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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신화 22부 폭풍의 종말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5.01.16|조회수219 목록 댓글 7
[황제의 진격 목표는 모스크바 입성 이었고 군단장 만프레드의 목표는 라쟌 이었다.많은 이들이

황제보다는 만프레드의 진격에 관심을 두었다.라쟌은 유럽 최동단에 있었다.많은 이들이 그곳에

서 전란이 종결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사 전략집-


황제는 상륙한지 얼마 안 되어 적과 칼을 맞부딫쳐야 했다.적은 압도적인 수로 황제군을 바다로

밀어 내려고 했었다.그러나 그것은 적군의 실책 이었다.황제는 위기를 싫어했지만 원하기도 했

다.황제가 침공한 곳은 사지 였다.지면 전원 사로잡혀 죽거나 전멸할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황

제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황제는 황제군이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빌미를 적으로부터 제공 받

을 수 있었다.황제군은 필사적으로 싸웠다.적은 수는 많았지만 경무장 이었고 아군은 중무장 이

었다.적의 가공할 대공세는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전투가 끝날 무렵에 황제군은 적과

싸우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숨바꼭질에 의해 완전히 지쳤었지만 전장을 적군의 피와 시체

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황제는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1300여명을 죽이고 300여명을 생포 했다.

황제는 기세를 몰아 다음해에 성을 점령했다.공성전에서 수비군은 전멸했다.만약 이곳에 상륙

한 뒤 첫 전투에서 졌었다면 황제군이 전멸 했을 것이다.성은 시체가 가득 했다.입성할 때,황제

의 말은 적의 시체를 짓밟았고 그 말 위에는 황제가 있었다.그리고 뒤에서 황제군의 철제 장화

가 시체를 짓밟아 버렸다.

황제는 포로들의 몸값을 요구 했으나 적은 거절 했다.황제는 포로들을 모두 배갈라 죽였다.그들

을 죽일때 비명소리가 가득 했고 적군의 가족들이 와서 시체를 찾거나 배갈라지는 가족원을 보

며 울부짓었다.황제는 울부짓는 그 가족들도 붙잡아서 사지를 찟는 형에 처하게 하였다.반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해도 제국에 있어서 그들은 반역자일 뿐 이었고 반역자는 제국의 법에 따라 가

족들과 함께 처형 되게끔 법으로 제정 되어 있었다.이 법은 반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지역에 모

두 적용 되었다.이 법은 1171년에 제정 되었으니 아마 이 법으로 인해 죽은수는......황제는 계산

을 포기 했다.

황제가 동부전선에 참전한 이후,황제의 성격은 변해 갔다.황제는 식사하거나 혼자 있을때 무언

가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중얼거리는 것은 기도 인 것 같았고 주문 같기도 했다.그러나 그

것은 조용하면서도 음산한 분위기를 내포 했고 공포를 자아내기 충분 했다.그럴때,시종들은 황

제를 두려워 했다.그러나 그럴 때는 하루에 몇 분도 채 안되었다.황제는 그 공포스러운 몇 분 후,

시종들에게 농담을 할 정도로 다시 정신이 맑아졌다.그러나 황제가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 했다.

그렇다고 황제가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무렵 황제가 있는 곳 남쪽에서도 토벌군은 진격하고 있었다.그들은 용감하고 충실하게 적과

싸웠고 전장을 피와 시체로 물들였다.이제 반군과의 전투에서 전술이라는 것은 생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전장은 항상 평평했고 전술을 꾀 할 만한 지형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물론 회전에서

의 전술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쓸 가치는 별로 없었다.전투에서 많은 적을 죽였지만 많은 적

이 도주 했다.그러나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생포 되었다.북쪽에 러시아를 건국

한 반군과 달리 남쪽에 있는 반군들은 가난했다.그들은 살려둘 가치가 없는 적으로 간주 되어 집

단으로 학살 되었다.반군의 가족들은 시체를 찾으러 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시체들은 전장에서,

혹은 아무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제국군의 점령지 후방에서는 포로 학살이 아닌 주민 학살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반군이 봉기 했

