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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44) ─ 개가 되고 돼지가 되어라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0.01|조회수771 목록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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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자 책봉을 둘러싼 항자들의 싸움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사황자 윤진은 이제 다른 황자들의 형제가 아니라 그들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제 윤진은 옹정제가 되었는데, 중국 고유의 오랜 관습에 따르면 천자의 이름은 그것이 불려질때, 그리고 문자로 쓰일때는 엄격하게 제한이 되어 있는 존엄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외경의 대상인 천자의 이름을, 형제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신하가 된 자들이 자신의 이름자로 쓰는것이 허용될 수는 없었습니다. 형제들의 돌림자인 윤(胤)은 이제 윤(允)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중국은 가장 오랜 예전부터 절대적인 황권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곳이고, 그 독재 황제에게는 형제도 없습니다. 관념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황제 앞에 나서는 순간 모두 신하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인간은 모두 신하이고, 신하 이외의 존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옹정제 윤진은 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군주였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면서, 최고정치회의가 설치 되어 네 명의 최고 위원이 임명되었습니다. 팔황자, 십삼황자, 대신 마치, 대신 융과다 등 네 명이었습니다. 이 중에 팔황자는 득의양양해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너무 뻔한 일이었습니다.


 당초에 옹정은 팔황자를 아무 일도 없는것처럼 대하였으나, 그의 행동에 대하여 끊임없이 모든 각도에서 밀정의 눈이 빛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팔황자는 처음에는 선제의 산릉을 짓는 공사를 감독했고, 옹정이 검약가임을 알고 있는 팔황자는 될 수 있는 대로 공사 예산을 절약했습니다. 예컨대 선례대로라면 능을 쌓기 위하여 필요한 적토는 베이징에서 운반해 와야 하였지만, 운임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현지의 적토로 벌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옹정은 "선제의 산릉 공사를 허술히 하는 것은 짐에게 불효의 악명을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라는 질책을 내렸습니다. 다음에는 황실의 목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목장에는 쓸모 없는 말이 너무 많아 팔황자는 숫자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옹정은 "선제가 하던 방식이 너무 사치스러웠다는 것인가. 만일의 경우 말이란 아무리 많아도 쓸모 없는 일은 없다." 라며 나무랐습니다.


 그 다음은 내무부의 인원관리였습니다. 최초의 인원관리 계획은 지나치게 사정을 봐주었다고 하여 옹정에게 야단을 맞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인원을 대폭 줄이자 이번에는 쫓겨난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해도 비난을 당하고, 저렇게 해도 비난을 당하는 와중에, 내무부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팔황자에게 따졌고, 사태는 폭동으로 번지기 전에 가까스로 진압은 되었으나, 옹정은 이것마저도 타인의 죄까지 스스로 뒤집어써서, 인기를 얻고 세상의 동정을 사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면서 그를 공격했고, 팔황자는 이제 친황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보통의 황족의지위로 강등되었습니다.


옹정은 선제 강희 말기에 벌어진 일을 조정에서 꺼내면서, 여러 황자들이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붕당을 만들어 대사를 도모했다면서 비난 했습니다. 붕당을 이룬다는 것은 청나라 조정에 있어서 가장 금기시 되는 일인만큼, 이 비난의 강도는 매우 강했습니다. 1724년 11월에 들어 옹정은 2일, 13일, 그리고 14일 등 세 차례에 걸쳐 팔황자를 마구 비난하고 욕했고, 그 내용과 태도는 갈수록 강경해졌습니다. 12월, 옹정은 이미 죽은지 7년이나 지난 팔황자의 심복 중에 한 사람의 묘에, "불충과 불효를 저지른 사악한 묘" 라는 비석을 세우게 했습니다.


 옹정은 선제의 사적을 조사하기 위하여, 강희 연간에 황제가 팔황자에게 내린 어필 편지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팔황자는 태워버렸다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친필문서 중에서는 강희가 엄하게 팔황자를 꾸짖는 내용도 있을텐데, 그런 내용이 조정의 손에 들어가면 역사 기록으로 남아 나쁘게 서술되어 만대에 비난을 받을텐데, 그런 취급은 당할 수 없었습니다. 팔황자는 입에 칼을 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지가 지켜보고 있는데 결코 거짓은 아뢰지 않는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일가(一家)가 모두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옹정은 여기서 일가(一家)라는 말을 트집잡았습니다. 팔황자의 일가라면 당연히 황족들입니다. 옹정은 팔황자가, 청조가 망하기를 하늘에 빌고 있는것 가다며 황족의 적을 박탈하고 일평생 평민으로 살아가게 하고는, 내무부 안에 있는 특별 독방에 감금시켜버렸습니다. 팔황자도 자포자기 했습니다.


 "지금까지 별로 식욕이 없는데 잘 된 일이다. 이제부터 먹을 수 있는 한 먹겠다. 몸을 더 더욱 소중히 여겨서 살 수 있을때까지 살련다.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는 돌이라도 갉아 먹으며 버텨 내어 보이겠다."


 그러자 옹정은 잔인하게도 말했습니다.


 "이 자는 이미 황족이 아니다. 일개 평민이다. 황족으로 착각 할 수 있는 이름을 가져서는, 다른 형제에게 폐가 된다. 이름을 무어라 붙였으면 좋을지 본인에게 물어보라."


 팔황자는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개."


 "좋다. 개라고 해라."


