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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16화 < 태아장의 승리와 서주회전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8.02|조회수847 목록 댓글 9

보정-창현의 방어선이 돌파되자 중국군은 하북성 남쪽의 안양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그러나 12월 23일 북지파견군 산하 제2군은 진포선을 따라 황화강을 도하한후 단숨에 산동성 북부로 진출하여 26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성을 공략합니다. 이어서 38년 1월 10일에는 해군 육전대가 청도항에 상륙하여 점령함으로서 산동성 대부분이 함락되죠. 

 

장개석은 낙양과 정주, 개봉, 서주를 연결하는 선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설정하였고 이곳을 무한방어를 위한 최외곽거점으로서 호종남이 지휘하는 중앙군을 비롯해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킵니다. 본인도 직접 전선을 돌아보며 방어를 독려하며 자신의 명령없이 무단후퇴하는 지휘관은 이유를 불문하고 즉결처분하겠다고 압박합니다.

 

강소성 북서부에 있는 서주는 중국의 남북을 관통하는 진포철도와 동서를 관통하는 농해철도가 교차하여 산동, 하남,안휘, 강소 4개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또한 중국 최대의 곡창지대이기도 했죠.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화북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 서주를 반드시 방어할 필요가 있었고, 반대로 일본 역시 서주를 점령한다면 화북과 화동으로 분리되어 있는 양 전선을 연결하여 측면의 위협을 제거할 뿐더러 서주 동쪽에 있는 연원항을 통해 본토와의 병참선을 단축시키고 철도를 이용해 병력과 물자를 화북과 화중으로 마음대로 수송할 수 있었죠. 따라서 쌍방은 무슨 수를 쓰든 서주를 반드시 확보해야 해야 했습니다.  

  

38년 1월 전구 개편에 따라 서주를 비롯한 산동성 남부와 강소성 일대는 이종인의 제5전구가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제5전구의 병력은 이종인 휘하의 광서군과 우학충의 구 동북군, 송철원의 제29군 등을 중심으로 약 30개사단 30만명에 달하였고 이종인의 사령부를 비롯해 병력의 절반이 서주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여기다 일본군의 압박이 점점 가중됨에 따라 백숭희를 제5전구 임시참모장으로 파견하고 군사위원회 직속의 전략예비대였던 탕은백의 제20군단(제2사단, 제4사단, 제25사단, 제89사단)과 손연중의 제2집단군(기존의 제26군을 제2집단군으로 개편. 제27사단, 제30사단, 제31사단)을 증원합니다. 손연중의 부대는 보정전역에서의 손실로 전투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으나, 중앙군으로 구성된 제20군단은 중국군 최정예 부대로서 2개군 4개사단으로 구성되었고 각 사단들은 병력과 장비를 충분히 갖추었으며 독일 라인메탈사에서 수입한 155mm 중곡사포와 37mm 대전차포 대대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독일로부터 수입한 18년형 105mm 곡사포와 155mm 곡사포로 무장한 중국군 정예 포병대. 이 포의 화력은 일본군의 야포를 능가하였습니다.

37mm PAK35/36 독일제 대전차포.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itzz/140038028942 

 

한편, 동경 대본영은 2월 16일 전선의 재정비와 전투력의 회복을 위해 여름까지 한시적으로 공세를 중단하고 전선을 이이상 확대하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이를 위해 참모본부 작전과장인 가와베 도라시로 대좌가 직접 현지까지 와서 대본영의 이런 방침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부대들은 이를 무시한채 명확한 전략적 목표도 없이 단지 국지적, 전술적인 이유로 여기저기에서 야금야금 점령지를 넓혀 나갑니다. 이 때문에 병참의 애로는 물론이고 병력은 무의미하게 분산되죠.

 

특히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을 점령하여 한껏 들떤 북지방면군의 제2군 사령관 니시오 도시조 중장은 대본영의 명령을 받은 바로 날인 2월 17일 가와베대좌가 떠나자말자 "군사령관의 의지"운운하면서 휘하 제10사단에게 산동성 남부로 계속 남하할 것을 지시하고 제5사단에게도 제10사단을 측면에서 지원하도록 합니다. 한마디로 상부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한 것이죠. 이에 따라 제5사단 휘하의 사카모토지대가 산동성과 강소성의 경계에 있는 탕두진을 점령합니다. 내친김에 서주까지 점령하기로 마음먹은 니시오 중장은 "목전의 적을 격파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진출 한계선을 남쪽으로 확대해 줄 것을 대본영에 요청하였고 강경파의 압박에 못 이긴 대본영은 불확대 방침을 깨고 이를 승인합니다. 

