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실험실에서 HPLC돌려놓고 하염없이 모니터만 노려보는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한번 번역해 보았습니다. 아는것도 없고 정신도 산만한 상태에서 번역하자니, 회원분들의 관대한
질책을 청할 뿐입니다 ㅠㅠ (혹 저작권 문제가 생기면 자삭하겠습니다.)
편제와, 샤스포 소총에 대한 부분만 발췌 번역했습니다.
제국 근위대
1854년 1월, 나폴레옹 3세는 삼촌의 옛 근위대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를 위하야,라인군의 부대원들 중에서 근위대에 어울리는 갑바와 근성을 가진 장정 여러분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초기에 근위대는 각각 두 연대로 구성된 척탄병과 볼티기어 한 여단씩과 경기병대대 하나, 정찰연대와
흉갑기병연대 (각각의 연대는 여섯중대) 하나씩을 가진 기병여단을 근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헌병연대는 두개의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동포병중대와 공병중대가 추가됨으로써
조직이 완성되었습니다. 라인군과는 달리 근위대는 평화시에 창설되었으며 장병의 4분의1 이상이 파리
권출신이었습니다. 근위대는 크림과 이탈리아에서 용감히 싸웠으며 1870년, 전쟁직전에 군단급으로
확대됩니다.
1st(볼티기어) 사단
두개의 연대를 거느린 두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연대는 3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며,
이에 경보병 연대가 추가되었습니다. 사단은 4파운드 포를 장비한 두 포병중대를 포함했으며 야전연대
에 mitrailleuse (기관총의 일종) 한자루씩을 보유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인군 소속의 공병중대가
추가됩니다. (근위공병대는 1865년에 해산됩니다.)
2nd(척탄병) 사단
역시 두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첫번째 여단은 척탄병연대와 (3개대대) 근위 주아브연대 (2개대대
)로 구성되었습니다. 두번째 여단은 그냥 2개의 척탄병 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병사들 출신은 볼티기
어사단과 별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기병사단
기병사단은 각기 두 개의 연대를 거느린 3개의 여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각각의 여단은 경기병여단 (정찰대와 경기병), 중(中)기병여단 (용기병과창기병), 중(重)기병여단
(흉갑기병과 카라비니에) 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사단 역시 말에 의해 이동하는 두개의 포병중대가
추가됩니다.
군단병들은...
이외에도 4개의 기동포병중대와 화차 포탄수송중대(Traindes Equipages Militaires)가 있습니다.
각각의 보병대대는 7개의 중대로 이루어지며 이중 6개가 야전중대입니다. 예외는 경보병 대대뿐으로,
10개 중대로 이루어졌으며 이중 8개가 야전부대였습니다. 모든 근위기병 연대는 여섯개의 중대로
이루어지며 이중 5개중대가 야전부대입니다. 모든 포병중대는 각각 여섯문의 대포를 보유합니다.
근위대의 부활은 당대 사회의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이 부대는 분명, 경험많고 정치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였기에 황제가 민중의 반란에 투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대의 창설은 좌파세력을 탄압하
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근위대는 엘리트 부대로 통했으며, 전투 중 결정타
를 먹일 부대로 간주되었습니다. 제 1제정때처럼 장군들은 부대를 분산기키거나 불필요하게 투입시키
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보불전쟁때 이러한 다짐은 지켜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8월16일의 1)마르-라-투르 전투에서 이러
한경향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틀 후 Gravelotte-stpriva 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여전했습니다.
제1제국때 엘리트부대의 존재는 나머지 부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의 높은 급료와 특권
과 황제의 총애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근위대는 점점 비대해졌으며 1870년에는 (라인부대의 정예병
에의 선발이 아닌) 징집병에서 바로 충원되기도 하였습니다. 근위대와 라인군 사이의 반목은 날이 갈수
록심각해졌습니다. Camrobert의 부대가 용전분투끝에 후퇴했을때야 그들을 도와줄 근위척탄병이 도
착한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라인군들이 격전 끝에 후퇴하면서 "뽈갱이" 라는 조롱을 참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메츠공성전때 특히 심했는데, 라인 부대들은 근위대가 식료품을 불공평하게 많이 받는다
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근위대가 전투중 좀더 나은 군율과 전투력을 보여줬지만...)
근위대의 연대들
척탄병 연대
<튈레리궁에서 촬영된 척탄병들. 전통적인 곰가죽 모자에 대한 애착은 끈질겼습니다.>
1854년 7월에 첫 두연대가 창설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라인연대들은 최소 3년이상 근무한 20명의
정예병사들을 차출당했습니다. 인력부족으로 기병대와 포병대는 만들 수 없었습니다. 크림전쟁에서의
전공 이후 세번째 연대가 1857년에 창설됩니다. 2년 후 3개연대 모두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으며, 특히 Magenta 에서 큰 공훈을 세웁니다. Bazaine의 라인군이 Rezonville에서 실전을 겪을
때 이 척탄병들이 그들의 측면을 보호했습니다. 이때 3개연대의 손실은 1200명 이상이었습니다.
3/3척탄병부대가 야전에서 황제 호위를 위해 창설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죽거나 세당에서 포로로
잡힙니다. 나머지 척탄병들은 10월에 메츠가 함락될 때 포로가 됩니다.
