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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스크랩] 9세기 불가리아와 프랑크, 비잔티움의 관계

작성자fdsa|작성시간12.05.30|조회수782 목록 댓글 5

 

I. 머리말

 

불가리아는 흑해 해안에 위치한 나라로 많은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생한 곳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인 바르나(Varna)의 공동 묘지에서는 기원전 약 50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골들은 잘 세공된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본 연구와 직접적인 관계되는 것은 아니나 황금을 사용한 최초의 인간이 불가리아에 살았었다는 것이 본 연구를 시작할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불가리아의 군주들이 12支로 즉위 년도를 표시하였던 사실과 훈족의 군주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가리아 연구는 특히 아시아 지역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바, 앞으로의 활발한 연구를 기대한다.

 

불가리아의 형성은 아바르(Avar)족이 중국 근처에서부터 이동하여 우랄 알타이 산맥과 카스피 해를 거쳐 흑해를 웃돌아 도나우 강 중류에 자리 잡음으로 시작된다. 그 후 샤를마뉴 대제에게 정복될 때까지 약 200여년 간 제국을 건설하여 그 지역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다스렸다. 또한 불가르(Bulgar) 족은 코카서스 근처에서 유래하여 볼가 강을 거쳐 이동하여 흑해로 진입하여 기존의 슬라브족을 지배하였다.

 

불가르족이 도나우 중류 지역에 등장했다는 것은 프랑크 왕국의 팽창이 도나우 중ㆍ하류에서 끝났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불가리아인들이 프랑크인들의 발칸 침투를 막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나우 중류 지역에서 펼쳐진 두 국가 간의 다툼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몇몇 슬라브족들이 독립할 계기를 제공하였고 모라비아 왕국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발칸 반도로의 팽창은 자연스레 비잔티움 제국과의 마찰을 낳게 하였다. 즉 로마 가톨릭교 선교의 선봉장 격인 프랑크 왕국과 동방 정교의 선봉장 격인 비잔티움 제국은 선교 활동을 두고 첨예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즉 로마 교회의 선교국으로서 프랑크 왕국,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선교국으로서 비잔티움 제국, 여기에다가 개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가리아 왕국 사이의 갈등과 협력은 당시 시대상을 잘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유럽의 근ㆍ현대사 이해를 위한 역사적 기반을 제공한다.

 

본고는 이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 및 앞으로의 세부적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 작성되었다. 연구 방법으로는 독일 문헌들을 중심한 문헌 작업을 채택하였다. 불가리아에 대한 선구적 역사서는 19세기 말엽 E. Dümmler가 서술한 3권으로 구성된 『동프랑크 왕국사』를 들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는 O. Halecki의 『중부 동유럽의 역사』가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차 사료들은 독일 중심적인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어서 객관적인 서술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불가리아의 관점에서의 역사 연구가 이루어 졌는데 M. ComҪa는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사료의 부족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구 동독 학자 D. Angelov 역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연구하여 9세기 말엽 불가리아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연구저서를 통해 주장하였다. 본 연구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 점을 확인하는데 있다. 즉 불가리아인이 세운 국가가 종교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고 성립되었다고 불가리아라는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최근까지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내고 있는 V. Gjuzelev(1966, 1993)는 9세기 전반부의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불가리아 왕국이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9세기의 불가리아의 성장이 Gjuzelev의 주장처럼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완화시켜 줌으로써 두 국가의 충돌을 막는데 기여하였다고만 생각하기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가리아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의 세계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둘로 나뉘게 되었다는 기본적인 논지는 보다 비판적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문제 의식에 입각하여 불가리아 왕국의 전개과정 및 9세기 전반부의 팽창 정책과 후반부의 그리스도교의 국교화 정책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겠다.

