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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33) ─ 네르친스크 조약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07|조회수755 목록 댓글 3

 청나라에게 있어 전기점이 되는 1681년. 바로 삼번의 난이 끝난 해. 간티무르 문제로 러시아와 대립을 벌이던 강희는 이제 시선을 동북으로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희는 대리시경 명애(明愛)와 낭중 액이세 등을 알바진으로 파견, 러시아의 의도와 상황을 정탐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을 보내면서 강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는 여전히 구석의 외방(外邦)이고, 본래 비루한 무리들이므로 가볍게 믿어서는 안 된다. 가서 그들에게 잘 말하도록 하라."


 명령에 따라서 명애는 알바진으로 파견되어, 러시아의 현지 사령관에게 경고했습니다.


 "당신들은 문제를 야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20여명을 파견하여 다륜선(多倫禪)의 거주지를 침략하였으니, 이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당신들은 당신 나라 사람들을 빨리 철수시키십시오."


 이렇게 따지고 드는 한편, 알바진 요새를 샅샅히 훎어보고 정보를 모았습니다.


 "……그 성의 수목으로 말하자면, 넒이는 15장(丈) 남짓이오, 길이는 20장 남짓이다. 4층으로 되어 있어 그 안에 조총을 설치했고, 성외는 4장 남짓의 땅을 남겨 두어 1장의 땅에는 목책을 박고 밖으로는 2층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300여명이 있다."


 1682년, 강희는 직접 성경과 길림, 오라 등지를 순시하면서, 영고탑 장군 파해 등에게 변방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슴 사냥을 명분으로 흑룡강 주위를 둘러보고, 러시아 군 거주지와 형세 및 수륙 도로를 감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대신 러시아 군이 출진할 경우, 싸우지 말고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나중에 들려온 보고로는, 러시아 군의 규모가 대단한 수준은 못되어 병사 3,000여명이면 격파에 충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강희는 러시아 문제에 대해 섣부른 개입보다는, 토지의 비옥도와 산천의 형세, 인물들의 정황, 도로의 원근 등을 세세하게 살피며 주의깊은 태도로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 군의 거주지인 네르친스크와 알바진은 비록 비옥하지는 않지만, 농경으로 자급할 수 있고 가축들을 기르고 있으며, 담비를 팔아 교역을 벌여 자급 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알바진과 멀리 떨어진 영고탑에 거점을 두고 있는 청군은 되려 현지에서 싸움을 벌이면, 제 땅에 접근하는 적군을 막으러 가는 것임에도 오히려 자신들이 원정군이 된듯한 어려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알바진에서 러시아 침략군을 물리친 약도


 이런 상황에서 비록 한번의 싸움으로 알바진 요새를 점령한다손 쳐도, 유지할 방법도 없고 청군이 물러가면 러시아가 다시 올 것은 자명하며, 변방 주민도 불안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리하여 강희는 흑룡강에 군대를 영원히 주둔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가면서 식량을 여유 있게 쌓아 두려 노력했습니다. 1682년, 그는 공격에 대한 논의를 중단 시키고, 대신 흑룡강에 영구적으로 군사를 주둔시키는 방안에 대해 돈의했습니다.


 파해 등 현지 사령관들은 지금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고 주장하면서 속전을 주장했지만, 강희는 상황의 발전과 변화에 근거하여 군사 계획을 완비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1683년 흑룡강 성을 건립하고, 대포를 장착한 함대를 준비시키고 봉화대가 설치되었으며, 관병 1,500여명이 흑룡강에 주둔하였습니다. 1684년에 이르면 다구르 관병 1,000여명이 흑룡강에 가족을 이끌고 도착해 토지를 경작하며 주둔했습니다. 그리고 대포를 주조하고 조총을 개조했는데, 대포는 강희가 직접 이름을 붙여 신위무적대장군포(神威無敵大將軍砲)라 명명했습니다.



신위무적대장군포

 신위무적대장군포
 

 "식량 비축이 부조하면 비록 파해 등이 정벌한다고 해도 성공 할 수 없다. 이 일은 아직 해가 멀지 않았음을 짐은 친히 들어 알고 있다. 또한 군중도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강희의 노력에 따라 식량들이 추가로 지원되었고, 흑룡강 주둔 병사들은 군둔, 즉 군사용 둔전을 실시하며, 호부 대신 한명까지 파견되어 현장을 감독했습니다. 일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요하와 이둔하의 물의 깊이와 흐름을 실지 조사해 모두 3장(丈)의 배가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이후 길림에서 대규모 선박 건조가 이루어졌습니다.


