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63) ─ 1760년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2.14|조회수632 목록 댓글 3






 준가르는 소멸했습니다. 이것은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실체를 그대로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어감을 잘 살리자면, 준가르는 절멸당했습니다. 하지만 청의 서북 진출이 이로 멈춘것은 아닙니다. 극동의 만주에서부터 시작한 청나라의 정복 전쟁은, 이제 투르키스탄 정복을 마지막으로 하여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투르키스탄 남부의 오아시스 지역들은, 15~16세기 수피 형제단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성직자들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준가르는 이에 대해 그들을 인정했고, 대가로 식량을 공급받았지만, 이 이질적인 존재들을 면밀하게 감시했습니다. 전대인 체왕 랍탄의 시대, 체왕 랍탄은 호자 마흐무트(Khoja Mahmut)라는 인물을 투르키스탄의 지배자로 선포했는데, 그는 갈단 체링의 시대에는 감금되어 이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곧 죽었는데, 이후 청군이 1755년 이리에까지 이르렀을때, 청나라 만주족은 죽은 마흐무트의 두 아들, 부르한 앗딘(Burhan ad-Din)과 호자 지한(Khoja Jihan)을 석방했습니다. 이후 형은 야르칸트로 이동했고, 동생은 이리에 머물렀습니다.


 문제가 생긴것은 아무르사나의 반란 당시 였습니다. 호자 지한이 이에 동참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후 야르칸트로 달아나, 그곳에 머물고 있는 형을 설득 했습니다.


 "항복하라는 조정의 명을 따른다면, 우리는 준가르인들처럼 베이징의 감옥에 갇힐 겁니다. 나의 선조 세대들은 다른 이들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제 강력한 준가르 국가가 우연히 무너지고, 우리들을 압박할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기회를 잡아 독립국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중국은 이제 준가르 땅을 차지했지만, 아직 투르키스탄에 대해서는 정책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군대는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고, 설령 들어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능히 그들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제안에 매력을 느낀 형은 그에게 동의했고, 지방의 벡과 이슬람의 명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의 핵심 지역은 쿠챠였습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적에 대하여, 건륭은 즉시 대응했습니다. 장군 야르하샨이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지만, 그는 현지에서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758년 7월 28일 역습을 당해 도망쳤고, 처형되었습니다. 무능한 야르하샨 대신 준가르 정벌에 참여했던 자오후이가 동투르키스탄을 파견되었습니다. 


 호자 형제들은 청나라 군이 접근하기 전, 주변의 야르칸트, 카시가르를 모두 손에 넣고, 농작물을 모두 치워버리고 주변의 땅을 초토화하고 좁은 도시 안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어 청야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야르칸트 근처에서 자오후이는 네배나 되는 적군에게 3달 동안이나 포위당했는데, 행운이 겹쳐 운 좋게 우물을 파내었고, 지하 곡식창고를 찾아내 아사하는것을 피했습니다. 이러한 행운으로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우루무치에서 지원군이 도착해 그를 구했고, 호자 형제는 카시가르로 도망쳤지만 자오후이는 이를 추격했고, 바다크샨에서 그를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지난 2세기 가량 이어진 청나라의 정복 전쟁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동북의 끝에서 시작했던 그들이 마침내 서북 사막의 오아시스들까지 통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파일





 기억도 하기 힘든 아스라한 수천여년 전부터, 세계는 두개의 세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성벽을 쌓고, 글자를 만들고, 무리를 지어, 마침내 거대한 왕조를 세웠고, 왕좌에 앉은 군주들이 있었고, 혹자는 파피루스에, 혹자는 죽간에, 그리고 마침내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여 후대로 그 지식을 전수했습니다. 장엄하다 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강 옆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신(水神)의 노여움에 시달렸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끈기와 희생으로 자연을 정복해나갔습니다. 

 맑은 날이 많고 높은 온도와 풍부한 햇빛은, 일단 물만 있다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의 제한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때문에 일구어서 농사를 지을만한 땅의 넒이에 한계가 있고 농경지와 거주지가 점의 형태로 분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강우량이 조금만 변동이 있어도 작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풍년과 흉년의 변화와 차이는 극심했습니다. 적절히 비가 오는 지방, 그렇지 못한 지방의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이 같은 불균형을 해소할수 있는 방법은 넒은 지역을 '전체'로 만들고 하나의 사회로 통일하여,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땅에서, 고대의 가장 위대한 문명들은 이제 거대한 제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지리적 조건은 주민들에게 농경이라는 생활 방식을 오구하였고, 그들은 후진성에서 벗어나 점차로 그러한 생활방식을 영위하는 주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되어, 유럽과 서아시아, 이란과 인도, 중국의 위대한 문명들은 서로간에 같은 단계의 물질 문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초원과 그 아래로 넒게 펼쳐진 사막과 반사막, 자신들이 선택할 없는 운명의 결과로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미 고대 중국의 역사가가 말했듯이,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2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적응하고, 또 인내하여, 역사의 부침에 동참했고, 인류의 문명사에 굵고 분명한 자국을 남겨 놓았습니다. 


 알 수도 없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의 제국들을 무너뜨린 뒤 갑자기 북방으로 돌아간 스키타이, '신의 채찍' 으로 불리우던 훈족, 북에서 남을 바라보며, 서로간의 모든 역량을 걸고 고대의 가장 강력한 제국과 격돌했던 흉노, 그 절정기에 서로는 비잔티움과 교류하고 사산조와 격돌하며, 동으로 중국의 제국과 극동의 고구려와 마주했던 돌궐, 멀리 북방 바이칼 호 근처에서 일어나, 한 세대도 채 지나기 전에 문명사회의 꽃이었던 북경과 바그다드와 키예프를 함락시켜버렸던 몽골.