 

※ 일본군의 "지대"란 전술적 필요에 따라 정규 사단에서 일부 병력을 빼내 임시로 편성한 부대로 1~2개 보병연대에 기병, 전차, 포병대대를 플러스하여 혼성 편성하였습니다. 그 규모는 통상 1개연대(3천명)에서 1개 여단(5천~7천명)정도였습니다. 지대장의 이름을 따서 "무슨무슨지대"라고 불렀죠.

 

3월 13일 제5사단의 사카모토지대와 제10사단의 세야지대가 남하를 시작합니다. 세야지대는 임현에서 치열한 전투끝에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 제122사단은 전멸당했고 사단장 왕명장이 전사합니다. 이어서 제63보병연대를 태아장 북쪽으로 진출시킨후 제2대대와 야전중포병 1개 대대로 태아장 혼성 파견대를 조직하여 3월 25일 태아장을 공격하게 합니다.  

 

서주에서 동북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도시 태아장은 서주 방어의 최일선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남쪽에는 북평에서 항주까지 중국대륙의 남북을 관통하여 황화강과 양자강을 연결하는 대운하가 흐르고 있어 말하자면 배수의 지세였죠. 일본군이 산동성을 침입하고 서주가 위협받게 되자 전해 12월부터 태아장 성내 주민들을 외부로 대피시키는 한편 여러 겹의 진지를 구축하여 요새화하는 등 철저한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병력을 보강하여 약 1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일본군은 고작 2개 대대로 공격했으니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 수 있죠. 

 

이종인은 당초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최정예인 제20군단을 각 진지에 분산시켜 소모적인 진지전을 할 생각이었으나 탕은백은 이에 반대하고 "자잘한 구멍을 때우는데 쓰기보다 전략예비대로서 결정적인 공격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남하하는 일본군을 깊숙히 유인한 후 압도적인 전력으로 사면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종인은 이를 받아들이죠. 

 

일본군 태아장 파견대는 전차부대를 앞세워 손연중군 제27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3월 27일 태아장 성내로 돌입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은 중국군의 함정이었고 단숨에 포위되어 전멸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1개 대대가 급파되었으나 이들 역시 포위됩니다. 지대장인 세야 히라쿠 소장은 3월 29일 본대 5천여명을 투입하여 남문과 동문을 점령한후 손연중의 제2집단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손실도 컸지만 손연중군 역시 사상자가 전군의 2/3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태아장 성내에서 시가전중인 손연중의 제2집단군 병사들. 

※ 사진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한편, 사카모토지대는 태아장 북쪽의 기주에서 장자충의 제59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세야지대가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다는 보고를 받자 기주 공략을 일단 중지하고 태아장으로 급히 이동합니다. 이들은 태아장 인근 5km 떨어진 외곽까지 진출했지만 탕은백의 제20군단에게 막혀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막대한 사상자만 냅니다. 세야지대 역시 손연중군과 탕은백군 사이에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직전 상황에 놓입니다. 결국 4월 6일 이들은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여 북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중국군은 이를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힙니다. 그런데도 일본 선전방송들은 "적을 섬멸하고 태아장을 점령하다"이라며 크게 떠들었고(38년 4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나중에야 제5사단장인 이타가키가 "오보"라고 변명하죠.

 

태아장전투는 쌍방이 사단급 제대를 투입한 대규모 전투에서 처음으로 중국군이 대승한 전투였습니다. 중국은 이 승리에 대해 "적군 제5사단과 제10사단 주력을 대파하고 사상자 3만이상, 소총 1만정과 보병포 77문, 전차 40량, 대포 50여문 노획 및 700여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태아장 전투의 전개과정(3월 13일 ~ 4월 6일). 일본측도 이 전투에 대해 "전래없는 격전"이라고 말했으며, 중국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태아장 북쪽의 기주와 임현에서 일본군을 소탕하고 이 지역을 탈환합니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과장된 얘기였으나 어쨌든 17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인정한 피해만도 제5사단이 전사 1,088명, 부상 4,137명, 제10사단이 전사 1,281명, 부상 5,478명으로 양사단 합해 1만2천명이 넘었을 정도였고(참고로, 일본군 사단정원은 2만5천~3만정도) 서방측 자료들은 대략 1만6천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군의 피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대략 2만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계되었고 특히 훈련과 장비가 빈약했던 손연중의 제2집단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군에 의해 노획된 일본군 전차. 정확한 모델은 모르겠으나 형상으로 봐서는 95식 경장갑차가 아닌가 싶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제2집단군 소속의 중국군 병사가 노획한 일본군기를 자랑하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태아장전투는 서주 전역 전체로 본다면 단지 전초전에 불과했고 일본군으로서는 비록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패배였지만 그럼에도 이런 참패는 메이지 이래 처음이라 할 정도로 충격이 컸습니다. 패배의 원인은 세야지대가 중국군을 지나치게 얕보았기 때문이었죠. 겨우 2개 대대 2천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덮어놓고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 수 있죠. 

