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오후 5시 30분. 야마모토는 진주만을 항진중인 나구모 기동함대를 비롯한 제일선에서 대기중인 전 일본 함대에 전문을 타전합니다. "新高山ノボレ(니가타산에 올라라) 1208"
※ 참고로, 니가타산은 현재 대만의 玉山으로 해발 3,952m에 달하는 동북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을 따서 암호명으로 쓴 것이죠. 작전중지명령은 "ツクバヤマハレ(쓰쿠바산은 맑음)"
일본시간으로 12월 8일 새벽 1시 30분(현지시각으로 12월 7일 오전 6시).
나구모 기동함대는 하와이 오하후섬 북쪽 370km 떨어진 곳에서 전투대형으로 전개를 마칩니다.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려 있다."
나구모의 훈시와 함께 후지타중좌가 인솔하는 공습부대 제1파 183대가 6척의 항공모함에서 일제히 발진하였습니다. 한편, 같은 시각 남방총군 휘하의 선봉인 다쿠미 지대가 영국령 말레이 코타발에 상륙합니다.
일본시간으로 새벽 3시 25분(현지시각으로 7시 55분).
진주만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일본기들은 무방비상태로 정박중이었던 미태평양함대에 어뢰와 폭탄을 퍼부었고 현지민들과 승무원들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으며 1시간 45분간의 일방적인 공습이 끝났을때 미태평양함대는 완전히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습니다. 188대의 항공기가 격파되고 159대가 손상을 입었으며, 4척의 주력전함이 격침, 4척이 반파되는 등 18척 군함이 격침되거나 손상을 입었습니다. 전사자 2,403명, 부상자 1,178명이었습니다. 일본의 피해는 항공기 29기와 잠수함 1척, 특수잠항정 5척을 상실했고 사상자는 100여명 이내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 3년 9개월간 이어지는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죠.
공습으로 불타는 진주만과 침몰중인 전함 캘리포니아(나중에 인양하여 전선에 복귀하였음)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0년 5월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시작으로, 극동에서도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 삼국 추축동맹과 일소 불가침 조약 체결, 독일의 소련 침공, 미일교섭 실패, 대미개전의 결정, 그리고 진주만 기습까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처럼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왜 태평양전쟁은 일어났는가. 미국은 왜 일본의 남방침략을 묵과할 수 없었으며, 양국의 교섭은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일본은 전쟁을 선택하면서 승리에 대한 계산은 있었던 것인가.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과연 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 일본 군부의 무모한 야심 탓인가, 아니면 미국의 경제제재가 일본을 벼랑끝으로 몰아 부득이하게 전쟁을 택할 수 밖에 없도록 조장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후 상황과 전개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주사변이래 일본의 거듭된 중국 침략, 그리고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이후에도 미국은 여기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하거나 일본을 견제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0년대 전반에 걸쳐 중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대규모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것은 독일과 소련이었습니다. 더욱이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최대 2천여명에 달하는 의용비행단까지 파견하며 사실상 대리전쟁을 치룬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독일의 협력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는데, 재군비에 절실하게 필요한 텅스텐, 안티몬 등 전략물자를 수입하는 대신(중국 생산량의 90%이상을 수입함으로서 사실상 독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군수품과 정밀기계를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소련은 중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함으로서 극동에서의 위협을 분산시키겠다는 안보적인 목적이었죠.
반면, 미국은 만주사변 당시 일본의 침략행위를 도의적인 차원에서 비난했을뿐 국제연맹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에는 반대하였고 단지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권고만 함으로서 중국을 실망시켰습니다. 심지어 33년 6월 미국 외무장관이었던 넬슨 존슨은 "일본의 만주침략은 미국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일본이 필요한 물품이나 기계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20~30년대의 미국은 국내적으로는 대공황의 극복, 대외적으로는 유럽문제가 우선이었습니다. 23년 8월에 발효된 워싱턴해군군축조약이 일본 군부내 일부 강경파들의 분노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미국으로서는 더이상 소모적인 해군 경쟁에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되었죠. 과거 먼로대통령이 "먼로주의"를 선언했을때처럼 1차대전후 미국은 철저한 고립주의로 회귀하였고 군대는 대폭 축소되었으며 국내 여론의 대다수는 "反戰"이었습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극도로 침체되자 이런 분위기는 더욱 심화됩니다. 그들에게 유럽이나 아프리카, 극동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주밖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심지어 1940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때조차도 미국 국민들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단지 7.7%만이 "즉시 참전"에 동의하였고, 40%는 "어떤 경우에도 참전해서는 안된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35년에는 미의회에서 제1차 중립법이 통과됩니다. 이것은 교전국에 대해서는 무기를 판매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디오피아를 침공중인 이탈리아에게 석유를 판매했고 중일전쟁 역시 국제법상 "전쟁"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중국, 일본 양쪽에 군수품과 석유, 자재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립니다. 만약 미국이 이 시점에서 침략국들에 대해 강력한 경제제재와 금수조치를 주도했다면 이탈리아나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미국은 이들 국가들과 당연히 심한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약소국들을 위해 굳이 그런 리스크를 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당시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시안적이고 자국 이기적인 사고에 대해 미국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당시 백악관의 주인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였습니다. 그는 만주국 승인을 거부하였고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37년 10월 6일에는 의회연설에서 일본의 침략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수동적인 정책은 결코 침략국을 억제할 수 없으며 강력한 경제제재를 통해 전쟁확대를 방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여론은 여전히 냉담했고 의회의 다수는 전통적인 고립파들이었습니다.
