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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17)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들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2.06.03|조회수107 목록 댓글 2

 

무적황군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목차:

동료에 대한 기억들

мяти товарища--------------------------------------------------------------------------- 3

아버지에 대한 한마디

Слово об отце ------------------------------------------------------------------------------- 4

서문

Вместо предисловия ----------------------------------------------------------------------- 5

피로 덮인 최후

Кровавый финал ---------------------------------------------------------------------------18

아나스타시요프카 마을 회의

Анастасьев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24

야코프 이바나비치 트리피츤

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 -------------------------------------------------------------25

니나 미하일로브나 레비제바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25

볼셰비키 운동 또는 혁명의 구성 요소

Партизанское движение, или составные части революционности --------------27

아무르강 하류에서의 혁명운동

Поход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30

시간 순서

Связь времен -------------------------------------------------------------------------------33

스파스크 폭풍우의 밤,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34

해방된 도시

Освобожденный город -------------------------------------------------------------------40

니항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43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 코뮨

Николаевская коммуна-------------------------------------------------------------------50

트리피츤의 완충국가 건설 반대

Антибуферная политика Тряпицына --------------------------------------------------57

트리피츤에 대한 음모

Заговор против Тряпицына--------------------------------------------------------------62

니콜라예프스크 코뮨의 마지막 날

Последние дни «Николаевской коммуны»-------------------------------------------69

불타버린 니항시(니콜라예프스크 시)

Сожженный город-------------------------------------------------------------------------73

트리피츤의 체포

Арест Тряпицына--------------------------------------------------------------------------87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Кровь за кровь, смерть за смерть ------------------------------------------------------92

결론

Заключение ---------------------------------------------------------------------------------98

 

일본군을 환영하는 러시아인들

거의 1920년 3월달까지,

이 사람들은 파르티잔들에 의해 사방에 둘러싸인 데카스티리(Де-Кастри) 지역에 있었습니다.

바깥 세상과 단절된 그들은 굶주릴 운명에 처했습니다.

완전 절망을 하게 된 비츠 대령은 자신의 힘으로 잔류한 장교들을 백파 정권에 대한 충성 맹세에서 해방시켜,

그들 자신의 운명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비츠 대령은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유서를 쓰면서,

페트라그라드(Петроград, 오늘날의 산크트 삐쩨르부르크,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혹은 상트 빼째르부르크)에 있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백파 정권에 대해서 장교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고,

볼셰비키 혁명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동의를 받지 않고 자살을 하게되었으며, 용서를 요청했습니다.

 

유서에는 또 장교들에게 보낸 마지막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를 향한 바닷가에 자신의 시신을 병사들의 매트리스에 넣어 묻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비츠 대령은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의 용기와 고귀함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권총을 트리피츤에게 넘겨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령이 자살한 후,

남은 백파 장교들은 항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항복한 장교들은 1920년 3월 12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이 있었을 때,

파르티잔들이 그들을 쐈습니다.

 

니항일대의 썰매, 겨울철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1900년대 초반 니항의 도시계획. 일본군 병영이 지어지기 전이다.

니항 인근 제정러시아군 병영

1900년대 초반 아무르강 일대의 여객선들

극동지방 조선인들

 

 

시간 연결

1987년, 작가 스말야크는 소련의 과학자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태평양 안보 문제에 관한 소련-미국 심포지엄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식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주 늙은 미국 여성이 우리 식탁에 다가왔다.

 

할머니 : “죄송합니다. 러시아어 연설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드문 일입니다. 저는 러시아인입니다.”

 

스말야크 :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나요?” .....라고 내(스말야크)가 물었다.

 

할머니 : “오, 그건 긴 이야기입니다. 나는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왔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어부였던 류리(Люри)입니다.

아버지는 1922년에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일본인들부터 권리를 회복한 위원회를 이끌었습니다.

1923년에 나는 하르빈에 갔고, 그 다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5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스말야크 : “나는 니콜라예프스크에 오랫동안 살았고, 그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할머니 : "당신은 이 도시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외쳤다,

"얼마나 놀라운 회의입니까! 당신이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나는 그녀가 내 말을 믿지 않고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말야크 : "트리피츤, 레비제바, 시마다(Петр Симадо), 비츠, 토카례프(Токарев) ... "

- 나는 이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 “당시 나는 여전히 소녀였지만,

나는 이 사람들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표트르 시마다(Петр Симадо)는 우리 이웃집이었습니다.

