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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차 불가리아 제국 역사 (개정);;

작성자바르티겐=이형희|작성시간08.06.05|조회수682 목록 댓글 7

1차 불가리아 제국(Tuna Bulgar)은 북위처럼 소수의 유목민 지배계층과 다수의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된 나라로 초기에는 유목적 기풍이 유지되지만 다수 피지배계층의 언어,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 민족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1차 불가리아 제국도 그런 과정을 겪은 투르크 왕국들 중의 하나입니다. 역대 투르크 제국과 왕국은 거의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봅니다. 고대 투르크인들만 봐도 東 돌궐쪽으로는 몽골리언적인 특징, 西 돌궐로 갈수록 코카서스 적 특징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역사는 건국 주체가 투르크 계의 불가르족인 만큼 넓게 따진다면 터키사의 범주에 속합니다. 하지만 보리스의 개종 이후 슬라브化가 급속하게 이루어져서 어떤 면에서는 터키사가 아닌 현 불가리아 공화국의 역사로 편입됩니다.

 

1. 대 불가리아(Great Bulgaria)

B

대 불가리아(Great Bulgaria)의 영역

*1 사비르 족의 와해 이후 흑해 남부를 장악한 대 불가리아의 쿠브라트 칸은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해 쇠퇴일로에 있는

아바르 족을 압박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쿠브라트 사후 사비르 족의 후예인

하자르 족의 흥기로 대 불가리아는 와해되고 와해된 부족은 각기 하자르나 아바르에 종속되거나

이틸에 새로이 도약하거나 롬바르드족을 따라 이탈리아로 갔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투나-(다뉴브) 강으로 이동하여 1차 불가리아 제국의 모태인 투나 불가르에 주목해야 한다.

 

*1 사비르 족(Sibir) ; 훈 족의 와해 이후 남러시아 초원을 장악한 투르크 계 유목민족으로 뛰어난 야금술과 무기제조를 통해 비잔틴 제국과 사산 조 페르시아에 원정을 나가 큰 세력을 구축했으나 545년 사산 조의 왕 호스로우 아누시르반의 원정으로 쇠퇴하다가 아바르 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훗날 거대한 툰드라 지역의 이름인 Siberia의 어원도 사비르족을 통한 것이다.

*2 Tartışmalı(논쟁적인) :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 알려진 불가르 족의 구성도.

*3 Onogurlar온 오구르 : 원 거주지는 우랄 동쪽이였으나 사비르 족에게 쫒겨 흑해평원에 와 아틸라 사후 흑해 남부 초원에 유목하던 훈족과 합쳐진 공동체입니다. 이 부족은 특히 1차 불가리아 왕가와 마자르의 아르파드 家의 본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헝가리의 어원 설 중 훈(Hun)과 함께 유력시 되는 어원의 원 부족이기도 하다.-

  

 
 
 
 
 
 
 
 
 
 

*2 Tartışmalı

 
 
 
 
 
 
 
 
 
 
 
 
 
 
 
 
 
 
 
 
 
 
 
 
 
 
 
 
 
 
 
 
 
 
 
 
 
 
 
 
 
 
 
 
 
 
 
 
 
 
 
 
 
 
Yedi Slav Boy
7 슬라브 족
 

Bazı Sabir boyları

서 사비르 족

 

*3 Onogurlar

 

 

Utrigurlar
(Otuz ogurlar)

아틸라 사후

분열된 훈 족 1

 

Kutrigurlar
(Dokuz Ogurlar)

아틸라 사후

분열된 훈 족 2

 
 
 
 
 
 
 
 
 
 
 
 
 
 
 
 
 
 
 
 
 
 
 
 
 
 
 
 
 
 
 
 
 
 
 
 
 
 
 
 
 
 
 
 
 
 
 
 
 
 
 
 
 
 
 
 
 
 
 
 
 
 
 
 
 
 
 
 
 
 
 
 
 
 
 
 
 
 
 
 
 
 
 
 
 
 
 
 
 
 
 
 