불티기어 연대
<근위대 소속의 한 볼티기어 병사. 사진에선 경찰모를 쓰지만, 머지않아 고유의 Shako형 군모를
지급받을 겁니다.>
1, 2 볼티기어연대 역시 1854년 7월에 라인군의 정예 볼티기어 병사들을 근간으로 창설됩니다.
그들은 크림전쟁 중 세바스토플 공략전에서 척탄병의 측면을 보호하다 1000명이 넘는 장병을
잃습니다. 1857년에 2개의 연대가 추가로 창설됩니다. 이탈리아에서 4개연대 모두 솔페리노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지만 보불전쟁때는 거의 실전을 겪지 못했습니다.
근위 주아브
그림전쟁 중인 1855년에 3개의 라인 연대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부대로, 그해 있었던 말라코프 요새
(Malakoff Fort)에서 절반이 넘는 희생을 치루면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때는 주로 척탄병의 측면을 방어했으며 10개의 레종 도뇌르, 50개의 수훈메달을
수여받었습니다. (이중 하나는 프랑스 군사상 여성이 받은 첫 훈장으로 기록됩니다.) 보불전쟁때는
Rezonville 전투에서 실전을 겪으며 1200명의 부대원 중 95명이 전사합니다.
추격보병대대 (Chasseurs a pied)
1854년에 신설된 편제로, 세바스토플 공방전에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솔페리노 전투에서 상등병 몽뗄리에가 오스트리아 군의 군기를 획득하여
레종 도뇌르를 받았습니다.
대대는 1870년 Rezonville전투에서 극심한 전투끝에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냅니다.
정찰대
1848년에 통신과 수색을 목적으로 한 8개중대의 정찰대가 신설되지만 2년후 단 두개 규모로
축소됩니다. 그 후 시종무관인 Fleury대령의 나폴레옹 1세의 모범을 따르자는 건의에 따라 이 두개중대
를 근간으로 4개 중대가 추가되어 연대를 이루게 됩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라인군의 편제를 따랐으며 최상급의 마필과 장비를 지급받았습니다.
그들이 장비한 갈색말들은 일반적인 라인군대의 말들보다 일반적으로 두 세배 정도 비쌌습니다.
이러한 편애는 다른 부대장병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기에, 나폴레옹 3세는 이들의 불만이
가라앉을 때까지 정찰대의 편제를 연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편제가 완성되자 이들연대는 새로이 신설된 흉갑기병대와 함께 여단을 구성했습니다.
새로운 연대가 추가된 1855년의 재구성 기간동안 정찰대는 Chasseurs a Cheval부대에 소속되어
경기병연대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솔페리노 전투에서 실전을 치릅니다.
하지만 1870년에 정찰대는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중 한 중대는 나폴레옹 3세가 메츠에서
세당으로 이동할 때 호위하는 임무를 받고 결국 그곳에서 포로로 잡힙니다.
정찰대는 당대의 영국 경기병들처럼 사치스러운 복장을 즐겼으며 오만한 특권의식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을 상징하는 요란한 군복과 번쩍번쩍한 판금갑옷은 황제의 돈으로 제공되었습니다.
흉갑기병
<완전군장을 한 기용병 하사관(Sous Lieutenant). 헬멧과 흉갑, 승마바지를 착용한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촌인 나폴레옹 1세와는 달리, 나폴레옹 3세는 흉갑기병 편제를 1854년에 추가합니다.
제1연대는 기존 라인군의 흉갑기병, 용기병, 카라비니에르 연대에서 20명씩 우수한 자원으로 선발된
인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창설된 제2연대와 함께 중기병여단을 이룹니다. 하지만
1865년에 예산문제로 한개 연대규모로 축소됩니다.
1870년 Rezonville 전투에서 진격하는 프러시아 보병대를 저지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십자포화를
받고 막대한 사상자를 냅니다.
용기병
1855년, 근위대가 확장되면서 신설된 부대로, 부대 구성원은 라인 용기병대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습
니다. 제1 제정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1857년에 "여왕의 용기병" 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습니다.
1859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면서 프랑스군 최초로 샤스포 소총을 지급받은 병종이 되었습니다.
1870년 부대는 마르-라-투르 에서 벌어진 대규모 기병전에서 혼전끝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창기병
용기병과 같은 시기에 창설되어 이탈리아에서 대 피해를 입은 불운한 부대입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이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오페라 극장에 행차..하시다가 암살시도를 당합니다.
폭탄이 터져서 나폴레옹 자신은 무사했지만, 28명의 창기병중 13명이 중상을 입는 불상사가 벌어졌습
니다. 이탈리아 전선에선 그들의 유니폼때문에 종종 이탈리아 동맹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당했습니다.
마르-라-투르 의 혼전의 와중 그들은 또다시 아군으로부터의 오인사격으로 140여명의 사망자를 냅니
다.
Chasseurs a cheval
최초의 4개 중대는 크림전쟁중인 1856년에 제 4아프리카 경기병연대와 나머지 3개연대 구성원의 일부,
그리고 1, 4 후사르연대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급조되었습니다. 전쟁후 남은 두 중대는 프랑에서 재정비
되었으며 이탈리아와 보불전쟁때 실전을 치뤘습니다. 보불전쟁때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카라비니에르(carabiniers)
원래 라인 기병대의 엘리트 부대였으며 제2제정 당시 2개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색창연한 역할 때문에 폐지압박이 심했으나, 그대신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을 한 연대로
통합하고 근위대로 편입시킵니다. 역시 보불전쟁때는 별 활약을 하지 못합니다.
