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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6. 예니체리, 오스만 투르크의 외로운 영웅들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7.23|조회수1,452 목록 댓글 2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지배 역사 중 가장 흥미있는 제도의 하나는 바로 예니체리였다. 우리 말로 굳이 번역하면 신식군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니체리는 프랑스의 외인 부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른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용병 근위 부대를 지칭했다.

예니체리의 지휘관(중앙)과 병사

 

그러나 예니체리는 가장 비인륜적인 방법을 통해 육성됨으로써 후세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오스만 투르크 황제의 최측근 정예 부대였던 예니체리의 충원은 바로 이슬람이 아닌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 가운데 어린이들만 뽑아 천애의 고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들을 제국으로 데려가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뒤 전형적인 무사로 양육했던 것이다.

연구가들에 따르면 예니체리는 술탄 무라드 1세(1360~1389) 집권 초기에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예니체리의 공식 해체는 1826년 술탄 마무드(Mahmud) 2세에 의해 이뤄졌다는 공식 기록을 고려하면 예니체리 역사도 5백년에 달한다.

예니체리의 창설 배경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의 권한은 사실상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 전역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대 대제국이 그러했듯이 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속주(屬州)에 파견된 총독이 전권을 행사했다. 술탄은 이스탄불을 지키고 있었지만 속주에 보낸 총독들이 언제 반기를 들어 자신의 지위를 찬탈하려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에 술탄은 자신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동시에 술탄 이외에는 어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즉 술탄은 충성을 100%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군대가 필요했다. 이러한 술탄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니체리 제도였다. 이 예니체리는 전적으로 황제의 직속 부대로 다른 명령 계통을 전혀 거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창설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며 예니체리 제도 자체가 처음부터 특정한 방식을 지향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선 술탄의 입장에서는 직속 친위대를 창설하는 것이 속주의 총독을 자극할 우려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니체리 초창기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가진 관례를 적용했다. 술탄은 수하 장군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전리품의 약 5분의 1을 상납하도록 하고 있었다. 술탄은 이 같은 제도를 통해 포로가 된 적군 가운데 우수한 인적 자원을 선발, 예니체리 부대를 창설했으며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를 충원해 나갔다. 그런데 이들 포로들을 규합해 부대를 만들었지만 전술적으로 이들이 뛰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적군을 최측근에 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른바 ‘데브쉬르메’라 불리는 충원 방법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발칸 전역에서 그리스 정교회나 카톨릭의 신앙을 지닌 사람의 자제를 강제 징집하는 것이었다. 더욱 잔인한 것은 성년이 된 젊은 사람을 징집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보통 8세 내외의 철부지만을 무조건 붙잡아 천애 고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제도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은 1385년으로 되어 있다.

예니체리에 대한 훈련 방식 또한 이제까지의 문화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잔혹한 방법이었다.특히 1453년 이후에는 주로 어린이들만 징집해 일단 이스탄불로 호송했다. 이곳에서 출신 성분, 건강 상태 등 이들에 관한 전면 재검토를 실시하고, 일단 이 면접 시험에 합격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현재의 소아시아 지방)로 보냈다. 이곳에서 보통 7년을 보내는데, 군사 훈련을 시켰던 것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인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며 그들의 말과 문화와 생활 방식 등을 철저히 익히게 하여 완전히 오스만 투르크 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이들은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신병 부대인 아예미 르그흘람스(Ajemi Lghlams)에 배치돼 철저하게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때 이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이슬람 교로 개종하여야 했다.

좌 - 훈련받는 예니체리 훈련생, 우 - 데브쉬르메 제도로 온 신참

 

술탄은 또 이 예니체리 부대가 술탄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적인 여건을 만들어 두었다. 우선 예니체리는 오스만 투르크 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들이었다. 아무리 이슬람 교로 개종하고 오스만 투르크 문화를 오스만 투르크 인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오스만 투르크 인이 아니었다. 오스만 투르크 인은 결국 이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니체리의 전사들은 그들이 이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에서도 버림받은 신세였다. 그들은 오직 황제를 통해서만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황제에 의지해서만 생존해 나갈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예니체리는 전사로 복무하는 중에는 결코 결혼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가족이 있으면 싸움을 두려워하게 되고 전쟁을 피해 도망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탄과 예니체리의 관계는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주인과 노예 관계였다.

예니체리의 전사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에는 최고의 엘리트 부대로 각광받으며 동서로 종횡무진했지만 그들은 마침내 처절한 운명의 멍에에 묶이게 된다. 그 멍에의 매듭은 바로 세르비아 인의 반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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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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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7.23 초기에는 투르크 귀족 견제용이였으나 파티히 이후 예니체리의 세가 급격해졌고.. 심지어 셀림1세(즉위때 예니체리의 지지를 얻음, 칼다란 전투 승리후 더 진격하러 했으나 보급+예니체리 반대) 술레이만 카누니(도 빈 공성전때 비슷한 경험을 함) 정도였고.. 셀림2세는 즉위 때 예니체리에게 포상금 안주자 예니체리가 반란직전까지 갔었다는 -_-... 그리고 셀림1세때까지는 공식적으로 결혼,사유재산 없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7.23 하지만 17c 이후 데브쉬르메제도의 유명무실-붕괴와 인력이 지나치게 늘어남에 따라 군대의 질적저하를 가져다주었고(하지만 수공업자, 등 각종 길드에 참여하여 대중화됨) 이들이 투르크 귀족의 영지(티마르 시파히...)를 잠식함에 따라 전체적인 군 질적 저하..(오죽하면 나중에 크리미아 기병이 전부가 되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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