미국 제32대 대통령이자 1933년부터 뇌출혈로 급사하는 45년까지 무려 12년간 집권하여 미국 역대 최장기 집권자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대공황의 여파에다 전통적인 고립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국론을 하나로 모아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탁월한 식견과 강력한 리더쉽 덕분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따라서 37년 12월 양자강에서 일본 항공대의 폭격으로 미해군 포함 파나이호가 격침되어 다수의 사상자를 냈을때도 중국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대신 단지 외교적인 항의를 통해 적절한 선에서 보상금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일본이 태평양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면 미 해군이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38년 1월 "해군확장법"을 통과시켜 대규모 함대 건조를 착수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군비 증강은 매우 완만했으며 38년도 국방예산은 일본의 65%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유럽에서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뮌헨회담에서의 협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히틀러가 체코의 남은 지역을 무혈 합병합니다. 이 과정에서 체코는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영, 프의 압력으로 제대로 일전한번 못한채 나라를 잃어야 했습니다. 즉, 19세기식 밀실회담에 의한 유화정책이 이들 국가들의 팽창 야욕을 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간접적으로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였죠. 여기다 독-이-일 삼국방공협정을 체결하고 39년 2월에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인접한 해남도를 점령하자 미국으로서는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연계하여 본격적으로 남진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라고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39년까지 미국의 대일 정책은 여전히 이중적이면서 소극적이었는데, 39년 4월 천진에서 일어난 친일파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 인도를 놓고 영국과 대립하면서 6월14일 일본군이 영국조계를 포위함으로서 영일 쌍방의 갈등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여기에 대해 영국은 미국이 함께 개입해 주기를 원했으나 일본과의 정면 충돌을 우려한 조지 마셜 참모총장과 그루 주일대사의 반대로 거부하였고, 당시 영국의 상황으로는 단독으로 일본과 대항할 수 없었기에 7월 23일 영국은 중국에서 일본군의 모든 활동을 인정하며 중국을 지원하거나 반일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크레이기-아리타 협정"을 조인함으로서 사실상 백기를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3일뒤인 7월 26일 일본과 사전협의없이 1911년 이래 유지되어온 미일통상항해조약에 대해 연장불가를 일방적으로 통보합니다. 물론 이것이 당장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나 보복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 외무성내 소장파들은 미국의 태도가 "매우 무례하다"며 주미대사를 즉각 소환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39년 11월 4일 노무라 기치사부로 외상과 그루 주일대사간의 제1차 국교조정 회담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그루대사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정에서 일본군의 무차별폭격으로 미국인 4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으며 막대한 재산상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 일본이 양자강을 봉쇄함으로서 수백만달러의 손실을 입는 등 미국의 권익이 제약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노무라는 개인적으로는 그루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일본 정부와 군부 강경파들이 "양보 불가"를 고수했기에 그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놓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어 1940년 1월 26일을 기하여 미일통상항해조약이 만료됨으로서 미국과 일본은 사실상 무조약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이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경제 제재나 무역 단절을 실행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조약의 폐기와 상관없이 일본과의 무역은 여전히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40년 7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겨우 12%만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일본을 제재해야 한다"고 대답했고 47%는 "일본이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어쨌든 일본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매우 큰 상황에서 루즈벨트 행정부로서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을 압박한다면 일단 국내 여론부터 악화될 것이 뻔했죠. 대신, 39년 10월 서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정박중인 미태평양함대를 40년 5월까지 하와이로 전진배치시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일종의 무언의 압박인 셈이었죠.
태평양전쟁 발발전 미태평양 함대 주력이 정박하고 있는 진주만의 모습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sienic777/60008244355
40년 5월 10일 새벽, 독일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전격 침공함으로서 서부전역이 시작됩니다. 군사적으로 형편없었던 네덜란드군은 4일만에 항복하고 빌헬미나 여왕은 망명정부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을 계속 수행합니다.
