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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8) 미진과의 불화가 시작됨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5.16|조회수65 목록 댓글 2

3개 혁명의 참가자 갈리온카(В.П. Голионко)가 프리빌로프(Прибылов)에게

1959년 3월 20일 아기셰프(Агишев)에게 복사

“트리피츤은 정치적 술수가 없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무정부주의자임을 인정하고

소비에트의 힘을 인정하는 동시에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는 제3인터내셔널을 인정했다.

 

1920년 아무르 하류 사건에 관한 아기셰프(Р. Агишев)의 메모는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며,

소위 "1920년의 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Николаевскую трагедию 1920 года)"을 다시 고려하게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의무를 준다.”

니항 거주 중국인

니항에서 파괴된 대일본제국 영사관 건물의 표지

니항 거주 일본인들의 모습

1920년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니항 거주 조선인들 (상당수가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일부는 적극 협조하였다.)

 

전직 육군 대령 라마노프스키(В.З. Романовский )가 프리빌로프 에게. 1960년 6월 10일

“아무르 하류에서 우리 파르티잔 투쟁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러시아 내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페이지 중 하나입니다.

당시 극동의 우리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침략자의 길을 도왔고, 적들이 우리 인민과 그들이 하고 있는 위대한 일에 진흙을 퍼뜨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소비에트 혁명을 위한 최고의 전사들을 폄하 했습니다.

마침내 트리피츤과 레비제바, 동료를 전멸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작가 글라드키흐(П.И. Гладких)와 파르티잔 사령관 스트렐초프-쿠르바타프(С.С. Стрельцову-Курбатову)와의 편지. 1963년 8월 23일.

“블류헤르(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는 대화중 한번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가지는 나에게 분명합니다.

트리피츤은 ‘시베리아의 할아버지’라고 불려진 <까란다리쉬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Каландарашвили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음)>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혁명을 위한 전사였습니다.

 

무정부주의자라는 누명이 트리피츤을 죽게 하였습니다

내전의 복잡한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1920년 아무르 하류에서의 혁명운동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사실적 자료로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행동에 더 이상 참가자가 없다시피 하지만,

니콜라예프스크 박물관(Николаевского-на-Амуре музея)의 직원인 두진(В. Дудин), 하바로프스크 지역 박물관(Хабаровского краеведческого музея )의 직원 프리빌로프(Н. Прибылов) 등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프리빌로프(역사 과학 박사), 벨리코바 교수 및 다른 사람들은

아무르 하류지역에서의 트리피츤의 지지자와 반대자들 모두에 관해서,

파르티잔 운동 참가자들의 회고록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수집했습니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들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매우 어렵습니다.

트리피츤의 지지자와 반대자는 해당 사건에 대한 공적과 평가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참가자 중 두명 :

트리피츤의 지지자인 스트렐초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а-Курбатова) 연대 사령관과

트리피츤을 치료했던 파르티잔 의사 말라예프(П.Д. Малаев)

 

그들 둘 다 미진(Г. Мизин)부대의 독단 행동이라는 동일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말라예프(П. Малаев).

아무르 강 하류에서 파르티잔 활동함

“1919년 여름부터 공산주의자 그리고리야 미진(Григория Мизин)이 지휘하는 신딘 지역의 볼셰비키(Синдинский большевистский, 신딘 지역의 볼셰비키로 추정됨) 파르티잔 부대가 아무르 강 하류에서 작전을 펼쳤습니다.

 

파르티잔 부대는 일라부크(Елабуг) 마을에서부터 제렙초프카(Жеребцовка) 마을에 이르는 (최대 550km 거리) 아무르 강 연안의 넓은 지역을 통제했습니다.

미진(Мизин)의 파르티잔 부대 사령부는 말미즈(Малмыж)에 있습니다.

 

콜친(Колчин)은 실리레프콤(сельревком)의 회장이었습니다.

