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정했던 불확대방침을 깨고 중국군 주력을 격멸하겠다는 이유로 서주를 공략하여 3개월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점령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일본군의 희생과 물자 소모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주된 목적이었던 중국군의 포위섬멸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중국군 제5전구 주력은 이종인의 지휘하에 서쪽으로 탈출하여 비록 많은 장비를 상실했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정주와 무한방면으로 600km를 후퇴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무한북쪽에 있는 대별산맥에서 병력을 정비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중국군은 중국의 중심부인 무한방어를 위해 이 일대를 새로 제9전구로 설정하는 한편 무한 주변에 약 60~90개사단 60~70만명을 집결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대본영은 서주공략이 끝나자말자 그동안 병참을 이유로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던 무한공략계획을 다시 추진키로 결정하였으나 무한의 전략적 가치와 중국군의 방어실태를 고려할때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내 동원가능한 모든 병력을 무한공략을 위해 전용하는 한편,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원합니다. 이에 따라 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선포하여 적령층을 대상으로 대거 징집하였고 새로이 편성된 사단은 총 10개 사단(제15, 제17, 제21, 제22, 제23, 제27, 제104, 제106, 제110, 제116, 제111)에 달했습니다. 이중 2개사단(제 23, 제104사단)은 관동군의 보강을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나머지 8개 사단은 중지나방면군에 편성합니다.
7월 4일에는 대본영에서 중국전선에 배치된 부대의 편제를 재정비하여 원래 북지나방면군에 속한 제2군을 중지나방면군에 배속시키고 새로이 제11군을 창설하여 아래와 같이 재편성합니다.
무한전역당시 중지나방면군 전투편제(사령관 : 하타 슌로쿠 대장)
- 제2군 : 제3사단, 제10사단, 제13사단, 제16사단, 병력 약 17만명
- 제11군 : 제6사단, 제9사단, 제27사단, 제101사단, 제106사단 병력 약 20만명
- 군직할 : 제15사단, 제17사단, 제18사단, 제22사단, 제11사단 병력 약20만명
작전목적은 서주회전과 달리 중국군의 포위섬멸 대신 무한지역의 점령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습니다. 작전중 중국군을 가능한한 많이 격파하여 적의 전력을 소모시키되 장개석의 총사령부가 있는 한구를 점령한후에는 병참의 부담과 병력의 분산을 고려해 점령지를 최대한 축소시킨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지파견군을 중심으로 대병력을 집중시켜 본격적으로 무한 공격을 시작하려는 바로 이때 만주에서 소련과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납니다. 바로 장고봉사건(러시아는 "하산호전투"라고 부름)이었습니다.
만주와 시베리아의 국경선에 대한 분쟁의 역사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청과 제정러시아간의 무력 충돌은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일단락되었으나 청나라가 기울면서 러시아는 청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들어가는데 2차 아편전쟁으로 영,프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된후 러시아는 청을 압박해 "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우수리강 동쪽 40만제곱km에 달하는 영토를 할양받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양국의 국경선은 당사국들이 몰락한후에도 이어져 만주국 건국 당시에도 그대로 묵인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조약과 협정은 조문이 구체적이지 않아 애매한 부분이 많고 해석하기 나름인데다 1천km가 넘는 광대한 국경선에 대해 세세한 곳까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분쟁의 소지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국경선이 가장 불명확한 지역은 흑룡강성의 동남쪽의 흥개호(러시아어로는 한카호)부터 두만강에 이르는 600여km의 동부지역과 외몽고와 접한 서북부의 호륜페이 초원지대였습니다.
33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국내 안정과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기에 극동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본 역시 만주국의 수립과 안정에 주력하였고 이 기간에도 쌍방의 국경충돌은 종종 발생했지만 국경을 순찰하는 경비대간의 사소한 총격사건이나 월경같은 소규모 분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35년부터 쌍방의 무력 충돌은 점점 확대되고 그 횟수도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31년~34년까지 152건이었던 것이, 35년에는 136건, 36년에는 203건에 달하였습니다.4 출동하는 병력도 소수의 순찰대가 아니라 정규사단과 기계화부대, 해공군까지 동원되어 전투가 벌어졌고 대표적인 예가 노구교사건 직전에 있었던 "간쨔즈섬(乾岔子島)사건"이었습니다.