네덜란드의 몰락을 이용해 일본은 5월 20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를 압박하여 석유를 비롯한 주요 전략물자의 판매를 보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양은 엄청난 것으로, 연간 석유 100만톤, 고무 2만톤, 보크사이트 20만톤, 니켈 15만톤, 고철 10만톤, 주석, 망간 등 사실상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대부분을 일본이 독점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또한 이 물자의 정상적인 수송을 감독하기 위해 일본인으로 구성된 특별팀의 상주를 요구합니다. 일본의 압력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식민정부는 일본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인 감독의 상주는 거부합니다.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압박하자 미국 국내에서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남방 침략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강하게 제기되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즉각 대일 석유금유조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것이 오히려 일본을 자극해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루즈벨트는 일단 경제제재 대신 네덜란드령 동인도 최대 석유기업인 스탠더드 바큠사와 비밀 교섭을 통해 대일 수출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도록 합니다. 물론 일본 역시 이런 사실을 파악하였고 미국이 끼어들어 일본의 권익을 훼방놓고 있다고 격분합니다.
왜 이 시점에서 일본은 중국에서 갑자기 동남아 침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는가.
만주사변 이래 일본은 만주와 중국 동부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만주국을 제외하고도 그 면적은 일본 본토의 약 3.5배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많은 인력과 물자를 쏟아붓고도 정작 일본 경제가 필요로 하는 석유나 고무, 구리, 주석과 같은 전략 물자는 없었습니다.(석탄과 철은 있었지만) 애초에 중국 침략 자체가 자원확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유럽 전쟁의 발발로 동남아에서 영, 프, 네덜란드의 방어력이 약화되자 군부 일각에서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잽싸게 동남아를 통째로 장악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룩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는 일본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이 정계와 군부, 재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40년 7월 27일 고노에 내각은 군부에서 제출한 "기본국책요강"을 승인하였고 "北防南進"과 "대동아신질서의 건설"을 향후 국가 방침으로 정하여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공식화합니다.
※ "대동아공영권"이란 원래 메이지시절 다루이 토키치의 "흥아론"이나 "대아시아주의"따위에서 시작되어 만주사변을 주도했던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는 "오족협화"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미야자키 마사요시는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일본을 맹주로 하는 자치국가들을 건설하자는 "동아연맹"을 주장합니다. 30년대말에는 보다 광의적 개념으로 동아시아에 동남아와 인도, 호주까지 확대하였고 40년 8월 1일 국무회의에서 마쓰오카 외상이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상투적인 단어로 "해방"이라는 말을 붙였을뿐 실제로는 히틀러가 제창한 나치 독일의 "생존권"이론과 다르지 않았으며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약탈과 독점을 정당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제국주의 일본이 주장한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영역. 말로는 "자유로운 정치적 독립"과 "권리"운운했으나 진짜 목적은 침략을 통한 영토 확장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점령지에서 철저한 약탈과 착취, 인권침해를 자행하였죠.
※ 사진출처 : http://heiwa.yomitan.jp/4/3253.html
일본의 이런 행동은 미국으로는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중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략하는 것은 동남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 영으로서는 당장 안보상의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는데다 이를 발판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영국령 말레이와 싱가포르, 필리핀, 괌 더 나아가 호주와 하와이, 심지어 미 서부지역까지 침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죠.
일본 제5사단이 9월 24일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입하였고 27일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추축동맹이 결성됩니다. 추축동맹은 37년의 삼국방공협정과는 달리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누가 보더라도 영, 미를 주적으로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단독으로는 미국과 대결할 수 없지만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한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테니 미국이 유럽에 우선순위를 두기 위해서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패권을 묵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사실 과거 러일전쟁 당시에도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이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함으로서 승리를 거둔 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제정러시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망각한채 독일, 이탈리아는 과대평가하고 영, 미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한 것이 그들의 최대 오판이었습니다. 더욱이 석유를 비롯해 주요 전략물자와 군수품 수입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간과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추축동맹 가입은 최악의 오판이었습니다. 조약을 주도했던 마쓰오카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독일의 승리에 편승해 가만히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이지 미국과의 전쟁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안이하고 어리석은 판단인지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은 일본의 팽창에 심각한 경계심을 품었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연대하여 이른바 "ABCD포위망"으로 일본을 고립시킵니다. 또한 점차 경제제재와 금수조치를 강화하여 일본을 전방위로 압박합니다. 더욱이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군부의 속셈은 마쓰오카와 달리 여차하면 독일과 손잡고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습니다. 1년뒤 병석에서 진주만 기습의 뉴스를 들은 마쓰오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측근에게 "3국 동맹의 체결은 일생일대의 실수다. 나는 무엇으로 천황께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삼국동맹은 그야말로 허울뿐인 무의미한 동맹이었는데,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면서 일본도 여기에 호응하여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이미 남방으로 방향을 정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고 반대로 일본은 독일에게 선박과 물자의 공급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부당합니다. 독-이-일 삼국은 전쟁기간내내 어떤 구체적인 전략적 협의도 없이 별개의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도대체 동맹을 맺은 이유조차 알 수 없었죠.
