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민(Minh)은 부통령에 구엔 반 후엔(Nguyen Van Huyen) 전 하원의장, 수상에 부 반 마우(Vu Van Mau) 반 정부파 하원의원, 공보장관에 그의 보좌관이며 하원의원인 리 퀴 청(Ly Qui Chung)을 임명하는 등 마지막 내각을 구성하였다. 민이 아직 협상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북베트남이 통일하게 되면 인도차이나 3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므로 중국이 북베트남의 무력에 의한 통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고 임시혁명정부(PRG)도 북베트남의 지배를 원치 않고 있으며 북베트남도 남베트남 전체를 통치할 행정조직이 아직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과도정부가 필요할 것이고 또한 북베트남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엔 반 후엔
부 반 마우
북베트남에서는 이미 친 중국파가 완전히 거세되어 레 두안(Le Duan)을 비롯한 친소련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북베트남 내 임시혁명정부의 위치, 북베트남이 사전에 남베트남 점령지 행정을 담당할 요원을 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민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군인들을 치하하는 레 두안
민은 4월 29일 오전에 공보장관 리퀴청 외 3명을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합동군사반의 임시혁명정부 대표에게 보냈다. 임시혁명정부 대표(북베트남군 상좌)는 정원에서 자기들이 재배했다는 바나나를 같이 먹자고 하면서 농담으로 시간을 끌었다. 남베트남측 대표들이 재촉하자 그들은 군인이라 정치적인 문제는 말할 수 없다고 얼버무렸다.
오후에는 소위 재야 중립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꼽히는 트란 곡 리엥(Tran Ngoc Lieng) 변호사, 추 탐 루안(Chu Tam Luan) 교수, 찬 틴(Chan Tin) 신부 등 3명을 합동군사반에 보냈다. 그들은 시간을 끌었고 군대를 해산하라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포탄이 계속 떨어져 남베트남측 대표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다.
찬 틴 신부
4월 30일 날이 밝으면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재개되었다. 남베트남군에게는 상급부대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롱안(Long An) 전선의 남베트남군 제22사단 병사들은 북베트남군 T-54 전차가 사이공으로 진격하고 있는데도 상급부대에서 왜 아무런 조치가 없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비엔 호아(Bien Hoa) 전선을 고수했던 남베트남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공격 4일 만에 비엔 호아 공군기지를 탈취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후퇴하면서 전투를 계속 하였다. 쑤안록(Xuan Loc) 전투에서 명성을 날렸던 남베트남군 제18사단 장병들은 사단장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단장 다오(Dao) 준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오는 전날 미군 친구로부터 같이 철수하지 않겠느냐는 무전을 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전설이 되어버린 남베트남 보병 제18사단, 사단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족한 정원 5,000명짜리 여단급의 부대지만,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레 민 다오 준장은 남베트남 패망 후 행방불명되었다. 한때 전사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훗날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북베트남에 체포되어 재교육수용소에서 전향을 권유당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결국 17년간 수용소에서 투옥된 후 베트남에서 탈출하여(북베트남이 추방하였다는 말도 있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 망명후, 연설하는 레 민 다오 준장.
북베트남군 제3군단 예하 제10사단은 08:00 경 탄손누트 공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2군단도 09:30까지는 사이공 강 다리까지 진격하였고 교량은 사전 침투한 요원들이 확보해 놓고 있었다.
탄손누트 공항에서 전투를 벌이는 남베트남군
탄손누트 공항을 공격하는 북베트남군
13번 도로에 연하여 빈두옹(Binh Duong) 전선을 고수하였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 구엔 비(Le Nguyen Vy) 준장은 군단과 통신이 두절되자, 사이공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장병들을 집결시켜 가용한 차량을 총동원하여 사이공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사이공에서 약 50㎞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기지에서 철수하던 제5사단은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고 사단은 와해되어 사단참모들은 포로가 되었고 사단장 레 구엔 비 준장은 자결하고 말았다. 전쟁지도의 부재가 빚은 참극 중의 하나인 것이다.
레 구엔 비 준장
연대장 시절의 레 구엔 비... 그는 함께 근무하던 미군고문단과 시찰 온 미군 장성들에게 매우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던 보기드문 예외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4월 30일 아침 일찍부터 합동군사반과 협상을 타진했던 민은 아무런 진전이 없고 북베트남군은 시시각각 사이공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자 오전 9시경 그는 무조건 항복을 결심하고 10:20에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발표하였다.
“전 남베트남군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정지하라. 본인은 베트남인끼리 더 이상의 불필요한 유혈을 방지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남베트남군에게 현 위치에서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 본인은 또한 임시혁명정부군도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임시혁명정부와 정부를 인계하기 위한 절차를 논의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 항복으로 남베트남(The Republic of Vietnam)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전 남베트남군에게 항복명령을 내릴 군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비엔(Vien)이 떠난 후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던 빈록(Vinh Loc)도 떠나가고 동생이 북베트남군 소장이었다는 참모본부 참모장 동 반 쿠엔(Dong Van Khuyen) 중장도 탈출하였고 참모본부에 남아있는 장성은 구엔 후 한(Nguyen Huu Hanh) 준장 뿐이었다.
