 비잔틴의 기만술에 투르크군은 완전히 속은 것이다. 게다가 농민병의 존재는 그들이 비잔틴군을 우습게 만든 요인이자 투르크군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태자저하, 트레비존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병력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대략 200명을 조금 상회합니다. 궁병위주로 편성되어 있사옵니다.”
“......프로스파네스. 이리로 와서 저 광경을 보시오.”
비잔틴 보병을 이끌고 있는 장군 프로스파네스는 황자 마뉴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자의 시선이 멈춘 곳은 벌판에 널부러져 있는 투르크군의 시체들이었다.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그대는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있습니까?”
“태자저하, 극악무도한 이교도들은 신성한 로마를 영토를 침입했고, 로마의 신민을 학살하였사옵니다. 그러할진대 더이상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나이까. 죽음조차도 저들에겐 가벼운 형벌이옵니다.”
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우수가 가득차 있었다.
“....저들은 정말로 악마같은 자들일까요.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먼 곳에 와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 있지 않습니까.... 가련한 자들이여. 그들의 악행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로마의 힘을 모르는 저들에게는 증오보다도 동정이 앞섭니다.”
감정적이군, 프로스파네스 장군은 황자 마뉴엘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다른 황자들과 달리 마뉴엘은 장군으로서의 능력과 더불어 감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상은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었다. 마뉴엘은 고개를 돌려 프로파네스를 바라보았다.
“저들도 이 전쟁의 제물입니다. 현명한 통치자라면 자신의 백성을 저렇게 죽게 하지 않으리. 투르크의 술탄은 그토록 어리석은가....프로스파네스 장군!”
“예. 태자저하.”
“황제께서 대치하고 있는 적의 군세는 얼마나 되오?”
“대략 1800명 정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1800명의 죽음과 그 몇배의 눈물이 흘러야만 이 전쟁은 끝이 나겠군요. 정녕코 그 목숨들을 빼앗지 않고서는 이 전쟁을 매듭지을 수 없는 것일까요....”
“저하. 저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면 우리 로마인들이 피와 눈물을 쏟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은....”
마뉴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무수한 생명이 죽어나갈 전장을 상상하는 것이리라.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프로스파네스 장군에게 명을 내렸다.
“우리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소 아시아의 군과 합류할 것이오. 전군을 소 아시아로 출발시키시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저하.”
1105년, 아나톨리아를 탈환한 제 3황자 마뉴엘은 약 3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 아시아로 출발하였다.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가 소 아르메니아를 구출하기 이틀 전이었다.


“저하. 포로들을 끌고 왔나이다.”
“세르비아 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불러라. 포로들은 그들 가운데 데려다놓고.”
세르비아 성 외곽의 넓은 벌판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미 반란군이 패한 뒤였으므로 모여든 군중들의 표정에는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비잔틴군에 대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는 비잔틴군에 의해 사로잡힌 포로 102명이 서로서로 줄에 묶여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세르바아인들이었다. 그때 일단의 비잔틴군이 다가왔다. 그 사이에서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나온 자는 진압군을 이끈 사령관 안드로니쿠스였다. 마뉴엘의 형이자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의 동생인 그는 제 2황자로서 비잔틴군을 이끌고 세르비아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안드로니쿠스도 황통의 핏줄임을 증명하듯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광폭하고 유혈을 즐기는 성격도 뚜렷했다. 그의 군사들은 안드로니쿠스를 두고 ‘뛰어난 공격자’라 부르는 반면에 ‘광기에 사로잡힌 자’라고도 불렀다. 실제로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가 발가벗고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옆에는 피를 흘리는 시체들이 있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또다시 반역을 일으켰는가. 지난 번에 형님께서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모자만을 처형하고 모두 용서해 주었거늘.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일벌백계하여 세르비아인들의 본보기로 삼으리라!!”
안드로니쿠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포로들의 무리 사이에서 한 남자가 일어났다. 피가 말라붙은 얼굴은 피로와 절망에 찌들어 초췌했으나 두 눈은 강렬하게 로마의 두 번째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낮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마의 장군이시여. 그대가 보다시피 우리는 그저 평범한 농민이올시다. 해가 뜨면 칼대신 쟁기를 갈고 사람대신 잡초와 해충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오.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스런 아내가 만들어준 빵과 수프를 먹고,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하루의 피로함을 씻는다오. 비록 그대의 호사스런 성찬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단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지요. 이 땅에서 몇 대를 내려오며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소이다. 그런데 그 평화로움을 깬 것은 당신들이요. 누가 당신들에게 이 땅을 바치더이까. 누가 당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더이까. 그대가 알고 있는 이 땅에 대한 것은 고작 금광이 있다는 것 뿐이잖소. 당신들은 침략자요! 그대들이 말하는 로마의 영광이란게 기껏 이런 탐욕스러운 것이었소? 남의 것을 힘으로 빼앗고 그 주인을 죽이는? 우리는 로마인이 되고 싶지 않소. 로마의 영광은 더더욱이나 필요없소. 그냥 우리를 이땅에서 조용히 살도록 물러가 주시오. 우리는 그대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소. 또한 저 군중들 사이에는 우리의 가족들도 많이 있다오.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기있는 포로들은 부디 살려주시오. 명예를 존중하는 로마의 장군답게.”