  

또한 중국군은 이전과 같은 구태의연한 진지 방어전이 아니라 일본군을 교묘하게 함정에 빠뜨려 포위한 후 포위 공격으로 세야지대를 전멸직전까지 몰아 붙였고 사카모토지대에도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각 부대들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적전 도주하지 않았고 각 부대간의 협동작전도 구사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전의 전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죠. 물론 중국군의 희생도 컸지만 피아간의 화력 차이(통상 일본군 사단전투력은 중앙군 사단의 4배, 지방잡군의 10배이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에다 이전의 평균 손실비율이 5배~10배에 달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건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연전연패와 패주만 거듭하여 의기소침하던 중국 전체가 모처럼의 승리를 환호했고 38년 4월 9일자 영국 로이터 통신도 "영국은 중국의 서주 방어전을 주목한다"라고 말하며 중국의 항전능력을 재평가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북평 주재 미국 영사관의 무관이었던 조셉 스틸웰대령은 자신의 일기에 "이 전쟁에서 중국이 이길 것"라고 적었습니다.  

 

많은 영토를 잃고 큰 희생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준 낮은 민병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약점을 보강하고 근대전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태아장의 결과는 단순히 국지적인 승패를 떠나 바로 그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공격하면 이긴다"는 식의 사고로는 더이상 이길 수 없으며 중국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였죠. 

 

일본 대본영은 태아장 패배직후인 4월 7일 서주에 중국군의 주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당초의 "전선 불확대" 방침을 깨고 이른바 "흡인(吸引)"작전의 발동을 명령합니다. 서주를 남북에서 협공하여 이종인의 제5전구를 포위 섬멸하겠다는 의도였죠. 이를 위해 타 작전을 중지하고 동원가능한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북쪽에서는 북지방면군 5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이, 중지방면군 3개 사단과 2개 독립지대, 여기에 해군 육전대와 임시항공병단까지 도합 20만이 넘는 대병력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장개석은 제5전구의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는 한편 제5전구에 "진포철도와 기주방면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는 한편, 주력부대는 남쪽으로 전환하여 적을 섬멸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즉, 남쪽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이 북쪽보다 전력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각개격파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제5전구의 중국군은 당초 30만에서 60만까지 증강됩니다. 쌍방이 이정도의 병력을 단일전구에 집중한 것은 상해전역 이래 최대규모였죠. 쌍방 모두 그야말로 사활을 건 것이었습니다.  

 

북지방면군 제2군(제5사단, 제10사단)이 가장 먼저 태아장 북쪽와 북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하여 4월 19일 기주를 총공격하여 점령합니다. 이어서 기하(沂河)을 도하하지만 이종인은 이에 대해 6개 사단으로 포위하였고 20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죠. 여기에 대해 일본 제2군은 제16사단을 증원합니다. 

 

당초 대본영이 "전선 불확대" 방침을 정한 것은 병참의 문제와 부대를 재정비하기 위함이었는데 현지 부대의 성화에 못이겨 서주 작전을 승인하지만 정작 현지 부대들은 제대로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중지방면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거의 한달후인 5월 5일에 와서야 가능했고 북지방면군 제1군 역시 5월 7일부터 개봉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제대로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작전을 했고 한달이나 지연되었음에도 공격부대들은 진격과정에서 탄약과 식량 부족으로 허덕였습니다. 이때문에 서주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본래의 목적인 중국군 섬멸에는 완전히 실패하였죠. 

 

한편,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자 5월 1일 장개석은 "서주 남쪽에 병력을 집중할 것"을 재차 명령하였는데 여기서 이종인의 방어전략이 다소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세찬 교수는 "중일전쟁기 국민정부군의 대일군사전략 변화"에서 5월 12일 이종인이 예하 부대에 군사위원회의 명령을 전달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레이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는 그가 장개석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력을 남쪽으로 전환하는 대신 북쪽의 방어선 강화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집하는 바람에 서주전역에서 패배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종인이 5월 1일에 "남쪽의 적을 공격해 각개격파하라"는 명령을 재차 하달받고도 5월 12일에야 예하 부대에 전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중국군이 공세를 취했다는 자료는 없습니다. 게다가 3일후에는 서주 포기 명령이 내려져 서쪽으로 후퇴하기 급급해지죠. 