 
 
 
 
 
 
 
 
 
 
 
 
 
 
 
 
 
 
 
 
 
 
 
 
 
 
 
 
 
 
 
 
 
 
 
 
 
 
 
 
 
 
 
 
 
 
 
 
 
 
 
 
 
 
 
 
 
 
 
 
 

Bulgarlar[2]
Büyük Bulgarya

대 불가리아

 
 
 
 
 
 
 
 
 
 
 
 
 
 
 
 
 
 
 
 
 
 
 
 
 
 
 
 
 
 
 
 
 
 
 
 
 
 
 
 
 
 
 
 
 
 
 
 
 
 
 
 
 
 
 
 
 
 
 
 
 
 
 
 
 
 
 
 
 
 
 
 
 
 
 
 
 
 
 
 
 
 
 
 
 
 
 
 
 
 
 
 
 
 
 
 
 
 
 
 
 
 
 
İtalya'ya
 

Tuna Bulgarları

투나 불가리아

or 다뉴브 불가리아

 

İdil Bulgarları

이틸 불가리아

or 볼가 불가리아

 

Avarlara karışmış

(아바르에 종속)

 

Hazarlara Karışmış

(하자르에 종속)

 
 
 
 
 
 
 
 
 
 
 
 
 
 
 
 
 
 
 
 
 
 
 
 
 
 
 
 
 

Birinci Bulgar Devleti
(632-1018)

1차 불가리아 제국

 

Çuvaşlar
(Tartışmalı)

추바쉬 인

(미확정)

 
 
 
 
 
 
 
 
 
 
 
 
 
 
 
 
 
 
 
 
 
 
 
 
 
 
 
 
 
 
 
 
 
 
 
 

İkinci Bulgar Devleti
(1185-1422)

2차 불가리아 제국

 
 
 
 
 
 
 
 
 
 
 
 
 
 
 
 
 
 
 
 
 
 
 
 
 
 
 
 
 
 
 
 
 
 
 
 
 
 
 
 

Bulgaristan'ın
Bulgarları

현대 불가리아

 
 
 

 

2.Dulo ailesi soyağacı [둘로 가]

대 불가리아 제국은 아틸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둘로 족에 의해 건국되었다. 하지만 대 불가리아의 와해로 대다수의 부족은 아바르와 하자르에 종속한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둘째아들 코트락에 의해 이틸에서 새로운 불가르 국을 세웠으며 일부는 용병으로 이탈리아에 이주하게 된다-이탈리아로 이주한 그들은 롬바르드 족에 융화되었다-. 하지만 셋째인 아스파루흐는 소수의 불가르족을 이끌고 군사적인 우위로 다수의 슬라브족을 지배한 후 비잔틴의 동의하에 투나 강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아스파루흐의 건국 이후 그의 아들인 테르벨-Tervel-(701-718)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705~711 복위)의 복위를 도와 투나 불가르의 국력을 과시하게 된다.

*4. 아틸라와 이르네크의 다른 전사인 아비토홀과 에르나흐는 아마 현재 터키어나 현재 터키에서도 '아틸라'라는 이름이 쓰여집니다.

 
 
 
 
 
*4.
 
 
 
 
 
 
 
 
 
 
 
 
 
 
 
 
 
 
 
 
 
 
 
 
 
 
 
 
 
 
 
 
 
 
 
 
 
 
 
 
 
 
 
 
 
 
 
 
 
 
 
 
 
 

Avitohol
Attila

(아틸라)

 
 
 
 
 
 
 
 
 
 
 
 
 
 
 
 
 
 
 
 
 
 
 
 
 

Efsanevî

(전설상의)

 
 
 
 
 
 
 
 
 
 
 
 
 
 
 

İrnik

(이르네크)
Ernah

 
 
 
 
 
 
 
 

Ermi ailesi

에르미 가

 
 
 
 
 
 
 
 
 
 
 
 
 
 
 
 
 
 
 
 
 
 
 
 
 
 
 
 
 
 
 
 
 
 