 

 

II. 불가리아 민족의 형성 과정

 

불가리아 민족은 100년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불가리아 민족은 슬라브족, 원불가리아족, 트라키아족이 섞여 탄생하였다. 그 중 슬라브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민족은 트라키아족으로 고증된다. 그들은 로마인이 이 곳에 등장하기 전부터 발칸 반도의 동편에 거주하여 왔으나 국가라 부를 만한 형태의 체제를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였고 문학 활동을 하였다. 도시에 거주하던 트라키아족은 비교적 쉽게 헬라화 내지는 로마화 되었다. 이에 따라 트라키아족은 쉽게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으로 흡수되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은 거의 해체되어 갔다. 그 이후 이어지는 민족 이동과 함께 트라키아족은 발칸 반도에서 그들의 족적을 감추었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려든 민족은 슬라브 족과 원불가리아족이었다. 슬라브족은 6세기 후반부에서 7세기 전반부에 걸쳐 발칸 반도에 등장하였다. 그들은 모에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지로 퍼져갔고 그 곳의 원주민들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여 갔다. 슬라브족은 그들의 정치 체제를 확립시켜갔으며, 7세기 말엽에 이르러 트라키아족이 뿔뿔이 흩어짐에 따라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트라키아족들의 슬라브족으로의 동화 과정을 통해 불가리아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원불가리아족은 7세기 후반부에 이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그들은 수적으로 슬라브족에 비해 열세였고 지역적으로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 원불가리아족이 어디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왔는지에 관하여는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발굴된 유물들에 쓰인 글씨의 해독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통해 원불가리아족이 훈족, 오구스족, 위구르족, 카자르족, 페체넥족, 쿠만족 등과 같이 투르크족 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몇몇 사료들을 통해 그들이 4세기 경에 이미 불가르로 불리었고 코카서스 북쪽에 거주하였음이 밝혀졌다. 이 원불가리아족의 일부는 카자르족에 복속되었고, 다른 한 집단은 볼가 강을 향해 북쪽으로 이주하여갔다. 또 다른 한 집단은 판노니아 지역으로 가서 아바르족에 복속되었다. 그리고  한 집단은 도나우를 향하여 남서쪽으로 이주하여 슬라브족과 함께 681년 모에지아 지역에서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이 함께 세운 이른바 슬라브-불가리아 왕국은 아직 뚜렷한 정체성을 띠지 않고 있었지만 동편의 비잔티움 제국과 서편의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통일 정권을 수립하여 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에 있던 슬라브족과 쿠베르(Kuber) 지배 하에 있던 원불가리아족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모에지아에 있는 슬라브족과 북동 불가리아에 있던 원불가리아족으로 구성된 작은 지역이 장차 불가리아 왕국으로 발전되게 된다. 두 민족은 점차 그들 사이의 차이를 무너뜨리고 하나로 발전하여 갔는데 모에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지에 퍼져 있던 모든 슬라브족이 이에 가세하였다.

 

또한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도 주목된다. 그리고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여러 슬라브 족끼리는 물론 원불가리아 족과 융화되어 갔다. 이 융화과정은 9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정책적으로도 지원되었으며 다양한 민족적 구성의 융합과 조화를 최상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불가리아 민족은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위에서 언급한 트라키아족, 슬라브족, 원불가리아족 등의 민족들의 동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불가리아 왕국은 옛 로마의 식민지였던 모에지아(Moesia), 소 스키티아(Scythia Minor), 트라키아 지역에 이르는 발칸 반도의 동쪽, 동남쪽 지역을 광대하게 차지하였다.

 

 

III. 불가리아와 비잔티움과의 관계

 

