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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고구려사 7-관구검의 침략, 평양성의 진실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0.10.01|조회수1,087 목록 댓글 8

관구검이 침략하자, 동천왕은 이에 대응한다. 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이 만 명을 끌고 왔다는데, 동천왕은 이만의 군대로 응대하여 3천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맥이라는 골짜기로 가서 또다시 3천명을 무찔렀는데, 그렇게 본다면 관구검의 군대는 4천만 남아있어야 함에도 관구검이 무모하게 4천의 병력으로 2만의 병력에 덤벼든다는 것도 우습고, 동천왕의 말 또한 앞뒤가 맞지 않다.


"관구검이 명장이지만, 위나라 군대는 대군이지만 우리의 작은 군사보다도 못하다."라고 호언할 정도라면 최소한 고구려 군대 2만보다는 훨씬 많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를 무시한 채 굳이 1만이라고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관구검이 자신의 패배를 낮추고 공을 높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농후하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원래 자신의 패배를 잘 인정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고의적으로 병사 수를 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6천이나 잃었는데, 4천을 가지고 2만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발상이다. 더구나 원정길인데다가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지만 1만 8천명을 잃고 2천명만 남았다는 것은 관구검의 군대가 고구려의 군대보다 배 이상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자만심에 빠진 고구려의 군대와는 달리 패배하고 돌아갈시 이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진 관구검은 배수진을 치고 고구려의 군대를 치니 동천왕은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동천왕은 수도인 환도성마저도 버린 채 동옥저까지 쫓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왕의 목을 노리는 관구검은 끝없는 추격을 시작했고 도망 길에 지친 동천왕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고육책을 쓰게 된다. 유유를 보내 항복하는 척하고, 수장을 죽이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대가 반격할 힘마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던 위나라 군대는 당연히 이에 응했고 방심한 틈을 타 유유는 그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목을 찔러 죽었다.


이에 당황한 위나라 군대는 당황하고 후퇴하게 되었고, 동천왕은 이 기회를 노리고 위나라 군대를 사살했다. 위나라 군대는 결국 고구려 왕의 항복을 받지 못했지만, 고구려의 수도를 점령하여 마음껏 유린했고, 환도성을 불내성(튼튼하지 못한 성)이라 비웃고 후퇴했다.


이로써 동천왕은 땅을 한번 잘못 얻었다가 수도를 빼앗기고 쑥대밭이 되는 비운을 맡게 되었다. 환도성의 백성을 보기도 부끄러워 결국 환도성의 근처인 평양성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평양성을 함흥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동천왕은 전쟁 패배의 휴유증을 이기지 못한 채 40세의 생애로 떠났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백성들의 자살 덕분에 무덤 주위에 시체 언덕이 생기니 이를 시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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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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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avoc | 작성시간 10.10.01 그러고 보니깐 넵어 웹툰에서 동천왕을 주제로한 웹툰을 연재하고 있던데, 거기서 나오는 내용들이 어느정도 현실적인가염? 내용이야 고구려에 어떤 현자가 나타나서 역사의 전개를 바꾼다는 내용이지만, 배경상 가능한 일인지...
  • 작성자bookmark | 작성시간 10.10.01 삼국사기의 위군 피해가 중앙군이라 일컬을 수 있는 부대에게서 있었다면 관구검은 이기고 돌아간다 해도 생명이 무사하기 쉽지 않다는 건 저시기 각국의 군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만. 중국이 기록을 왜곡했을 것이다... 라고 하기엔 지나침이 많습니다. 이 정벌 이후 관구검은 승진했거든요.
  • 작성자hannibal | 작성시간 10.10.02 두번째 줄 3천원 -> 3천명
  • 답댓글 작성자havoc | 작성시간 10.10.0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0.10.02 동아시아 고대전투는 사관탓인지 사가들의 잘못인지 전쟁 기록자체가 두루뭉실하게 쓰여진 탓에 병력동원에 관해 불투명한게 많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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