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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80. 1968년 구정 공세(5)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4.24|조회수1,825 목록 댓글 7

그렇게 많은 인명을 희생하면서 기만공세를 실시하였고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공세준비를 해왔던 북베트남은 최종공세 직전을 차질을 일으켰다.

1968년 1월 30일, 음력으로 무신(戊申)년 새해가 되는 00:00시가 지나고 거리에는 남베트남인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축제를 하고 있었다. 나트랑(Na Trang) 남베트남 해군훈련소에 00:35에 베트콩들이 박격포 공격을 가하면서 1개 대대가 나트랑 시내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01:35에 반메투오(Ban Me Thout)에서 군중들이 폭죽을 터트림과 동시에 박격포, B-40로켓포의 사격과 함께 2개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다.

전장을 돌진하는 북베트남군 병사들, 구정공세 중의 한 컷이다. 전면적인 시가전이 남베트남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호이 안(Hoi An), 다낭(Da Nang), 퀴논(Qui Nhon)에서도 베트콩들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04:40 티우 대통령은 30일 오전 10:00에 구정휴전의 취소를 발표하고 휴가 중인 남베트남군들의 부대복귀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복귀한 병사는 얼마 되지는 않았다. 교통편도 없었고 만일 적이 공격한다면 우선 자기 가족부터 먼저 지키고 싶어했다.

구정공세 때 다낭의 야경

 

이미 공격을 개시한 8개 도시지역의 베트콩들이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북베트남의 공격개시 시간이 최초에 1월 30일 새벽이었다가 1월 31일 새벽으로 변경되어 전달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켰는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1월 31일 02:45 사이공 미 대사관 공격을 필두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6개 직할시 중 5개 직할시, 44개의 성도(省都) 중 36개 성도, 242개의 군청 소재지 중 64개소 그리고 50여개의 촌락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차 경고는 되었으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국에 걸쳐서 이와 같이 일제히 공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습은 달성할 수 있었으나 지난 밤 공격의 착오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공격에 대한 반응시간을 단축시켜 놓고 말았다.

구정 공세시의 전투 지역

 

미 대사관 공격은 15명의 베트콩이 2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대사관 정문으로 접근하면서 시작되었다. 경계를 하던 초병이 사격을 가하자 베트콩들은 담을 폭파하고 내부로 진입하였다. 미 해병대 헌병의 사격으로 최초 3명의 베트콩이 사살되었고 미 해병대 헌병 2명도 전사하였다. 베트콩들은 대사관 건물에 진입하기 위하여 B-40로켓포를 발사하였고 미 해병들도 건물내부의 옥상에 응사하여 사격전이 벌어졌다. 베트콩의 지휘자가 최초의 총격전에서 사살당하여 베트콩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하였다. 미 헌병 1개 소대가 도착하고 공수 1개 소대가 옥상에 착륙하였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나버렸다. 15명의 베트콩이 사살되었고 미 해병대 헌병 5명이 전사하였고 미 대사관에 고용된 남베트남인 4명이 사망하였다. 남베트남인 중 1명은 베트콩 내통자였다.

구정 공세시 미 대사관에서 전사한 미 헌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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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 앞뜰에서 사살된 게릴라 대원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는 미군들

 

사실 싱겁게 끝나버린 미국의 상징인 대사관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은 미 국민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미 대사관이 공격을 받자 베트콩들이 대사관 건물을 점거하였다고 소문이 돌았다. 확인도 하지 않고 미국 기자들은 즉각 기사를 송고하였다. 미국시간 1월 30일 저녁뉴스에 베트콩들이 전국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대사관도 베트콩들에 의해서 점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당시에 명성을 날리던 뉴스 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이를 보도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나는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What the hell is going on? I thought we were winning this war)"라고 빈정거렸다. 미국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정정보도는 되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월터 크롱카이트

 

08:30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미 대사관을 방문하고 12:00부터 정상 근무하도록 벙커(Bunker) 대사에게 보고하였다. 미 기자, TV 카메라맨들이 열심히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사관 공격상황을 설명하고 타 지역의 공격도 적은 도시지역에서 노출되어 미군과 남베트남군에게 현재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으며 적은 패배를 자초하였다고 그는 자신있게 말하였다.