5세기 말엽부터 6세기 초엽까지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로 진입하였다. 이 이동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때 더욱 두드러졌는데 비잔티움 제국은 동ㆍ서쪽 경계를 강화하느라 북쪽 경계를 소홀하게 되었다. 당시 이주한 슬라브족은 스클라벤족(Sklavenen)과 안트족(Anten)이었다. 안트족의 이주는 7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는데 수천 명의 전사들이 발칸 반도 남부까지 쳐들어왔으며 심지어는 황도인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침범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약탈을 일삼았지만 점차적으로 온후한 기후와 기름진 땅에 정착하여 갔다.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들 슬라브족의 정주지가 처음으로 형성되어 7세기 전반 비잔티움 황제 포카스(Phokas, 602-610)와 헤라클레이오스(Herakleios, 610-641)의 재임 기간에는 발칸 반도에 정착하였다. 슬라브족의 발칸 정착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이 북쪽 경계에서 내란과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하는 동안이라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발칸 반도의 북쪽과 동쪽은 거의 슬라브화 되었다. 슬라브족은 평지와 산지 등 거의 모든 지역을 파고 들어 그 곳 원주민들을 완전히 동화시켜 갔다. 아울러 문화의 교환도 이루어져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원주민들이 갖고 있던 헬라-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그들의 풍습이나 강 이름, 지명 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정착은 하였지만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고 분쟁을 일삼았다. 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의 공세가 있자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슬라브족은 발칸 반도로 진입할 때 벌써 불가리아족과 교류하였고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정벌에 나섰으며 626년 아바르족의 지휘 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불가리아족은 5-7세기에 볼가 강 하류에 흩어져 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른 투르크계의 다른 종족들과 동화하여 대 불가리아 왕국(볼가불가리아)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칸 쿠브라트(Khan Kubrat)가 죽은 후 642년경에 이 왕국은 분해되었다. 쿠브라트 아들들의 지휘 하에 볼가 강 어귀에 살던 카자르족(Chazaren)에 쫓기어 뿔뿔이 흩어졌다.

 

칸 쿠브라트의 아들 중 셋째 아들인 아스파루크(Asparuch, 혹은 Isperich, Ispor)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의 북부 해안선을 따라서 678-679년에 도나우 강 어귀에 도달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당시 소아시아로 침입한 아라비아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게다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 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함께 파생된 종교적인 분쟁을 수습하느라 이 불가리아의 도나우 지역으로의 침입에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681년 4-5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4세(Constantinos IV)가 불가리아를 평정하려 진군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스파루크의 군대는 도나우를 건너 소 스키티아(Scithia Minor, 오늘날 Dobrudža)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모에지아(Moesia Inferior)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의 슬라브족을 정복하여 슬라브족의 정주지였던 플리스카(Pliska)를 수도로 삼았다. 이렇게 탄생된 불가리아 국가의 다수 피지배층은 슬라브족이었고 8-9세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이었던 불가리아족이 그들과 동화되어 갔다.

 

681년 9월 중순경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제국은 불가리아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하였다. 불가리아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제국령을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 협약으로 제국은 사실상 불가리아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가리아(Bulgaria)라는 국명이 681년 8월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불안정이 불가리아 왕국의 성립에 일조하였음은 앞서 이미 언급하였다. 695년 폐위되어 세르손(Cherson)에 유배되어 지내던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Justinianos II)가 705년 초 불가리아 칸 아스파루크의 후계자인 칸 트레벨(Khan Trevel)에게 피신하여 그의 도움으로 황제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제국은 681년의 평화 조약을 새로이 맺어 칸에게 황제(Caesar) 칭호를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선물을 주었다. 두 국가의 이와 같은 관계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지만 이를 통해 불가리아는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였다.

 

