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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36) ─ 차오모드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14|조회수770 목록 댓글 4




 


 혹독한 눈보라. 종잡을 수 없는 적.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 강희는 불가능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르단이 6만명의 러시아 지원군을 데리고 왔다는 절망적인 정보가 전해지자, 이상아, 동국유, 그리고 색액도까지 모든 고문들이 황제에게 북경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강희는 분노했습니다.


 "나는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에 호소했다. 병사 가운데는 소년 마부라 할지라도 가르단을 궤멸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대 고관들은 힘쓰기를 두려워하는 비루한 아녀자 같은 겁쟁이들이다. 나는 망설이는 자는 누구든지 확실히 죽이거나, 원정에서 축출해낼 것이다!"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6만명의 러시아 지원군은 물론 거짓이었으며, 가르단은 1천명의 병력과 대포를 얻으려고 러시아와 접촉했고, 실제로 협의했지만 러시아가 확답을 주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것은 강희가 이끄는 중군이 아니었습니다. 피양구의 서로군이 시간을 맞춰서 도착을 하여, 가르단의 도주로를 차단해야만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가르단은 아직 청군의 존재를 몰랐지만, 알게 되자마자 달아날 것은 자명했고, 그렇다면 강희는 과거 영락제와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고에 따르면, 피양구는 5월 3일에 웅긴 강, 5월 24일에는 툴라 강, 그리고 가르단의 진영인 바얀 울란에는 5월 27일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보급 수레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피양구는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피양구 부대의 소식은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몽골 초원에서 완전히 실종된 서로군은, 한달이 지난 후 간신히 보고가 도착하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눈과 진창으로 인하여 부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르단을 제압하는데 필수적인 대포는 59문 만을 낙타에 실어서 간신히 옮길 수 있었고, 대부분의 대포는 변경에 버리고 왔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는데, 매우 아슬아슬했습니다. 말들은 지쳐 있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너무나 기진맥진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중로군, 강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아갈 것인가, 머물 것인가. 머물게 된다면 한정된 식량은 빠르게 소모가 될테고, 진격하는데 피양구가 도착하지 못한 상태라면, 가르단은 달아날 것입니다. 군사 회의에서는 계속해서 격론이 벌어졌고, 진격하자는 사람들과 피양구를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사람들의 우려가 섞여들었습니다. 청군은 가르단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위험을 무릎쓰고, 5월 23일까지 며칠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낙타 3백 마리와 수레 173대가 곡식 300톤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보급에 할하 몽골인들은 정말 깜짝 놀랐지만, 보급은 여전히 부족했으며, 보급 수레들은 이곳까지 오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5월 26일, 대치 상황에서 강희는 다른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려던 움직임에서 벗어나, 그는 가르단에게 협상 사절을 파견했습니다. 협상을 하면서 가르단을 잠시 머뭇거리게 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곧 평화를 말하는 사자가 준가르 포로들을 이끌고 가르단에게 가서 그들을 풀어주었고, 황제의 관심은 오직 국경의 평화이며, 가르단과 적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국경을 확정하고 이전의 조공 관계를 재개하자. 나는 그대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황제의 사절은 더욱 대담한 했습니다. 가르단의 조카 단지라에게 피양구 부대의 존재를 말한것입니다. 대신에, 피양구 부대가 툴라강이 '이미' 도착해 있으며, 가르단 부대의 퇴로는 따라서 막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오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가르단의 조카 단지라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음날,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잠깐 동안의 머뭇거림 끝에 강희는 피양구가 이제 도착했으리라 확신했으며, 가르단의 도주는 불가능해졌다고 여겼습니다. 6월 7일 케롤렌 강에 도착한 강희는 진을 쳤던 흔적을 보았지만 가르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황으로 보아, 방금전에 떠난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강희는 투덜거리며 가르단이 겁쟁이라고 비난하고는 추격을 계속하면서, 가르단에게는 항복을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습니다. 뒤쳐진 병사들을 사로잡자 그들은 가르단이 숲으로 달아났다고 말했습니다.


 피양구는 가르단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했을까.


