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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60) ─ 사상의 종말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28|조회수766 목록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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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륭 60년은 건륭 개인에게 있어서 영광스러운 시기입니다. 황제에 등극한지 무려 60여년이 지난 시기로, 건륭이 이미 소년 시절은 벗어나서 황제가 되었다는것을 생각하면, 그처럼 오랜 시간,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제국을 다스린 군주는 없다시피 합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건륭의 재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변방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미 건륭 중기를 기점으로, 백성들의 불만은 위험 수위를 이미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관료 사회의 부패였습니다. 건륭 60년, 귀주에서 수만 명의 묘족이 다시 한번 들고 일어섰습니다.


 묘족들은 본래부터 생계가 곤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족 지주나 청나라 병사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속이고 착취했고, 이를 조정하고 감시해야할 관리들 역시 자기들 뱃속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묘족들이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하지만 건륭은 이번에도 복강안을 사령관으로 내세운뒤, 대만 평정에서 사용했던 술수인 이간책을 사용해 그들 중 배신자를 만들었고, 결국 힘이 약해진 봉기군을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비란 없었습니다.


 건륭제 시기에도 이미 여러곳에서 반란의 징후들이 보였지만, 그래도 건륭은 대부분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건륭이 가장 자주 즐겨 쓴 수법이 반란군을 분열시키고 기만하여 약화시켜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 내, 변방의 이슬람인들이 신구 교도간의 종교적 분쟁이 일어나자, 건륭은 이를 진정시키는것보다도, 오히려 대립을 부추겨서 더욱 분쟁을 격화시키고, 반항하는 자들을 가족까지 모조리 학살하고, 진압된 후에도 소탕전을 벌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륭의 기만 행위는 반란의 진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보다도 훨씬 거대한, 가증스러운 기만을 벌였습니다.


 기만의 대상은, 바로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 건륭제의 뒷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들입니다. 건륭은 자신의 후대인들을 모두 속이고자 했습니다. 





청나라 시대의 문자의옥(文字─獄)은 그 악명이 높습니다. 청은 만주족의 왕조이고, 한줌도 안되는 만주족이 수억명 한족의 위에 군림하고 있기에, 어거지로라도 자신들을 신화적 존재, 천명을 받은 존재로 꾸며내어 정치적인 위상이 자리잡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자의옥은 청나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강희와 옹정의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건륭 시대의 대탄압은 강희, 옹정 시대의 모두를 합친것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실상 강희와 옹정 시대의 검열은 그 이전 왕조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만드는 작업과 별 다를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건륭시대 문자(文字)는 정말로 옥(獄)을 치루었고, 문인들은 손발이 묶였으며, 그들의 책은 한낱 휴지덩이로 전락하여 내용이 마음대로 바뀌어지거나, 금서가 되거나, 혹은 불에 타서 완전히 이 세상에서 소멸했습니다.


 본격적인 탄압의 시작은 건륭 16년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이 해, 청나라의 운귀 총독 석색이라는 인물이 건륭에게 보고를 했는데, 귀주에서 어떤 약재상이 위조된 상주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상주문 내용에서 건륭이 남순을 하면서 벌인 다섯가지의 이해할 수 없는 죄악을 거론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참혹한 문자옥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건륭은 이에 깜짝 놀라면서 철저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위조 상소문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의 범위가 점점 커지면서 엮어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각지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증명해보이려고 사적인 감정으로 거짓인 사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따라서 원한을 대신 분풀이 해버리려는 사람, 이에 놀라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 윗선의 압력때문에 허위진술을 하는 사람들 억울한 피해자가 점점 늘어나, 그 불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공식적으로 체포된 사람만 천여명을 넘겼습니다. 조사를 받은 사람은 아마 10배는 많았을 것입니다.


 이에 어사 서성이 상소문을 올려, 건륭에게 여러 폐단을 지적하고, 지금처럼 요란하게 조사할게 아니라 조용히 최초 유포자만 비밀 수사로 잡으면 된다고 하였지만, 건륭은 대단히 격노하여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고작 만주의 노예인 네가 이 같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구나. 만약 네 조상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느냐? 그 문서를 보고 퍼뜨린 자들부터 차례로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범을 찾아내겠는가?"