던 동부는 그리스 정교나 다신교.혹은 미신을 믿는 자들이 주민들의 다수를 이루었다.1160년 경

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를 했었지만,그들은 종종 살해 당했다.훗날에 그것은 외국의 암살자들

의 소행으로 밝혀 졌지만 그 당시에는 주민들의 만행으로 알려져 있었고 황제는 그것을 이용

하기로 마음 먹었다.황제는 스위스와 브란덴부르크 등 서부의 몇 개 도시에 종교 재판소를 설치

하고 종교 재판관을 양성하여 프랑스 남부 및 이탈리아 이북 지역과 동부에 파견 했다.프랑스의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카사드]라고 불리우는 사이비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다.보고서에

의하면 [신도들은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하고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을 권유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선제에 의해 1178년에 프로방스에서 300여명이 고문과 재판을 통해 죄를 인정 했고 처형 되었

다.이것이 제국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종교 재판 이었다.그 후 1180년에 아퀴텐에서 500여명이

처형 되었고 1182년에는 북부 이탈리아 2개주에서 약 900여명을 죽였다.그리고 한 동안 종교재

판은 열리지 않았다.그러나 이제는 종교재판이 동부에서 시행되는 것 이었다.1191년 4개주에서

종교재판이 동시에 진행 되었고 약 3000여명의 주민들이 처형 되었다.처형된 자들로부터 몰수

된 재산들은 교황과 교회에 기부 되었다.대신 교회측은 동부에서 일어나는 제국군의 잔악행위

와 학살.약탈을 묵인 했다.

제국군의 진격에 방해되는 것은 없었다.1170년때 제국군이 퇴각하면서 성과 방어 시설을 모두

허물고 경제시설을 소각하거나 철수 시켰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진격으로 인해 얻는

것도 별로 없었다.


1192년이 될 무렵, 황제는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남쪽에서 싸우는 토벌군의 진격이 빨라서 손쉽

게 모스크바까지 진출 할 수 있었다.만프레드 군단은 라잔에 도착하여 반군과 맞서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현재 동부에서 파견된 제국군은 9개 군단 4800여명 이었다.우리와 맞서싸우는 적

군의 수는 11000여명 정도 되는 듯 했다.마침내 토벌이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황제는 군사들을 사열했다.남쪽에서 진격한 1개 군단과 합류해서 황제군은 2개 군단 980여명

정도 되었다.황제군에서 몇백M 떨어진 곳에 러시아군 3200여명이 진열을 갖추고 있었다.황제

는 병사들에게 훈족의 아틸라가 했던 말을 했다.[ 영혼이 복수심에 가득차는 것은 자연의 엄연

한 이치다.]황제는 잠시 호흡을 했다.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제군들,복수심을 마지

막 순간까지 지니고 있으라.적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으라.이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은 역사

가 될것이고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그리고 이곳까지 오면서 사별한 수많은 전우들을

영원히 기억되게 할 것이다.그들을 영원히 잊지 말라.]그리고 황제는 말했다.[내가 지금 입고 있

는 갑옷은 프레드릭 볼프강 장군이 입었던 갑주다.나는 오늘 그를 기리고자 한다.이 전란의 영웅

을 위하여.]그리고 황제는 칼을 뺏다.[우리가 여기서 바쳤던 청춘과 피.노력을 오늘 여기서 마지

막으로 보상 받는다!전군,돌격!!]

-[신성로마제국사 전략집]-


그 시각 라쟌에서도 만프레드는 2개군단과 합류하여 1800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라잔을 포위한

반군 7000여명과 대치 하고 있었다.병력차이가 너무 심했다.그러나 만프레드는 전투를 결심 하

고 있었다.만프레드는 병사들을 사열 시켰다.반군은 이미 만프레드 군단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만프레드는 연설했다.[오늘 신께서 우리에게 크나큰 복을 주셨다.오늘 우리는 난이 일어난 이

후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웅이 될 것이다!볼프강 장군처럼 싸워라!제국을 위

해 돌격!!]