40년 10월 영국은 그동안 폐쇄했던 버마루트를 재개시킴과 함께 중국에 1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미국 역시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원조를 시작합니다. 극도로 피폐해진데다 외화부족으로 허덕이던 중국으로서는 삼국동맹은 그야말로 "할렐루야"나 다름없는 반면 일본은 스스로 제무덤을 판 격이었습니다.
41년 3월 11일 루즈벨트의 주도로 미의회에서 무기대여법이 통과됩니다. 물론 주요 수혜 대상은 영국이었지만 중국도 포함되었고 독소전쟁 발발후에는 소련도 추가되죠. 그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정식으로 적극적인 중국 원조를 약속하였다. 이것은 항전에 일대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즉, 중일전쟁이 더이상 중일 양국만의 전쟁이 아니라 본격적인 국제전쟁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한달후인 4월 13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마쓰오카와 몰로토프간에 일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또한 중국에는 큰 충격을 주었는데, 장개석은 소련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면서 더욱이 만주국에 대해 암묵적인 승인을 했다는 점에서 강한 불만을 표시합니다.(반면, 중공은 오히려 소련을 옹호함으로서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마쓰오카는 아예 추축동맹에 소련까지 포함시킬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을 극도로 불신했던 소련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5년 기한의 불가침조약만을 체결하였습니다.
마쓰오카 요스케(1880~1946) : 고향은 일본 야마구치현이지만, 어릴때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졸업할때까지 성장기 전부를 미국에서 보냈기때문에 스스로 "일본 제일의 미국통"임이라며 자부합니다. 일본으로 귀국후 외교관이 되었고 이후 만철 총재와 중의원을 지냈으며 제2차 고노에내각이 결성되자 외상에 임명됩니다. 그는 수렁에 빠진 중국전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통해 독일, 소련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추축동맹과 일소불가침조약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여 신중한 검토와 논의조차 없이 혼자서만 졸속으로 추진하여 측근들조차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라고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과 달리 국익에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게 되죠. 패전후 도죠와 함께 A급전범으로 기소되었다가 옥사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미국과 일본이 협상을 시작한 것은 41년 4월 16일이었습니다. 주일 미대사로 임명된 노무라 키치사부로는 미 국무장관인 코델 헐에게 일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1. 일본이 가입한 추축동맹은 순전히 방어적인 것이며, 독일이 현재 참전하지 않은 제3국(미국)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만 군사원조의 의무가 있음
2. 미국은 앞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이며 전적으로 자국의 방위만을 고려할 것
3. 미국은 만주국을 승인하고 왕정위정권과 통합을 전제로 장개석정권에 대해 일본과의 화평을 권고하며 중일 양국간 화평이 수립되면 일본군은 단계적으로 중국에서 철병할 것임
4. 미국은 미일통상조약을 부활시킬 것
5. 미국은 일본의 남태평양에서의 자원획득에 협력하고 필리핀의 독립을 공동보장할 것
간단히 말해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인정하고 여기에 대해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헐은 강력히 반발하고 미국의 교섭원칙 4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일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1. 모든 국가의 영토 및 주권을 존중할 것
2. 타국의 내정 불간섭 원칙 존중
3. 무역의 기회균등 원칙
4. 태평양에서의 현상 유지
한편으로 헐은 일본이 남방침략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철수하는 댓가로 "만주국"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형태의 양해안을 제시했으나 마쓰오카는 타협은 없으며 미국이 일본의 모든 요구사항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미일교섭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며 강경하게 맞서자 협상은 난항일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쌍방의 주장만 팽팽하게 대립한채 지지부진한 가운데 또 한번 기습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41년 6월 22일 독일이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죠.
사실 일본이 "바바롯사 작전"의 실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이 소련과의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소련 정보부는 물론이고 미, 영도 정보를 입수하여 스탈린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이 소련 스파이로서 도쿄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구체적으로 독일군의 이동상황에 대해 모스크바에 보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 역시 나름대로 여러가지 루트를 통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스탈린만큼이나 일본 역시 뒷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는데, 히틀러는 이탈리아와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등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사전에 침공계획을 알리고 참전을 요구했으나 정작 일본에게는 아무런 협조도, 사전 언질도 없었습니다. 일소불가침 조약을 직접 주도했던 마쓰오카는 그 직전에 베를린을 방문했음에도 "나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만약 그들이 전쟁을 할 줄 알았다면 결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며 당연히 독일과의 협력에 주력했을 것이다."라고 독소전쟁 발발 직후 열린 국무회의에서 보고하였습니다.