 이리하여 조사는 강도가 약해지기는 커녕, 추진력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관원들이 모조리 교체되는등 오히려 강도만 더 높아졌습니다. 전국에서 순식간에 피바람을 불었고, 조금이라도 위조문서와 관련이 있거나 조사가 지지부진한 관원들은 굴비처럼 엮여 들어 죗값을 치루었습니다. 이 사건은 발생 2년만에 강서의 한 부자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그들이 능지처참을 당하는것으로 끝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문자의 옥은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습니다. 건륭의 의식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건륭 21년, 산동사람 유덕이라는 인물이, '흥명흥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도 총독 백종산은 그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겠다고 보고했는데, 건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때려 죽이는것" 을 허락하지 않고, "더욱 무겁게" 처벌 할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반역문자 사건이 발생할 당시, 주범은 무조건 능지처참을 당했고, 심지어 의심만 가는 사람도 모두 죽였으며, 게다가 어린아이까지 용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물론, 청조의 입장에서 반청사상을 품은 학자들의 말은 분명히 통제해야할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엮이는 사람들은 전혀 이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재수 없이 모르고 단어를 썻다는 이유만으로 잡혀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건륭 40년. 광서 평남현에 글방 선생 오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60을 넘었던 사람입니다. 생계가 어려웠던 그는 당시 사회의 폐단을 보고, "황제는 만곡의 은혜를 널리 베푸셨는데, 빈민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고 탄식하여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하는 대책을 글로 작성했습니다. 흉년에 대비한 사창제도와 의창제도, 도적을 없애기 위한 연좌법, 잡곡 재배의 권장, 승려를 줄이는 일 등 자기 나름대로의 대책을 열심히 적어 건륭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바쳐진 내용 중에 "성상의 덕은 크고 넒었으나, 그 은턱은 널리 미치지 못했다." 라던지, 이 문구 가운데 "홍" 이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이것이 건륭의 본명이라 피휘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오영은 전혀 불충한 의도는 없었고, 단지 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충심은 능지처참으로 대신해졌고, 그의 아들, 동생, 조카 모두가 죽었으며, 열다섯이 안되는 아이들은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강소성 화정에 살던 채현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평생 지은 시와 산문을 모아 '한어한한록' 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채현이 지부, 어사 등 관리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기에 그들은 원망하여 책 내용을 꼼꼼히 살펴 트집을 잡았고, '붉은 색을 잃으면 순수한 색이 아니거늘, 이종이 왕을 칭하는구나.' 라는 구절이 불충한 의도가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던 채현은 무죄를 확신,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건륭은 그를 죽였고, 가족들을 흑룡강에 노비로 보냈습니다.


 이상의 여러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는 점이, 실제 건륭 시대 문자옥의 대상이 된 사람이 반청복명 단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 한족 문인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입니다. 건륭 역시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문자의 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져만 갔습니다.


 


건륭제 시기의 문화 사업으로 빛나는 가장 큰 사건은 '사고전서'의 편찬입니다. 고금의 서적을 집대성한 이 사업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사업이라, 필사된 책만 3458종에, 권수로 따지면 80000권에 이르고, 제목과 해설만 기록한 책은 6788종, 모두 93000권에 이르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입니다. 게중에는 중국 내의 책은 물론, 다자이 슌다이, 네모토 부이,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 드으이 저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자만 마냥 빛나고 위대하기만 할 이 거대한 사업의 추악한 실체는, 극도의 사상 탄압과 검열이었습니다.


 건륭은 사고전서를 편찬한다는 구실로, 전국의 수많은 책들을 검열,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 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그 중 정치성이 짙다고 간주되는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었고, 일부는 불에 타버렸습니다. 지식인들은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책에서 조금이라도 반청의 내용이 보이면 모두 태워버렸고, 상투적인 내용만을 조심스럽게 쓰게 되었습니다.


 건륭은 이 일에 대해 대단히 의욕적이었고, 지방 관원들을 달래기도 하고, 혹은 협박하기도 하면서 일에 성과를 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관원들은 살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불온 서적'의 색출을 위해 활보하였고, 청제국 전역의 장서가들은 모두 조사의 대상이 되어, 수시로 관리들이 집에 드나들며 검열을 벌였습니다. 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책방에도 전문요원들이 출몰하여 일일히 수색을 벌였고, 조금이라도 특이한 책이 발견되면 바로 압수해버렸습니다. 책방 주인이야 억울한 일이지만, 처벌받지 않는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술이 발전하기를 바라는것은, 산에 불을 질러놓고 나무가 자라기를 바라는 행위와 같습니다. 건륭 42년, 왕석후라는 사람은 여러 차례 진사시험에 낙방하자, 책을 쓰는데 열중하여 한 자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강희자전에 나오는 시운은 1만자도 넘으나, 학자들이 많이 알지 못하고 사전을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몰라, 매번 힘들게 읽고 나서도 망연할 따름이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저 학술적인 관점에서 아쉬움을 표방한 일이 불과했는데, 건륭은 이것이 대역무도한 행위라며 왕석후의 목을 베어버렸고, 그의 처와 며느리, 손자는 모두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안휘성 천장현 사람인 정수류에게는 왕원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시를 짓기를 좋아하던 왕원은 그러나 어느날 중병으로 기억력을 상실, 시를 짓기는 커녕 글씨조차 못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반백치가 되어버린 친구를 본 정수류는 너무나 비감에 젖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에 대한 불만을 글로 작성했는데, "방자하다." 는 이유로 잡혀서 목이 베였습니다.