 흑룡강 전선과 중앙 내지와의 연락을 위해 길림에서 애혼에 이르기까지 역참을 설치하는 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당초에 올라온 보고는 1195리에 역참을 14역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강희는 이를 즉각 지적했습니다.


 "역참 관계는 매우 긴요하다. 대체로 장량은 마땅히 5척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1340여리로 계산을 한 뒤, 역참 19역을 두었습니다. 청군의 움직임이 매우 긴요해지자 소수민족들이 동요하여 러시아에 저항했고, 이에 따라 알바진 요새는 점차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 되자, 이제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섰습니다.


 네르친스크의 문장



강희는 군사 개입을 준비하면서도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1685년 3월, 모스크바로 국서를 보냈는데, 내용의 전문을 옮길 필요는 없겠고 대청국 황제가 명령하니 어서 철수하거나, 혹은 사신을 보내 이야기를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685년 4월, 만주족, 한족, 몽고족, 다구르 족 등으로 구성된 3,000여명의 병사가 애혼에서 수륙 양용으로 출발, 알바진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한 병사들은 육식이 부족하여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사슴 수만 마리가 내달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5,000여 마리를 사냥하고 사기가 고양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건 액면 그대로 믿긴 힘든 이야기입니다.


 Red deer stag 2009 denmark

 6월 초,청군은 알바진 맞은편에 전선 지휘소를 설치하고, 만주와 몽고, 러시아 어로 된 문건 두 통을 보냈습니다. 하나는 강희가 차르에게 보내는 국서이고, 다른 한 통은 알바진 장관에게 주는 자문으로, 이것은 러시아 군 포로인 톨부진(Tolbusin)이 전달했습니다. 내용은 신속히 철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역시 전문을 올릴 필요는 없겠고, 내용의 마지막은 이러했습니다.


 "만일 망령되어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완강히 저항하면 대군으로 무력 토벌하여 알바진 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너희 무리를 모두 없앨 것이다. 너희는 그때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이에 특별히 자문을 전한다."


 하지만 정작 강희는 일선 지휘관들에게 자신은 살상을 좋아하지 않으니, 될 수 있는대로 살해하지 않고 투항을 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외교적 해결을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은 총포를 발사했고, 결국 청군은 수륙으로 진을 치고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25일 새벽, 상류에서 러시아 군이 땟목을 타고 증원했습니다. 청군의 등패병(등나무를 엮어 만든 방패를 가지고 있는 부대) 옷을 벗고 나체로 물에 들어가서, 머리에 등나무로 만든 방패를 올리고, 손에는 단도를 잡고 신속히 적의 선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러시아 군은 깜짝 놀랐습니다.


 "대모달자(大帽達子)가 왔다!"


 이 물속에 있자 화기를 쓰기도 어렵고, 등패가 머리를 가리는지라 총과 화살도 쓰기 어려웠습니다. 등패병이 칼로 적들의 정강이를 후려치자 적군은 강물 속에 빠졌고, 황망히 퇴각했습니다. 이때문에 청군은 적이 수로에서 증원하는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청군은 적의 도주로를 막고, 각 방면에서 연합하고 화력을 집중시켜 포탄을 비 오듯 쏘아대었습니다. 성내 화염이 하늘을 덮고 연기가 가득했고, 러시아 군은 사망자가 많아 당황했습니다. 러시아 군의 신부 마이금(摩爾金)은 이에 십자가를 잡고 기도를 올렸고, 알바진에 있는 장수 톨부진은 전멸의 위기를 느끼고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요청했습니다. 청군은 러시아 군과 부녀자들 600여명을 모두 그들의 물건과 함께 무사히 돌려보냈습니다.


 강희는 승전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러시아를 무력 토벌하는 데 사람들은 모두 길이 멀어 어렵다고 한다. 짐이 단독으로 군대를 일으켜 정벌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늘의 은총을 입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짐의 마음은 매우 기쁘도다."