 
 
 
 
 
 
 
 
 
 
 
 
 
 
 
 
 
 
 
 
 
 
 
 
 
 
 
 
 
 
 
 
 
 
 
 
Babası
-이름 불명-
 
 
 
 
 
Annesi
-이름 불명-
 
Gostun
(603-605)
 
 
 
 
 
 
 
 
 
 
 
 
 
 
 
 

Kurbat
(632-635)

대 불가리아

창건자

 
 
 
 
 
 
 
 
 
 
 
 
 
 
 
 
 
 
 
 
 
 
 
 
 
 
 
 
 
 
 
 
 
 
 
 
 
 
 
 
 
 
 
 
 
 
 
 
 
 
 
 
 
 
 

1. Batbayan
(665-668)

: 대 불가리아의 와해 이후

하자르국의 예속민으로

카프카스에 거주

 

2. Kotrag
İtil Bulgar

이틸 불가르 혹

볼가 불가르의 시조

 

3. Asparuh
(681-701)

투나 불가르

-다뉴브 불가리아

초대 칸

 

4. Kuber
Avar veziri 

아바르

재상

 

5. Altseko
İtalya'ya

주 : 아마도 롬바르드족의 알보인왕을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한 불가르족의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Kormesiy
(718-724)
 
Tervel
(701-718)
 
 
 
 
 
 
 
 
 
 
 
 
 
 
 
 
 
 
 
 
 
 
 
 
 
 
 
 
 
 
 
 
 
 
 
 
 
 
 
 
Sevar
(724-739)
 

 

 

 

 

 

 

 

3 .Krum ailesi soyağacı -크룸 칸 家 소개-

 

테르벨 이후 불가르 족의 활동은 잠시 정체되었는데 그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돌궐 제국의 와해로 군소 투르크족의 서쪽으로 이주함에 따라 기존에 살던 투르크계 민족은 동쪽에서 온 동족과의 마찰을 피해 남러시아, 헝가리로 이주한다. 당시 유럽은 중세 초기로 게르만 족들이 세운 여러 왕국들이 있었지만. 이들 투르크계 유목민에게 상대가 되질 못 했다. 하지만 훈족이 망하고 아바르 족이 들어오듯 불가리아는 아바르 족을 멸망시켜 발칸 지역에 거주하게 되지만. 또다른 압력을 받아 이주해온 투르크 계 민족 (하자르, 페체네크, 킵차크), 그리고 훈 족 계통의 귀족을 지도자로 삼은 마자르 족의 압박을 받게 됐다..

2. 유목 국가의 칸의 등극은 회의로 통한 추대나 정복을 통한 등극이 주를 이룬다. 유목 국가들은 특히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그 군사력이 크게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리더쉽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농경국가처럼 장자 우선 계승제같은 체계적인 계승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분이 많이 일어났고. 이는 유목 국가의 큰 약점이다. 1차 불가리아 제국도 초기에 그러한 상황을 통해 크룸 칸 이전까지 별다른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비단 1차 불가리아 제국만 아니라 모든 유목 국가에 포함된다.

3. 642년 야르무크 강에서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비잔틴 제국은 급격한 영토 축소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북 아프리카는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고.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정복으로 이탈리아의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부터 방치되오던. 발칸 반도는 슬라브족이 차지하게 되어 제국의 존립을 더욱 힘들게 했고. 더군다나 불가르족이 슬라브족을 규합하여 불가르 왕국을 세운 이후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운 이 북방의 이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가의 시조로 삼는 훈족의 아틸라와 같이 제국의 부를 이루는 콘스탄티노플을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동쪽에서 새로이 들어오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을 이용하거나 직접 원정을 통해 수시로 불가르 왕국을 견제해왔고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크룸 칸의 등장으로 비잔틴 제국은 또다른 국면에 맞이했다..

테르벨 이후 크룸 칸까지의  칸은 다음과 같습니다.

