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월 13일 야간에 베트민군의 총 공격은 개시되었다. 최초 공격목표는 북동쪽의 베아트리스(Beatrice), 북쪽의 가브리엘(Gabrielle), 북서쪽의 안느 마리(Ann Marie) 진지에 지향되었다. 55일간 계속된 디엔 비엔 푸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디엔 비엔 푸를 공격하는 베트민군
베트민군은 며칠 전부터 장애물 제거반이 은밀하게 진지에 접근하여 철조망을 절단하고 지뢰 제거작업을 실시하였고 공격에 참가할 병력은 계속해서 참호를 굴착하여 프랑스군 진지 200m 앞까지 진출해 갔으나 프랑스군은 전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로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베트민군은 3월 18일까지 3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나바르 장군에게 “산의 사면에 배치된 베트민군의 대포는 3발을 쏘기 전에 우리의 대포로 전부 파괴하여 버릴 것입니다.”라고 큰소리쳤던 프랑스군 포병단장 샤를 피로스(Charles Piroth) 대령은 자살하고 말았다.
포격을 개시하는 베트민군 포병
피로스 대령. 포병대 선임지휘관
베트민군도 최초 제1단계 공격에서 2,5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세 진지를 점령한 베트민군은 즉각 대공화기를 이 진지로 이동하여 프랑스군의 공중보급과 항공지원을 교란시켰다. 베트민군의 포병도 끊임없이 프랑스군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디엔 비엔 푸에서 대공사격을 가하는 베트민군
주야간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베트민군은 2단계 공격준비를 계속하였다. 2단계 공격의 목표는 중앙진지 일대를 공격하여 동쪽과 서쪽의 거점들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군 비행장의 기능을 마비시켜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베트민군은 주변의 고지로부터 무수하게 갈라진 참호를 굴착해 나가면서 전진해 나갔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화를 견디면서 베트민군 병사들은 인내심과 끈기로 한발 한발 참호를 파 내려갔다.
디엔 비엔 푸에 고립된 프랑스군
부상자의 후송조차 불가능했던 디엔 비엔 푸 상황
3월 30일 3개 사단의 병력이 모두 투입된 2단계 총 공격이 개시되었다. 프랑스군도 용감하게 분전하였다. 한 개의 거점을 놓고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어떤 거점에서는 피아의 간격이 10~15m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집중, 막대한 화력지원, 침투전술로 베트민군은 저항거점을 하나 하나 점령해 들어갔다.
디엔 비엔 푸 전투를 그린 그림
디엔 비엔 푸에서 전투하는 프랑스군
프랑스군이 그렇게 믿었던 공중지원도 무위였다. 당시 프랑스군의 항공 전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300여대의 항공기 중 전투기는 80여 대로서 그나마 비행거리 때문에 충분한 지원이 곤란하였고 베트민군의 대공화기는 끊임없이 프랑스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프랑스군 지원 항공기 중 48대가 디엔 비엔 푸 상공에서 격추되고 16대는 지상에서 파괴되었으며, 167대가 피해를 입었다.
격추당하는 프랑스 항공기
파괴된 베어켓 위에서 환호하는 베트민 병사들... 프랑스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을 극복해낸 그들은 승자로서 환호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베어켓 2대의 배열상태를 볼때 최초의 포격에 당했던 기체로 보인다.
포로가 된 프랑스 조종사
일주일 가까이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프랑스군은 4개의 방어진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진지는 모두 베트민군에게 피탈되었다. 프랑스군의 저항도 대단하였고 베트민군도 2만 명 가까운 손실을 입고 4월 5일 지압은 일단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군도 너무나 엄청난 손실을 입어 내부적으로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필사의 탈출, 점점 포위망이 좁혀들어오는 디엔비엔푸에서 부상병들이 수송기를 타고 탈출하고 있다. 그나마 활주로가 월맹군에게 떨어지면서 이 마지막 탈출로마저 없어지게 된다.
1954년 4월 2일 디엔 비엔 푸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프랑스군
프랑스군의 참호...전투는 후기로 갈수록 지리한 참호전양상을 보였고 이는 병력과 군수지원에 열세를 보인 프랑스군에게는 절망만을 남겼다. 베트민군은 땅굴전략으로 참호전을 돌파해 나갔고 지친 프랑스 군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베트민군의 피해는 엄청났지만 전투에 임하는 이들의 의지는 이를 극복해 내었다.
병력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지압은 5월 1일 3단계 총 공격을 개시하여 5월 7일 베트민군 제 308 사단이 마지막 남은 프랑스군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디엔 비엔 푸 결전은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부상자를 포함한 11,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가 되었다.
최후의 돌격을 준비하는 베트민군
베트민군이 디엔 비엔 푸 요새 내부로 들어가는 임시가교를 건너고 있다. 최후의 날의 모습이다.