간쨔즈섬은 만소 북쪽국경을 지나는 흑룡강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으로, 쌍방은 서로 자기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측이 이 섬에 만주국 경찰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륙시키자 소련이 외교적으로 항의하였으나 묵살당하자 6월 19일 20여명의 병력을 이 섬에 상륙시켜 이들을 쫓아내고 일부는 억류합니다. 이에 대해 관동군과 만주군이 병력을 급파하여 대치하자 소련군은 다음날 추가로 포함 1척과 경비정 1척, 30명의 병력을 상륙시켜 진지를 구축합니다. 상황이 점점 험악해지자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별 가치도 없는 이 작은 섬 하나때문에 소련과 전면전이 발발해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현지부대에 불확대방침 및 공격금지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외교교섭을 통해 처리키로 합니다.
그런데 본국의 소극적인 자세에 반발한 관동군은 이 명령을 임의로 묵살하고 독단적으로 공격명령을 내려 30일 오후 전투가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소련군 포함 1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 1척은 도주합니다.5 사실상 소련군의 패배였죠. 그러나 소련은 사태 확대를 막기 위해 7월 4일 모든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서 상황은 더 확대되지 않고 일단락되었지만 이로 인해 양측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쌍방은 병력을 대규모로 증강시키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37년 11월 6일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방공협정이 체결되자 일소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일촉즉발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38년 당시 바실리 블류헤르원수가 지휘하는 소련의 극동군의 규모는 20개 저격사단, 4~5개 기병사단, 전차 1500량, 항공기 1,560대, 병력 37만명에 달했으며6 여기에 대해 관동군의 전력은 조선군과 만주국 괴뢰군까지 합해도 그 절반정도에 불과할만큼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중국전선의 확대로 만주에 대한 병력 증강도 쉽지 않았습니다.
현재 한중러 삼국의 접경지대에 있는 장고봉은 두만강 하구 맞은편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발 149m의 고지로 나진항이 내려다보이는 군사적 요지이기는 했으나 딱히 전략적으로 반드시 확보해야할만큼 가치있는 요충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소속과 경계가 매우 모호하였고 서로 자기 지역이라며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건직전까지만 해도 특별히 쌍방이 이 부근에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진지를 구축하는 등의 직접적인 분쟁은 없었고 주목될만한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두만강 건너편에서 왼쪽이 장군봉, 오른쪽이 장고봉이라고 합니다.
※ 사진출처 : http://www2u.biglobe.ne.jp/~akashids/ryokou/choukohou/mokuji.html
그런데 38년 6월 13일 소련 NKVD(내무성 인민위원회, KGB의 전신) 최고위 고위간부인 겐리히 류시코프의 망명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소련 동부지역에서 소위 외국적이고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연해주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대거 이주시키는데 주도한 장본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겐리히 류시코프(1900~1945)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숙청될 위기가 처하자 그는 만주국 국경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소련측은 급히 국경지대의 경비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7월 6일 일본군 감시병들이 장고봉에 수명의 소련군 기병이 갑자기 나타나 고지를 점거하고 진지를 구축한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에 대해 당초 일본군 참모본부는 소련군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상황을 계속 주시하되 규모가 작아 별로 대수롭지는 않다고 판단합니다. 또한 두만강일대를 맡고 있는 조선군 제19사단 제75보병연대장 사토 고도쿠 대좌 역시 이 문제는 외무성에서 해결할 일이지 무력을 사용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문제는 관동군이었는데,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러시아는 약점을 보이면 반드시 쳐들어온다. 장고봉은 명백한 일본의 영토이며 조선군이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면 관동군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전문을 조선군 사령부로 보냅니다. 이런 도발적인 전문은 조선군으로서는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였죠. 이에 따라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 대장은 "외교교섭으로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되 그래도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라고 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냅니다.
