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르 왕은 최종적으로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수상으로 1941년 쿠데타의 주역인 두샨 시모비치 장군을 임명했다. 망명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전체 전황과는 상관없는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편견에 빠져 있었다. 특히 이들은 크로아티아 자치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로아티아 인의 세르비아 인 학살 사태에 고무되었기 때문에 1939년 가까스로 합의한 대타협(스포라줌)은 더 이상 준수될 가능성이 없었다. 스포라줌은 사실상 이때 완전히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망명군을 사열하는 페타르 2세와 시모비치 장군
페타르 왕에게는 전쟁보다는 카라조르지예비치 왕가의 안위가 최대의 관심이었다. 페타르는 망명 정부의 수상 시모비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쟁과는 상관없이 세력 확보에 나섰다. 이를 위해 왕국의 병사들이 독일과 싸워 망명 정부의 위신을 세워 주어야 했다. 또한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 공산주의자의 준동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그 실천 방안은 애매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라는 대도(大盜)를 막기 위해 공산주의자와 ‘국공 합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독일과 싸우면서 동시에 강력한 파르티잔을 견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타르는 시모비치와의 오랜 논의 끝에 일단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나름대로 독일에 저항하고 있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을 망명 정부의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 페타르 왕이 연합국측에 그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임명장은 우여곡절 끝에 1941년 5월 베오그라드 근교의 야산에 캠프를 설치하고 있던 미하일로비치에게 전달되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비치 역시 정치 산술을 기막히게 하는 정치 군인이었다. 또한 그는 대세르비아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민족주의자였으며 왕정 신봉자이기도 했다. 카라조르지예비치 왕실을 한 축으로 세르비아 정교를 다른 축으로 한 세르비아 통일 국가의 건설만이 그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며칠 후, 그는 일선 지휘관들을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을 내렸다.
우리 세르비아는 절대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전하는 망명 정부를 이끌고 해외에 계시고 모든 땅은 독일군과 그 앞잡이 크로아티아 놈들이 점령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전투 목적을 독일과의 전투에만 두지 않고 장기전으로 들어갈 태세를 세운다. 우리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대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할 사전 준비를 해두는 일이다. 목숨을 아껴라. 용감무쌍하게 독일과 싸운다고 대세르비아가 건설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적은 도처에 있다. 곳곳에서 포진하고 있는 공산 파르티잔도 우리의 적이요, 우리 동족을 학살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살인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최소한의 필요한 전투에만 참가하라. 그리고 필요할 경우 모든 재량권을 지역 지휘관에게 넘긴다. 그리고 향후 우리 세르비아 군사령부 소속 전투 대원들을 체트니크(Cetnik)라고 부르도록 선포한다.
본래 체트니크는 과거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이에 무장 저항하던 세르비아 게릴라 단원을 의미했다. 미하일로비치 대령이 주도한 체트니크는 유고가 점령당한 직후인 1941년 5월 창설되었다. 체트니크는 망명 정부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무장하였으며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반공주의자이면서 반크로아티아주의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게다가 체트니크는 중앙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지역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전권을 행사하는 느슨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들 모두 세르비아 주도의 왕정에 충성을 다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블랙 핸드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로 블랙 핸드의 첫 번째 부활 시도였다.