725~740  세바르(Sevar)

 

740~756  코르미소스(Kormisos)

 

756~762  비네츠(Vinech)

 

762~765  벨레크(Velec)

 

765~767  사빈(Sabin)

 

   767      우마르(Umar)

 

767~772  토크투(Toktu)

 

   772      파간(Pagan)

 

773~777  텔레리그(Telerig)

 

777~802  카르담(Kardam)

 

4. 크룸~ 시메온 시기 불가리아

중부 유럽에서 아바르 칸국이 샤를마뉴 재위시의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되는 시점에서 등장한 크룸은 헝가리 남부와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하고 영토를 넓혀 동유럽의 강력한 통치자로 부상하자 갑작스런 투나 불가르 칸국의 흥기로 불안을 느낀 니케포루스 1세는 811년 크룸을 공격하지만 크룸의 반격을 통해 오히려 전사하고 비잔틴 군은 전멸하게 되었다. 크룸은 전사한 니케포루스 1세의 머리를 베어 그의 두개골을 금박에 씌어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스키타이, 흉노ㅡ훈, 돌궐(고대 투르크)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일종의 '적에 대한 경고 메세지'라고 볼 수 있다.

 

헤리포터에 나왔던 빅터 크룸

-외담이지만 현재 크룸(Krum)은 동유럽권에서 쓰이는 이름중 하나가 되었다.-

Resim

-마드라사의 기사상-

기마상으로 있는 인물이 바로 크룸 칸이며 밑에 히미하게 보이는 2마리의 동물은 늑대로 추정되며

고대 투르크의 전통처럼 늑대가 국가의 미래를 인도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크룸 칸 시대의 영역

크룸 칸이 즉위함에 따라 불가리아는 다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갑작스런 불가르 족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니케포루스 1세는 섣불리 불가르 원정을 일으켜 초반에 성공하듯이 보이다가

크룸의 투란전술-초원민이 쓰던 전술(척후-유인-매복-기습) 에 말려 결국 그의 술잔으로 전락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크룸은 프랑크 왕국에게 결정타를 맞고 비틀거리는 아바르를 공격하여 서북쪽으로

페스트까지 넓혀 아르파드 왕조 시기의 헝가리 영토의 40%달하는 영토를 획득하고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노리지만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불가리아는 주춤거립니다..

그의 사후 오무르타그 왕 시기에는 비잔틴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고대 투르크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그의 아들의 이름과 같이 점차 슬라브 化가 진행되어 고대 투르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된다.

 

시메온 1세 시기의 불가리아

오무르타그 이후 진행된 슬라브 화는 마침내 보리스 칸의 개종으로

불가리아는 동방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그 후에 불가리아 대주교를 놓고 비잔틴과 싸우지만;;)

그러나 보리스 칸의 개종은 기존에 이교도 전통을 유지하던 불가리아 대귀족(보야르)의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피지배계층인 슬라브족을 문화,군사적인 우위로 지배했고 이 특권을 잘 누려왔는데 동방정교회의 개종은 이 특권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신민들도 갑자기 성화를 들고 찾아온 수도사를 먹고 재우기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다. 이러한 불만의 대표는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가 있었다. 슬라브적인 이름과 달리 이도교(투르크)전통을 중시했으며 이는 보야르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보리스 칸 사후 등극하면서 다시 옛날로 희귀하는 정책을 폈쳤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궁정의 불모로 지낸 둘째 시메온이 비잔틴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쫒겨나게 된다. 차르에 오른  시메온이 다시 투르크 전통을 따르려는 형 블라디미르와 그의 지지세력인 보야르 세력을 깨끗히 없애고 비잔틴의 정치,군사 체제를 모방한 통치 체제를 구축한다.

어릴 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궁정의 불모로 있어 비잔틴의 교육을 받은 그는 원래 사제가 되었어야 했지만 이교도적인 정책을 펴는 형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비잔틴에서는 비탄틴 化된 시메온이 불가리아 차르에 오르면 불가리아와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개선될 것을 기대하여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러나 궁정시절 비잔틴의 내부사정과 콘스탄티노플의 막대한 부를 동경한 시메온은 제위기간동안 3차례동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며 자신을 발칸과 그리스의 전제군주로 칭함으로써 비잔틴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920년 비잔틴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일소 시킬뻔까지 했으나 927년 급사함에 따라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다.