한편, 일본참모본부 작전제2과장인 이나다대좌는 장고봉의 소련군에 대해 위력정찰을 명분으로 국지적인 전투를 벌일 계획을 수립합니다.8 당시 일본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일본군의 주력이 중국 대륙 깊숙히 진격해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소련이 중일전쟁에 직접 개입하여 중국군과 연합하거나 만주를 침공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것인데 일개 대좌의 발상치고는 상당히 위험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해당 지역이 협소하여 큰 전투로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막연한 예측만으로 낙관하였으나, 만약 예상외로 소련이 이를 명분삼아 확전을 할 경우 국력과 병력에서 절대 열세인 일본으로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었죠. 특히 한반도에서는 서울에 주둔한 제20사단이 중국전선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단지 제19사단만 남아 있어 소련군이 이들을 격파하고 서진할 경우 속수무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나다는 장고봉에 대해 소련군이 투입할 병력은 많아야 3~4개 사단일 것이며 장고봉 주변에 진흙과 연못이 많고 지형이 험하여 전차와 같은 기계화부대는 투입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이 투입할 병력은 조선군 산하 1개사단(제19사단)으로 제한하고 전차와 공군은 투입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 육군이 장고봉을 점령하면 이후에는 즉시 병력을 철수시키고 정부가 나서서 외교수단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이런 낙천적인 사고는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과정에서의 경험때문으로, 당시 일본군은 소련군을 제정 러시아군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오합지졸로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월 15일 장고봉 동남쪽 52고지를 순찰중이던 일본군 헌병대가 소련군의 총격을 받아 그 중 한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허둥지둥 도주합니다. 일본은 소련군이 만주국 영내로 월경하여 공격했다고 주장했고 소련은 반대로 일본군이 소련 영내 30m 들어왔기에 사살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사살된 병사의 시체에서 국경지대를 찍은 사진기와 정찰일기 노트를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섰고 긴장관계는 더욱 고조되어 소련군은 전차부대를 비롯해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정찰기가 만주국 영내로 접근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국경지대의 주민들에 대해서도 모두 후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양측의 외교협상 역시 서로의 요구사항만 앵무새마냥 반복할뿐 7월 20일 사실상 결렬됩니다.
장고봉 고지 정상에서 반대편을 감시중인 소련군. 당시 상황을 삽화로 그린 모양입니다.
※ 사진출처 : http://mnd-nara.tistory.com/689
이런 상황에서 이나다대좌는 당연히 상부의 허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상부의 승인과 함께 즉시 행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고 자기 마음대로 조선군 사령부에 전문을 보냅니다. 이에 따라 7월 16일 조선군사령부는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제19사단에 대해 두만강일대로 병력을 집결시켜 공격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합니다. 18일에는 선봉부대 3,236명과 말 743필을 배치하여 공격준비를 마쳤고 전방의 소련군은 병력 400명에 야포 2~3문정도로 판단하였습니다. 사단장 오다카중장은 "20일~21일중 제75보병연대를 앞세워 야습을 할 계획"이라고 상층부에 보고합니다.
사토 대좌는 장고봉 서쪽 800m에 있는 장군봉을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냅니다. 공격은 20일밤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개시할 계획이었으나 그 직전에 참모본부에서 확전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별도의 명령이 있을때까지 일단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중국전선에 병력의 70%이상을 투입한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가치도 없는 작은 고지하나때문에 국운을 거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다는 판단이었죠. 히로히토 천황 역시 소련과 본격적인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해 작전을 중지하고 외교로 해결할 것을 직접 지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제19사단은 마지못해 일단 원대복귀하기는 했으나 사단 참모들은 불만이 많았고 사토 연대장은 독단적으로 1개 중대로 장고봉에 인접한 장군봉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장군봉에 90명을 배치하고 사초봉에 30명을 배치하여 소련군과 대치합니다.
이런 출동은 명백히 명령 불복에 해당하는 것임에도 사토 연대장은 상층부에 공격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아니며 연대장의 권한으로 순찰과 정찰목적으로 두만강 맞은편에 배치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오다카 사단장은 이를 묵인하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력부대는 29일까지 원대복귀를 완료합니다.
