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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55) ─ 미얀마 전쟁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24|조회수696 목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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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는 금천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를 소모했지만, 결국 뜻하는 바는 이루어내었습니다. 어떠한 원정이던 엄청난 기회비용이 드는것은 분명했는데, 하지만 모든 전쟁에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승리' 라는 목표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투자금만 날리고 아무 소득도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건륭제의 제위가 10년을 넘기던 시점부터 버마는 정세가 묘해졌고, 국왕이 포로로 잡혀 강에 익사하는가 하면, 그 혼란에 다른 부족이 일어나 거병을 하고 겨루는 어지러움이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버마가 평정되는 과정에서, 청나라에 복속되었던 여러 토사부, 즉 청에 복속하는 대신 세습 자치를 하는 여러 세력들이 침공당했습니다. 청나라로서는 운남 방면의 경계가 위험해지는 동시에, 토사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도 출병을 해야 했습니다.


 이 무렵이 건륭 30년이었습니다. 1765년에 해당하는 시점입니다. 이때 버마의 군주를 보면 꼰바웅 왕조의 신뷰신(Hsinbyushin)이 집권하고 있었고, 그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당시, 청나라의 운귀 총독이었던 유조라는 인물은 청렴하다는 평판이 있었지만 군사의 일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중국 남부의 적대적인 이민족들은 전대에 많이 평정되어 그로서도 별 걱정은 없었을텐데, 훨씬 더 남쪽에서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빈다. 유조는 버마군이 구룡강, 즉 메콩강 일대의 토사들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군대를 보내 방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제독 달계, 총병 유덕성, 참장 하경조, 유격대장 명호라는 인물들에게 군사를 보내 서둘러 진군하도록 했습니다. 당시의 병력은 600여명이었습니다.



메콩강의 돌고래.



하지만 오랜 평화로 남부의 청나라군은 기강이 땅바닥에 떨어져있어, 청군은 모두 대패했습니다. 특히, 어떤 부대는 행군 할 시에 병장기는 모두 수레에 실어버리고, 병사들은 빈손으로 걸어가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줄행랑을 놓은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수하 지휘관들이 유조에게 거짓말로 실적을 꾸며 보고하는 통에, 건륭제에게는 승리의 보고가 연이어 이어졌습니다.


 건륭은 처음에는 이를 바른대로 믿고 대승을 거둔줄로만 알고 좋아라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기민한 사람이었고 일단 지도와 부대의 움직임을 살펴보고는, 만약 청군이 보고대로 대승만 거두었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상황들이 나온것을 보고 사태가 돌아가는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조에게 유지를 보냈습니다.


 "보고는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은 녹영병들이 평소 거짓말에 능숙해 전공을 날조하여 보고하는 것이다. 군사를 잃은 것을 거짓으로 과장하여 사실이라 믿게 하였다."


 이 부분에서 건륭은 수천킬로미터 남부에 있는 유조보다 더 뛰어난 식견을 발휘했습니다. 건륭은 유조를 호북순무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강등을 시켰다가, 다시 이 호북순무 직을 박탈하여 운남에 머물게 했습니다. 만회를 하고 싶으면 공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차례 질책을 받은 유조는 결국 불안해하더니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을 했던 일선 지휘관들을 형부에 넘겼으며, 유조의 후임으로 양응거(楊應琚)라는 인물을 운귀 충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양응거가 부임하자 사태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해서 버마군도 천천히 후퇴했고, 청군은 보이(普洱) 일대를 대부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양응거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상소르 올렸고, 건륭은 이를 신뢰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너무 먼 곳이니, 잘 살펴보아 물러나도 무방할 듯 싶으면 싸움을 마무리 지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에 양응거가 건륭에게 "자신은 공을 탐하는 것이 아니며, 적당한 기회에 미얀마를 정벌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라는 뜻을 설명했고, 건륭은 이에 그의 행동을 승인했습니다.