즉, 마쓰오카는 독소전쟁 발발 직전까지도 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타협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지도부 역시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비해 진지한 논의 한번 하지 않았고 어떤 구체적인 방침이나 준비도 없었습니다.
독일이 일본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전을 요구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지 10일이나 지난 뒤인 7월 1일에야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가 일본 외무성에 "독일이 서쪽에서 공격하고 일본이 동쪽에서 공격하여 겨울이 오기전까지 쌍방이 중간지점에서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런 독일의 제안에 대해 육군에서도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독일에 호응하여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내각과 군부에서는 연일 회의를 개최하여 격론을 벌였으나 독소전쟁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동에 주둔하는 소련의 병력이 70만명에 달하는 반면, 관동군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주장이 대세였습니다. 결국 7월 2일 천황 히로히토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 요강"을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소련에 대해서는 전쟁의 추이가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진전되었을때 참전하고 미일교섭과 남방문제 해결에 주력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황을 지켜보면서 독일의 승리가 명확해지면 그때 잽싸게 끼어들어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따라서 소련을 공격하는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장악하는 쪽을 선택하였고 7월 28일 새로 편성된 제23군은 남부 인도차이나로 진격하여 인도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런 결정 덕분에 소련은 41년말 모스크바가 위기에 처했을때 극동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빼내어 독일군을 저지하고 수도의 함락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그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외상 이든에게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병력을 투입한 것이 국면을 호전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오."라고 말합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국책 요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이들이 본격적인 대영미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미국의 태도는 급격히 경색되었고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점령 직전인 7월 25일 미국내 일본자산 동결령을, 26일에는 영국, 네덜란드와 공동으로 대일금수조치를 선언합니다. 당장 일본의 해외무역은 1/4로 격감하죠. 이어서 8월 1일에는 석유 수출을 1/10로 감축키로 결정합니다. 당시 일본은 석유생산품의 80%, 휘발유 소요량의 90%, 기계부품의 60%, 고철의 75%이상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조치로 인해 도쿄의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일본 경제는 마비직전에 직면합니다. 당시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의 수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미 행정부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루즈벨트와 국무부는 일본의 남방침략에 대해 미국이 좌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할 필요는 있지만 이로 인해 양국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어 일본이 도리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쟁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며 40년 9월에야 논란끝에 "평시 징병법"이 통과되어 21세~35세까지의 모든 남성들은 거주지 징병위원회에 등록토록 합니다. 그러나 40년말까지도 미군의 병력은 총 45만8천명에 불과했으며 태평양에서의 해군력 역시 영국, 네덜란드와 연합한다쳐도 명백히 열세였습니다. 질적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그 격차는 더욱 컸죠. 독일의 위협으로 대서양에 배치된 해군을 빼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약 일본이 선제 공격을 시작한다면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죠. < 태평양전쟁 개전직전 태평양에서의 연합군과 일본간의 해군력 비교>
구분 전함 항모 중순양함 경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계 연합군 영국 2 1 7 13 23 미국 9 3 13 11 80 56 172 네덜란드 - 3 7 13 23 계 11 3 14 21 100 69 218 일본 10 10 14 18 113 63 228 따라서 루즈벨트로서는 대일제재의 수위에 대해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부분적인 자산 동결과 일본과의 협상 추이를 지켜보면서 단계적으로 대일 수출을 줄여나갈 생각이었지 처음부터 아예 전면적인 금수조치를 취할 의도까지는 없었습니다. 석유의 수출 역시 비항공기 연료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러나 헐 국무장관이나 딘 애치슨 국무차관보는 일본이 앞에서는 외교적 협상운운하면서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며 극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대일수출을 전면 거부함으로서 루즈벨트의 의도와 달리 일본과의 무역은 사실상 중단됩니다. 8월 14일 루즈벨트와 처칠은 영국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선상에서 양국이 공동으로 독일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대서양 헌장"을 선언합니다. 미국이 석유와 원자재 공급의 중지를 선언하자 일본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경악이었습니다. 일본은 40년에는 미국으로부터 500만톤의 석유를 수입했으나 41년에는 겨우 110만톤만을 수입할 수 있었고 국내 비축분은 18개월 분량에 불과했습니다. 고노에는 마쓰오카를 외상에서 해임하는 한편, 미국이 제시한 4가지 원칙의 전면 수용과 미일 양국의 수뇌 회담을 제의합니다. 그러나 육군상 도죠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의 주전파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이들의 주도로 9월 3일 대본영에서는 10월을 기한선으로 정하고 미국과의 교섭이 성과가 없을 경우 전쟁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1. 제국은 자존자위의 보전을 위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결의하에 대략 10월 하순을 목표로 전쟁 준비를 완료한다. 2. 제국은 위의 사항과 병행하여 미, 영에 대해 외교 수단을 다하여 제국의 요구 관철에 노력한다. 3. 전호 외교 교섭에 의거하여 10월 상순에 이르러도 우리 요구를 관철할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즉각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개전을 결의한다. 또한 미국에 제시할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미, 영은 일본의 지나사변 처리에 관여하지 않으며 장개석정권에 대한 원조를 중지한다. 2. 미, 영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일본의 국방을 위협하는 행위를 취하지 않는다. 3. 미, 영은 일본과의 통상을 회복하고 일본이 필요로 하는 물자 확보에 적극 협조할 것 4. 미, 영이 전항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은 더이상 무력진출을 하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적당한 시기에 철병할 용의가 있다. ※ 일본 정계내에 폭넓은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 회의의 결정사항을 즉시 모스크바에 보고합니다. 