디엔비엔 푸를 점령한 베트민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난공불락이라고 프랑스군이 자신만만했던 요새지를 공격하여 비록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였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 2,293명, 부상 5,134명, 포로 11,000명(부상자 포함)이었고 베트민군은 전사 8,000명, 부상 15,000명으로 베트민군 투입 병력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패전 후 수용소로 이동하는 프랑스군 포로
포로 수용소를 향해 행진하는 프랑스군 포로들
프랑스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한 근본원인은 베트민군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베트민군은 게릴라나 부랑자들을 주워 모은 오합지졸로서 비록 소규모의 게릴라전은 수행할 수 있으나 군사적으로 대규모 정규전은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에서 모든 전술적 과오가 기인되었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이 4개 사단, 5만여 명의 대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디엔 비엔 푸를 방어상 취약한 지역이 아니라 적에게 압력을 가하는 공세기지로서 운용하려고 한 것이다.
추후 정보기관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집중된다는 정보를 제공하였으나 프랑스군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오합지졸들을 격멸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베트민군이 군수지원 능력, 중장비 이동능력, 대규모의 정규전 수행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비대장인 카스트리를 제쳐두고 전투를 도맡아 수행해 훗날 공수부대 마피아라는 별명을 얻은 제2공수전투단의 지휘부들이다. 좌측에서 두번째가 제6콜로니얼파라의 대대장 비제아 소령이고 우측에서 두번째 카키색 군복이 제2공수전투단의 지휘관 랑그레 중령이다.
따라서 1954년 2월 중순 경 베트민군 포로의 소지품에서 사면에 구축된 지하포대의 배치도가 나왔지만 프랑스군 수비대 포병단장은 적이 3발을 발사하기 전에 이를 제압할 수 있다고 호언하였다.
디엔 비엔 푸 주둔 프랑스군 포병대
또한 지형상 디엔 비엔 푸는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고지군을 통제하여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군사상식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통제수단을 강구하지도 않았고, 베트민군이 2개월여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주변지역에 대한 수색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트민군의 공격개시 3일 전에 디엔 비엔 푸 일대에 있는 베트민군 전투병력 5만여 명에게 쌀을 공급하는 계획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베트민군의 전문을 입수하였고 첩보원이 105㎜ 포 20문, 대공화기 100정 등 베트민군의 화력지원 능력을 정확하게 탐지해 왔으나 프랑스군은 이에 대해서 어떤 대응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험준한 지형 때문에 75㎜ 야포보다 구경이 더 큰 포들은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포병, 공군의 능력으로 충분히 제압 가능하기 때문에 화력지원 없이 공격하는 베트민군은 공격하는 대로 그들 화력의 밥이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베트민군의 최초공격은 프랑스군을 경악시켰고 베트민군의 강력한 대공화기 때문에 항공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군은 미국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군 출신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이를 신중히 고려한 후 개입을 보류하였다.
베트민군에게는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대 결전이었다. 베트민군의 승인은 호치민과 지압의 대 결단에 의한 병력집중, 프랑스군의 의표를 찌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창의성, 이를 가능하게 해 준 베트민군의 군기, 인내심 그리고 주민의 자발적인 협조였다.
디엔 비엔 푸의 공로를 치하하는 호치민
이 디엔 비엔 푸 전투가 프랑스군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군에게는 어느 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든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그렇지 않아도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군의 전의를 결정적으로 꺾은 계기가 되어 프랑스는 서둘러 제네바 협정을 타결하고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게 되었다.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되기 몇일 전의 프랑스 수비대 수뇌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 가운데 카스트리 장군의 표정에는 전투 초기의 자신감은 찾아볼수 없다. 카스트리 장군은 디엔 비엔 푸의 가장 선임 지휘관이었지만 본래 기갑 병과 출신으로 디엔 비엔 푸같은 전투에는 적합치 않은 지휘관이었다. 거기에다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수부대의 장교들은 카스트리를 대놓고 무시했으며 자기들끼리 별개의 작전회의를 통해 카스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디엔 비엔 푸에서 카스트리의 명령이 통하는 것은 10대의 전차 뿐이었다.
베트민군의 디엔 비엔 푸 공격 시기도 기가 막힐 정도로 적절했다.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된 바로 다음날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토의가 시작된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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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Z.W.P.A 작성시간 13.02.02 베트남군의 저력과 용맹도 대단하지만 프랑스군의 무능이 전투에 큰 성패를 좌우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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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코크레인 작성시간 13.02.02 실로 경이로운 전과라고밖에는;; 소금물로 발 식히면서 타이어 조각으로 된 군화 신고 수백 킬로미터 행군해서 수개월을 공세준비...
근데 그에 맞선다는 친구들은 방심을 넘어서서 방만 수준인데요. 기지 200m 전방에서 진지 공사를 하는데 눈치도 못챘다면 이건 뭐.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작성시간 13.02.02 프랑스군도 참 용감히 저항했지만 정보인식부족, 적능력과소평가...간부가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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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썩은얼음 작성시간 13.02.02 레알 무섭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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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3.02.07 지금 베트남하면 깡다구로 통하지만 저때 베트남...프랑스인들이 별 문제없이 100년동안 지배한 베트남인들이 저런 깡으로 덤비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판단이 합리적이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