불가리아의 지배권은 739년까지 둘로(Dulo) 가문이 장악하였다. 칸 코르미소스(Khan Kormisos, 739-756)가 즉위하였고 8세기 중엽이 지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남쪽과 남서쪽의 슬라브족을 공략하였다. 이들은 모에지아와 소 스키티아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과 혈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Constantinos V)는 이 침략을 좌시하지 않고 756-775년까지 해상과 육로로 열 번 이상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불가리아를 정복하려 하였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불가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고 코르미소스가 퇴위한 이후에는 왕권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칸 카르담(Khan Kardam, 대략. 777-802)이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가 건설되어 100년 이상 불가리아를 지배하였다. 칸 카르담은 다시 남쪽으로 공략을 시작하였으며, 803년 칸 크룸(Khan Krum, 803-814)이 즉위하여 카르파티아 산맥과 도나우 강 사이로 왕국을 팽창시켰다. 크룸은 샤를마뉴 대제의 아바르 원정(795-796)이 있은 후 수년 뒤 804-805년 도나우 동편의 아바르족을 공격하여 그들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는 법령을 만들어 법치를 함으로써 원불가리아족과 슬라브족 사이의 민족적인 갈등을 완화시켰다. 그의 집권 말기에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세력을 팽창하여 그 곳의 슬라브인족을 그의 왕국민화 시켰다. 또한 809년 오늘날의 소피아인 세르디카(Serdica) 요새를 점령하여 남서쪽으로 팽창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자 제국의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가 811년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스카(Pliska)까지 진격하여 도시를 파괴하였다. 니케포로스 1세는 전쟁에서 이겨 많은 노획물을 얻어 귀국하였으나 도중 베리가바(Verigava, 오늘날 Vŭrbiški) 지역을 통과할 즈음 불가리아의 기습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후 크룸은 그의 남하 정책을 지속하여 한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814년 4월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고 불가리아의 정복 전쟁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 아들 오무르타그(Omurtag, 814-831)가 뒤를 이었다. 오무르타그는 비잔티움 제국과 30년 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 조약으로 남쪽 국경의 요새화와 플리스카 궁전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특히 북서쪽 경계를 강화하였는데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 팽창 정책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IV. 9세기의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프랑크와의 갈등과 협력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사이의 갈등은 칸 크룸(Khan Krum, 803-814)의 재임 기간에 당시 아바르 왕국이 멸망하여 가면서 야기된 슬라브족, 불가리아족, 프랑크족과의 얽힌 관계 속에서 발생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788년 바이에른과 손을 잡고 남동쪽으로 팽창하여 아바르 왕국과 전투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 후 도나우 강 중류 지역의 슬라브족의 세계로 힘을 뻗쳐 그들을 지배하려 하였지만 쉽지 않자 우회적으로 선교를 위한 설교와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여 갔다.

 

796년 슬라브족 선교와 관련하여 주교 회의가 열렸다. 샤를마뉴 대제는 선교를 통해 슬라브족을 왕국에 동화시켜 갈 것을 명령하였고 교황 레오 3세(Leo III, 795-816)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이와 같은 팽창은 슬라브족은 물론이거니와 불가리아와 비진티움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당시 프랑크 왕국의 남동 유럽에서의 경계가 어디였는지를 살펴 보자. 카롤링거 왕조의 남동 유럽으로의 선교의 시작은 740년경부터 잘츠부르크(Salzburg)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타실로 3세(Tassilo III) 치하의 바이에른의 경계는 몬드제(Mondsee), 크렘스뮨스터(Kremsmünster), 마트제(Mattsee) 등 서부 오스트리아와 남티롤의 인니센(Innichen)이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카롤링거 왕국은 계속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클레벨(E. Klebel)에 의하면 9세기 전반부에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 경계가 형식적으로 드라우(Drau)와 도나우(Donau) 강으로 여겨졌다. 실질 경계는 엔스(Enns) 강으로 프랑크 왕국 연대기에는 한 번도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바르와의 경계 limes avaricus가 되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시대의 왕포고령(Capitularia)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은 전 판노니아(Pannonia) 지역에 미쳤다. 다시 말하여 드라우와 도나우 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805년 슬라브인들과 아바르인들의 나라들은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노니아 지역은 프랑크 왕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불가리아와 제국의 전쟁에 관하여 살피기 전에 먼저 아바르 왕국과 불가리아와의 관계를 살펴 보겠다. 몇몇 자료에 의하면 불가리아는 아바르족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왕국을 정복하였을 때 아바르족의 일부가 불가리아의 허락 하에 도나우 강 중류의 불가리아 국경에 피신하여 지냈다. 이 아바르족이 그 후 불가리아와 제국의 전쟁에 불가리아를 위해 싸웠다.

 

797년 랑고바르드-바이에른 군대가 프리아울의 에리히(Erich von Friaul) 지휘 아래 판노니아로 쳐들어왔고, 프랑크의 피핀 왕도 슬라브족과 격전을 벌였지만, 타르사티카(Tarsatica / Trsat)의 주민들의 저항으로 이 지역의 총독이었던 프리아울의 에리히와 게롤드가 죽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하여 아인하르트는 그의 샤를마뉴 대제 전기에서 샤를마뉴의 동서인 게롤드가 아바르족과의 전투에서 누군가에 의해 incertum a quo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국 연대기에서는 이 살해 사건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으며 단지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아바르족이 프랑크 왕국과 계속하여 전쟁을 하였는지 아니면 프랑크 왕국이 그들의 저항을 막아내어 지배하였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족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803년으로 알려져 있다.