 

5. 쇠퇴하는 제국의 마지막 불꽃 차르 사무엘

시메온 사후 뛰어난 선왕과 달리 매우 유약한 차르인 페테르는  제위기간 내내 불안했다. 크룸 시기 때 점령한 헝가리 남부와 트란실바니아를 아르파드 家가 이끄는 마자르 인들에게 빼앗기고 對 비잔틴에 있어서 주도권을 뺏겨 밀리는 상황이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고.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차르 사무엘의 등장으로 불가리아는 다시 뜨거운 불꽃을 일으키듯 부활한다.

1. 생애와 업적

그는 마케도니아 프릴레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인 코미타 니콜라는 원래 페타르 1세 때의 대귀족이었다. 그러나 969년 스뱌토슬라프의 내습으로 불가리아가 위기에 처하자 소피아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했다. 970년 니콜라의 사후 네 아들인 다비드, 모세, 아론, 그리고 사무엘(즉 코미토풀리 형제)이 유력자가 되었는데, 이때 스뱌토슬라프가 비잔티움에게 패하여 러시아로 돌아가던 중 암살되고 보리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잡혀가게 되자 이들은 반(反) 비잔티움 항쟁을 일으켰고 황제 요한네스 1세와 싸워 승리하였다. 그후 976년에 이르러서 그의 형제인 다비드와 모세가 왈라키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아론이 비잔틴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사무엘과 전투 끝에 아론의 아들 이반 블라디슬라프를 제외한 아론의 가족 전원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어 보리스 2세가 살해됨으로서 사무엘은 불가리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그 후 980년 불가리아의 차르로 정식 즉위한 뒤 모에시아를 되찾고 알바니아와 테살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고 나서 992년 수도를 스코페에서 오흐리다로 천도하고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켰고, 980년대에 바실리우스 2세 불가톡누스를 격파한 뒤 그는 발칸 반도에 남슬라브 통일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 세르비아를 멸망시키고 나렌타인들까지 굴복시켰지만 그 꿈은 사무엘이 트라키아와 크로아티아에 입성하기 전에 깨졌다. 소아시아에서의 싸움을 끝낸 바실리우스 2세가 발칸에서 사무엘과 싸움을 재개하였고, 997년부터 지루하고 참혹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1014년 7월 29일 벨라시차 전투에서 사무엘은 완패하였고, 그는 겨우 오흐리다로 귀환하였으나 곧 바실리우스가 귀환시킨 포로들을 보고 경악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15,0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100단위로 나누어 앞장 선 자만 눈 하나를 뽑고 나머지는 모두 눈을 뽑아서 보냈고, 그 끔찍한 행렬을 보고 사무엘은 결국 기절해서 죽었다. 그 후 아들 가브릴은 1015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던 중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암살당했고, 이반 블라디슬라프도 1018년 전사하였으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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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5 '불가록토누스(Bulgaroctonus)'와의

*5 클레이디온 전투(Battle of Kleidion)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 

2. 사무엘을 위한 변명

차르 사무엘 유능한 지휘관이였지만 한 수위인 *6 '불가록토누스(Bulgaroctonus)를 만났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운이 없었다. 만약 무능한 황제가 그의 상대자였다면 제 2의 크룸, 시메온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차르 사무엘 사후 뒤를 이은 가브리엘 란도미르(1014~1015)와 이반 블라디슬라프(1015~1018)이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1018년 1차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후 비잔틴 제국은 395년 이후 무려 720년만에 발칸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되고 불가리아는 1180년까지 지배를 받게된다. 이후 킵차크 출신의 이반 아센(Ivan Asen)과 페테르 아센(Peter Asen) 형제를 주축으로 아센 왕가의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이 세워짐으로 불가리아는 다시 부활하게 된다.