사토 고토쿠(1893~1959) : 임팔작전당시 제31사단장으로 무다구찌와 대립하고 독단적으로 후퇴를 결정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당시 그는 무다구찌의 무능함을 격렬하게 비난했으나 사실 본인 역시 무능하고 용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영국군측은 "최고의 아군"이라며 그의 사령부를 공습하는 것을 중지시킵니다. 장고봉에서의 용전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으나 임팔작전으로 무다구찌와 함께 군인으로서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최종계급은 중장.
이렇게 상황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소련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는 사초봉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제40사단에 국경지대의 병력 보강과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고 2개 대대를 파견합니다. 일본군 제19사단이 거의 철수를 완료하고 있었던 29일 오전 9시 사초봉 서쪽에서 1개 소대규모의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제76 국경수비대 대장인 센다중좌는 소규모의 소련군이 국경을 침범했으며 이들을 공격해 격퇴할 것을 오다카사단장에게 상신하였고 사단장은 승인을 하되 이들을 격퇴한후 즉시 철수하여 분쟁을 확대시키지 말것을 지시합니다. 여기에 대해 일부 참모는 "소규모라도 일단 병력을 출동시키는 이상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사단장은 "적이 국경을 침범한 것에 대해 조치하는 것은 사단장의 임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대일본제국의 위신이 손상되며 대중정책에도 영향이 갈 수 있으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어 도리어 전면전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29일 오후 1시 센다중좌는 2개 중대를 동원해 소련군의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소련군 역시 이에 대항해 주변에서 기병과 보병을 증원하고 수대의 전차까지 투입하자 센다중좌는 사단장에게 보고하여 급히 병력을 증원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당일 저녁 제75연대가 열차로 급히 증파됩니다.
그리고 21시 20분, 뒤늦게야 제19사단은 서울의 조선군 사령부에 "장고봉사건과는 별개로, 적의 불법 도발로 인해 제75보병연대의 귀환을 중지하고 국경지대에 전진배치하여 월경한 적과 전투중임. 모든 책임은 사단장이 직접 지겠음."이라고 보고합니다. 이것은 병력 사용에 대한 정상적인 승인절차를 완전히 무시한채 독단적으로 행동한 주제에 사후승인을 요청하는 것이었죠. 당시 고이소의 후임으로 신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나카무라 고타로 대장은 그러나 "부득이한 조치"라며 사단장의 조치에 동의한다는 전문을 보냅니다. 당시 조선군 사령부의 스치야 중좌는 훗날 "제1선 부대의 지휘관에게 국경의 수비를 위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제19사단은 겉으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고서 막상 사단장 단독으로 행동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왜 사전에 상부와 논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며 현지부대들이 국가와 군의 방침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분위기에 대해 비판합니다.
게다가 조선군 사령부는 현지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현지부대의 보고에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지휘의 혼선과 무능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게 됩니다. 조선군 사령부에서는 제19사단에 "장군봉과 사초봉 주변의 소련군 진지를 공격해 장악하되 무력행사는 소련군이 공격하는 부득한 경우에만 자위로 행하고 그 외는 별도 명령에 따를 것"이라고 지시했으나 정작 제19사단은 이 명령을 제75연대에 전달하지도 않았고 제75연대의 구체적인 공격계획에 대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오다카사단장은 상부에 보고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소련군을 공격할 호기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이유였죠.10
30일 저녁, 연대장 사토대좌는 사방의 관측이 용이한 장군봉 정상에 지휘소를 설치한후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공격태세를 갖춥니다. 또한 오다카 사단장 역시 이들의 지원을 위해 산포부대와 기병, 통신부대 등을 현지로 증원시킵니다. 사토대좌는 장고봉을 공격목표로 삼아 야습을 하기로 했는데, 야습은 메이지이래 일본군이 자랑하는 특기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공격은 밤 10시 30분부터 시작되어 350명 규모의 대대병력이 장고봉 서남쪽에서부터 진격하기 시작하여 그들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전날 내린 비로 진창이 된 길을 건너 밤 11시 30분경에는 소련군 전방 150m까지 진출합니다. 이들이 철조망을 끊고 소련군 진지로 천천히 접근하자 31일 새벽 2시 30분 이들을 발견한 소련군이 사격을 개시합니다.