 

판노니아에서의 아바르족의 저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보복 전쟁은 802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에 카달로(Chadaloh)와 고테람(Gotearm)이라 불리는 두 명의 백작과 많은 전사들이 판노니아의 성(castellum Guntionis)에서 전사하였다. 그 이듬 해 803년 샤를마뉴 대제는 바이에른으로 진군하여 그 곳에서 부대를 판노니아로 진군시키고 그 결과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기다렸다. 연대기들에서 수년 간 사라졌던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에 관한 이야기가 803년에 아바르인 투둔(Tudun)의 투항을 내용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투둔은 황제에게 수많은 슬라브인, 훈인 (multi Scalvi et Hunn)과 함께 굴복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아바르족의 마지막 저항이 803년경에 끝난 것으로 보인다. 망국의 아바르족은 슬라브족의 구속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였으며 프랑크족의 보호를 받으며 그나마 종족적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크족이 아바르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보호한 이유를 불가리아 때문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10세기 경에 작성된 수다(Suda) 문서에 의하면 칸 크룸(Khan Krum, 802-814)에 의해 아바르 족은 완전히 정복당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804년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술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아바르 족은 803년 프랑크족에 의해 정복당한 후 슬라브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자 카프칸(Kapkhan) 집단이 프랑크족에게 피신하였었기 때문이다. 아바르의 카프칸 테오도르는 그 후 805년 악헨(Aachen)으로 샤를마뉴 대제에게 찾아가 슬라브 족의 침입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 요청은 수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있지 않고 테오도르가 죽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이 사료를 통해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경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정확한 국경선은 없었지만 옛 로마의 군사 도로였던 카르눈툼-사바리아(Carnuntum-Savaria)가 프랑크 왕국의 남동쪽 경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오도르 뒤를 이은 카간은 이와 같은 상황을 이용하여 샤를마뉴 대제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 왕국 건설을 허락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개종하여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 세례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지역에 있는 피솨(Fischa)에서 805년 9월 25일에 거행되었다.

 

이로 보아 빈에서 엔스 강(Enns)까지 아바르 왕국이 지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로르시(Lorch)에 옛 도로 통행세관이 있었던 것 또한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 한다. 즉 아바르 왕국은 프랑크 왕국의 변방 국가, 즉 ‘provincia Avarorum’으로서 기능하였다. 다시 말하여 프랑크 왕국은 아바르 왕국을 슬라브인들로부터 보호하였고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았다. 이와 같은 관계는 822년까지는 확실하게 성립되어 있었고 프랑크 왕국에 대한 조공 국가로서 아바르 왕국은 828년 최종적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문서에서 슬라브족이 불가리아족을 포함한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는 아직 많은 고찰이 필요하다. 불가리아는 당시 발칸반도의 남쪽, 남동쪽의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불가리아는 802년부터 814년까지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침입으로 제국의 황제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 802-811)는 샤를마뉴 대제의 황제 칭호로 심각하게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803년 두 지배자는 남부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해안 지대가 비잔티움 제국령이라는 점에 합의하였다.

 

동으로는 불가리아로부터 서로는 아라비아로부터의 침입에 힘겨웠던 니케포로스 1세는 결국 프랑크 왕국에 평화를 제의하기 위해 810년 악헨으로 사신을 보냈지만, 811년 불가리아와의 대규모 산악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듯 황제가 전사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성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문서에서 쓰여진 슬라브족에 불가리아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샤를마뉴 대제는 니케포로스 1세에 응답하여 그의 사신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의 아들 쉬타우라키우스(Stauracius)가 뒤를 이어 불가리아와 전투를 지속하였지만 중상을 입고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다음 황제 미카엘 1세(Michael I)는 니케포로스의 사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문제 시 해 오던 샤를마뉴 대제의 황제 칭호를 인정하여 줌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불가리아전에 끌어 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의 집권은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814년에 그는 죽었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내분되고 약화되었다.

