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04. 1972년 북베트남의 춘계 공세(3) - 콘툼(Kontum) 및 봉송(Bong Song) 지역 전투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5.27조회수2,256 목록 댓글 4중부 고원지대에 북베트남군 공세의 주공이 지향될 것이라고 판단한 남베트남군은 1972년 1월부터 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2월 24일부터 적의 공세가 개시된다는 정보가 있어 이 지역 일대에 항공기가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하였고 기갑부대도 증원되었다. 3월 초에는 공수사단의 제2여단을 콘툼에 증원하여 방어력을 증강시켰다.
북베트남군은 4월 2일부터 캄보디아(론놀 정권이 들어선 후 크메르로 국호변경)와 라오스 국경에 연하여 있는 콘툼 성의 전초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4월 11일부터 북베트남군 제3사단은 1개 연대로 플레이쿠(Pleiku)와 퀴논(Qui Nhon)을 연결하는 19번 도로의 안케(An Khe) 패스(Pass)를 공격하고 2개 연대는 남베트남군 제22사단 예하 제40, 41연대가 방어하는 봉송 일대를 공격하였다.
콘툼 지역
북베트남군 제3사단이 봉송과 푸미(Phu My) 사이에 험준한 산악에 위치한 오렌지(Orange) 기지를 공격하자 남베트남군은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도주하여 버렸다. 미 항공기가 긴급지원 요청을 받고 출격하였을 때는 이미 남베트남군은 철수한 뒤였다. 북베트남군 제3사단은 부대를 양분하여 1개 연대는 봉송으로, 1개 연대는 푸미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호아이안(Hoai An) 기지를 방어하던 남베트남군 2개 대대와 지원 포병 1개 대대도 북베트남군이 출현하자 진지를 포기하고 봉송으로 후퇴하였고 봉송에서도 접전을 시도하지 않고 잉글리쉬(English) 기지로 퇴각한 후 5월 3일 LST로 퀴논으로 철수하였다. 푸미도 5월 1일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되었다. 한국군 수도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을 제외한 빈딘(Binh Dinh) 성이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한국군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북베트남군 제3사단 제12연대가 4월 11부터 19번 도로상의 안케 패스(통로의 길이는 7.5㎞로서 미 제1기병사단 지역이었으나 1970년 7월 이 부대가 철수하게 되자 수도사단 책임지역이 되었음)를 차단하자 4월 13일부터 개통작전을 개시하여 이 지역의 감제고지인 638고지 일대에서 북베트남군과 접전이 이루어졌다.
수도사단 기갑연대
안케 지역의 위치
기갑연대는 4월 24일 638고지를 점령하고 4월 26일까지 작전을 종격하여 차단 15일 만에 19번 도로를 개통시켰다. 최초 적의 투입규모를 판단하지 못하여 축차 투입의 과오를 범하였고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에 남베트남군이 계속 밀리고 있는 가운데 북베트남군을 격퇴시킨 연합군 최초의 성공이었다.
안케 패스의 전경
안케패스 전투의 한국군 수도사단
푸미 이북의 빈딘 성이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하자 퀴논 시민들은 동요하여 피난을 떠나는 소동이 벌어져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은 한국군 수도사단장에게 1개 중대만이라도 퀴논에 주둔시켜 주도록 요청하여 수도사단장은 1개 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콘툼 지역에 대한 북베트남군의 본격적인 공세는 4월 23일부터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닥토(Dak To)와 탄칸(Tan Canh)에 집중공격을 가하여 소련제 AT-3 새거(Sagger) 대전차미사일로 남베트남군 M-41전차를 파괴하였다. 남베트남군의 레인저대대와 미 그린베레가 양성한 900여 명의 소수민족 부대가 방어하고 있는 이 기지는 북베트남군이 T-54 전차를 앞세우고 기지에 쇄도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장비를 유기한 채 4월 25일 도주하고 말았다. 미군 항공기는 남베트남군이 유기한 M-41전차, 105㎜, 155㎜ 야포와 탄약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탄칸 기지의 모습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은 콘툼이 위급하여지자 플레이쿠에 있는 제23사단을 콘툼에 투입하여 방어토록 하였다. 제23사단장 바(Ba) 대령은 공수사단 제2여단, 3개 레인저부대, 제2기갑여단을 배속받아 콘툼 시를 중심으로 반경 7㎞의 원형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외곽에 또 하나의 추가 방어선을 구축하여 2중으로 된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배속 부대 지휘관도 사단장과 동 계급인 대령으로 많은 지휘 상의 불화를 야기하였으나 미 고문관들이 설득하여 해결해 나갔다.