 

곧이어,

하바로프스크 군사 혁명 본부의 부의장 파프코(М. Попко), 할라질로프(И. Холодилов), 비스소노프(И. Бессонов), 니나 레비제바(Н. Лебедева, 트리피츤의 동거녀) 본부의 구성원이며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지도자중 한명인 부진비치(Д. Бузин-Бич)도 말미즈(Малмыж)에 도착하였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과 주코프(Н. Жуков)는 소규모 파르티잔 부대와 함께 하였습니다.

말미즈(Малмыж)에서 트리피츤이 미진(Мизин) 부대를 흡수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파르티잔과 미진이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미즈에서 미진과 트리피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미진 파르티잔 부대 약 100명(썰매 제외)은 식량 호송대로 단독으로 진군하였다.

이 부대에서는 세 사람만 트리피츤에 합류하였습니다.

 

 

 

 

스트렐초프-쿠르바타프.

아무르 강 지역 하바로프스크에서 니콜라예프스크(니항)시, 사할린 섬 등에서 파르티잔 활동

"1919년 7월에 미진 동지의 파르티잔 부대 15명이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는 신딘 마을의 주민인 저도 있었습니다.

파르티잔 부대는 하바로프스크와 니콜라예프스크 사이의 아무르 강을 따라 증기선의 이동을 방해하고 도시 간의 전신 통신을 방해하는 임무를 스스로 설정했습니다.

 

칼미코프차미(колмыковцами) 부대가 신딘 마을을 불태운 후 미진이 지휘하는 파르티잔 부대의 총회가 소집되었으며,

파르티잔 부대는 지휘관인 미진 동지의 비겁함과 간섭국 군대 및 백파 군대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고려하여,

타이가 숲 깊숙이 주둔할 것을 제안하였고,

미진을 파르티잔 부대장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사령관에 아츠빌리 파블루츠카바(Оцевили Павлуцкого)를 선출했습니다.

 

마을에서 떨어진 타이가 숲인 말미즈(Малмыж)의 겨울 기지에 새로운 사령부가 구성되었습니다.

 

1919년 11월경 말미즈(Малмыж)의 어느 마을에는

1919년 11월 2일 아나스타시예프스크(Анастасьевск) 마을에서 개최된 혁명본부 회의에서 선출되어, 파견된 트리피츤과 파르티잔들이 도착했습니다.

 

파견된 부대와 함께

혁명사령부에 있던 파프코(тт. Попко), 니나 레비제바도 도착했습니다.

말미즈(Малмыж) 마을에서 두 개의 파르티잔 부대 총회에서는 트리피츤 동지가 연합 파르티잔 부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역사의 이러한 일치되지 않는 점들은, 안타깝게도 많은 기억들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여러곳의 다른 출처들에서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확인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거의 90년 전에 일어난 니항 사건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들은 이제 무뎌졌습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사회주의 성향을 고수하는 역사가들에게 이 주제는 탐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산당은 이미 1919년부터 ~ 1920년에 발생한 아무르 강 하류의 사건을 평가했습니다.

새로운 사회경제적 주제를 다루는 역사가들은 지금까지 이 주제를 피했습니다.

 

때때로 해당 사건에 대한 개별적인 언급이 미디어와 인터넷에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말한 내용만을 반복했습니다.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니항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 1920년대 3대 독립군 승리의 시작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新)報)가 제1차 니항사건, 제2차 니항사건으로 구분하였고, 오늘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사실이라고 주구장창 우겨대고 있다.

 

참고 인물 및 출처

시마다(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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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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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5.17 시마다의 이력이 특이하네요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끌었고 니항사건 당시 일본인회 회장이었다니 사건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었군요 나가사키현 출생인데 평양에서 사망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5.17 예,
    아마 이 사람의 아들중 한명이 일제시대 평양에서..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니항, 평양 등지에서...
    유곽(성매매업소)과도 관련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사할린섬의 석유개발, 니항에서 잡화, 어업, 상업 등등을 했고,
    당시 오호츠크해가 대표적인 어장이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어장이며, 동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죠)

    1945년경 평양에 있던 아들집으로 간후 일본이 패망하며 소식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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