 

여기서 불가리아의 성장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서 완충 작용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813년 레오 5세(Leo V, 813-820)가 비잔티움의 제위에 오르면서 불가리아 공격에 대비하여 도시 방어를 강화시켰다. 당시 불가리아의 칸 크룸 또한 샤를마뉴 대제와 마찬가지로 집권 말기에 있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방어를 강화하여 갈 때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817년에 두 국가 사이에는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탁(Khan Omurtag, 814-831)은 티모칸족(Timočani), 브라니케브족(Braničever), 아보드리트-프레데네켄트족(Abodriten-Praedenecenten) 등 세 슬라브 족들이 불가리아와 동맹 관계를 끊고 프랑크 왕국에 접근하였을 때 족장들을 축출하여 엄벌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왕국은 더욱 견고한 국가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융화 정책을 펴갔다.  왕국 내부의 민족적인 갈등을 자신이 슬라브족과 결혼하여 난 두 아들에게 슬라브 이름(Enravotha와 Zvinitsa)을 줌으로써 슬라브족을 자연스럽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보내진 정교회 선교사들을 박해하였으며 슬라브족 포용 정책을 통해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헝가리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큰 왕국을 발전시켰다.

 

818년 프랑크의 경건왕 루드비히는 여러 민족들의 대표들을 헤리스탈리움(Heristallium)에서 맞이하였는데 그 중 불가리아와 동맹 관계를 끊고 프랑크 왕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그 곳에 온 티모칸족(Timočani)이 있었다. 티모칸족은 슬라브인으로 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요구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819년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판노니아 지역 크로아티아인의 통치자인 리유데빗(Ljudewit)의 반란(819-823)에 가담하였다. 이 때 프랑크 왕국은 이 반란에 개입하였고 불가리아는 티모칸족과 다시 동맹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불가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팽창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불가리아와 프랑크 왕국은 824년 2월에 처음으로 외교적인 접촉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불가리아의 사신들은 프랑크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하여 방문하였으며 프랑크의 왕은 이와 같은 뜻밖의 사절단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바이에른 출신의 막켈름(Machelmum)을 불가리아 사신들과 함께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타크에게 보냈다.

 

그 후 824년 12월 오무르타크는 사신을 다시 보냈으며 루드비히 왕은 이들을 접견하기에 앞서 불가리아인들과 이웃하여 다키아(Dacia)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아보드리트족을 불러 불가리아 왕의 저의를 파악하려 하였다. 아보드리트 족은 불가리아의 부당성과 침략성을 호소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프랑크 왕국의 왕은 불가리아 사신을 돌려 보냈다. 경건왕은 825년 5월 마침내 프랑크 왕국과 국경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악헨을 방문한 불가리아 사신을 맞이하였다. 당시 아보드리트족의 서쪽 국경은 오늘날 바나트(Banat)지역에서 시작되는 도나우 강의 지류인 타이스 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군주 오무르타크는 826년 824년에 보냈던 사신 대표를 다시 바이에른으로 보내 양국 사이의 국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어길 시에는 전쟁도 불사하겠노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판노니아와 아바르 왕국과의 접경 지대에 잇던 백작 발데리히(Balderich)와 게롤트(Gerold)는 불가리아군의 침략 가능성이 없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 해(827년) 불가리아는 드라우 강 계곡으로 침투하여 판노니아 지역의 슬라브족을 복속시키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은 남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프리아울 변경 백작령을 4개의 백작 구역으로 재조직하여 경계를 강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곧 경건왕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지만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타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판노니아 지역을 넘어서 지배권을 팽창시켰다. 양국 간의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으나 829년에서 오무르타크가 죽은 해인 831년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국경이 확실히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양국 간의 전쟁은 불가리아가 도나우 중류에 진입하여 ‘나라’를 세운 후 그 지역의 슬라브인들을 복속시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이었다. 불가리아의 침입에 힘입어 판노니아의 거의 모든 크로아티아가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불가리아의 칸 오무르타크의 바살이었던 라티미르(Ratimir, 829-838)의 지도 하에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도 당시 정치적으로 독립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와 같은 슬라브족의 독립화 과정은 샤를마뉴 대제 이후 분열된 왕국의 약화와 불가리아 왕국의 성장에 힘 입고 있었다. 불가리아 왕국은 바낫(Banat)과 스렘(Srem) 지역, 다시 말하여 오늘날의 벨그라드에서 도나우 강과 자베 강(Save)사이에 위치한 시르미움(Sirmium, Serbia)에 이르는 지역에 대해 1018-1019년 비잔티움 제국에 빼앗길 때까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불가리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칸반 도에서의 고립을 막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분쟁에 효과적인 대처를 할 수 있었으며 중부 유럽에서 프랑크 왕국과 거의 대등한 강력한 왕국을 수립하였다.