 

*5 클레이디온 전투(Battle of Kleidion) : 벨라시차 전투로 불리기도 한다. 1014년 차르 사무엘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바실리우스 2세가 직접 출정하여 불가리아 군을 벨라시차 산으로 유인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이 전투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1180년까지 발칸반도에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6 '불가록토누스(Bulgaroctonus) : 비잔틴 제국의 중흥기의 절정을 이룬 바실리우스 2세를 가리키며

불가록토누스란 '불가리아의 학살자'란 뜻으로 클레이디온 전투로 사로잡힌 불가리아 포로 1만명에게 100명당 99명은 모조리 장님으로 만들고 1명만 애꾸눈으로 만들어 차르 사무엘에게 보낸 것에서 유래했으며

차르 사무엘은 전투의 패배와 비참한 포로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게 된다.

 

 
 
 
 
 
 

 

 

 

 
 
 
 
 
 
 
 
 
 
 
 
 
 
 
 
 
 
 
 
 
 
 
 
 
 
 

*2. Dulo ail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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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um
(803-814)

 
Dokum
(814)
 
Ditseng
(814)
 
 
 
 
 
 
 
 
 
 
 
 
 
 
 
 
 
 
 
 
 
 
 
 
 
 
 
 
 
 
 
 
 
 
 
 
 
 
 
 

Omurtag
(815-831)

 

 
 
 
 
 
 
 
 
 
 
 
 
 
 
 
 
 
 
 
 
 
 
 
 
 
 
 
 
 
 
 
 
 
 
 
 
 
 
 
 
 
 
 
 
 
 
 
 
 
 
 
 
 
 
 
 
 
 
 
Voin
-
 
Zvinitzi
-
 
Malamir
(831-836)
 
 
 
 
 
 
 
 
 
 
 
 
 
 
 
 
 
 
 
 
 
 
 
 
 
 
 
 
 
 
 
 
 
 
 
 
 
 
 
 
 
 
 
 
I. Presian
(836-852)
 
 
 
 
 
 
 
 
 
 
 
 
 
 
 
 
 
 
 
 
 
 
 
 
 
 
 
 
 
 
 
 
 
 
 
 
 
 
 
 
 
 
 
 
 
 
 
 
 
 
 
 
 
Maria
-
 

I. Boris
(852-889)

 
Dukus
-
 
Gavril
-
 
 
 
 
 
 
 
 
 
 
 
 
 
 
 
 
 
 
 
 
 
 
 
 
 
 
 
 
 
 
 
 
 
 
 
 
 
 
 
 
 
 
 
 
 
 
 
 
 
 
 
 
 
 
 
 
 
 
 
 
 
 
 
 
 
 

Vladimir
(889-893)

 

I. Simeon
(893-927)

 
gavril
-
 
Yakov
-
 
Eupraksiya
-
 
Anna
-
 
 
 
 
 
 
 
 
 
 
 
 
 
 
 
 
 
 
 
 
 
 
 
 
 
 
 
 
 
 
 
 
 
 
 
 
 
 
 
 
 
 
 
 
 
 
 
 
 
 
 
 
 
 
 
Michael
-
 

I. Peter
(927-969)

 

 
Maria
[1]
 
İvan
 
Benyamin
-
 
kız
-
 
 
 
 
 
 
 
 
 
 
 
 
 
 
 
 
 
 
 
 
 
 
 
 
 
 
 
 
 
 
 
 
 
 
 
 
 
 
 
 
 
 
II. Boris
(969-977)
 

I. Romanus
(977-997)

크룸 가계의 마지막 차르로 이 차르가 콘스탄티노플에 억류된 사이 차르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972~1014) 사무엘 (Samuel)

쇠퇴일로에 있던 불가리아 제국을 일시적으로 부흥했던 차르로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초기에는 그리스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지만 클레이디온 전투로 그의 시도는 불발로 끝나게 된다.