 그런데 청군은 러시아가 구축한 알바진 성을 불태운뒤, 이곳에 주둔하지도 않았고, 알바진에 척후를 설치하라는 강희의 지시도 시행하지 않고, 무엇보다 알바진 근처의 수확물도 취하지 않고 그냥 철수했습니다. 네르친스크로 패잔병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어온 톨부진은, 마침 바이돈(Baidon)이 이끄는 구원병을 만났습니다. 게다가 네르친스크 독군 블라소프(Wlasov)는 사람을 보내 청군이 이미 알바진에서 전부 철숨했음을 알자, 바로 군사를 보내 수확물을 거두고 요새을 재건하고 장기적 방어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1686년, 강희는 러시아 군이 다시 알바진에 성을 쌓는다는 보고를 듣고 이를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 확인하였는데,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이에 강희는 다시 한번 2,000여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또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강희는 겨울에 얼음이 언 뒤에 선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말은 어떻게 먹여야 하나, 적의 구원병이 이르면 어찌해야 하나, 성에 들어갈 수 없으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모든 부분에 관해서 자신에게 신속하게 보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현지 지휘관은 강희의 명을 받들어 사방에 해자를 파고 장기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러시아 군은 돌파할 방법이 없어 곤란한 상태에 빠졌고, 톨부진도 돌파 작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바이돈이 이를 이어받았는데, 먹을 물이 부족하고 땔나무도 부족하고 군량도 떨어지고 탄약도 바닥났으며, 기아와 추위로 고통스러웠고 성내에 질병이 돌았습니다. 800명의 병력중에 고작 100여명 밖에 남지 않게 되자, 결과가 어찌 끝날지 자명했지만, 강희는 이 무렵 가르단의 움직임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강희가 보기에, 가장 막아야 할 일은 가르단과 러시아가 연대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선 러시아와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고 우호적으로 지내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모스크바의 차르에게 청나라 황제의 서신이 전달되었고, 패전이 명확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이익이라도 건지기 위해 러시아 정부는 청나라의 화평 조약을 억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86년 9월, 차르는 국서를 북경으로 보냈고, 알비진의 포위를 풀 것을 요구했습니다. 강희는 즉각 알바진의 포위를 풀었고, 의원을 보내 질환에 시달리는 러시아 인들을 치료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687년이 되면 청군은 주력군을 20여리 밖으로 철수시켜 알바진의 봉쇄를 완전히 정지했는데, 이것은 강희가 차르에게 보여주는 평화적인 제스처 였습니다. 서로간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마련됨에 따라, 알바진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골로빈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1686년 1월, 모스크바에서 골로빈을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국경선 확정과 교역 관계에 대한 협상단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1687년 8월에 셀렌긴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젭종단바 쿠툭투를 초청,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중재자로 삼을 생각도 있었던 골로빈은, 강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로 하고 강희는 1688년 셀렌긴스크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가르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우선 중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르단의 교란에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지역인 네르친스크가 선택되어, 그곳에서 담판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당시 러시아 정부는 크리미아 원정에 완패, 아무래도 중국과 화의를 서둘러 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습니다. 


 1689년 6월, 중국 담판 대표단의 색액도(송고투) 등은 골로빈에게 도착 사실을 알렸고, 7월 31일은 네르친스크에서 3리 떨어진 지역에 머물었습니다. 8월 19일,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양국은 기본적인 회담 관련 사항을 논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전의 중국 왕조와는 판이하게 다른 매우 재미있는 요소가 발견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와 청제국이 협의한 사항을 보면,


 "한 건 마다 평등에 의거하고,"

 "어느 한편이 상대방을 능가하지 않는다."


 는 원칙을 준수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이전까지 중국의 왕조에서 보이던 조공 방식의 외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입니다. 그외 다른 문제도 논의되어 칼과 도끼외엔 아무런 무기로 들고 있지 않은 경호원 삼백여명에 대한 이야기와, 회담장 밖에서 쌍방이 500여명의 호위병을 배치하는 문제도 논의되었습니다. 골로빈은 1천여명의 인원으로 색액도를 맞이했고, 색액도는 제르비용과 페레이라, 군대, 1만여명의 불교 승려를 이끌고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색액도