 

 

V.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화와 국가의 정체성

 

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동중부 유럽과 남동부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는 그 간 서유럽에서 진행되었던 그리스도교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리스도교가 슬라브인들의 영혼을  다투어 책임지려고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동프랑크 왕국은 남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동중부 유럽에 위치한 대모라비아 공국(830-907)의 선교에 앞장섰다. 프랑크 왕국의 선교는 교황과의 유대를 통해 798년 아바르족의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잘츠부르크 대주교구, 그리고 바이에른 주의 파사우(Passau)와 프라이징(Freising) 주교구 등을 중심으로  ‘샤를마뉴 선교 Schwertmission’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인 압박과 군사적인 무력이 동원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비잔티움의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외교적인 여러 방법을 통하여 불가리아를 압박하였으며 오무르타크 이후의 칸들(말라미르(Malamir, 831-836), 페르지안(Persian, 836-852), 보리스(Boris, 852-889) 때 왕국은 크게 확장되었는데 특히 남동쪽, 다시 말하여 같은 슬라브족이 많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큰 저항 없이 확대되었다.

 

불가리아 왕국은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치룬 후 9세기 중엽까지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45년 불가리아의 사신들이 루드비히 왕이 있는 파데르본(Paderbon)으로 보내졌으며 이전의 평화 조약이 재확인되었다. 불가리아는 프랑크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또한 쉽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에 기거하는 남동 슬라브인들을 하나로 묶어 성공적으로 통솔하였다. 852년 보리스가 집권한 후 잠시 동안 세르비아인과 분쟁이 있었고 세르비아의 승리로 끝났다. 862년 비잔티움 제국이 대모라비아 왕국과 손을 잡자 위협을 느낀 불가리아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았다. 칸 보리스가 루드비히(Ludwig der Deutsche) 왕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동프랑크 왕국의 바이에른 교회의 선교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가 원정하여 불가리아를 압박하여 864년경 30년 평화 조약을 맺었고 보리스는 당시 자신의 대부 이름을 따라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의 제후들과 국민들은 865년 초가을 공식적으로 동방 정교를 받아 들여야만 하였다.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종속되어야 했고 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866년에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접촉을 시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불가리아의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개선은 불가리아의 지배층이 내부 문제, 다시 말하여 민족적 다양성을 극복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소수 지배층이었던 원불가리아족은 수많은 전쟁으로 그 수가 갈수록 줄어들었고 그 자리는 슬라브족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주위 슬라브 지역이 왕국에 편입되면서 지배층의 슬라브화는 가속화 되었다. 제후와 평민들의 개종 후 예배 언어로 슬라브어가 채택되었으며 불가리아는 870년 제 8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로마 교회 추진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동방 정교를 받아들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불가리아의 대주교 및 주교들을 임명하였다. 성 콘스탄티누스-키릴(Konstantinus-K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us)에 의해 만들어진 슬라브어의 정착은 독립적인 슬라브 문학과 예배 의례를 탄생시켰다. 슬라브 교회 제도의 발전은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보리스는 889년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Vladimir)에게 정권을 맡기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블라디미르는 이교도들을 위한 정책을 폈고 동프랑크 왕국과의 유대를 통해 불가리아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대모라비아 왕국의 영향력을 제거시키려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정책은 이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였던 아버지 보리스의 정책에 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리스는 893년 블라디미르를 밀어내고 작은 아들 시메온(Symeon)을 왕위에 올렸다. 왕국 회의는 시메온을 국왕으로 즉위시켰고 슬라브어를 공용어로, 프레슬라브(Preslav)를 왕국의 수도로 선언하였다. 시메온은 894-896년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를 상대로 전쟁을 하였고 그 후 불가리아는 20년 간의 평화 시기를 맞이하였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으며 학문 문학 예술을 촉진시키는 정책을 썼다. 수도 프레슬라브에는 화려한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불가리아는 시메온과 함께 문화의 전성 시기를 맞이하였다.

