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Ernst II. von Mans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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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Ernst II. von Mansfeld
피터 에른스트 2세 폰 만스펠드 백작, 대부분 그냥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라고 부른다 1580년생. 1626년 11월 29/30일 보스니아에서 사망. 30년 전쟁중에 영향력있는 용병과 군대지휘관이었다.
1. 가문과 그의 초년기(1580-1610)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나중에 „Ernest conte de Mansfelt“라고 썼다 –는 서자였다(ein natürlicher). 즉 스페인 왕국의 룩셈부르크 총독이었던 페터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1세(Peter Ernst I. von Mansfeld)의 적자가 아니었다(fils naturel: 불어인데 웃기군요. 자연적인 아들이라는 뜻인데….).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왕국 백작가문 출신이었다.(Mansfeld-Vorderort-Friedeburg 라인)
Peter Ernst I. von Mansfeld 와 그의 룩셈부르크 궁전
만스펠트는 1580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궁정에서 카톨릭 교도로 양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595년 15세가 되던해에 그는 아버지에 의해서 큰형과 함께 황제 루돌프 2세(Kaiser Rudolf II)의 이른바 긴 터키전쟁(Lange Österreich-Türkei Krieg 1593-1606)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의 전장터인 헝가리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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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er Rudolf II (재위 1576- 1612)
그러나 그는 나중에 네덜란드를 위해 헌신한다. 160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법적으로 효력을 부여받은 자녀가 아닌 그는 그 유언에 따라 단지 적은 유산청구권만을 갖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고용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610년에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옮겨간다. 그가 이런 자리바꿈의 여정속에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2. 신교도 연합군시기(1611-1618/21)
공식적으로 만스펠트는 1611부터 1621년까지 팔츠선제후가 지휘하는 신교도 연합군의 대령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향력있는 영주들(안할트-베른부르크 공,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로 부터 이미 독립적인 명령권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좌: 크리스티안 1세(Christian I. 1568-1630), 우: 요하힘 에른스트(Joachim Ernst , 재위 1603-1625)
이러한 신교도 영주들은 카톨릭과 대립하여 신앙적으로 양극화되고 이데올로기화되었으며 그리고 전쟁내내 지속되는 정책을 대표했다. 네덜란드 분리독립파들의 자발적인 해산으로 늦어도 1621년 5월 까지 그의 복무는 끝이 나기 때문에, 그를 신교도 연합군의 사령관이라고 칭하는 것은 사실상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1618년을 전후로 신교도 연합군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신교도 사령관이라는 칭호 또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1610년 이후 그는 자신의 진정한 신앙을 숨긴채, 신앙적인 모티브에 관하여 인식할만한 어떤것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후에 카톨릭 또한 그를 고용했었기 때문이다. 1610년 부터 계속되는 여정에서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만스펠트가 합스부르크가의 다양한 정적들의 편에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후작연합과의 비밀계약을 통해서 만스펠트는 1616년부터 1617/1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사보이 공작이자 피에몬트 후작이었던 카를로 에마뉴엘레 디 사보이아(Carlo Emanuele I. di Savoia)에 고용되어 제 1차 만투아 계승전쟁(1612/13-1617) 동안 독일 군대를 이끌었다. 1619년 나중에 투린에 머물던 시절에 이 사보이 공작은 만스펠트에게 Castel-Nuovo 와 Buttigliera (Buttigliera d’Asti : 지금의 이탈리아 북서부)의 영주칭호를 부여했는데, 이 두지역 모두 피에몬트 후작령 안에 있다.