그의 말이 끝나자 장군들과 병사들은 숙연해졌다. 몇몇 병사들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울먹이기까지 했다. 성을 지키던 스테파누스 장군은 그들을 살려주고 싶었다. 애초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를 모시고 이 곳을 점령했을 때, 황태자는 그들을 달래주려 애썼다. 주모자는 부득이 처형했어도 남은 포로들은 자유롭게 해 주고, 세금도 거의 걷지 않았으며 사제들을 불러 그들의 교화에도 힘썼던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가 투르크전쟁에 출정할 때에는 환송나온 주민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민들의 충성도가 눈에 띄게 나빠지더니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고 급기야 반기를 든 것이다. 스테파누스는 자신의 기량이 부족한 것을 한탄했다. 내가 잘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안드로니쿠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황량한 벌판에 부는 바람같았다.
“.....미하엘, 미하엘 슈만트요....”
“좋다. 미하엘 슈만트. 그대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그대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리겠노라. 그대는 젤 마지막에 죽을 것이며 그대의 혀로 인해 그대의 친구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태자저하, 저들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어 로마의 영광을 받들게 하시옵소서.”
스테파누스 장군이 안드로니쿠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난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다. 그대는 로마의 황태자이자 이 곳의 사령관인 나의 말을 거역할 셈인가?”
“아니옵니다. 그러나 우둔한 무리에게는 공포보다 온정이 더 잘 들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대는 지금 저들 앞에서 로마의 황자를 능욕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더는 용서치 않겠다.”
“............”
안드로니쿠스의 성격을 아는지라 스테파누스는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더 이상의 만류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하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102명의 포로들은 세르비아의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불에 달군 칼과 창으로 처형되었다. 마지막 처형자는 미하엘이었다. 그는 안드로니쿠스의 장담대로 산 채로 화형당했다. 처형장에는 포로들의 비명과 가족들의 울음이 메아리쳤고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하여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비잔틴군들조차 이 가혹한 장면에 눈을 감는 자도 있었고 토하는 자도 있었으나 오직 하나, 안드로니쿠스만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끝까지 바라보았다.
울부짖는 군중들 속에서 유독 표정이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후드를 둘러쓴 이 남자는 포로들이 처형되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 뒤를 돌아 사라졌다. 마을 어귀에 한 여인숙에 들어간 그는 양피지를 꺼내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포로들을 너무 가혹하게 처형하여....앞으로도 이 지역은 끝까지 로마에 반항....남은 것은 교황과 황제의 이간질이오며....본국에서도 빈틈없는 준비를 부탁....시칠리아의 번영이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편지를 다 쓰자 남자는 초에 녹인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했다. 마굿간으로 내려간 그는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신부는 편지를 받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나갔고 그 뒷모습을 보는 사내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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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04.03.06 -_-;;; 왠지 모르게 스토리가 이상하게 된-_-ㅋ
  • 작성자겨울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3.06 아...지금 세르비아 반란을 진압했거든요. 근데 전부 다 처형하면서 글을 쓰려니 비잔틴의 황자들의 성격이 똑같은 것 같아서 조금 달리 묘사해 봤어요.^^; 투르크전은 잠깐 소강상태랍니다. 병력이 너무 적어서...;;;; 그리고 반역이 아니라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입니다. 연좌제는 적용하지 않죠.^^;
  • 작성자겨울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03.06 에뎃사와 시리아, 아르메니아는 신격카이사르님 말대로 신중히 하려고요. 꽤나 골치아프더군요...ㅠㅠ 시칠리아는 애초부터 음모의 본산(?)으로 상정해서 쓰고 있어서....;;;; 투르크는 다음 편부터 다시 쓰겠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나베싱 | 작성시간 04.03.07 음.. 시칠리아가 음모의 본산이라....-_-; 어쩌다가 간혹 시칠리아가 교황령을 공격해서 교황을 쫓아내기도 하던데... 그리되면 정말 아주 골치아파지겠군요...-_-;;;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04.03.07 저도 슬슬 글쓰기 도전을 준비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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