 이것이 승패의 갈림길이었습니다. 황제의 군대가 진격함에 따라, 그들은 가르단이 버리고 간 지친 말들을 발견했고, 가뭄이 심각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풀은 전혀 싹을 틔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뒤쳐져 있었고, 보통 나이가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르단군의 도주를 공포에 질린 '공황' 으로 묘사했습니다. 가르단 군의 일부가 서로 공격했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자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승리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곡물과 가축 먹이의 심각성은 위험 수위까지 도달했습니다. 황제 본인조차도 양고기 말고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강희는 추격을 중지하고, 소규모 부대만을 남겨 진격하게 하고 대군은 이끌고 회군해야 했습니다. 강희는 피양구가 앞서 가 있을 것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불안함은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피양구의 서로군도 곡물 보급이 부족하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우울한 심정으로 강희는 귀환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천 리 동안 멋진 장소들 하나 없다."


 피양구의 보고는 다음 날 도착했습니다.


 그는 가르단이 케롤린 강에 있음을 알고 있었고, 빠르게 자신이 도착해야 한다는것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이 너무나 지쳐 동작이 느려졌습니다. 식량 배급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5월 31일 시점에서 그는 가르단과 10일 거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피양구의 장병들은 말 고기와 낙타 고기로 연명하며 11일간 행군 상태였고, 6월 2일 마침내 1만 4천명의 병력으로 가르단의 도주로를 막아세울 수 있었습니다. 6월 12일, 지칠대로 지친 양 군대는 사막의 한가운데, 차오모드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쳤습니다.



 훗날 가르단의 항복한 장수로 인해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가르단은 만주족 대군이 진격해온다면, 그들이 지칠 때까지 후퇴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유목민의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황제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군중에 있다는 이야기에 그의 부대는 패닉에 빠졌고, 세부대로 병력을 파견하는 청나라의 수법에 매우 놀랐습니다. 


 가르단이나 피양구나 보급에 있어 매우 극단적인 제약을 받았으며, 서로 아슬아슬한 상황을 계속해서 넘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르단의 몽골 부대는 양과 소때를 충분하게 보유하고 있었고, 청군은 오직 내륙에서 오는 곡물만으로 버텼습니다. 가지고 있던 가축은 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거의 소진했고, 역으로 가축들이 소진됨에 따라 보급을 옮길수가 없어 많은 보급품을 더 버려야 했던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선교사 제르비용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당시의 피양구 부대가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보자면, 가르단의 부대가 풍부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피양구의 부대는 살 수 있었고, 또 전의를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고대 한나라의 가장 위대한 명장 곽거병은, 사막에서 흉노를 격파하고 흉노의 보급을 빼앗아 군대의 보급을 해결했는데,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살기 위해선 피양구 서로군은 가르단을 격파하고, 그 가축들을 빼앗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굶주리고 지쳤지만, 그러나 살기 위한 최후의 투지로 불타는, 온 몸이 창에 찔려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무적의 부대가 탄생했습니다.


 반면에, 가르단은 다시 퇴각해서 중국 부대를 완전히 아사 시켜버릴 수도 있었으나, 강희의 퇴각 소식을 못 들었는지 그러지 않았고, 지칠대로 지친 피양구의 부대를 보고 스스로의 역량을 과신했씁니다. 가르단의 부대는 조총 2천여정을 지닌 5천여 병력이 고작이었고, 피양구의 부대는 어쨌든 가르단 보다는 두배가 더 많습니다. 게다가 만주족 부대는 가르단에 앞서 언덕을 장악하고, 적을 내려다보면서 진을 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조건 적을 죽여야만 하는, 말라비틀어진 가축의 시체 외에는 아무런 구경자도 없을, 사막의 초원에서 벌어진 처절한 살육전이었습니다. 청군은 대포를 쏘면서, 면으로 덧댄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진격해 나갔습니다. 청군은 적군의 10여보 진격했고,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댔습니다. 많은 몽골인들이 이미 패닉 상태에 이르렀기에, 대부분이 갑자기 놀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단은 병력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남을 깨닫자 달아났습니다. 만주 기병들은 승리를 직감하고 달려들었고, 수천명이 나가떨어졌습니다. 2천여명이 넘는 소떼와 양 4만마리를 노획하여 그들은 생존에 성공했고, 가르단은 조카 단지라를 데리고 단지 40~50여기만 이끌고 달아났습니다.