그러나 미 기자들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베트콩들은 사이공 지역의 작전본부를 촐론(Cholon) 지역에 설치하고 주요 시설들을 공격하였다. 독립궁, 라디오 방송국, 남베트남 해군본부, 남베트남군 총참모부, 5,000여 명의 죄수가 있었던 사이공 교도소(베트콩 1개 대대 공격),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베트콩 3개 대대 공격), 남베트남군 포병, 기갑사령부(베트콩 2개 대대 공격) 등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되었다.

사이공 시내 중국인들의 거주지역인 촐론. 사이공에서 가장 부패하고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베트콩들의 거점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침투당하였으나 근무요원이 사전에 약정된 신호에 따라 전원을 단절시키고 예비 방송국에서 방송을 계속 하였다.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포병, 기갑사령부를 점령하여 그곳에 있는 포와 전차를 운용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전차는 사전에 타 지역으로 이동되어 버렸고, 포는 적의 공격이 있자 포의 폐쇄기 뭉치를 제거해버려 베트콩들이 운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탄손누트 공항은 베트콩들이 3개 대대를 집중하여 공격하였으나 미 기계화 연대 예하 1개 대대가 신속히 출동하여 베트콩들의 후방으로 공격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항공기, 건쉽, 포병화력이 지원되어 베트콩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산발적으로 도처에서 교전이 있었으나 2월 6일까지는 촐론 지역을 제외하고 사이공은 평온을 되찾았다.

남베트남군 레인저 병사들이 사이공에서 베트콩 저격수의 시체를 치우고 있다.

 

사이공에서 경찰국장 구엔 곡 로안(Nguyen Ngoc Loan)이 노상에서 포로가 된 베트콩 장교를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어 베트남전에 대한 세계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트콩들은 공세 기간 중 후에(Hue)에서만 수천 명을 학살하였는데도 이 사진 한 장으로 오히려 남베트남이 더 잔인하다는 인상을 전 세계인에게 특히 미국인에게 심어주게 되었다.

구정공세 당시 베트콩 장교를 즉결 처형하는 구엔 곡 로안 사이공 경찰국장

 

처형한 직후의 사진

 

이번 공세의 최대의 비극이 후에에서 일어났다. 북베트남군은 후에 시내에 8개 대대 7,500여명을 투입, 02:00부터 은밀히 진입하기 시작하여 후에를 점령하였다. 곳곳에 베트콩 기가 휘날리고 14만의 시민은 포로가 되었다. 북베트남군은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후에 시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여 재보급을 실시하면서 후에의 장기 점령을 시도하고 있었다.

후에시의 어느 거점을 장악한 북베트남군 중위와 그의 부하들

 

후에를 공격하는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1사단과 미 해병사단의 일부 병력은 고도(古都) 후에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항공, 전차, 포병화력의 지원 없이 후에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공격을 하였으나 피해만 속출하였고 베트콩들도 완강히 저항하여 진격이 저지되었다.

1968년 구정공세 당시 치열한 전장이던 후에 전투에서 작전중인 미 해병대 사진

 

후에시의 북베트남군 저격수, 68년 2월 후에시

 

2월 7일 티우 대통령은 재탈환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여 본격적인 재탈환 작전이 전개되었으나 유적보호를 위한 배려로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가옥 하나 하나를 탈취해 가는 시가전이 계속되었다. 남베트남과 미군의 투입병력은 남베트남군 1사단(사단장 고 쾅 트룽(Ngo Quang Truong) 준장, 남베트남 패망 당시 1군단장) 예하 11개 대대와 미 해병 3개 대대였고 미 제1기병사단은 시 외곽작전을 전개하여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고 쾅 트룽

 

구정공세(Tet Offensive) 때 후에(Hue) 접전의 미군과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은 보급로가 차단당한 후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으나 이미 시 외곽이 포위되어 탈출로도 없게 되자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이 후에를 점령한지 25일 만인 2월 24일 재 탈환작전은 종료되었다.