포병대
<근위기마포병대 소속의 한 Cantonoere.(제 Vivandiere글을 참고하세요)>
근위포병대는 4파운드포를 장비한 5개 포병중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후 규모가 계속 불어나 마지막에는 12개 포병중대를 가지게 됩니다.
아프리카 부대
주아브
1830년 10월 Zouagha부족의 지원병으로 창설되었습니다. 그 후 1842년 이후에 부대원들은 유럽인들
로교체됩니다. 이들의 복장은 군민 양측에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1852년 2월 13일, 3개 연대가 더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크림, 멕시코, 이탈리아, 레바논에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보불전쟁 때 이들은 그들의 용맹을 재증명했는데 제3연대의 경우 65명의 장교와 2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부대가 Froeschwiller 지구의 전투를 치르면서 24명의 장교와 415명의 병사로
격감합니다.
제 1연대의 경우 행군 도중 프러시아 포병대의 십자포화에 맞서다 결국 물러납니다.
4주후 세당에서 버티던 나머지 주아브들은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포로가 됩니다.
Tirailleurs Algeriens (Trucos)
역시 1830년에 여러 아랍부족과 뚫흙부족의 지원자들로 창설된 편제입니다.
모든 병사와 하사관의 절반가량은 현지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아브부대가 유럽인으로 바뀔 때
북아프리카계 주아브 병사들을 흡수하였으나 고급장교들은 여전히 프랑스인이었습니다.
1841년 이 부대는 3개의 대대로 재편되었는데 각각의 대대는 오랑, 콘스탄틴, 알제 지역에서
충원되었습니다.
크림에서 보여준 이부대의 용맹은 나폴레옹3세를 감동시켜 3개연대 체제로 확장됩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이 명성을 유지되었는데, 사살된 적의 목을 잘라와 프랑스 장교들을 기겁하게 합니다.
이 부대는 세네갈과 인도차이나, 멕시코도 그 명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성실함의 결과로
이들을 더욱 확장하라는 요구에 따라, 나폴레옹 3세는 1865년에 각각의 연대를 기존의 3개 대대에서
4개 대대로 늘립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보여준 그들의 능력은 각각의 연대에서 한개 대대를 근위대로 편입시켰으며,
이 대대를 근간으로 주아브 근위연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보불전쟁 당시 3개의 연대가 맥마흔MacMahon의 1군단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첫번째
주요한 실전참여는 Douay장군의 2사단에 소속된 1연대가 겪은 것이었는데, Wissenbourg 지구에서
건방진 독일 땅개들의 러쉬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나 500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맙니다.
2일후 Froeschwiller 지구에서 3개연대 모두는 대타격을 입습니다.
이러한 막장스런 상황에서도 제 1연대는 자신들의 용맹을 다시한번 과시하게 되는데..
기세좋은 훈족 보병의 물결로부터 예비 포병대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는,
자신들의 총을 휘두르면서 워크라이와 함께 돌격했습니다. 세번에 걸친 절망적인 돌격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포화가 그들에게 퍼부어졌고 전투에 참가한 거의 전 연대원에 해당하는 800명 이 넘는
부대원을 잃었습니다. Trucos는 실질적으로 세당 전투에서 이렇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1870년 8월, 각각의 대대는 7개의 중대가 존재했으며, 그 중 6개 중대가 전투중대였습니다.
아프리카 경기병
1830년대에 토착 기병들이 경기병의 타이틀을 달고 알제리에서 신설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그들은
2개의 아프리카 경기병연대로 통합되었으며 각각의 연대는 3개의 기존 중대와 보충병, 그리고 프랑스
인 지원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꾸준히 알제리에서 복무했으며, 크림에서는 발라클라바의 삽질
이후에 여단 규모로 커졌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솔페리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들 일부는 중국, 시리아, 멕시코에도 파견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공훈은 그들로 하여금 레종
도뇌르를받은 첫번째 기병연대가 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창백한 도살자들" 이라는 별명을 적들인
멕시코인들로부터 얻었습니다.
보불전쟁에서는 4개의 연대가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제 2연대는 마르-라-투르에서의 대규모 기병전
에 제 1, 3연대와 함께 투입되어 황제를 샬롱에서 메츠로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제 4연대는 뒤늦게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제 1, 3연대와 함께 세당에서 함께 싸울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용감한 돌격은 이 전역에서 가장 영웅적인, 그러나 가장 참담했던 비극으로 손꼽힐 것입니다.
상당수의 프러시아 척후병들을 베었지만, 적군의 주전선을 돌파하는 것은 결국 무리였습니다.
프랑스의 공식전사에 따르면 3개 연대는 35명의 장교와 438명의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다른 기병연대와는 달리 아프리카 경기병대는 한 연대에 5개가 아닌 4개의 기병중대로 이루어졌습니
다.
생존자들은 알제리에서 계속 근무합니다.
라인군 (Armee du Rhin)
그들은 대부분의 작전의 주력을 맡았으며, 프랑스군 가용병력의 80%를 차지했습니다.