 그리하여 건륭 31년인 1766년 9월 12일. 양응거는 보이를 출발하여 미얀마로의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 사람을 보내 "변경에 청군이 50만여명이 있고, 대포가 천여문이 있다." 면서, 항복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에 미얀마군은 수만 군대를 이끌고 대응하러 나섰습니다. 이에 청군은 여러 전투에서 몹시 어려움에 처하였고, 장수들도 여럿 죽었습니다. 하지만 양응거는 조정에는 자신이 미얀마 부대를 벌써 1만여명이나 박살내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항복을 윤허' 하는 방식으로 적당히 싸움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리하여 '청군은 적을 여러 차례 섬멸했고, 버마의 두목이 병영으로 찾아와 귀순을 간청하고 있' 다는 식의 보고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건륭은 이 보고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격노하여 분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보고한것을 보면 수차례나 적군 1만여 명을 죽였다 하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디인가? 네가 말하는 승리라는 것은 마음대로 과장하여 전공을 꾸며내는 녹영의 악습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양응거도 모든 지위를 잃고 목이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양응거 뿐만 아니라 휘하 장수들도 대부분 죽었습니다. 건륭은 이렇게 된 바, 미얀마와의 싸움을 최후의 최후까지 완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이 대청제국의 전성시대인 것을 생각해 보라. 어떤 일인들 이룰 수 없겠는가? 미얀마의 도적들이 내지를 침략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그 간교한 무리들을 징벌함으로써 제국의 위세를 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중도에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 제국은 지금이 전성시기이다. 보잘 것 없는 미얀마를 멸망시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에 파견된 사람은 명서라는 사람으로, 회족과 준가르와의 싸움에서 여러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며, 금천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부항의 친조카였습니다. 그는 1767년 현장에 도착하여 새로 전략을 세워 건륭에게 보고했습니다. 건륭은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이번에 출병한 우리 군대의 전력은 매우 강하여,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어 짐에게 승전보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의 도적들이 우리 군사의 위세에 눌려 죄를 반성하고 패배를 인정하더라도 명서 등은 절대 과분한 자비를 베풀어 항복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에 저들의 소굴을 뒤집어 괴수를 죽이고 악한 무리를 섬멸하지 않는다면, 국위를 떨칠 수 없게 되니 항복을 받는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의 군사가 아와(阿瓦 당시 미얀마 수도)까지 이르러 성을 격파하면, 곧 반역의 수괴를 참수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토벌하여 죄를 철저하게 응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적절하게 토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만을 영원히 굴복시키리라."


 하지만 실제 사태는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명사는 1만 7천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군하고, 또 액이경액이라는 지휘관은 9천여명을 이끌고 진군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미얀마의 수도인 아와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명서가 진군을 할때, 연일 큰 비가 쏟아져서 행군이 지체되었습니다. 명서는 억지로 진군하였고 적군 수천여명을 격파하고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면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명서 자신도 눈부상을 당했지만 그래도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공에도 불구, 병사와 말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군량까지 떨어져 청군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명서는 계속 진군하여 아와에서 칠십여리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지만, 군량이 바닥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명서는 군단을 돌리려고 했지만, 다른 길로 돌아올 액이경액이 뒤늦게 도달하여 적에게 완전히 격파당할까 두려워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액이경액은 적과 싸우다가 병사하고, 그 동생 액이등액은 전세가 불리하자 병사를 철수시킨 뒤였습니다. 하지만 명서는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명서는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 뒤를 미얀마 군이 뒤쫒았습니다. 명서는 싸우다가 퇴각하고, 싸우다가 퇴각하고를 반복하여 하루에 삼십여리를 나아가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명서는 적군의 복병에 걸려들어 4천여명이 죽어버렸고, 미얀마 오지에서 고립되어 중국 내지와 완전히 연락이 끊어져버렸습니다. 명서는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군대를 어떻게든 전진시켰지만, 최후의 순간에 5만여명이 되는 미얀마군이 나타나자 살아 돌아갈 희망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명서는 최후의 순간에 앞서 부하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주어 보내고, 여러 장수들에게 병사들을 나누게 해서 밤을 틈타 달아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수백명만을 이끌고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수만여명의 적과 격돌했고, 부관들도 목에 화살을 맞고 죽어갈때 부상을 입고, 적에게 잡히기 전에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건륭은 처음에는 명서가 승승장구하여 진군하자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 군사를 정비하여 퇴각하라고 권고했지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건륭은 자신이 적을 과소평가하여 명서가 죽었다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전쟁 수행에 대한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이 시점에서 서로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유지하면 어떠한가, 하는 의도를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무력 수단에 의존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륭인지라,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금천 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부항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다시 한번 진군하도록 했습니다.