병사들은 [황제 만세!!]를 외치고 갈까마귀처럼 달려드는 적군속으로 파묻혀 들어 갔다.만프레

드는 적군을 향해 말을 달리면서 자신이 이 전투에서 프레드릭 볼프강 처럼 죽기를 바랬다.살아

남으면 만프레드는 수천의 포로들을 학살하게 될 것이고 역사에 도살자라는 오명이 붙을 것 이

었다.그는 그런식으로 역사에 기록 되는 것이 두려웠다.하지만 만프레드는 곧 적군 안에 파묻혔

다.그리고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전술은 전혀 쓰이지 않았다.오직 개개인의 전투의지와

전투력에 의존한 전투 였다.모스크바와 라쟌,두 곳의 전투가 종료 되기 까지 1일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1193년...모스크바가 점령되고 라쟌의 반군이 소탕됨으로써 1170년 이후 23년 동안 동부에 피바

람을 일으킨 반란이 진압 되었다.황제는 모스크바에 당당히 입성했고 만프레드는 볼프강 처럼

죽지 못하고 살아 남아 약 3200여명의 학살을 지시 했다.제국이 건국된 이래 이만큼 많은 포로

가 잡힌 일은 없었다.학살은 이틀 밤낮에 걸쳐 진행 되었고 각종 고문기구와 도구들이 동원되었

다.반군의 우두머리는 [철녀]라고 불리는 도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그는 [반역자의 왕]이라

는 칭호를 받았다.그리고 만프레드는 [토벌군의 영웅]이라는 칭호와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며칠후,라쟌에서는 최고참 부대인 바이킹 부대의 해산이 있었다.해산할 때 까지 살아남은 부대

원은 4명 밖에 없었다.그들은 동부 전격전때 스위스에서 고용되어 라쟌에 주둔 했었고,1170년때

의 반란때부터 지금까지 이 곳을 수비 하고 있었다.그 노병들은 제국군의 경의를 받으며 군을 떠

났다.그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듯 했다.

그 동안 모스크바 외각의 어느 숲에서는 황제와 몇명의 장군이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숲은 친위

대가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그들은 프레드릭 볼프강의 갑주를 묻고 있었다.그 갑주에는 황제

의 단검으로 쓰여진 글귀가 있었다.

[제국을 위해 갑주를 복수의 피로 물들이도다.]

황제의 단검에는 [제국을 위하여 세상을 피로 물들이도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동부에서의 학살은 반란 평정후 7년 동안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계속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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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Shin | 작성시간 05.01.20 필체는 역시 소설에 어울리는듯... 하지만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좀 많네요 예를들어 사지[死地] 에 들어섰다면, 다 죽거나 전멸한다고 설명이 들어가있는데도 아군은 중무장이고 적군은 경무장이라서 이겼다는 좀 말이 안되네요 불필요한 설명을 좀더 줄이고 필체를 좀더 말끔히 정리한다면 정말로 소설출판가능!!
  • 작성자Shin | 작성시간 05.01.20 필체는 역시 소설에 어울리는듯... 하지만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좀 많네요 예를들어 사지[死地] 에 들어섰다면, 다 죽거나 전멸한다고 설명이 들어가있는데도 아군은 중무장이고 적군은 경무장이라서 이겼다는 좀 말이 안되네요 불필요한 설명을 좀더 줄이고 필체를 좀더 말끔히 정리한다면 정말로 소설출판가능!!
  •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0 제가 설명하고자 한것은 황제가 직접 인솔하는 군대가 바다를 건너 바로 적군 후방에 당도 했기 때문에 승리하지 않는 이상 퇴각 할 수 없는 곳 이었습니다.그렇지만 적국은 반군들이 세운 국가라서 수를 채우기 위해 농민들이 많이 동원 되었더군요.덕분에 사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 입니다.
  •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0 그리고 저는 저의 진행기를 역사를 기록하는 것처럼 구술 하고자 합니다.그리고 황제의 심정과 진행기의 에피소드나 이벤트를 통해 미디블 토탈워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0 저의 진행기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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