치열한 전투끝에 새벽 5시 15분, 일본군은 소련군을 격퇴하고 장고봉 점령에 성공합니다. 3시간 가량의 전투에서 쌍방의 피해에 대해서는 일본측은 전사 45명, 부상 133명, 소련군에 대해서는 600여명의 사상자와 전차 17량을 파괴했다고 주장한 반면, 소련측은 전사 13명, 부상 55명과 전차 1대가 파괴되었고 일본군에 대해서는 4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장고봉을 빼앗긴 소련군은 전차와 포병을 비롯해 3천명으로 증강하여 장고봉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또한 포병을 동원해 두만강 반대편을 포격하고 항공기 130대를 동원해 경흥, 증산, 고성 등 두만강 접경의 조선땅과 철도를 폭격하였습니다.12
소련공군에 의해 폭격중인 장고봉.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소련군의 공격은 8월 1일부터 수차례 계속되었는데, 맹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사토 연대장은 지형을 이용해 진지를 어떻게든 사수합니다. 소련군으로서는 지형적인 불리함과 협소함으로 정면공격만 가능하였고 대병력을 전개하기도 어렵고 우회하는 것도 불가능한데다 비로 인해 진창으로 변해 전차 역시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장고봉을 향해 진격중인 소련군 전차부대.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사토대좌는 소련군의 병력이 점점 증강되고 포병 화력도 강력한데다 이들의 사거리가 일본군의 산포를 능가하여 사거리밖에서 일방적으로 쏘고 있어 매우 불리하다며 열차포병 1개 중대, 90식 야포 중대 등 포병의 대규모 증원을 급히 요청합니다.13 게다가 압도적인 병력으로 일거에 공격해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라며 우려하였습니다. 오다카 사단장은 이에 따라 고사포부대와 포병을 대거 현장으로 급파합니다. 대본영에서도 관동군 제104사단의 급파를 명합니다.(이들은 훈춘에 도착했으나 현지에 투입되기전 전투가 끝나 실제 전투에 참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공군에 대항하기 위한 비행대의 투입은 거부합니다.
이 분쟁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쌍방은 8월 4일부터 정전협의에 들어가는데 소련측은 1886년 청과 러시아간 체결된 혼춘밀약에 따른 국경선밖으로 일본군이 먼저 철수한다면 소련군도 전투를 중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하게 나섭니다. 결국 8월 11일 모스크바에서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과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는데 11일 정오를 기해 쌍방은 전투를 중지하며 일본군은 현재의 선에 1km 후퇴하고 소련군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합니다. 어쨌든 장고봉은 지켜냈으므로 전술적으로 패배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전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사실상 백기든 셈이었죠. 정전협정에 의해 일본군은 장고봉에서 서쪽으로 철수하였고 장고봉은 양측의 공백지역으로 남게 됩니다.
이 전투는 러일전쟁이래 일본이 처음으로 열강과 붙은 사단급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쌍방은 각각 2만여명을 투입하였고 사상자는 일본군 전사 526명, 부상 914명, 소련군 전사 236명, 부상 611명, 전차파괴 96량, 비행기 격추 3대였습니다.(이 전투에서의 정확한 사상자 집계는 여전히 없으며 일본 위키에서는 일본군 전사자 526명, 부상자 914명에 대해 소련군 전사자 792명, 부상자 2,752명으로 소련군이 훨씬 많았다고 주장합니다.)