소련은 서부전선에서 심각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공을 우려하여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일본은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극동의 병력을 서쪽에서 이동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군부의 결정안이 상정되자 히로히토는 "3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라고 호언하는 스기야마 참모총장에게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신랄하게 추궁하였고 그 자리에 참석한 군부의 어느 누구도 이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고노에는 아직도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전면전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으나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허황된 희망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동아공영권을 인정하고 아시아에서 물러나라는 일본의 요구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반대로 삼국동맹의 탈퇴와 중국에서 전면 철수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일본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쌍방의 요구는 완전히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이었기에 그 중간점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말이 "교섭"일뿐, 단지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에 불과한 이상 끝없는 평행선의 연장일뿐 타협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죠. 10월 12일 고노에의 사택에서 도조 육군상, 오이카와 해군상, 도요다 외무상, 스즈키 기획원 총재 등 지도부가 모여서 10월까지 미국과의 교섭을 타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논의합니다. 고노에와 도요다는 현실론을 내세워 미국의 양보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육군이 중국에서 철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도조는 "불가하다"라고 잘라서 말했고 우유부단하고 리더쉽이 없는 고노에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0월 16일 군부의 압박에 못 이겨 고노에 내각은 총사퇴하였고 히로히토는 내대신 기도 고이치의 추천에 따라 도조 히데키를 신임 총리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도조 본인도 예상밖이었는데, 당초에는 황족중에서 총리가 임명할 계획이었으나 기도 고이치는 이에 반대하고 "만일 황족내각이 미국과 전쟁을 결정했다가 예상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황실이 국민의 원망의 대상이 될 것"라며 대신 도조를 추천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미국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향후 패전의 책임을 질 희생양으로 골랐다는 말이죠. 당시 일본 지도부의 리더쉽 결여와 책임회피, 비겁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교섭이냐, 전쟁이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일본 지도부는 극도의 갈등과 대립, 파벌, 국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정부와 군부간, 정부 부처간, 군부내에서도 제각각 따로 놀았고 의견 조율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본 해군은 육군과의 주도권 싸움과 예산의 확보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대미개전이 무모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외부적으로 강경론을 고집합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해군군령부총장이 된 도요다 소에무는 "해군은 오랜 세월동안 큰 예산을 받아 바다의 수호신을 자처해 왔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자신이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라고 술회합니다. 국운이 걸린 일임에도 자기 체면에만 급급한 것이 당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히로히토 역시 그 책임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선봉에 서서 전쟁을 직접 주도하고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의지가 있었다면 전쟁을 막는게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수수 방관했고 국가 원수로서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전범중의 하나일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벼랑끝 전술"을 끝까지 고집한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으로 "승산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기대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만약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하면 미국은 태평양보다 유럽전선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일본이 초기 작전에서 신속하게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어 외교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다면 미국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이 아직 전쟁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일본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낙관하죠. 9월 7일 도조는 히로히토에게 "미국의 요구는 일본에게 있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입니다. 만약 일본이 전쟁으로 나아간다면,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먼저 공격할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일본을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태평스럽게 독일의 승리에 무임승차하겠다는 속셈이었고 명확한 근거도 없이 독일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미, 영, 소의 군사력과 전쟁 의지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오판을 저지른 것이죠. 심지어 군부내 주전파들은 미국과의 교섭 결렬이 국민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국론을 일치시킬 것이라며 오히려 천우신조의 기회라고 주장하였고,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잡지인 "오리엔틀 이코노미스트"는 41년 9월호 논설에서 "석유는 생존에 불가결한 상품인데도 미국의 변덕과 호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일본은 미국의 비위를 비굴하게 맞추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종과 민족도 자존심이 있다면 그와 같은 방식을 감수할 수는 없다."라고 전쟁을 선동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더쉽이 없는 일본 내각이 전쟁은 망국이라며 군부와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고노에를 대신해 신임 총리가 된 도조 역시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 회의가 열렸으나 같은 말의 반복일뿐이었고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육군상일때에는 주전파의 선봉이었던 그 역시 막상 총리의 자리에 앉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립무원에 진퇴양난의 처지였습니다. 결국 11월 1일 3가지안을 제시합니다. 제1안, 전쟁없이 와신상담한다 제2안, 즉각 개전을 결의하고 전쟁으로 해결한다 제3안, 전쟁 결의하에 작전 준비와 외교를 병행하되, 가능한 외교적 타결에 최선을 다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추상적인 원칙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일단 제3안을 선택하되, 통수부는 이미 남방작전을 위해 군대를 일단 동원한 이상 도로 물리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 문제라면서 11월 30일 밤 12시를 외교 교섭 기한의 한계로 못 박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도조는 명색이 전직 육군상이자 군의 원로이면서도 아무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전까지도 그토록 고노에의 우유부단함과 무능함을 비난했던 그도 전혀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죠.