 서로간의 평등을 위해, 아예 두 나라는 모국어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청나라 관료들은 러시아어 통역관이 있었지만, 일부러 이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은 만주어 통역사를 찾았지만, 능숙한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에게 익숙한 언어는 바로 몽골어였는데, 중간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개입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의 협상 언어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라틴어가 되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골로빈의 이야기에 따르면, 몽골어 통역사들이 충분하지 않고, 무엇보다 '믿을만하지' 않아서 쌍방이 라틴어가 더욱 '객관적' 일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회담이 처음 시작하자 마자 골로빈으 선제 공격을 날렸습니다. 청나라가 아무 선전 포고도 없이 갑자기 러시아 황제 폐하의 국경을 침범했고, 중국은 마땅히 피해자인 러시아에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색액도는 그 자리에서 반박하면서 러시아 측의 여러 악행을 열거하고 자신들은 여러번 문서를 보내 깨우치려 노력했지만, 답신을 보내지 않고 무시했으며 도리어 침략을 멈추지 않은것은 그쪽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포위를 풀고 그드르이 곤궁함을 구제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신경전 후에 바로 본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골로빈이 네르친스크와 알바진이, 먼저 러시아가 개척한 식민지며, 러시아 황제 폐하의 영토라고 열변을 토한 것입니다. 여기에 색액도는 한술 더떠 몽골 부족들이 '중국'인 원나라에 조공을 바쳤음을 근거로, 아예 바이칼 호까지 전 지역이 자신들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골로빈은 아무르 강을 따라 국경을 정하여, 알바진과 네르친스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썻습니다. 서로 군사 협박까지 하는 통에, 첫날 회담은 별다른 진전도 못 보이고 끝나버렸습니다.


 이 과정 속에 러시아 측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말 장난을 중간에 부리는 것을 깨닫고, 청나라 사절에게 몽골어로 이야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습니다. 협상이 난항에 빠지면 러시아 측은 답답해서 몽골어 통역사로 만주인들과 직접 교섭하려고 했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은 몽골어 통역사들의 실력이 별로라며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만주족에 말을 거는것도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몽골어가 완전히 배제됨으로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간에서 완벽한 지위를 누렸으며 중재자로서 자신들의 이익(황제의 신임)들을 얻어내었습니다.


 두번째 날,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아 전혀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꺠달은 골로빈은 이제 색액도가 실카 강에서 아무르 강까지 이어진을 선을 긋자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이대로라면 아르군스크의 러시아 요새와 귀중한 염호와 광산들이 전부 청의 영토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골로빈은 이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시베리아 전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겠다며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계속되는 결렬에 색액도는 갑자기 1만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네르친스크를 포위했고, 골로빈은 1천 5백의 병력으로는 이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습니다. 그는 알바진을 포기헀지만, 그러나 아르군 강 북쪽의 염호와 강산은 절대로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르군스크 요새는 강 북쪽 러시아 영토로 옮겨지고, 청은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양대 제국은 아무르 강 북쪽의 가장 가까운 산맥들을 따라 국경을 정하고 표석을 세웠고, 러시아어, 한자, 만주어, 몽골어, 라틴어로 조약문을 작성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가 진정한 협상의 승리자라고 자신들을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 이것은 액면 그대로만 보면 1:1 관점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 조약의 가장 큰 피해자는 몽골족, 그리고 가르단이었던 것입니다. 해국도지(海國圖誌)와 성무기(聖武記)를 쓴 위원(魏源)은 이렇게 평론했습니다.


 "황제께서 두 차례나 러시아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고 한 차례 네덜란드 수만 리까지 사신을 보내 비로소 국경을 정했다. 왜인가? 그때 칼카 준가르가 아직 줄복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와 접경하여 서로 의지하고 혹은 연합해 우리 병력을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조약을 맺고 나서, 준가르는 화기를 빌릴 곳이 없고, 패하여 달아나도 투항할 곳이 없었다."


 이 조약이 있기 전까지, 청나라에 대항하거나, 러시아와 적대한 몽골 부족은 서로 반대편의 제국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러시아를 피해 저 멀리 중국 근처로 달아나거나, 청나라를 피해 러시아의 초원으로 피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국의 조약이 체결되어 한 제국의 적이 된다고 하여도, 다른 제국의 동맹자가 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달아날 자유조차 사라졌습니다. 이제 중국의 장성밖은 어디로든 뻗어있는 대초원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 과 '대청제국'의 사이에 있는, 끼어있는, 국경선을 가진것과 비슷해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르단은 이제 조약의 힘을 피부로 느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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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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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9.07 초원의 태풍이 사그라 드네요.. 드넓은 초원을 통해.. 흉노-훈부터 몽골까지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는데 ㅠ
  • 작성자이리야스필 | 작성시간 12.09.08 네르친스크 지역명이었네요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12.09.08 알바진 약도와 신위무적대장군포 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데 저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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