매우 부자였습니다.

 

이시다 영사 가족과 사진촬영한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그리고 토카례프의 부인(Женя Токарев)은 내 여동생을 돌봐주었습니다.”

 

스말야크 : “트리피츤을 본 적이 있나요?”

 

할머니 : “여러 번 봤습니다. 잘 생겼지만 그런 끔찍한 남자 ...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래서 토카례프의 부인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

 

그 후 우리는 그녀와 별도의 테이블로 이동하여

그녀와 함께 멀리 떨어진 아무르 하류 지역에 당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역사였고,

그녀에게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그리고 근처에 달빛이 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태평양은 아무르 하류 지역의 물과는 다릅니다.

 

“진실로 주님의 길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작가 스말야크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임)

 

 

 

 

스파스크(Спасск) 폭풍우의 밤들,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극동지역 파르티잔들의 유명한 노래 <골짜기를 건너, 언덕을 넘어>의 가사였습니다.

(000은 유럽, 한반도에서도 매우 유명한 노래중 하나다.)

 

그리고 정치적 이유로

노래는 "니콜라예프스크의 날들" 이라는 단어를 "볼로차예프스키의 날들(Волочаевские дни)"로 변경되었다.

(남한에서는 아마 금지된 노래였을 것이다.)

 

마린스키 마을에서의 무혈 승리는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니항)로 가는 길을 열었다.

 

나중에는,

불과 수십여명에서 출발한 트리피츤의 부대는 최소 1,000여명에서 ~ (일본측에서 주장하기로) 5,000여명의 파르티잔 부대로 커지며,

 

물론 그중에는 맨손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인들도 분명 있었고,

또 니항에는 영사관 협력단체를 조직해 끝까지 천황에게 구원 청원서를 작성하고, 조국 대일본제국을 위해 충성한 자도 분명 있었다.

일본에서는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니콜라예프스크 도회에는 이시카와 소령의 지휘 아래 대략 800여명에 달하는 일본군 대대급 부대와

백파인 미드베제프 대령(полковника Медведев)이 지휘하는 약 500여명의 백파 경비대가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니항에는 일본인들의 비교적 평화로운 큰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북경정부) 강방함대의 니항 도착

소비에트 역사 기록 등에서는 당시 니콜라예프스크에는 무장한 중국인이 있다는 것을 때때로 언급합니다.

 

사실입니다.

두 척의 중국 군함(실제로는 4척 이상, 「진세영」이 영솔)이 태평양 연안에서 아무르강을 거슬러 만주의 대도회 하르빈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서리가 내리고, 일본군의 방해와 아무르강 결빙으로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중국 군함들은 러시아 내전에 대해 중립적이었다.

니항의 포병 부대장이었다고 일제 앞잡이들이 주장하는 안드레예브

오늘날 재건되어 남아 있는 니항의 일본군 병영건물

 

일본과 북양정부는 같은 연합군 소속

또 당시 중화민국 북양정부(북경정부)는 연해주 일대에 수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한,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간섭전쟁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진세영(진계량)이 지휘하는 중국 강방함대가 니항에 도착하자 일본군들과 일본인들, 2,000여명의 중국인들이 열렬히 환영했었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 부대의 병력 증가

1920년 2월쯤에 이르렀을 때,

야코프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에는 약 2,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에서 니콜라예프스크에 이르는 파르티잔들의 두달 가량 무혈에 가까운 행군은

아무르강의 하류 지역에서 소비에트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확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승리자들의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도시를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보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부진비치의 회고록

이러한 분위기는 부진비치(Д. С. Бузин-Бич)의 회고록에서 매우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싸우고 승리하려는 파르티잔들의 열망이 너무 컸습니다.

이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만들 수단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각 파르티잔 부대들의 분위기는 나우모프(Т. Наумов, 트리피츤 부대의 참모장 겸 파르티잔 부대 사령관중 한명-저자, 1920년 3월 12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전사)에 의해 성공적으로 특징 지어집니다.

 

나우모프 : "나는 원하고 나에게는 장벽이 없습니다.

깊은 사려, 분별 ? 혹은 휴전? 은 아닙니다 !

 

너희들은 배신자이며 우리 중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파르티잔 부대 참모장 나우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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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06.03 유서를 쓰고 자살한 비츠 대령이 비장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0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 내전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동란도 마찬가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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