칼 에마뉴엘 1세 (Karl Emanuel I) , Carlo Emanuele I. 라고도 불렸다. 1562년 1월 12일 리볼리의 성에서 태어났고 1630년 7월 26일 사비글리아노에서 사망했다. 에마뉴엘 필리베르트 폰 사보이(Emanuel Philibert von Savoyen)와 마가리테 폰 프랑크라이히(Marguerite von Frankreich)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 마자 만스펠트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여 봉기한 신교도를 지원하기 위해 1618년 보헤미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머물때에도 - 신교도 연합군의 우두머리들과의 결탁을 통해 – 그는 아직 사보이의 용병신분이었다. 왜냐하면 사보이 공작은 보헤미아 왕위를 노렸기 때문이다. 1618년 11월에 만스펠트는 합스부르크가의 도시인 필젠(Pilsen: 맥주의 필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네요. 맥주의 원산지가 체코라는…)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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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중 도시의 포위장면
그러자 황제는 그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렸다. 1619년 6월에 보헤미아의 자블랏(Sablat)에서 대패하자 만스펠트는 자신의 군대를 재편하고서 1619/20년에 신성로마 제국령인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Niederösterreich)를 공격했다. 1620년에 그는 필젠으로 돌아온 후에 그곳에서 황제 추종세력들을 멋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620년에 일어난 바이센 베르게(Weißen Berge) 전투에 그는 개인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대가로 그는 카톨릭 진영으로부터 100,000 탈러를 받았다. 그러나 보헤미아를 둘러싼 전쟁을 그는 1621년 5월까지 계속해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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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스나이어의 바이센 베르게 전장도
일시: 1620년 11월 8일
장소: 프라하 근교, 체코(보헤미아)
결과: 카톨릭 리그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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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카톨릭 리그 |
보헤미아 신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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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
부쿼이 백작 |
크리스티안 폰 안할트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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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29,000명 |
21,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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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 |
700명 |
5,000명 |
1621년 봄부터 만스펠트는 추방된 팔츠공작에 고용되어 압도적으로 우세한 황제와 그의 동맹국들(스페인, 바이에른 그리고 리가)에 대항하여 팔츠 선제후를 위한 전장에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가을에 만스펠트는 더이상 방어할 수 없게된 상팔츠(Oberpfalz)를 포기하고 진영을 라인강으로 옮겨와서 팔츠 요새인 프랑캔탈에 주둔했지만 스페인 군대에 포위당하자 10월달에는 결국 탈출을 해야했다. 1621/22사이 겨울을 그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보냈는데 그는 자신의 군대를 그 땅에 살도록 내버려둔채 엘사스에서 약탈을 통한 전리품으로 더욱 강해져만 갔다. 이듬해 1622년 4월 27일 밍골스하임(Mingolsheim)에서 그는 바이에른 장군인 틸리 원수(Feldmarschall)를 공격했지만 그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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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622년 4월 27일 틸리와 만스펠트의 전투도, 우: 틸리 원수
일시: 1622년 4월 27일
장소: 밍골스하임 근교
결과: 신교도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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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카톨릭 리그 |
신교도 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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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
틸리 |
만스펠트, 바덴 두어라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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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12,000명 |
22,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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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 |
2,000명 |
300명 |
그리고 한편 1622년 5월 6일 빔펜(Wimpfen)에서 바덴-두어라흐 변경백(Markgarf Baden-Durlach)의 심각한 패배는 오히려 틸리백작에게 유리한 국면을 유지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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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5월 6일 빔펜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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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프리드리히(신교도 지휘관) 1573-1638,
그는 바덴-두어라흐 변경백이었다.
일시: 1622년 5월 6일
장소: 바드 빔펜 근교
결과: 카톨릭군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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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카톨릭 리그 |
팔츠 신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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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
틸리, 코르도바 |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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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15,000명 |
2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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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 |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지지 않음 |
부담이 가중된 팔츠공국으로부터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만스펠트의 군대는 막대한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즉 그렇게 1622년 Obergarfschaft Katzenelnbogen(지금의 헤센남부)의 전쟁피해명부는 헤센-다름슈타트를 향한 만스펠트의 약탈을 언급한다. 수많은 도시들과 마들들이(랑엔, 다름슈타트, 노이하임, 오버-람슈타트, 니더-모다우, 노이엔키르헨, 바이터슈타트, 라운하임, 뤼셀스하임, 뷔텔보른 등) 이 피해명단에 올라있다.
1622년 7월 라인팔츠를 둘러싼 전쟁이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자,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 폰 브라운슈바익(Christian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은 엘사스에서 팔츠백작의 용병들을 해산시킨다. 곧 네델란드 의회에서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자 이 두 용병지휘관들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를 관통하여 코르도바 휘하의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다. 그때 스페인 군대는 플뢰리스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기를 원했었다.(1622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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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Herzog Christian von Braunschweig) 1599년생, 1626년 6월 16일 볼펜뷔텔에서 사망 그는 „tolle Christian“ 혹은 „toller Halberstädter“라고 불렸다. (toll이라는 뜻은 „미치광이“ 또는 „멋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좌측은 1619년 그림으로 왼팔이 있지만 우측 그림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왼팔을 잃은 왼팔을 볼 수 없다.
그해 가을에 만스펠트가 공작령인 오스트프리스란트를 점령하자 크리스티안 공작이 그를 뒤따랐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1623년 8월 6일 슈타트론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이 둘은 계속해서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1624년초 만스펠트는 오스트프리스란트에서 남은 자신의 군대를 해산해야만 했다.
네덜란드, 파리 그리고 런던 등을 거치는 몇번의 여행 후에 만스펠트는 1624년 가을부터 영국 급료를 통해 새로운 군대를 얻었다. 1625년 그는 네덜란드군에 복무하다가 그후에 독일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 휘하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그는 그동안에 제국 전역을 휘젓고 다녔었다. 그러나 이듬해 1626년 4월 25일 만스펠트는 데싸우(Dessau)에서 발렌슈타인(Wallenstein)에 의해서 참담하게 패배를 당한다.