 강희는 7월 3일, 아직 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이 승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흘 후에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많은 우려를 받았던 강희의 결정은 완전한 성공이 되어 그는 위풍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고, 98일간 케롤렌 강까지 왕복 2천여킬로미터를 움직여 승리를 거둔 대사업을 칭송하여, 대규모 승리 축하 행사를 열었습니다. 황제는, 그리고 아마도 패배한 가르단도, 이 승리를 하늘이 인도해준 결과로 여겼을테고, 강희는 하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엄청난 안도감을 얻었습니다.


 한족 관료들, 만주족 신료들, 몽골의 칸들은 강희의 놀라운 승리를 칭송하였고, 가르단이 약탈 공격에서 자신들을 구해준것에 대해 감사해했습니다. 강희는 몽골족 집단을 청나라의 혈족 관계에 통합하면서 이렇게 말했씁니다.


 "나는 이전에 관 내에 있는 이들을 모두 가족으로 여겼다. 이제 케롤렌과 툴라 안의 모든 이들은 한가족이다."


 그러나 아직 충성 관께가 확실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변경에 있었습니다. 강희는 가르단이 코코노르의 몽골 왕공들과 러시아, 그도 아니면 회족(回族)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심지어 가르단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지 않았나 생각으 하기도 했고, 이 수상쩍은, 믿을 수 없는 무슬림 집단들이 가르단과 손을 잡는것에 대해 매우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희에게 충격을 주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차오모드 승리 이후, 항복한 준가르의 용사 중에 누군가가 달라이 라마가 9년전이 이미 죽었고, 지금 달라이 라마 행세를 하는 인물은 제파 샹게 가초라고 실토했던 것입니다. 정확한 사망일은 나중에 체왕 랍탄이 강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사실을 알고 지난 날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티베트의 지난날의 태도는 수상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강희는 티베트가 준가르와 더불어 반청 연합을 구축하려고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티베트에서는 지난 날의 옛 제자이자 동문, 가르단에 대한 동정적 견해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황제의 눈에 제파 샹게 가초와 티베트는 가르단의 협조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제파가 보낸 사절들을 모두 체포 했습니다. 강희는 가르단을 움직인것이 제파의 뜻이라고 하여 그를 비난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있었다면 군사적 침략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르단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르단은 어디로 갔을까. 그 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종적은 묘연했습니다. 확실한건, 체왕 랍탄에게는 돌아갈 수가 없고, 러시아는 패배한 칸에게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저 멀리, 과거 동족을 두고 떠난 토구트로 가르단이 찾아가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은 코코노르를 가로질러 라싸에 있는 제파 샹게 가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는 것 정도.


 강희는 다시 한번 움직였습니다. 세상에서 도움을 구할 곳이라고는 없는 가르단이라는 외로운 늑대를, 이 땅에서 영원히 없애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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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09.15 몽골은 유목민족이라 사막이나 초원에서 문제없이 잘사는지 알았더니 얘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생하네. 그리고 강희제는 운도 있었던거같고. 영락제는 5번이나 출정하고도 만나지 못했는데
  • 작성자love | 작성시간 12.09.15 유목민족이 삶이 더 고단해여..식수며 모든물자를 스스로 얻어야 하니..가축은 늑대같은 야생동물한한테 보호할려고 밤새 잠도제대로 못자고..저 저렇게 비적떼같은 약탈자들도 신경써야 하니..저 시대국가중에 조선 초중기는 세계적으로 양민이나 노예가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국가중 하나였을겁니다..호란이나 왜란만 안일어났으면..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9.15 나름 강인한 인물인 강희제조차 몽골에서 생활해보고 하는 말이 "세상 천지에 할하 땅 같은 곳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나라 시절에 흉노에 갔다가 억류된 소무 등이나 여인들이 황량하다고 했던 시가 괜히 하던 말이 아니죠.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9.17 몽골 사람들은 초원에서 배두드리고 사는 줄 알았더니.. 저치들도 굶고, 고생하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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