참모본부 참모장 동 반 쿠엔 중장
구엔 후 한 준장
한 준장은 10:30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 예하부대에게 무기를 버리고 최초로 접촉되는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후에 한은 오래 전부터 북베트남의 첩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참모본부의 책임 있는 장군들은 다 도망하여 버리고 도망할 필요가 없는 북베트남의 스파이가 남베트남군에게 항복명령을 하게 되는 웃지 못 할 비참한 현실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던 장병들은 깊은 허탈감에 빠졌고, 이 허탈감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계속 항전하는 자, 허공에 총을 쏘아대며 울부짖는 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결하는 자, 분노와 증오심에 어쩔 줄 모르며 약탈을 자행하면서 미국인을 모두 쏘아 죽이겠다고 날뛰는 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자 등 갖가지였다.
남베트남군들이 버리고 간 군복과 군화들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AC-119 건쉽의 조종사 티엔 중위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역은 아직도 건재하였다. 이 지역에는 북베트남군이 추가로 투입되지도 않았고 이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군의 일부는 사이공 지역 공세로 전환되기도 하여, 이 지역은 온존되었었다. 제4군단장 구엔 코아 남(Nguyen Khoa Nam) 중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기 군단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제4군단장 구엔 코아 남 중장
남 중장은 미국의 철수가 한창일 때 남베트남을 떠나기 위하여 사이공으로 도주하는 성장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또 다른 성장이 해상으로 도주하자 헬기로 추격하여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 중장은 민의 항복발표를 듣고 권총으로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남 중장은 남베트남군 중에서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한 소수의 떳떳한 장성이었다. 제4군단 예하 제7, 9, 21사단은 해산되었고 제7사단장 트란 반 하이(Tran Van Hai) 준장은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제7사단장 트란 반 하이 준장
벤캣(Ben Cat)에 있는 북베트남군 전선 사령부는 환희로 가득 찼다. 레둑토(Le Duc Tho), 팜 훙(Pham Hung),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이하 모든 간부들은 서로 끌어안고 환희와 눈물을 흘렸다. 둥은 예하부대에게 계획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최종목표를 모두 점령하도록 하고 저항하는 남베트남군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남베트남 독립궁을 최종목표로 부여받은 제2군단 예하 특수임무부대는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10:20에 민의 항복 발표가 있기까지 사이공 시내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11:30에 그들은 사이공 동물원 일대에서 남베트남군의 저항을 받았다. 시간이 지체되자 사이공 여자 게릴라의 안내로 북베트남군 전차 1대가 미 대사관 앞을 돌아 독립궁으로 직행하였다. 폐쇄된 독립궁 철문을 그대로 밀치고 들어가 남베트남군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섰다. 민 이하 그의 각료와 보좌관 몇 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병사와 여자 게릴라가 게양대에서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리고 임시혁명정부 기를 게양하였다. 시간은 12:45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
북베트남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로 진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남베트남 독립궁을 점령한 북베트남군
대통령궁을 포위한 북베트남 탱크
동물원에서 남베트남군의 저항을 물리친 북베트남군 특수임무부대 지휘관 구엔 반 탕(Nguyen Van Tang) 소좌는 수상 집무실에서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장까지 부착하였다. 그는 즉시 독립궁으로 향하였다. 13:45에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민은 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를 논의하자고 말하였다.
탕은 소리쳤다.
“무엇을 이양한단 말인가? 당신들은 패배자요, 항복자일 뿐이다.”
북베트남군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총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민 이하 패배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연행되어 갔다.
민 대통령을 체포하는 북베트남군
포로가 되어 재교육 수용소로 끌려가는 남베트남군
사이공에서 미군 함선으로 탈출한 남베트남인들은 괌의 남베트남인 수용소에 일단 도착하였다.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한곳에 따로 수용되었다. 3군단장이었던 토안(Toan)이 휠체어를 차지하자 결막염으로 고통을 받던 1군단장 트룽(Truong)이 다른 의자를 찾고 있었다. 이때 미 해군장교가 들어와 많은 별들이 달린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도록 요구하였다.
“우리는 그대로 군복을 착용할 수 없는가?”하고 처량한 목소리로 간청하자 미 해군장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이제 군대도 국가도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없이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06 감사합니다.
-
작성자프란츠 작성시간 13.07.06 나라 말아먹고 별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여전히 입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저렇게 행동한 미군장교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
작성자centurion 작성시간 13.07.09 고생 많으셨습니다.
-
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3.07.09 잘 감상했습니다. ^ ^~
-
작성자베트남청춘 작성시간 15.02.17 이번에 호치민 출장갔다 하노이로 오면서 버스타고 육로로 이동했는데,님의 연재글 생각하면서 각전선을 유심히 보게 되었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