체트니크 부대의 모습
이 같은 미하일로비치의 결정의 배후에는 세르비아 인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던 위기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세르비아 인은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인구의 20%를 잃었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세르비아 인에 대한 학살이 추축국을 등에 업은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세력뿐만 아니라 알바니아와 이탈리아가 점령한 코소보에서도 계속되고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1차 대전중 세르비아인을 학살하는 오스트리아군
그들의 입장에서는 독일군보다는 차라리 크로아티아 인이 더 미웠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이 세르비아에 세운 괴뢰 정권인 네디치 정권에 협조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게릴라전은 거의 하지도 않았다. 연합국이 개입하는 시기까지 목숨을 유지하는 데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체트니크가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거의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세르비아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얽매여 있었던 체트니크와는 대조적으로 반파시스트 투쟁을 용감하게 펼쳐 온 공산주의자들은 이른바 유고슬라비즘의 기치를 내걸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 시작된 유고슬라비즘은 이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탁월한 지도자 요시프 티토가 이끌던 공산 파르티잔들은 잘 짜여진 조직으로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티토는 1892년 5월 크로아티아의 쿰로베치에서 크로아티아 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 인 어머니 사이에서 무려 15남매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 같은 배경이 장래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요시프 티토
독일군은 작전의 상당 부분이 공산 파르티잔의 게릴라 공격으로 손상을 입게 되자 철저한 보복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1941년 9월에 시달된 독일군 최고 사령부 명령서에 따르면 독일군 1명이 피살되었을 경우 주민 1백 명, 부상했을 경우 50명을 처형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 지시에 따라 광범위한 보복 살인이 자행되었다.
이 지시가 내려진 지 한 달 만에 세르비아의 크라구예바라는 곳에서 공산 파르티잔의 공격으로 10명의 독일군이 피살되고 26명이 부상당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무려 7천 명이나 되는 마을 주민을 사살해 버렸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크라구예바 학살의 모습
크라구예바 학살의 모습2
학살의 책임자인 독일 장성 프란츠 보엠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자살하였다.
1941년 11월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서로 전쟁 중 협력을 위해 협상을 계속했지만 끝내 무산되고 만다. 세르비아 제일주의로 무장하고 있던 체트니크에게서는 이제 독일군보다는 동족의 가슴에 피를 뿌린 우스타샤의 크로아티아 인이 더 큰 원수였고 체트니크를 능가하는 세력으로 뿌리 내리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더욱 큰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내내 의문스러운 행동으로 일관했다. 연합국 정보 판단에 따르면 체트니크는 엄청난 정보들을 독일측에 넘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연합국측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경계를 하긴 했지만 공산 파르티잔이 워낙 영웅적인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세르비아의 건설이라는 대명분을 내걸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무릎쓰면서까지 종횡무진했던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1944년 봄이 되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져 갔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런던의 페타르 망명 정부와 티토와의 화해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전제 조건으로 영국 정부가 내세운 첫 번째 조건은 페타르 정부가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와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는 내용이었다.
가중되는 외교 압력에 굴복한 페타르는 그때부터 나 몰라라 하고 미하일로비치를 모른 척했다. 전쟁 속에서 일으켜 보려던 대세르비아주의의 영광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종전으로 치닫으면서 모든 땅은 공산 파르티잔의 손으로 들어갔고 부하들마저 괴멸해 버려 미하일로비치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미하일로비치는 끝내 파르티잔에게 생포되었다. 반역죄로 기소된 미하일로비치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블랙 핸드를 통해 대세르비아 통일 국가를 세워 보려던 드미트리예비치의 운명처럼 미하일로비치 역시 똑같은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블랙 핸드의 첫 번째 부활 시도는 그야말로 싹도 내밀어 보지 못한 채 무서운 현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제 대세르비아주의는 다시 고개를 숙여 부활의 그날을 꿈꾸며 지하로 지하로 한없이 추락해 갔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미하일로비치와 그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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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2.08.21 한국인들은 언어가 같으면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인들은 언어가 달라도 문자로 통하면 같은 민족인데 이 사람들은 언어가 같아도 종교 다르니까 다른 민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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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임용관 작성시간 12.08.24 체트니크의 애매모호한 처신이 결국 스스로 화를 자처하고 말았군요. 이제 티토의 시대가 열리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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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8.24 체트니크들이 이용당한 측면도 있죠. 런던 망명정부에게 체트니크는 그냥 용감히 싸우다 죽어서 망명정부의 체면을 세워주는 도구로 생각했다고 볼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