쌍방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고 특히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자신들의 전술과 교리상의 다양한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특히 지적된 문제점이 일본군의 전통적인 교리상 기습할때는 적의 진지에 도달할때까지 절대 사격을 금지하고 있으나 강력한 화력을 지닌 적 앞에서는 큰 희생만 강요당할 수 있다는 것, 포병력의 증강이 절실하다는 것, 야습은 장교들의 희생이 너무 커 함부로 실행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실제로 제75보병연대는 공격에 참가한 장교의 25%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지휘계통과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무시한채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관행에 있었습니다. 병력 출동에 대한 최종 권한은 대본영과 천황에게 있었으나 일선 지휘관들은 이것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를 군법으로 다스려야할 상층부 역시 대충 묵인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천황과 대본영, 참모본부에서는 무력 대신 외교로 해결하기로 방침을 정했음에도 참모본부 작전제2과장 이나다대좌, 제19사단장 오다카중장, 제75연대장 사토 대좌, 제76 국경수비대 대장 센다중좌 등 관련된 지휘관 모두 이 방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한채 마음대로 전횡하였고 충분한 준비도 없이 마치 "불장난"하듯 무턱대고 공격을 개시하여 막대한 사상자만 낸채 결국 이득없이 물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당초 한낱 "위력정찰"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시작했다가 겆잡을 수 없이 전투가 확대되어 제19사단은 총병력의 22%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사건을 축소하기 급급했고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역시 여전하였습니다. 소련군은 장고봉 주변의 지형적인 협소함과 진창으로 전차를 운용하기 어려웠고 포병의 사격 역시 지형적인 문제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인데, 이를 소련군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였고 소련군의 중전차에 대해서도 "별거 없더라"는 식의 소문이 퍼집니다. 더욱이 관동군은 장고봉사건에 대해 "우리가 나섰다면 훌륭하게 해치웠을 것"이라며 우쭐댈 정도였죠.
이렇듯 상대의 실력을 절실하게 깨닫고 대비하기보다 근거없는 자신감과 우쭐대는 자세는 변함없었고 소련과의 분쟁 역시 도처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벌어집니다. 그러다 10개월후인 39년 5월부터 8월까지 벌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소련군의 하산호 전투 승리 기념탑. 소련군은 이겼다고 선전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고봉 탈환에 실패했기에 어쨌든 전술적으로는 소련군의 패배였습니다.(물론 외교 협상을 하지 않고 계속 전투를 했다면 소련군이 탈환하는데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스탈린은 류시코프의 망명과 장고봉에서의 지휘 실패를 이유로 바실리 블류헤르원수를 극동군 사령관에서 해임하였고 10월 22일 일본 스파이로 몰아 그를 체포합니다. 블류헤르는 NKVD에 의해 심한 고문을 받은후 11월 9일 비밀재판을 거쳐 총살당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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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튜튼 작성시간 13.08.04 미국이 소련군의 기갑 웨이브를 우려해서 유럽에 핵미사일을 배치한것도 '사기'라고 생각하시는듯..
뭐든지 자신의 분야가 아니면 수박 겉핥기 수준이죠. ㅎㅎ -
답댓글 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3.08.04 솔까말 러일전쟁 때도 러시아가 전력을 다해 밀어붙였으면 일본은 못 이겼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치를 돈도 죄다 영국과 미국한테 빌려온 거였고, 일본 해군의 전함들도 대부분 영국제를 수입해다 썼고, 결정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사망한 병사 숫자는 일본이 러시아보다 많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의 막바지를 장식한 8월의 폭풍 작전 때도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완승을 거두었죠.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러시아? 그까짓 못사는 빨갱이 나라 따위 알아서 뭐하냐?"라고 생각하고 있죠. 도올 선생도 그 범주에 들어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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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Aetius 작성시간 13.08.04 문제라면 자신의 분야가 아닌데도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단정짓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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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지옥괭이 작성시간 13.08.05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교육받던 사람들은 구할수 있는 자료가 한정되는데, 7,80년대만 해도 소련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다 서방측의 시각으로 작성된 것들 뿐이라서
그당시에 대개의 경우에 저럴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같은 것도 무능하고 악랄한 구소련군을 때려잡는 미국의 모습을 그린 람보 같은 영화가 압도적이었죠 -
작성자centurion 작성시간 13.08.17 600Km후퇴라... 역시 대륙스케일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