리 톤 바 대령, 얼마 후 준장으로 승진한다.
북베트남군은 4월 28일부터 콘툼 남쪽에 있는 콘툼 패스(추파오(Chu Pao) 고개)를 2중 3중으로 차단하여 쿤툼 방어부대의 보급은 공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베트남군 2개 사단과 남베트남군 2개 사단 규모의 부대 간에 콘툼 공방전이 5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T-54전차의 선도로 콘툼 시의 북쪽과 북서쪽을 주공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남베트남군은 전차, 근접항공지원, M72LAW, TOW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한 코브라 건쉽 등을 운용하여 적 전차를 공격하였다. 수개 지역에서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남베트남군은 역습으로 백병전을 전개하며 이를 격퇴하였다. 격퇴를 당한 북베트남군은 즉각 20:00부터 야간공격으로 다시 돌파하였다.
방어선의 지탱이 위태롭게 된 남베트남군은 돌파된 지역 일대의 부대를 철수시키고 B-52의 폭격을 요청하였다. 이제 B-52 폭격의 우군 안전거리는 600~800m로 단축되었다. 수백 구의 시체를 유기한 채 북베트남군은 퇴각하고 말았다.
5월 21일까지 5차례나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5월 25일에는 다시 북베트남군의 집중공격이 시작되어 방어선의 일부가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된 채 며칠 동안 접전이 계속되었다. 북베트남군은 1,000여 명의 특공부대를 5월 25일 공격과 동시에 콘툼 시내에 침투시켜 비행장 일부, 성당, 병원, 고아원 등을 점령하여 내부혼란을 야기하는 전술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이들도 4일 만에 모두 사살되었다. 5월 30일 티우(Thieu) 대통령은 콘툼의 제23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바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키고 콘툼을 끝까지 사수하도록 격려하고 돌아갔다. 5월 31일부터 북베트남군은 점령한 방어선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남베트남군은 과감한 추격 작전으로 적을 격멸할 수 있는 호기를 활용하지는 못하였으나 B-52의 폭격에 힘입어 콘툼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북베트남군이 유기한 시체는 4,000여 구에 달하였다.
콘툼에서 시가전을 준비하는 남베트남군
그러나 콘툼 패스는 아직도 개통시키지 못하였다. 콘툼 방어에 성공한 바 준장은 2개 레인저 부대와 1개 기갑대대로 콘툼 패스 개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월 초에 에이브럼스(Abrams) 대장은 주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 중장에게 콘툼 패스 개통작전을 실시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한국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세호 중장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작전을 실시하려고 계획하여 지형정찰까지 실시하였으나 남베트남군의 반대로 작전은 실시되지 않았다. 남베트남군이 50여 일간 개통시키지 못한 작전을 한국군이 수일 내에 개통시켰을 경우 남베트남군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을 고려한 것이다.
제2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 중장
이미 북베트남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콘툼 패스는 6월말에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개통되었다. 7월부터 남베트남군은 콘툼 주위의 잃어버린 기지들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격을 개시하여 주요 기지는 휴전 전까지 거의 탈환되었다.
중부 해안지대도 콘툼 시의 상황이 안정되자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 구엔 반 토안(Nguyen Van Toan, 남베트남 패망 당시는 중장으로 제3군단장) 소장은 2개 레인저 부대를 해안지역으로 전환하여 7월 10일부터 반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7월 21일에는 봉송을 탈환하였고 7월 24일까지 이 지역의 작전은 종료되었다.
구엔 반 토안
북베트남군은 점령 동안 남베트남 지방 관리들을 거꾸로 매달아 혀를 잘라 죽이고 어떤 마을에서는 47명을 생매장하기도 하여 이 만행은 쾅트리(Quang Tri) 시의 만행과 함께 남베트남 국민에게 전파되어 1975년 북베트남의 공세 시에 엄청난 피난민 사태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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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리야스필 작성시간 13.05.27 어후..정치가 다말아먹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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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튜어니즘. 작성시간 13.05.27 초반에는 베트콩 상대로 싸우다가 후반께는 월맹 정규군과 싸운다고 하는 말이 이것놓고 하는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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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레이* 작성시간 13.05.27 저런상황에 체면을 생각하다니..ㄷㄷ
그런데 한국군이 저떄까지 남아있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27 저 당시 남베트남에 미군은 95,500명이 있었지만 전투부대가 보병 8개 대대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군은 청룡부대만 철수하고 맹호와 백마 2개 사단이 남아 있어서 실질적으로 우방군의 주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