좌: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 1577-1648 덴마크-노르웨이의 왕, 재위(1588-1648) 자신의 긴 통치기간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내적인 정치개혁으로 그는 절대주의 확립에 기초를 세웠고 역동적인 건축공사를 통해 Kristiansand, Kristianstad 그리고 Christianshavn 같은 도시들을 남겼다. – 오늘날 코펜하겐시의 일부.
우: 발렌슈타인, 즉 알브레이흐 벤젤 오이세비우스 폰 발드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dstein) 1583-1634 그는 원래 프리드란드와 메클렌부르크의 공작이었으며 사겐의 후작이었다. 1625년에서 1634년 사이에 30년 전쟁에서 그는 황제군의 최고지휘권자 였다. 그는 황제와 카톨릭리그에 서서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연합으로 이루어진 신교도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후에 황제를 추종하는 장교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후 그는 자신의 군대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에서 병력을 재편성을 하고 보강한 후에, 그는 6월에 헝가리 전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보르 베틀렌(Gabor Bethlen)과 함께 황제령을 공격하여 합병하려 하였다. 발렌슈타인은 그를 쫓아서 7월 부터 엘베강 중류로부터 슐레지엔을 거쳐 매렌을 지나 헝가리까지 따라온후에 만스펠트군이 황제령을 침공하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만스펠트를 잡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전장은 승패의 결과 없이 그해 가을에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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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르 베틀렌 또는 가브리엘 베틀렌(Gabor Bethlen, Gabriel Bethlen von Iktar) 1580-1629 그는 1613년에서 29년까지 지벤뷔르겐의 후작이었고 1619년부터는 반 합스부르그가 봉기의 지도자로 헝가리왕국,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에 있었다. 1626년 그의 전장은 30년 전쟁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일어났다. 아래는 헝가리 지폐속의 가보르 베틀렌(아마도 헝가리입장에서는 독립운동 지도자일테니…..)
달마시안 해안으로 가는길에, 그곳에서 부터 만스펠트는 배로 베네치아로 배를타고 떠나기 원했는데, 새로운 모병광고를 위한 돈을 조달하기 위했었던 그는 보스니아에 다다르게 되었다. 사라예보 윗지방의 산속에 있는 로코비카라는 마을에서 그는 이미 결핵때문에 심한 토혈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626년 11월 29/30밤에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된다. 그의 시신은 당시 베네치아령이었던 스팔라토라는 섬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스플릿(크로아티아어), 이태리어로는 스팔라토 그리스어의 아스팔라토스라는데서 유래한 이 섬은 크로아티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그의 생에 마지막 주간은 비밀에 싸여있다. 믿을만한 소문에 따르면 그는 터키인으로 부터 감염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는 각혈때문에 쓰러졌다고 한다. 만스펠트는 자신의 유언을 받아적게한 후에 완전무장한 갑옷 속에서서 두명의 시종에 부축을 받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여러번 권력을 가졌었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또한 조약 비준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대신에 서류를 소지했었는데, 이 서류의 비준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세 장교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 서류는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역시 공증되었다고 한다.
간경변의 결과로 각혈이 있었을 가능성은-마지막의 각혈은 식도정맥류로부터 나온 피다-아주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의 중도적인 삶의 방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그는 명백히 알콜중독자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군인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죽는 장면은 이미 군인 영웅의 죽음으로 정형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확실하게 신뢰할만한 어떤 유언도 남아있지 않다. 출처에 근거하면[Ernst Fischer, Mansfelders Tod 참조.] 만스펠트 다른 죽음의 원인은 그럴듯한 것을 완전 뛰어넘는다(아마도 결핵이 확실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 각혈은 폐결핵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각혈에 대한 일치된 학설이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1800년대 중반에 그려진 만스펠트의 동판 초상화. 라이프치히에서 그려졌다.
항상 학생님 글만 읽다가 만스펠트가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는 걸 보니 갑자기 재칼의 삶을 정리해보고 싶더군요.
제가 문외한이라 아마 오역도 많을 겁니다. 군사용어나 작위 같은것 중에 잘못된것은 댓글 달아주세요. 고치겠습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가스가겐고로 작성시간 08.10.30 만스펠트~~~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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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하늘 작성시간 08.10.30 만스펠트는 다른 신교도측 사령관들과 달리 패배한 뒤에 망명 따위는 안 했군요... 의외의 사실이네요. 재칼답게 빠져나가 잘 살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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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카르도 작성시간 08.11.02 능력은 있는데 운이 전혀 따라주지 않은 비운의 장수이랄까..조금만 성질 좀 죽였다면 대활약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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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학생[역갤] 작성시간 08.11.03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안할트-베른부르크는 공(퓨르스트 혹은 퓌어스트), 요하임 에른스트는 변경백(마르크그라프)가 나은 것 같습니다. '후작'의 직위는 좀 궁정적이라, 독일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1622년에는 틸리가 백작 직위를 받기 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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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Heinrich IV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1.03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대로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1622년에 틸리는 백작이 아니라 장군이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