 

 

VI. 맺음말

 

이상 불가리아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과정에 미치는 대외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환경의 영향을 분석했다. 대외적인 환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프랑크 왕국과의 경쟁적 체계를 주목하였으며 불가리아가 이들과 대항하기도 하고 이들과 협력하기도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을 형성시킨 후 동진을 시작하여 8세기 말 아바르가 멸망하자 보다 적극적으로 동진하였다. 아울러 비잔티움은 제국의 동쪽이 이슬람화 되면서 제국의 서쪽인 발칸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이 두 나라와 불가리아와의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돌입하였음을 보았다.

 

불가리아 왕국의 중앙 집권화는 칸 크룸(Khan Krum, 803-814) 재임 기간에 강력하게 실시되었는데 이는 당시 불가리아가 가졌던 대외적 위협 하에 진행되었다. 즉 불가리아는 동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서쪽으로는 프랑크 왕국과 경계하여 두 대국 사이에서 살아 남을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칸 오무르타크는 중앙 집권에 기반을 둔 강력한 선왕의 정책을 이어갔으며 민족적인 내부 갈등을 융화와 포용 정책으로 다스림으로써 그리스도교화로 정치적 통일을 이룬 비잔티움 제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있었다. 오무르타크의 정책은 다음 왕들에게서도 지속되었다. 칸 보리스(Khan Boris, 852-889)는 다 종족으로 구성된 불가리아를 하나의 민족 국가로 엮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865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함으로써 종족적인 이질성을 극복하고 보다 강력한 정치적 통일성을 확립하려하였다. 다시 말하여 그는 슬라브족과 원불가리아족 사이의 인종적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인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써 두 강국 사이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견지에서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화는 서유럽의 그리스도교화와는 다르게 로마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 사이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국익을 위해서 종교를 정략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화는 특히 다 민족으로 형성된 불가리아의 민족 동질성과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9세기 비잔티움 제국과 프랑크 왕국 세력 사이에서 불가리아의 역할은 왕국의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지, 두 국가를 갈라 놓는,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교 문화권을 로마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 문화권으로 분리시키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보는 입장에 따른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 민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세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 가며 그 세력을 확장 시켜 갔던 불가리아 왕국의 중세사는 당시의 국가와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에 관한 좋은 역사적 사례를 제공한다. 아울러 강대국 사이에서 통일과 민족의 동일성 및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현대사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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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fd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30 불가리아라... 비잔티움은 멸망햇는데 불가리아는 살아있다느게아쉽습네다
  • 답댓글 작성자최하늘 | 작성시간 12.05.30 오스만이 그렇게 밀리면서도,유럽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은걸 보면, 메흐메드 2세가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서라도 콘스탄디누폴리를 점령한게 신의 한수는 신의 한수인거 같네요 ㅎ
  • 답댓글 작성자오로쿠트 | 작성시간 12.05.31 '로마민족'은 없지만 불가리아 민족은 살아남았으니까요. 보편제국을 표방했기에 결국은 중핵민족을 남기지 못하고 분해되버린게 어찌보면 당연했죠.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5.30 헝가리의 경우 카자르의 지배하에서 여타 투르크부족(초기엔 카바르-세케이인 나중엔 쿠만-쿤족을..)을 끌여들였고.. 불가르 족에 비해 분열되지않고 통일된 체제도 있었기에 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를 뺀 슬라브인들을 동화시키기 쉬웠고 몽골마왕님 강림전까지는 왕국 인구중에서 절대 다수를 이루었죠..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5.30 더불어 불가리아의 경우 아시다시피 "차르", "보야르(투르크어 bey + ar)"를 러시아와 비슷한 혹은 몇십년 앞서 이용한나라입니다. 후에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아센왕조의 경우 쿠만계라는 설이 있을만큼.. 나름 포용력있게 발전하지만 얘네들 또한 몽골마왕님께 ㅌㅌ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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