(1014~1015) 가브리엘 란도미르(Gavriel Randomir)

 

(1015~1018)이반 블라디슬라프(Ivan Vladislav)

 Dulo ailesi (둘로 家) 세바르 칸 이후 크룸 칸의 즉위까지 불가르 칸국은 내분과 對 비잔틴에서도 열세에 미쳤기 때문에 터키사에서도 별 중요하지 않게 다뤄서 생략한 듯 싶습니다.

또한 보리스 칸의 개종 이후 불가리아는 칸국이 아닌 차르 국가로 출범하는데 이는 15세기 이반 뇌제가 칭했던 차르보다 약 400년 앞서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또한 아래에 나오는 보야르(Boyar)도 초기에는 불가리아의 투르크계 대귀족(군사귀족)을 뜻했으나 후기로 가면서 슬라브화된 투르크 가문과 ,슬라브계 가의 군사귀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6. 결론

개인적으로 터키에 관심있던 필자는 여러 민족이 오가는 발칸 반도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운 불가르 족을 주목하여 집필했다.. 남쪽에서는 부유하며 약탈의 대상이 되지만 언제나 위험의 대상이 되는 비잔틴 제국과 북동의 킵착초원에서 오는 동족들(페체네크, 우즈, 킵차크)의 물결에도 681년~1018년까지 가히 337년을 버틴 것이다. 비록 세계사에서는 그 위치가 크진 않으나 민족의 교차로인 발칸 반도의 역사로 보자면 불가리아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고 볼 수 있으며 불가리아 자국 내에서는 나라의 이름과 국가의 존재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터키사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숱한 투르크 왕국-5개의 큰 제국과 100여개가 넘는 군소 국가-중의 하나로 동유럽에 투르크의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불가리아와 비잔틴의 관계는 흡사 고구려와 수, 당제국과 비교하는데 이들의 대립관계를 보면 충분히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수 양제의 고구려 침입과 니케포루스 1세의 불가리아 침입의 공통점은.. 둘 다 상대에게 파멸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2세라는 명군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멸망했다. 이또한 당 태종-고종의 끊임없는 공격을 통해 멸망한 고구려와 겹쳐 보이는 것 또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필자는 앞으로 장교의 길을 걷고 터키에 관련된 일을 종사하고 싶다. 이 논문을 통해 꿈을 위해 나아가는 소중한 한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2008년 6월 5일 집에서..

 

출처 : 터키 위키디피아

        작자 미상 ROME AND ROMANIA, 27 BC-1453 AD 

-워랜 트레드골드  저,박공순 옮김  2003 <<비잔틴 제국의 역사>>, 서울 : 가람기획
이희수 저 2005(개정) <<터키사>>, 서울 : 대한교과서(주)

르세 그루쎄 저,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 2005년(개정)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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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바르티겐=이형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6.05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궁금했던 지라.. ㅎㅎ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자료를 좀 더 찾아봐야겠군요 ㅎㅎ
  •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08.06.05 게다가 구 불가리아 제국 동부 지역에 대해서는 과거와는 달리 비잔티움 제국에게 상당 부분 중요한 방어선을 이미 내주고 시작한 꼴이었으니.....굳이 불가록토누스가 아니었더라도 장기적인 견지에서는 결국 뿌리 부분인 동부 부분의 통제력을 상실한 불가리아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이길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구 불가리아 제국 지역은 지속적으로 인력과 군사와 장교를 비잔티움 제국에 공급하면서 제국의 또다른 저력이 솟아나는 원천이 됩니다. 어느 정도는 상당히 비잔티움 화가 되는데, 고구려와 발해가 과연 수당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06.06 하자르족은 유대교돌궐족이고 그 근처의 베네치그족(돌궐족의 일파)이 분탕질합니다.(사실상 불가리아제국의 영토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르티겐=이형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6.06 베네치그가 아니라 페체네크족입니다;; 페체네크족 경우에는 오우즈족한테 쫒겨나서 유럽에 분탕질 치게 된거구요 ㅎㅎ.. 뭐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할 생각입니다.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08.06.0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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