도조 히데키(1884~1948) : 30년대 이래 사실상 육군의 수장으로서 중일전쟁의 확전을 주도하였고 마쓰오카의 삼국 추축동맹에 대해서도 적극 찬성합니다. 미국과의 교섭을 강력히 반대하고 주전파들을 선동해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으나 막상 본인이 총리가 되자 미국과의 전쟁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패망하였고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말로는 외교적 타결에 최선을 다한다고 했음에도 일본이 미국에 제시한 안은 결국 기존의 주장의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협상의 진행과 관계없이 일본의 전쟁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1월 5일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25척의 함대는 비밀리에 훗카이도 동쪽 쿠릴열도에 있는 이투르프섬의 히토캇푸만으로 이동하여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에 대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음날에는 데라우찌원수를 사령관으로 "남방총군"을 편성했는데 전체 육군의 51개 사단중 4개군 11개 사단(제14군, 제15군, 제16군, 제25군) 36만명과 육군 항공대의 1/3을 동원하였습니다. 제14군은 필리핀을, 제15군은 태국과 버마, 제16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25군은 말레이시아를 각각 담당합니다.
한편, 미국도 협상이 도저히 진전이 없자 재무장관인 헨리 모겐소가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모겐소 안"은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와 태국에서 부분 철수하고 남방침략을 중지한다는 조건으로 미국은 통상의 재개와 자산 동결을 철회하고 태평양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하며 또한 북부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은 최대 2만5천명선에서 주둔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전선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계속 묵인하겠다는 의미였죠. 이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으로, 극동에서 일본의 지위를 일정부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중국은 물론 영국 역시 강력하게 반발했고, 암호해독기 "매직"을 통해 동중국해에서 일본이 육해군을 집결시켜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을 취하려는 것이 명백해지자 루즈벨트는 더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초강경으로 급선회합니다. 그리고 11월 26일 헐은 주미대사인 노무라에게 10개 항목으로 된, 후에 "헐 노트"라고 부르게 되는 각서를 제시합니다. 1. 다변적인 불가침조약의 체결 2.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주권의 존중과 이에 관한 협정을 체결 3. 일본군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전면 철수할 것 4. 중국에 대해 장개석 정권 이외의 그 어떤 정권에 대한 모든 지원을 금지 5. 중국에서의 모든 치외법권의 포기 6. 미국과 일본가의 통상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 개시 7. 미일 양국은 자산동결조치를 철회 8. 엔화와 달러 환율의 안정에 관한 협정과 이를 위한 자금을 각각 절반씩 부담 9. 제3국과 체결하는 협정이 본 협정에 모순되는 해석이 없도록 노력한다 10. 타국이 본 협정을 준수, 적용하도록 노력한다32 이것은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한다는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노무라를 통해 각서를 전달받은 도조와 각료들은 "미국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전쟁이냐" 두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12월 1일 어전회의가 열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대미 개전이 최종결정됩니다. 그리고 진주만과 동남아에서의 미, 영, 네덜란드 식민지에 대한 공격명령이 하달됩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대체적인 주류 견해는 일본 군부의 무모한 야심과 팽창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만 여기에 대해 반박하는,이른바 "수정론자"들의 이론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론 몇가지를 본다면 첫번째 "미국책임론"으로, 먼저 어느 한쪽에만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돌릴 수 없다며 미국이 융통성없는 원칙을 강요하고 경제적 압박을 가하여 일본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부득이하게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합니다. 헐노트를 비롯한 미국이 제시한 교섭안은 일본이 만주사변이래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들여 획득한 모든 권리와 지위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며 일본은 거듭 양보했음에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고집함으로서 교섭은 결렬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두번째가 "전쟁유도설"인데, 유럽전쟁에 미국이 참전하기 위한 명분을 얻기위해 루즈벨트는 의도적으로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고 공격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소수의 패권국가에 의해 형성된 기존 국제질서와 여기에 불만을 품고 도전하는 국가들간의 대립은 불가피한 현상이며 2차대전이나 태평양전쟁 역시 기존의 패권국가와 신흥강대국간의 패권 다툼이라는 일종의 "패권이론"입니다.33 미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지역 패권국으로 남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새로운 도전 세력의 등장을 막았고 여기에 반발한 일본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과연 합당하고 논리적인 것인가. 과연 일본이 진정으로 미국과의 타협에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설사 미국이 일본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고 해서 침략이 멈추었을까. 첫째로, 교섭기간 내내 일본의 요구내용은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무조건 미국이 물러날 것을 일관되게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이 설정한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는 중국과 인도차이나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태평양 전체였습니다. 이는 영국의 몰락을 의미했고 동시에 미국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으로서는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고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협공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일본은 한편으로 교섭을 하면서 뒤로는 그것과 관계없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구모 함대에 진주만 출동명령이 내려진 것은 헐노트가 전달되기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처음부터 교섭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미국은 암호해독기 "매직"을 통해 일본의 암호를 대부분 해독하고 있었고 교섭기간 내내 일본군이 남방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따라서 일본이 겉으로만 교섭 운운한다며 그들의 이중성을 극도로 불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주만 기습당시 나구모 함대의 이동경로. 