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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30. 혼돈에 빠진 남베트남군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2.15|조회수1,268 목록 댓글 5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베트남전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적극적인 미국의 개입과 결의는 남베트남 국민과 남베트남군을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들은 본격적으로 남베트남군 장교들에게 대 게릴라전 교육을 실시하면서 베트콩 전술에 대응하는 훈련을 강화하고 헬기, M113 APC(Armored Personnal Carroer, 병력수송 장갑차) 등의 신 장비를 보급하였다.

M113 APC

 

전장에서 새로운 장비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헬기를 보는 베트콩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데 급급하였다. 무장 헬기의 공중사격에는 엄폐를 취할 수도 없었고 신속한 공중기동으로 어느 틈엔가 자기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APC의 효과도 마찬가지였다. 야지에서의 신속한 기동력은 베트콩을 압도하였다. 마치 토끼몰이 식으로 베트콩들을 추격하면서 사격을 가하였다. 베트콩의 한 지휘관의 보고에 의하면 “M113 APC는 탱크보다 회피하기가 더 어려웠고 그 속도도 엄청났다. 이 APC들이 우리들의 통제지역을 계속 유린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전투는 점점 격화되어 베트콩에 의한 소부대 작전 위주에서 작전부대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고, 피아 무기손실률이 역전되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전략촌 확대 계획으로 보급이 어려워지고 베트콩들의 보급기지에 대한 남베트남군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점점 진작되기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과 농부들 간의 신뢰관계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베트콩에 대한 정보도 신뢰성이 증가하고 베트콩들의 귀순자도 1961년도에 비하여 3배로 늘어났다.

1961년 베트콩이 주도권을 잡고 계속 공세활동을 전개하였던 때와 비교하여 1962년도에 들어와서 남베트남 정부군의 사기는 눈에 띄게 높아졌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디엠이 내정을 개혁하고 전 국민과 군대가 일치단결하여 나간다면 승리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정치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디엠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1960년 11월 11일 공수부대 지휘관을 역임했던 부옹 반 동(Vuong Van Dong) 대령이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동 대령이 독립궁을 포위하자 디엠은 협상하자고 시간을 끌면서 은밀히 사이공 근교에 있는 7사단장 트란 티엔 키엠(Tran Thien Khiem)에 지시하여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부옹 반 동

 

트란 티엔 키엠, 훗날 부통령이 된다.

 

이 사건 이후 디엠은 쿠데타의 불안에 싸이게 되었고 명망있는 장군들을 의심하였다.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베트남인으로서 당당한 체구를 가져 별명이 Big Minh) 장군은 제네바 협정 이후 사이공 지역 담당 지휘관이었다. 그는 디엠의 권력투쟁 기간에 디엠의 반대세력을 제압하는데 수훈을 세워 1957년에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당시 남베트남군 참모총장인 레 반 티(Le Van Ty) 장군의 다음 서열이었다.

두옹 반 민.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이 된다.

 

레 반 티

 

민은 군과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고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되자 특히 고 딘 누가 싫어하기 시작하였다. 남베트남 내에는 두 사람의 영웅은 필요없었다. 민을 실권이 있는 지위에 둘 수는 없었다. 육군 야전사령부를 민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실권은 없었고 고작해야 1군단, 2군단 지역 부대검열이나 지도방문을 나가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직책이었다.

1962년 중반에 이 할 일 없는 고급사령부는 해체되고 대신 육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민을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신설된 육군사령부에는 민 다음으로 명망있는 제1군단장이었던 트란 반 돈(Tran Van Don) 장군을 임명하였다. 육군사령부는 지휘권이나 책임은 없었고 예하부대 지도방문이 유일한 할 일이었다. 민과 돈 장군은 디엠이나 누에게 내정개혁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트란 반 돈

 

또 하나의 명망있는 장군인 레 반 킴(Le Van Kim)은 동 대령의 쿠데타 기도시 육사교장이었으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 하여 체포되어 조사받은 적이 있었다. 결국 민, 돈, 킴의 세 장군은 1963년 11월 1일 쿠데타의 3주역이 되었다.

레 반 킴

 

1962년 2월 22일 두 공군 조종사가 디엠 권력의 상징인 독립궁을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시 한 번 디엠에 대한 군부의 불신이 노출되었고 단결된 남베트남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되었다.

디엠에게는 공산주의와 대결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뒷전이었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대로 군부는 분열시켜 통치해야 했고 하급 장교의 임명으로부터 군사 작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통제하여야만 했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군부의 실권을 줄 수가 없었다. 4명의 군단장은 직접 통제해야 했고 지역 사령관인 군단장이나 사단장도 지역 내에 있는 성장(省長, 중령, 대령의 현역 장교)을 지휘할 수 없게 하였다. 각 성장은 직통선으로 직접 통제하였다. 더구나 각 성장들은 지방군과 민병대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의 통일은 필수적이었는데도 이런 것을 문제삼을 수는 없었다. 군사작전 시에 행정관청의 지원이나 협조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것도 디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장교들 간에는 전투보직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성장, 군수, 군수지원 부대 등의 직책이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한 장교보다 야심이 강하고 부패한 장교들이 득세할 수 있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군을 통해서 시행되는 평정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토지분배에 문제가 생기고 농민에게 가야 할 물자가 다른 데로 흘러들었다.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단행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원조의 증가와 비례하였다. 제네바 협정 이후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는 미국의 지지가 절대 필요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정권도 안정되었고 기반도 튼튼하였다. 자신감이 생긴 디엠은 미국의 내정개혁 요구에 대하여 내정간섭이라고 버티었다. 고 딘 누를 제거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고 딘 누는 미국을 제외하고 하노이와 직접 협상을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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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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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3.02.15 저게 망조의 지름길이었군요...이런......내부 분열이 저렇게까지 갔으니..ㅡㅡ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2.15 군에서 정신교육할때 이런 것도 좀 교육을 했으면 좋겠군요;; 특히 장교후보생들 교육할때........... (근데 이걸 하려면 우리나라가 환골탈태를 해야하잖아 아마 안될꺼야............)
  • 답댓글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13.02.21 장학금과 스팩을위해! .. 아마 안될거야...........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13.02.21 고딘누를 확실히 다루거나 제압햇어야했는데 그럴 능력도 의지도없어보인 디엠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이끄내요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3.03.19 정주행중입니다.
    " 유능하고 성실한 장교보다 야심이 강하고 부패한 장교들이 득세... "
    남의 얘기도 먼 옛날의 얘기도 아닌것이 함정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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