베트남의 古都 후에 성곽.  베트남전쟁시 미해병대와 베트콩, 월맹정규군이 치열한 시가전, 백병전, 공방전 등을 격렬하게 치렀던 전쟁터다.

 

후에에서의 단일작전에서 미군은 전사 119명, 부상 961명, 남베트남군은 전사 363명, 부상 1,242명의 피해를 입었고 전과는 시내에서 적 사살 5,000여명, 시 외곽에서 3,000여명이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작전 간 야포 52,000발, 함포 7,670발의 화력을 운용했고 공중 투하 폭탄량은 530톤이었다.

폐허가 된 '후에' (Hue)시

 

후에시의 시가지를 달리는 미해병들

 

민간인 피해도 엄청났다. 모든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청년 등 5,800여명이 처형 당하였다. 2,800여명을 한곳에 집단 매장해 버렸고 생매장되기도 하였다. 이재민은 116,000여명이었다. 외국인은 모두 사살되었고 미 민간인 수석고문(미군 내 장군 급에 해당하는 군무원) 맨하드(Manhard)와 헬기추락으로 다낭 군수지원사 부사령관 퍼셀(Purcell) 대령이 포로가 되었다.

후에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저지른 엄청난 만행은 남베트남인에게 깊은 공포심을 갖게 하여 이후 피난민 사태는 군 작전의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정 공세시 후에에서 생매장된 시체를 발굴하는 모습

 

델타지역에서는 남베트남군 7사단장 탄(Thanh) 준장이 그의 가족과 함께 베트콩들에게 인질로 붙잡히기도 하였다. 예하 장병들에게 베트콩에 항복명령을 하도록 협박당하였으나 그는 끝내 버텨내었다.

구엔 비엣 탄 준장

 

이 외에 비엔 호아(Bien Hoa), 쾅트리(Quang Tri), 달라트(Dalat), 다낭 등지에도 베트콩들의 강력한 공격이 있었고 베트콩들이 10개의 성도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2월 11일까지는 후에를 제외하고는 북베트남의 공세는 거의 마무리 되었다.

미군이 집계한 구정공세 기간의 피해 및 전과는 다음과 같다.

미군 및 연합군 전사 1,536명, 부상 7,764명, 실종 11명, 남베트남군 전사 2,788명, 부상 8,229명, 실종 587명, 북베트남군 베트콩 사살 45,000명(투입병력의 1/2로 추산), 포로 6,991명, 공용화기 1,300정, 개인화기 7,000여정 노획, 민간인 사망 14,000명, 부상 24,000명, 이재민 63만 명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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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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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3.04.25 헉, 실패였다니 몰랐네요. 그런데도 이 구정 공세가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미국은 엄청난 반전 여론에 휩쓸렸고, 반대로 패배했지만 북베트남은 큰 선전술로 오히려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었으니 참... 이래서 전쟁의 승패가 꼭 정치의 승패로 연결되는 건 아닌 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Vv아마게돈vV | 작성시간 13.04.25 말 그대로 의지의 싸움이군요.
    만약에 미국이 더 확고한 의지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을듯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4.25 솔까말... 2차대전 이후로 미국이 의지를 가지고 밀어서 지도에서 지워지지 않을 나라가 어디있나요(.....)

    문제는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국내여론에 전쟁수행 능력이 많이 끌려 다니는 편이라서요....나름 민주정이 잘 잡힌게 그 이유겠습니다만.

    첨언이지만 오늘날 베트남이 베트남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그렇게 인상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1.돈
    2.내가 이겼는데 왜?
    3.한국군과 주로 툭탁거리던 베트공 조직이 구정대공세때 갈려나가서


    라는 얘기도 나오거든요(....)
  • 작성자지옥괭이 | 작성시간 13.04.26 그런데 미군은 어차피 남의 일이라 쳐고, 남베트남은 저런 피해를 입었는데도, 극우적인 분위기로 흐른다거나 복수를 하려는 움직임같은 것이 없었나요? 저 당시 정규군의 병력 및 장비등만 보면 남베트남의 군사력도 상당한 편인데 아무런 조치도 안했다는 게 좀 ?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4.28 내전은 결국 학살극으로 귀결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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