보불전쟁 당시 그들은 7개의 군과 2개의 예비 기병사단, 그리고 예비 포병대와 공병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 1군단은 주아브와 Turcos를 포함했으며 제 1예비기병사단은 4개의 아프리카
경기병연대로 구성되었습니다.)
3개의 군단 (1, 3, 6군단) 이 원수들의 지휘를 받았으며 권위과 우선권의 문제로 나머지 군단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4개의 보병사단, 3개의 여단으로 구성된 1개의 기병사단.)
나머지 군단들은 3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여단으로 구성된 기병사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장군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군단예비 포병대는 각기 8개에서 6개의 포병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보병사단은 각가 두개의 연대로 구성된 두개의 여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제1여단은 비록 실전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추격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병여단은 대부분 두개의 연대로 이루어졌으나 간혹 세개의 연대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병
1870년의 패배는 프랑스 보병에게 전술교리를 재조명하게 만듭니다.
위대한 혁명시대와 제 1제정때의 왕성한 공격정신은 크림전쟁과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유감없이
다시 발휘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장식 소총의 등장과 그 광범위한 사용은 많은 장교들로 하여금
전장전술에 대해 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군장.>
화력과 정신력, 이 두 요소의 변호자들간의 활발한 논쟁은 결국 그 중간쯤에서 타협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화력증강의 필요성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인의 1)고유한 정신(Elan)이 그들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이 반영된) 보불전쟁 전 간신히 보급된 1869년의 훈련교본은 많은 프랑스군 장교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또한 프러시아군이 무서워했던 바요넷(총검) 챠지에 필요한 용기를
감소시켰습니다.
이런 경향은 장거리를 자랑하는 샤스포 소총의 보급과, 그들의 방어상의 유리함때문에 확대되었습니다.
비록 기존 니들건의 사정거리를 능가하는 그들의 총의 이점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요소는 적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니셔티브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Line infantry
제 2제국치세 초기에 75개의 Line연대와 25개의 경보병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854년 겨울에 이 제도는 폐지되고 76번부터 100번까지의 Line연대가 더 신설되었으며,
추격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중 50개의 연대가 크림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49개 연대가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그중 제 76연대는 솔페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연대기를 획득했습니다. 이런 열성은 멕시코에
투입된 51, 99연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각각의 Line연대는 3개의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대대는 6개의 전투중대를 비롯한 8개중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제 1대대의 제 7중대와 8중대는 네번째로 병참대대를 구성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그해 7월 19일의 군령 "regiment de marche" 에 의해 공포됩니다.
제국이 멸망할 때 까지 이러한 유형의 연대 27개가 만들어졌습니다. 8월 13일부의 군령에 따라 각각의
연대는 두 개의 중대를 차출하여 이 네번째 대대를 보강하게 됩니다. 제 2, 3대대의 제8중대는
고정적으로 병참부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연대 지휘관들은 야전대대들은 헌신적인 병사들로 이루어져야 하며, 예비병이나 후비병들은 꼭 필요
할때만 써야 한다고 훈련받았습니다. 전쟁 중 불운하게도 이동 중 만성적인 문제점인 탈영이 발생했는
데, 2000명이정원인 부대가 1300명으로 줄어든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편없이 훈련된 후비병들을 채워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Spicheren 지구 전투에서 제 2라인군만이 제 시간에 나타나 프랑스군의 퇴각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Wissembourg 에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몇몇 연대는 해외파병으로 인하여 보불전쟁 초기에 효과적으로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35연대와 42연대는 교황령 주둔군이었으며 (이들이 철수하고 나서야 통일 이탈리아 군대가 교황령을
점령합니다.) 16, 38, 39,92연대는 알제리에서 훈련중이었습니다. 또한 22, 34, 58,79연대는
툴루즈에서 스페인 국경을 감시하느라 간신히 세당의 샬롱군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경보병
1837년에 실험적인 성격의 한 경보병연대가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에 의해 Vincennes 에서
창설되었습니다.
이들의 만족스런 결과는 3년 후 10개 대대의 완편 편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대창설자의 이름을 따
"오를레앙의 경보병" 이라 별명이 생긴 이 부대는 알제리의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습니다.
1848년부터 부대는 간단히 Chasseurs a pied로 불렸습니다. 1853년에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공격정신과 사격술에 감명받아 10개였던 부대를 두배로 늘립니다.
이 중 12개 대대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으며 10개가 이탈리아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들은 중국, 시리아,
멕시코에도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 부대로 간주되었으며 독일놈들과의 전투에서 특유의 근성을 훌륭히 발휘하였습니다.
8월 6일에 있었던 Froeschwiller 전투에서 네개의 대대가 용전분투끝에 전멸했으며 제13대대는 700명
이 넘는 장병들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라인군이 편성되는 방법대로 편성되었습니다.(대대당 8개중대, 그 중 6개가 야전부대)
기병
제1 제정때의 선배들의 전통을 따라 프랑스 기병은 예비대, 본대, 경기병대 등 3개의 유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예비대는 흉갑기병, 본대는 용기병과 창기병, 경기병대는 후사르와 샤쇠르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프리카 기병대는 경기병대로 간주되었습니다.
각각의 부대는 각각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쇼크, 하마전투, 그리고 정찰.