 옹정은 그 자리에서 팔황자를 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만주어로 개는 아키나(阿其那)라고 하였는데, 그 후로 조정에서는 항상 팔황자를 칭할때는 절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키나라고 불렀습니다. 팔황자가 아키나로 이름이 바뀐것에 대한 이 설명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에서의 언급인데, 정남기 도통 음덕이라는 사람이 이름을 바꾸자는 상소를 올려, 옹정이 개명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권력 앞에서는 형제도 없다고 하지만, 이와 같은 처사는 너무한것으로 여겨졌고, 옹정이 엄격한데 반해 팔황자는 일찍부터 관대하고 인자하다는 평판이 높았던 만큼, 갖가지 풍문이 바람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10월, 난이 일어나 팔(八佛)이 죄수가 되다……옹정제가 가해자고 팔황자는 피해자다. 군민은 새 임금을 원망한다. 군민이 함께 궐기하자."


 팔불이라는 말은 말할 나위도 없이 팔황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성격이 온후하여 자주 부처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옹정은 문무대신들을 모아 논의를 했고, 아키나(팔황자)를 불러 행동을 심의하였고, 40여항이나 되는 긴 죄목을 만들어 그를 탄핵했습니다. 그런데 옹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키나가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은 짐을 화나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짐이 그에게 형벌을 내린다면 천하의 어리석은 자들이 이를 구실로 짐에게 악명을 씌우려고 들 것이다. 이것이 아키나의 진짜 속셈이다. 그런 수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키나는 계속해서 감금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옹정과 사이가 나쁘고 팔황자와 아주 친하였던 구황자 역시 박해를 당했습니다. 특히 구황자의 생모는 옹정의 생모와 격렬하게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옹정은 변방에 있는 십사황자를 불러들여 견제를 하려고 함과 동시에, 구황자를 사천 성의 시닝으로 파견했습니다. 변방에는 옹정의 심복인 연갱요가 있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은 연갱요에게 통제가 될 것입니다.


 연갱요의 감시하에서 구황자는 죄수나 다름없이 감금을 당했고, 모든 행동은 보고가 되었습니다. 구황자는 황제가 보낸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야심도 없다. 출가해서 세상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자유롭게 해줄 수 없겠는가?"


 그런데 옹정은 출가라는 말을 트집 잡았습니다.


 "출가하면 형제지간이 아니다. 세상을 버리면 군신도 아니다. 형제도 군신도 아닌 신분이 되고 싶다는 말인가."


 또 구황자가 사람의 눈을 피해 베이징의 십황자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압수당했습니다. 편지에는


 "기회를 늦어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떻게든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편지가 발각된 이후에 구황자는 이후에는 베이징의 가족들과 로마자로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구황자는 크리스트교에 매우 강하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서양인 선교사와 교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던 편지도 발각이 되자, 옹정은 암호로 편지를 교환하는것은 첩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비난하며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면서 구황자의 황족 신분을 박탈해 버렸습니다. 황족이 아닌 이상 개명을 해야 했는데, 구황자의 원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옹정은 "돼지라고 하라." 면서 그의 이름을 고쳐버렸습니다.


 만주어로 돼지는 사스헤(塞思黑)가 됩니다. 그 후로 구황자의 이름은 사스헤가 되었고, 28개의 죄상이 열거되어 탄핵당했습니다. 사스헤는 처벌을 받고 변방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멀면 멀수록 내겐 유리하다."고 말한 것이 발각되어 수도에서 가까운 독방에서 감금당했습니다. 옹정 4년 8월 그는 죽었는데, 옹정은 사스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 아키나도 멀지 않은 시기에 사망했는데 적당히 처리해버린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위풍당당한 대장군 십사황자 윤제도 괄시의 대상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옹정은 그를 온갖 구실로 공격하면서, 그가 변방에 나가 있었을 당시 서북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지 않았는냐고 윤제의 측근들에게 추궁했고, 그들이 부정하자 거짓으로 윤제를 비호한다면서 처벌하여 영원히 족쇄를 채우도록 했습니다. 윤제에게 글을 가르쳤던 사람도 불경하다면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러는 마당에 옹정과 윤제의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질 일이었고 1723년 5월 23일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태후가 윤제를 만나려 하자 옹정이 화를 냈고, 그러자 태후가 기둥에 머리를 찍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형제라서 아키나와 사스헤와 같은 대우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옹정은 윤제를 강희가 매장된 산릉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내려, 모양새 좋게 그를 연금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는 건륭이 즉위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났습니다.


 황위 계승이라는 전쟁에서 패배자가 된 옹정의 형제들은 엄청난 수모를 당해야만 했지만, 그런 대우를 받은것은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옹정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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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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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10.02 그런데 이창희(이병철 둘째아들)이 활발하게 사업을 펼치다가 백혈병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됬는데요,그때는 아들들이 어리고 경영수업도 제대로 못받은 상태여서 불안했는데 이창희는 이건희한테 아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어요.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10.02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18/2010081801942.html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10.02 위 기사보면 새한이 경영을 하다가 어려워지니까 삼성에 지원을 기대했는데 지원은 커녕 다른 빚쟁이보다 먼저 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망했다는군요.경영이야 냉정하게 해야 성공하는거고 친척이라고 도울 의무같은거가 있는거도 아니지만 다른 빚쟁이보다 먼저 자금을 회수했다니...좀 무섭군요
  • 답댓글 작성자리헨 | 작성시간 12.10.02 삼성가야 피도 눈물도 없는 집안 아닌가요? 그 둘째아들의 아들인가? 암튼 자살한 자손도 있는데 조문도 안왔다고 하던데...친척간이 아니라 그냥 남남보다 더 한것 같던데요.
  • 작성자리헨 | 작성시간 12.10.02 독재군주는 다 같네요... 역시 숙청없이는 안되는구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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