 부항이 이끄는 군대도 처음에는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앞을 가로막는 성들은 가파른 산과 강에 인접한 천혜의 요새들뿐이었고, 성벽이 견고하여 대포를 쏘고 화약을 폭발시켜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벽에는 수문들이 있어 적은 강을 통해 배를 보내 물자를 끊임없이 공급받아, 공성전을 벌이는 의미도 없었습니다. 


 청군은 수군을 동원하여 뱃길을 막아버렸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청군은 무려 4만여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전투도 전투지만, 지방의 풍토병도 무시무시했습니다. 게다가, 사령관 중에 한명이었던 아리곤이라는 인물이 11월에 병사했고, 총지휘관인 부항마저 병에 걸려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 마당이니 전투는 더 이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부항은 미얀마와의 화의에 동의했습니다. 내심 미얀마도 피해가 극심했기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건륭도 이렇게 되자 더이상은 고집을 부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미얀마가 청국의 신하국이 되고, 조공을 바치는 정도에서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청군은 서둘러 귀환하였습니다.


 사령관이었던 부항은 돌아와서 황제를 알현했으나, 남쪽에서 얻은 병세가 약화되지 않아 결국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미얀마 원정에서 청군은 수많은 병사와 장군을 잃었습니다. 운귀 총독 유조와 양응거, 장군 명서는 전투에서의 패배로 자살하거나 살해당했고, 총병 왕옥정, 색주, 호대유, 이전, 덕복계, 이훈, 본진충, 입주, 엽상덕, 시위 부령안, 참찬대신 액이경색, 부도통 면강, 이주, 부도어사 부현, 호군통령 오삼태, 산질대신 갈포서, 부장군 아리곤, 경략 부항 등은 모두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늪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한 당시 소모된 물자에 대해, 전쟁을 반대하던 인물인 서혁덕 등이 손실을 우려하여 미리 말한 바에 따르면, 그 지역까지 병사 1만여명이 출병할 경우에 모두 3만 8천필의 말이 필요하고, 녹기병 3만이 출병할경우 5만 7천필의 말을 필요로 하며, 병사가 4만 명이면 하루에 쌀이 4백석이 필요하고 말이 10만필이면 하루에 쌀 1천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10개월동안 군사를 움직이면 42만석의 쌀이 소모되고 운송을 하는데 백만여명을 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는 추정치일 뿐이고, 또 전쟁을 막기 위해 한 소리이니 이것이 완전히 정확한 수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만큼의 나돌만큼, 이 전쟁에서도 많은 군비가 소모되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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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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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11.24 새삼스럽게 중국이 크다는게 느껴지는군요... 미얀마와 국경이 닿아있다니; 그나저나 저번 준가르 정벌때도 그렇고, 이 미얀마 정벌도 그렇고... 기후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전투력과 병참능력이 꽤 의심이 된다는...
  • 답댓글 작성자어하라 | 작성시간 12.11.24 그냥 건륭제의 역량이 강희제보다 딸리는 거죠 ㅡㅡ;;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11.24 강희는 준가르를 이겼는데 건륭은 버마에서 애먹었네요.하지만 건륭은 준가르를 이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족을 없애버렸자나요.몽골계 유목민을 끝장낸건 참 대단하지만 다른 전쟁들,예를들어 버마나 베트남등 다른 나라와 싸운거보면 건륭의 군사실력은 그저그런듯.준가르야 건륭이 군사천재가 아니라 유목민족이 발리는 시대가 됬으니까 그런거겠고.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11.25 중국이 상대한 국가들 중에서 우선순위를 따져야지라... 북경-화북 옆동네인 준가르 애들이랑 비교하면- 저어~기 운남 귀퉁배기 국경 맞댄 미얀마나, 광동-광서에 붙어먹은 베트남 같은 나라들은 사실 큰 위협이 안되었으니까요. 걔들은 조선보다도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거리 좀 보시유~ 미얀마나 베트남 전선을 북경에서 관리-감독한다는 것은, 근세에 포르투갈 리스본에 지휘본부를 두고 동유럽을 지나 러시아랑 전쟁하는 수준임...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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