1870년까지도 예비기병대는 접근전과 돌격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Froeschwiller 와 세당에서 무참하게 무너졌죠. 또한 프랑스 기병대는
기병의 첫번째 존재가치라 할수 있는 정찰조차도 만족스럽게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사실1868년에
프랑스 내각에서는 프러시안 스탈처럼 경기병연대를 각각의 보병사단에 분산배치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제안은 보병지휘관의 지휘를 받기 싫어하는 기병대 장교들의
고집불통의 저항때문에 거부당했습니다.
대신 좀더 큰 단위인 기병사단이 각각의 군단에 배치되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실전에서 정찰과 망치의 역할 모두 할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보다 낮은 지휘계통에 의해 지휘되는 개별 기병연대가 가져오는 잇점은 부적절한 사단급 지휘 아래에서
거의 발휘될 수 없었습니다.
Wissembourg 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기습, 마르 라투르와 보몽 Beaumont 전투의 결과는 기이할
정도로 이완된 프랑스 기병대의 자만심의 결과였습니다.
짧았던 세당전투기간에 프랑스 보병들은 자신들의 기병대가 무능을 자랑하는 동안 독일기병 들에 의해
자신들이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는 기병대의 화기사용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들이 강조해 온 2)정신(Elan)
에 의한 충격전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12용기병 연대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병대의 주무장은 기병도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프랑스 기병대의 사격술은 굉장히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전쟁발발시점에 라인군에는 50개의 기병연대가 있었습니다. 10개의 흉갑기병연대, 12개의 용기병연대,
8개의 창기병연대, 12개의 경기병연대, 그리고 8개의 후사르.
예비대와 본대는 공히 5개의 중대를 가졌는데, 경기병대만은 6개 중대였습니다. 이중 한 중대는
연대본부 소속이었습니다.
전쟁발발시 5개 기병연대는 당장 쓸 수가 없었습니다. 1, 9경기병대와 8후사르연대는 알제리에
주둔중이었고, 8경기병연대와 7경기병연대중 3개 중대는 스페인과의 국경지대에 주둔중이었습니다.
(나머지 2개 중대는 교황령에 주둔중이었으며..) 제 6후사르연대와 6용기병연대가 소속된 7군단의
한 여단은 리용의 정치적 소요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는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흉갑기병
전장에서의 망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들은 워털루 이후 보불전쟁때까지 거의 실전을
겪지 않았습니다. (제 6연대와 9연대가 포함된 한 여단이 크림전쟁에 파견되었으나 전투를 겪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50년간 그들의 전술과 무기는 거의 진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정체는
그들이 알제리에서의 근무에서 해방됨으로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들 연대들은 작전 중 보여준
이들 연대들의 독단적인 태도때문에 이미 악평이 자자했습니다. 다른 기병부대들이 새로운 사상의
보급에 태만한 것처럼 흉갑기병 연대의 초급장교들은 전혀 실전 경험이 없었습니다.
Barail장군은 당시의 군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 1흉갑기병 연대장으로서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퍼레이드용 부대" 에 대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부대의 많은 장병들이 다른것엔 관심없이 오로지 헬멧을 광내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짓을 금지하자 장교층에서 그러한 "전통에 대한 이단" 에 대한 거센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수위치를 과시하려는 듯 어느 한 흉갑기병연대는 뤼네빌에 주둔했으며, 다른 부대는 아예
베르사유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존재하고 있던 10개의 연대중6개는 예비대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4개연대는 1군단과 6군단 소속이었습니다. 그들의 태평세월은 Froeschwiller 지구에서 미셸의 여단이
모르스브롱에서 학살당하면서 박살났습니다. 같은 날 Bonnemais에서 4개의 연대로 구성된 거창한
예비사단은 프러시아군의 라이플 사격에 핏빛 재앙을 겪었습니다.
용기병
용기병 역시 제 2제국때 별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1870년 이전의 실전경험이라고는 크림전쟁에 투입된 6, 7용기병연대가 Kanghil 지구의 전투에서 대규
모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한 것뿐이었습니다. 전쟁발발 당시 즉각 투입이 불가능했던 6기병
연대를 포함하여 12개의 용기병연대가 있었습니다.
제 3용기병연대는 마르 - 라 -투르 전투에서 근위 창기병부대가 혼란을 겪게 한 책임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통적인 하마전투도 가능했습니다. Spicheren 전투에서 12연대휘하의 두개 중대는 공병대와
100여명의 후비병들과 함께만든 급조된 참호에서 프러시아 포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
그들은 부정확하지만 강력한 일제사격 후 기병도를 들고 돌격했습니다.
중소수의 기병들은 프랑스군의 후퇴를 지원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창기병
1870년 이전엔 제 1, 4창기병대만이 솔페리노전투에서 실전을 경험했습니다. 프러시아와의 전쟁때는
8개의 연대가 있었으며 실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제 6창기병대의 두개 중대는 Norsbronn 에서 미셸
의여단과 함께 돌격을 감행했으며 (그러다 괴멸당했고) 그때 3연대는 Rezonville 에서 근위흉갑기병의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세당에서는 1, 7연대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기위해 절망적인 돌격을 감행하다
괴멸당했습니다. 제 2, 6연대는 간신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공화국 정부의 명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후사르
나폴레옹 1세때의 전통대로 9개의 연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근위대 확장을 위해 해산됩니다.