 건륭 50년, 양강 총독 살재라는 인물은 유우기라는 전대의 문인이 쓴 신여당집과 청풍당집이라는 문집에, "명(明)월을 마주하여 좋은 친구로 삼고, 청(淸)풍을 마시니 취기가 돋는구나." 라는 구절이 있고, 또 감히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더럽히는 문구가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이게 말도 안되는 소리임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명월, 청풍 운운하는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와는 아무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 유우기는 순치제 시절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 따위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유우기의 고손자는 잡혀와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한림학사 호중조는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흐리고 맑음(濁淸)을 논하네." 라는 구절이 있는 시를 썻습니다. 그런데, 건륭은 감히 탁이라는 글자를 국호인 청 자 앞에 사용했다고 그를 죽이고, 스승과 친구들도 처벌했습니다.


 서술기라는 사람이 지은 시에서는 "내일 아침 다함게 청도에 가고자 하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억지 해석 끝에 "명나라를 부흥시키고 청조를 무너뜨리자." 라는 해석이 되어버렸습니다. 서술기는 이미 그때 죽어있었지만 무덤에서 파내어져 목이 베어졌고, 아들은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손자와 시집을 교정했던 모든 사람들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광기의 시대였습니다. 이 당시 문인들의 상태에 대해,


 "서간으로는 절대 교우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쓸모없는 종이를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불살라 버렸다."


 고 합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우스울 지경이었습니다.


 검열의 대상이 된것은 불온서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민간 희곡에까지 검열의 손길이 미쳤습니다. 시와 책이 문인들의 작품이라면, 희곡은 민간의 창작 애술입니다. 하지만 건륭제 시대, 민간의 희곡들은 모두 조정의 검열을 당해, 대사를 고치거나 내용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명나라 말기의 역사를 다룬 책, 변방의 문제를 다룬 책, 국방의 문제를 다룬 책, 민족 등을 다룬 책, 송나라 시대나 원나라 시대를 다룬 책들은 그 내용이 적건 작건간에 모조리 불타버렸습니다. 특히, 조상들의 문제 때문에, 여진이라는 글자, 요동이라는 글자가 있기만 해도 모조리 태워졌습니다. 조정에서 임시로 불온서적을 보관하던 방략관은 책으로 넘쳐났으며, 도저히 넣어둘 공간이 없어 앞뜰까지도 책을 산처럼 쌓아놓았습니다.


 추정되는 숫자로 이때 검열 등으로 소실된 책은 모두 3000종, 총 70000여권에 달합니다. 이는 사고전서에 포함된 책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 말고도 내용의 일부가 고쳐지거나, 훼손되어진 책들은 그 숫자를 감히 추정하기도 힘듭니다.


 사상의 종말기였습니다.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불타올랐고, 시국을 다루는 책도 불타올랐고, 시문을 다루는 책들도 불타올랐습니다. 강희제 시기, 청조는 정치사상적 환경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호기심과 활발한 학습 분위기가 제법 조성되었지만,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 오히려 이는 쇠퇴하였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감히 정치를 논하지 못하게 되었고, 현실의 문제에서 손을 때어버렸습니다.


 우습게도, 이러한 기조가 고증학이라는 학문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 학문의 전성기는 건륭 - 가경제의 시대로, 이때가 문자의 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입니다. 지식인들은 입에 재갈이 물리어지게 되고, 반정부 언론의 기능도 불가능해지자, 학자들은 현실의 시국을 논하기보다는 고전을 연구하면서 고증학 연구에 열중했습니다. 고증학은 기록과 사물이 판단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일종의 과학이나 다름없는 일로서 개인의 의사가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한대와 당대의 도량형이나 고대 역사 기록 중에 내용이 상충되어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 같은 경우엔 억울하게 몰릴 일 같은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것이 정반대로 소위 말하는 '실제적인 학문'을 하게 하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활발한 사상적 토론과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다면 이것도 전부 공염불일 뿐입니다. 


 수천리의 영토. 수억의 인구.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내는것은, 비판적 어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 선전문적 단어의 조합. 소위 깨어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 눈을 돌려 더욱 과거로 가는 세상. 건륭이 만들어내려던 세상은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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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2.11.29 건륭제 시기에 청나라에 간 조선의 사신 중에 박지원도 있었는데, 그가 쓴 열하일기에 보면 자신과 글로 대화(필담)을 나눈 청나라 관리들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종이를 바로 화로에 던져 태운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런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군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11.29 절대권력이 절대부패로 귀결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 것인가....... 조부와 아버지의 업적들이 ㅜㅜ
  • 작성자번영 | 작성시간 12.11.29 선제처럼 간첩을 잘 활용했으면 부패는 막았을텐데 처벌만 엄하고 단속은 아예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게 해놨네요
  • 작성자▶◀ 치우승천 | 작성시간 12.11.29 독재정치의 폐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군요.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11.30 저런 독재가 60년이 지속된게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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