최종적으로 개전 결정이 내려진 12월 1일, 그들은 이미 목표지점까지 절반이상을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외교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셋째로, 미국이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을 압박하여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은 명백히 억지스러운 주장일뿐입니다. 물론 해군장관인 프랭크 녹스와 육군장관인 헨리 스팀스가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지만 루즈벨트는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대서양과 태평양 양쪽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늦게 일어날수록 미국에게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리어 일본에게 적당히 양보함으로서 시간을 버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었죠. 그 시점에서 굳이 개전을 서두름으로서 미국에게 과연 어떤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석유금수조치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미국의 오판은 일본이 그렇게 신속하게 공격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설사 공격을 하더라도 괌이나 웨이크, 필리핀과 같은 태평양 최일선이 될 것이지, 설마 일본본토로부터 무려 1만km나 떨어져 있는 태평양함대의 본진을 직접 치고 들어오리라고는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이 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 역시 억지일뿐입니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는 도의적인 비난만을 했을뿐 사실상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37년부터 39년까지 미국이 제공한 차관은 겨우 2,500만달러였으며 이는 소련이 제공한 금액의 1/10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내 여론이 중일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개입에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의 대부분을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점에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간접적으로 지원한 셈이라고도 볼 수 있죠. 미일간의 관계가 급격히 경색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해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면서부터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패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안보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패권국과 도전국간의 싸움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30년대 영국 체임벌린 수상이 유화정책을 추진하여 독일, 이탈리아의 팽창을 어느정도 묵인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죠. 그의 유화정책은 도리어 독일, 이탈리아의 더 큰 야심만을 불러왔고 주변국을 차례로 집어삼키며 결국 2차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독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침략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만주사변 이래 중국에 대한 침략과정에서 이미 증명된 것입니다. 미국이 설사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제시했다고 해도 일본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대동아공영권"이 완성될때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이 원한 것은 단순히 자원의 확보만이 아니라 세계의 분할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은 전적으로 일본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어느 국가이건 자국의 이익을 가장 우선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공갈과 협박, 그리고 그것이 통하지 않을 경우 무력에 의존한다면 상대의 저항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미일간의 교섭과정에서의 일본이 보여준 방식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쌍방이 모두 비타협적인 자세를 고집했지만 전후관계는 따지지 않고 미국의 비타협과 일본의 비타협을 동일하게 보는 것자체가 오류이죠. 수정주의 학자들의 논리는 그 의도가 어떻든, 성급한 주장으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킴으로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그 과정에서 빚어진 약소국들의 희생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무책임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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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8.22 일본 군부는 국력이 뽑아도 뽑아도 나오는 거미줄인줄 안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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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3.08.23 미국이 생산력이 더 뛰어난거에 대해 일본군부는 더 짧은 보급로(미국은 태평양을 횡단해야 하니까)더 뛰어난 일본군의 의지(누가 인정한적도 없음)에 승부를 걸었다더군요.고집스럽게 사수하다가 안되면 칼로 배 가르는게 뛰어난 의지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머리를 열어놓고 유연하게 자기자신에 대한 진실에 대해 냉정해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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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8.23 그렇군요. 현실을 속이면 안되는 것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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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8.22 -만주 사변에 항의하던 미국의 한 외교관이 일본 측으로부터 “당신들도 자국민 및 자국 보호를 위해 니카라과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느냐”는 반박을 받고 도리어 당황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저 시대 어느나라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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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2Pac 작성시간 13.08.26 지금 봐도 일본 지휘부는 미쳤었던 듯.... 인구, 생산력 등 뭐하나 비슷한게 있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