나머지 8개 연대는 제 2제정시대에 상당한 공훈을 세웁니다. 1, 4연대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는데
그 중 4연대는 Kanghil 지구의 전투에서 얼마간의 러시아 대포를 노획합니다. 이 전공에 감명받은
나폴레옹 3세는 그 전투의 이름을 연대기에 새기도록 명령합니다. 황실의 총애로 그들은 귀환 후
한동안 파리에서 근무했습니다.
1859년에 2, 5, 6, 7, 8연대가 크림전장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시리아와 멕시코에도 파견되었습니다.
보불전쟁기간 그들은 언제나 전장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2, 7연대는 마르-라-투르 대기병전에 처음으
로나타난 부대였습니다. 프러시아 용기병대를 무찌른 후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지휘관인 Montaigu중장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됩니다.
제 1연대는 세당에서 아프리카 경기병대와 함께 절망적인 돌격을 감행한 대가로 239명의 장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제 3연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Chasseurs a Cheval
후사르처럼 이 경기병대도 프랑스 침략군의 기병지원을 받아 알제리에서 확대된 부대입니다. 4개의
연대 (2, 4, 7, 10) 가 이탈리아에 투입되었고 제 3연대는 교황령 수비에 투입되었으며 2연대는 멕시코
에 파견되었습니다. 보불전쟁 당시엔 12개 연대 중 8개 연대가 야전군에 속해 있었는데 차후에 2개
연대가 세당에서 합류하여 새로 만들어진 12군단의 일원이 됩니다.
제 6연대 역시 1후사르연대와 함께 격전을 치뤘습니니다.포위된 연대 중 제 11연대만이 탈출에
성공합니다.
Cavaliers de Remont
1831년 4월 11일, 수송부대와 전투부대에 말을 공급하는 임무를 띠고 창설된 부대입니다.
제 2제정 출범 당시에는 10개의 부대가 있었는데, 그 중 3개는 알제리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각지역은 다양한 능력을 가진 말을 제공했습니다. 예를들어 노르망디 지역은 용기병용 대형마의
산지였으며, 브루타뉴 지방은 포병대용 수송마, 남서지방은 경기병용 말의 산지였습니다. 실제로 말을
관리하는 것은 연대에 딸린 민간인의 일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지역의 재향군인들 이었습니다.
1852년에 부대는 4명의 장교와 196명의 병사로 구성된 4개의 예비군 기병중대로 개편됩니다.
1854년에 중대의 수가 6개로 늘어납니다. 그해에 3개의 중대가 알제리에서 추가 창설됩니다.
1856년엔 한 중대가 훈련되어 St.cyr 의 군사학교와 소뮤르의 기병학교에 배치됩니다. 1862년에
부대는 8개의 중대로 줄어들고 그중 세개는 알제리에 주둔했습니다. 제 2제정내내 좋은 군마의 결핍은
계속되었고, 이는 좋은 종마의 부족으로 생각됩니다. 보불전쟁당시 일반적인 프랑스 기병마는 독일의
군마보다 열등했습니다.
포병대
나폴레옹 1세가 포병에 애착을 가진것을 볼때,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 역시 포병에 관심을 보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포병전술과 기술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그것들에
대한 몇몇 중요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놈들의 집안싸움에서 위력을 과시한 12파운드포의 증산에도 열성적이었죠. 그의 지도하에서
포병대는 좋은 대접을 받았으며 1859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말하는 듯)
프랑스군의 강선포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기이하게도 폐하께서는 그 사정거리와 정확성에 두려움을 느낀 고급장교들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독일놈들의 크룹포의 위력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능수능란한 장군이었던 Lebrun은 이 문제의 원인
이황제께서 기존의 포의 개량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간주합니다. 기실 1870년의 프랑스
포병대는 그들 적군에 비해 여러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화시에 포병대는 포병화력에 관한 책임을 진 화포위원회가 행사하는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들의 포병화력에 의한 광역제압에 관한 가히 고집불통적인 집착은 1858년에 처음 제안된 샤스포
후장식 소총의 도입을 지연시켰습니다. 10년후 위원회는 크룹포의 도입도 무산시켰습니다.
포병은 국방정책에 주기적으로 참여하는 많은 민간 국방위원회와 접촉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병이나 기병장교들은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만남은 포병 장교들의
교육수준을 높이는데 공헌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 또한 이러한 특수무기를 교육받은 장교들만이
이기는 작전을 펼치는데 의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포병대의 지위를 보여주는 한 가지
상징은 그들의 Etat major였습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은 포병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탄약의
수급을 담당했습니다. 전쟁시에 예비탄약을 관리하는 역할은 보병들이 치르는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보불전쟁 발발당시에 이 책임은 Soleill장군에게 있었는데, 마르-라-투르 전투 이후에 그는
육군의 탄약상황을 오판하였으며 이때문에 프랑스는 메츠로의 퇴각을 강요당합니다.
그는 세당포위전 당시에도 가용탄약의 보유량의 정확한 수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전쟁발발후 첫주간, 포병대는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각각의 군단에 독자적인 가용
포병연대를 보유한 프러시아와는 정반대로, 프랑스군 포병대의 분산배치는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미미했으며, 성공하는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1, 2, 4, 5, 7,
9, 11연대가 한 군단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11야전연대와 18기동포병대는 예비군 소속이었습니다.)