 

중국군은 북쪽에서 남하하는 일본 제2군을 저지하는 동안, 남쪽에서는 중지방면군에 의해 부녕과 노주가 함락되었고 서쪽에서는 일본군 제14사단이 5월 12일 황화 동안으로 도하하자 중국군 전체가 서주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합니다. 따라서 점차 상황이 심각해지고 일본군의 규모가 당초 예상을 초월하는 대병력인 것을 확인하자 5월 15일 군사위원회에서는 이종인에게 서주를 포기하고 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중앙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이종인은 전병력을 5개(노남, 농해, 진북, 진남, 소북)으로 나눈후 개별적으로 일본군을 피해 서쪽으로 후퇴시키고 장자충의 제59군이 이들의 철수를 엄호토록 합니다. 이는 상해전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기동성과 제공권에서 열세한 중국군이 한꺼번에 뭉쳐서 철수할 경우 되려 혼란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고려해 분산 기동시킨 것이죠. 일본군은 농해철도를 폭파시켜 중국군의 퇴로를 재빨리 차단하려고 했지만 중국군의 저항이 워낙 거센데다 우군끼리의 협조 부족과 병참의 한계로 차단에 실패합니다. 여기다 난봉을 점령한 제14사단은 중국군 제1전구의 협격을 받아 되려 12개사단에게 포위되어 괴멸직전에 몰리죠. 장개석은 이들을 아예 전멸시킬 것을 명령했으나 제16사단이 이들을 구원하러 온 덕분에 제14사단은 간신히 전멸을 모면하였습니다. 일본 대본영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1군 사령관 카츠키 키요시 중장을 해임합니다. 그는 본토로 송환된후 강제 예비됩니다.  

 

일본군 제13사단은 5월 17일 서주 남서쪽의 패왕산을 기습하여 장자충군 제21사단을 격파하고 점령합니다. 5월 19일에는 제13사단 산하 제65보병연대와 전차대대가 서주성으로 돌격하지만 중국군은 철수하여 이미 성은 비어있었죠. 

 

 

 

대본영은 현지부대에게 병참을 이유로 난봉에서 더이상 서진하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이종인군을 계속 추격하여 제14사단이 6월 5일 개봉을 함락시킵니다. 이때문에 정주마저 위험해지자 장개석은 6월 9일 정주 동북쪽에 있는 황화강의 제방을 폭파시킵니다. 마침 큰 비까지 내려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서진중이던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6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더이상의 진격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로 인해 5만 4천 제곱km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에서 2천여개의 촌락이 수몰되었고 1천만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황하강의 범람으로 수몰된 마을. ※ 사진출처 : 도해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서주 전역에서 쌍방은 유례없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일본이 "봉천회전이래 최대의 혈전"이라고 평했을만큼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중국군은 서주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철수하였습니다. 레이황은 "서주 전역의 패배는 전적으로 이종인의 오판과 실수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그가 워낙 "장개석빠"다보니) 이것은 부당한 것이며 오히려 남북으로 협공받는 상황에서 이종인은 병력을 신속하게 기동하여 피해를 최소화한 것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일본군이 8개사단, 4개 여단 20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한 상황에서 아무리 숫적으로 3배정도 우세하다해도 쌍방의 화력을 고려한다면 단지 머릿수의 우세만 믿고 각개격파를 노린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한 소리이죠.(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탕은백의 제20군단조차 일본군 1개 보병사단 정도의 전투력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어물거렸다면 기동성과 제공권에서 월등히 열세했던 중국군은 손쉽게 포위 섬멸되었을 것입니다. 

 

  

 

중국군의 피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대략 총병력의 1할정도(5만~6만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태아장전투를 비롯해 2월부터 6월까지 약 3개월간의 서주 전역 전체의 피해를 말하는 것인지 철수과정에서 입은 피해만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해전역을 비롯해 이전의 작전에서 중국군이 입은 피해에 비한다면 이종인의 철수 지휘는 명백히 성공적인 것이었습니다.(비록 많은 장비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한편, 일본군은 서주 전역 전체에서 약 4만3천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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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8.04 일본군 사단과 중국군 사단은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일본군 1개 사단은 보통 20,000에서 25,000명인데 반해 중국군 1개 사단은 보통 8,000~11,000명 수준입니다. 장비도 일본군은 현재 기준에서는 미흡하지만 나름대로 포병과 기병등 지원 부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중국군은 사단 안에 중기관총을 제외하면 거의 포병 전력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포병의 숙련도도 차이가 나서 더 큰 화력의 차이를 가졌죠. 그리고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일본군은 제공권과 함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의 차이는 더 커집니다. 그리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장교의 차이도 크죠. 마치 한국전쟁에서 2,30대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군 위관이나 영관급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8.04 고문관들보다 군사적 식견이나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중국의 군관학교와 일본의 사관학교는 그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 답댓글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8.05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과 비교라도 할 만한 나라가 없었던 듯...
  • 작성자이 지옥같은 행성 | 작성시간 13.08.02 몰아서 보면 재미있겠지만, 정작 집에 가서는 딴거 하게되는... 나중에 다시 볼게요. ㅜㅜ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8.02 2천으로 십만에 꼴아박는 일본군이 멍청한건지...

    일본군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중국군이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한건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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