17기마포병대를 예로 들자면 소속 포대가 2, 3, 4군단에 흩어져 있었으며 6야전연대
는 1, 5, 7군단에 분산배치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비포병대 동원의 실패로 포당 발사가능한 포탄
은 규정인 440발의 절반가량이었습니다. 마필의 부족또한 골치거리였는데 거의 9000필의 군마가 부족
했습니다.
게다가 포병대는 전장에서의 운용도 미숙했습니다.12파운드 중포를 포함한 많은 대포들이 최후의 결전
을 위해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나폴레옹 1세가 바그람과 보로디노에서 저지른 핏빛 실수가 보불
전쟁때도 재현되었으며 독일군은 손쉽게 포병화력의 우세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술적 보완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었던 포병화력의 집중투사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개전당시 20개의 포병연대가 있었습니다. 15개의 야전연대 (연대번호1-15), 하나의 pontonniers연대
(16), 그리고 4개의 기마포병대(17-20). 각각의 연대는 12개의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8개 중대가
기동력을 보유했습니다. 나머지 4개 중대는 본부에 배치되거나 프랑스 곳곳의 요새에 주둔했습니다.
pontonniers연대의 경우는 14개 중대로 구성되어서 Potoon 다리의 건설에 투입되었습니다.
기동포병연대는 각각 여덟개의 중대로 이루어졌으며 그들 모두는 기동력이 있었습니다. 5개 중대가
알제리에 투입되었고 2개 중대는 교황령에 주둔했습니다. 전성기 포병대는 30000명의 인원과 16000필
의군마를 보유했습니다. 16개 중대로 된 2개의 열차수송대는 전장으로 탄약을 보급하는 임무를 부여받
았습니다. 여기에는 10개 중대분에 해당하는 노동자와 6개중대분에 해당하는 기술자가 배치되었습니
다. 이 중 2개 중대분의 화차와 각각 한 중대분의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알제리에 배치되었습니다.
공병대
포병대의 경우처럼 공병대도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들의 etat major는 27개의 지방 부대들
을 지휘하였는데, 그들 부대는 곳곳에 산재한 프랑스의 요새의 유지와 보수를 책임졌습니다. 전시에
그들은 임시 방어거점을 만들거나 폭파시켰으며 규정에 따라 보병들을 위한 참호를 건설했습니다.
보불전쟁당시 대육군의 공병대는 Nordeck 의 Coffimieres장군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방어거점에
의한 이니셔티브의 이점을 이용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메츠 남쪽의 다리들을 폭파하는데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결국 Bazaine군은 프러시아군에 의해 통째로 포위당했습니다. 그는 Borny 전투 후 모젤강
을 거쳐 후퇴하는 아군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실패는 훗날 누군가의 지적대로 공병학
교가 메츠에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비판받았습니다.
전쟁발발 당시에 공병대는 7000명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메츠, 마라스, 몽펠리에에 본부를 둔
3개의 연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각각의 연대는 8개 중대로 이루어진 2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Sapeurs conduceurs라 불린 한개 중대가 추가되었습니다. 1870년 8월당시 6개 중대가
알제리에,1개 중대가 교황령에 주둔중이었습니다. 하나의 공병중대가 하나의 사단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1-2개 중대가 사단예비로 존재했습니다. 군단에는 3개의 예비공병중대가 배치되었습니다.
3)샤스포 소총
<유럽최고의 소총, 샤스포 소총.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배에 무기탓 못합니다.>
공무원이었던 샤스포에 의해 개발된 총으로, 1855년에 황제에게 헌상되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부 견본품이 근위 용기병대에 의해 사용되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화포위원회에 의해 차갑게 거부당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후장식소총의 개발을 지시
하는 명령이 내려졌고, 보수적인 군부내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866년에 마침내 제식소총이 됩니다.
그 직후 샬롱부대에서 행하여진 실험은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쟁발발당시에 약 100만정의 소총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중 상당수가 프랑스 공업생산의
부족분을 매우기 위해 외국에서 주문된 것이었습니다.
날이좋은 날에는 사정거리가 1200미터에 달했으며 관통력과 사정거리 모두 당시 프러시아의
주력소총인 드라이제 라이플을 능가했습니다. 메츠농성전 중 몇몇 소총이 개조된 끝에 1600미터까지
사정거리가 늘어났으며 이러한 개조는 종전 후 일반화되었습니다.
설계자는 작은 고무링을 이용하여 가스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는데 이는 이 무기의 탄속을 403미터/초
까지 늘렸으며 (이에비해 드라이제 라이플은 275미터/초) 결과적으로 매우 안정된 탄도곡선을 만들었
습니다. 발전된 노리쇠의 구조덕분에 좀더 빠른 사격률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사용탄인 11mm탄은 좀
더 많은 수송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것의 탄자는 원뿔형이었는데 대략 25g (대부분의 니들건이 31g일
때) 였습니다. 가연성인 카트리지는 비단거즈가 입혀진 종이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총의 무게또한
가벼웠습니다.
샤스포의 약점은 안전장치의 위치였는데 이것때문에 이따금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탄자의
도탄현상이 심한 편이어서 이는 병사들로 하여금 엉덩이아래로 사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격전에서 한동안 급사격을 가하면서 총후미의 고무마개가 닳아감에 따라 심화되었습니다.
총신또한 빠르게 닳는 편이엇으며 상대적으로 작은 구경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총탄또한 습한 조건하에서는 문제가 많았는데, 금속카트리지는 전쟁기간중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실전
에서 이 총의 성능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정거리가 긴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어 너무 먼 거리에서 발사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기실 일반적인 프랑스병사들의 규율과 사격술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급히 소집된 실로 너무나 많은 예비병과 후비병들은 이 신무기를 접한적
이 없었고 따라서 부실한 속성교육을 강요당했습니다.
이 총은 보병용 버젼뿐만 아니라 포병, 기병, 심지어 헌병대용 모델도 생산되었습니다. 그 중
포병대용 모델은 전쟁이 끝난 1873년까지도 전군에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기병대용 모델은 용기병대와
경기병대에 의해 전쟁 중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 버젼의 사정거리는 약 800미터였습니다.
아프리카 기병대의 경우는 보병용 모델과 비슷한 좀더 긴 모델을 사용했습니다.
추가설명 :
1) 마르-라-투르 전투 : 이 전투는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군의 제 3군단과 제 10군단이 베르됭 방
면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라인군의 5개 군단을 포착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프로이센군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오후 까지 프랑스군 주
력이 베르됭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제 10군단이 증원되면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오후에 증원된 제 10군단은 프랑스군 우익의 제4군단을 공격해 퇴
각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 됩니다.
저녁 전투에서 프로이센 6보병사단 병력은 프랑스군 제 4보병사단 70연대(제 6군단 소속)에 접근한 뒤
프랑스어로 아군이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이 아군으로 착각하고 소총을 내리
자 프로이센군은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 제 70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프로이센 기병이 가세해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 황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자 프랑스 제 6군단전체
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2) Elan Vital : 이 Elan Vital은 프랑스 군사학의 근본으로 이 사상을 정리한 것은 그 유명한 포슈 원수
입니다. 포슈 원수는 그의 저서 「전쟁의 원칙」에서 이것의 개념을 소개했는데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포슈는 이 사상을 프랑스 육군 대학(Ecole Superieure de la
Guerre)에서도 강의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장교는 극소수였으며 대부분은 너무나 난해해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도 전해집니다.
이 Elan Vital 은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굳이 한다면「생사와 관계되는 중요성을 가지는
강한 성질 (또는 정신력)」 쉽게는「공격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직역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 되어 버리죠.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의식이다. 즉 총사령관이 패배, 혹은 승리라고 인식하는 것
으로써 승패는 결정된다. 참고로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총사령관은 전군 통수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
다. 즉 일반적인 야전군의 지휘관이 아니고 대개는 참모 총장일 것이다. "
요컨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야전군의 지휘관과 참모총장이 승리할 의사를 계속 보유하는 것
에 있다는 겁니다. "Victoire c'est la volonte." 이것을 달성하려면 연속적인 공세 의사를 보유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Elan Vital 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는 조금 잘못 전해져서 1차대전때 프랑스 보병들을 개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처럼
느껴지는데요. 전술의 단계에서 세련되지 않아 많은 보병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기본
전략으로서의 저 Elan Vital의 개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그리고 베트남전은 모두 어느 한쪽 총사령부의 의지부족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 뒤에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난것은 결국 총사령관의 의지 부족
때문이거든요. 좋은 예로는 아직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으면서 항복한 2차대전 당시의 프랑스와,
또 그 반대로 본토는 점령당했으나 망명정부가 독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한 네덜란드와 벨기에, 폴란드
등이 있다고 봅니다.
프랑스를 위시하여 근대 유럽각국의 군대는, 이러한 사상을 말단병사에서부터 총사련관에까지 계속
강조했습니다.(물론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현실과 이론의 괴리를 넓히기도 했지만...)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대의 사기는 바닥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 (Louis Jules
Trochu) 장군은 1864년 메츠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3) 샤스포 소총 : 샤스포소총은 보불전쟁기간에도 결코 전 프랑스군에게 지급되지 못합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지요.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잡다한 종류의 총으로 몇분안에 총알을 다 써버리고
부상자들을 남겨놓은 채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군, 1870~1871" 오스프리 출판사의 멘엣암즈 시리즈.
그 외 배군님 블로그와 어린양님 블로그를 참조했습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gaius 작성시간 07.07.06 죤정보이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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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Balian de Ibelin 작성시간 07.07.06 프랑스에서의 전격전도 6주만에 끝났잔아요~~~올려주세요^^;;(니가 해봐 임마! 퍽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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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7.06 음...변명인데요;;; 제가 알기로 2차대전에 관해선 오스프리에서 나온 책들의 평이 그닥 좋지 못합니다.(도주) 사실 2차대전에 대해선 워낙 명저들이 많아서요. 지금 눈독들이고 있는 책이 하나 있는데 구입해보고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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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Balian de Ibelin 작성시간 07.07.06 명저들이야 많지만 불란서군빠들이 원하는 책들은 정말 희귀하니 문제죠...혹 원서를 구입하시려는 계획이아니신지 ㅡㅡ;;;(괜히 저땜에 피같은 $를 쪼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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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교황 빠돌이 작성시간 07.07.10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