 이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잘 알려진 예에 불과합니다. 모든 위대한 문명들의 이야기에서, 서술되지 않는 공백의 공간들. 만주에서 부다페스트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의 북방을 가로지르는 넒은 지역, 그곳은 초워지대였고 그 북방의 끝은 시베리아의 삼림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 문명은 극히 일부만 가능하였고, 이로 인하여 BC 2000년경의 사람들과 AD 12사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게 된것입니다.


 가뭄이 든 해가 되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여기저기 헤매면서 초원을 지나 농경지대의 언저리, 정주문명이 이룩해 놓은 기적과 마주하였습니다. 풍부한 농작물, 곡식으로 가득찬 마을들, 도시들의 호화스러움들. 여기에 매혹된 유목민들이 양떼를 보호해놓은 울타리를 넘어, 막달레니안기의 고대인이 세기를 거슬러 문명의 시대로 진군하고, 장안, 낙양, 개봉, 북경, 사마르칸트, 이스파한, 타브리즈, 코냐, 콘스탄티노플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둔 그들은 자신들에게 패배한 사람들의 위에 지배자로서 왕좌에 앉았습니다. 이제 권위와 전통을 상징하는 왕관을 쓴 이 고대인들은, 중국의 황제가 되고, 페르시아의 샤가 되고, 인도의 군주가 되고, 룸의 술탄이 되어 중국인이 되었고, 페르시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북방을 돌아보면, 초원의 깊숙한 어둠 속에서는 또다른 굶주린 유목집단이 출현하였고, 출세한 자기 사촌들을 목표로 또다시 문명의 세계로 진군하였습니다. 이제 문명의 수호자가 된 이전의 고대인들은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격돌하였고, 여기서 패배할 경우 또다른 고대인이 문명의 세계에서 왕관을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북쪽에선 또다른 유목집단이 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랜시간동안 반복된 어떠한 역사의 리듬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이야기는 종결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문명의 세계는 조그마한 유목민 집단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졌습니다.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주던 말과 귀신도 놀랄만한 그들의 활은, 개량을 거듭한 화약 무기와 가공할 위력의 대포 앞에 무력해져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문명 세계의 군대에게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이었던 깊숙한 초원은, 이제 전근대 거대 국가의 광대한 시스템과 엄청난 보급 체계로 인해 점차 문명의 영역으로 정복되어갔습니다.


 최후의 유목 제국, 준가르와 가장 강력하였던 전근대 국가인 청나라, 이 두 제국의 대결은 그러한 모습을 상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의 인구는 수억명으로 폭증했고, 이는 준가르의 300, 400배에 달하는 비율입니다. 야전에서 전통보병들에 대한 기병의 우위는, 사막까지 동원되었던 화기들의 힘에 상당 부분 저지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또 하나의 대안이었던 초원으로의 탈주에 대하여, 청은 수만, 수십마리의 가축을 동원했고, 하북에서 신강에 이르는 경이적인 보급 체제를 완성시켜 더 멀고 먼 곳으로 군대를 진군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불가능으로 보이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엄연한 현실의 영역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문명은 마침내 초원의 세계를 완벽하게 굴복시켰습니다. 




 또한 이는 청나라의 팽창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만주의 통치자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사회를 조직했습니다. 1616년 만주에서 국가 건설의 일부분으로 창조된 만주 민족은 힘으로 서북 부족들을 통합하는데 전념했습니다. 중국 본토를 점령하는 전쟁에 이르러서, 그들은 영토 확장이나 상업적 통합과 더불어 제도적 변화를 끊임없이 일으켰고, 이는 대부분 성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세기까지, 청은 제도적인 이행과 더불어 확장의 추동력은 끊임없이 유지했고, 이 과정에서 협상과 편입이 진압보다 훨씬 보편적인 수단이었지만, 부드럽고 의례적인 가면 뒤에는 항상 철의 주먹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변경 팽창은 제국의 경제 자원 동원을 촉발했습니다. 전쟁은 엄청난 물자 소모를 필요로 하고, 더 멀고 더 외진 지대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물자 소모를 몇배로 가속화 시켰습니다. 언제나 그랬든, 청나라는 이 경우에도 상황에 맞는 제도적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머나먼 신장에서 청나라의 관리들은 농업이나 광산 개발과 결합된 대규모 둔전을 진척했고, 풍요로운 내지의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썻고, 또 이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에서 수많은 물자들이, 인간의 힘으로 이동했고, 이는 어떠한 사회 유기체적(Social Organism) 활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종합하자면, 이러한 제국의 관료적인 효율성은, 18세 중엽 무렵, 제국의 팽창이 끝났을 시점에 역동성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청나라의 어마어마함을 들어, 이를 발전 도상의 농업 국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산발적이었고, 어떠한 포괄적인 발전이 아니었습니다. 청은 수많은 기획을 시행했는데, 이는 기근이 심하게 들었을때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또 군대가 지역의 시장을 통해 생존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지역들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팽창과 변경의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혁신의 동기와 통제 수단은 느슨해졌습니다. 이제 청은 빈농들에게 철저하게 자원을 쥐어짜내어 다른곳으로 이동시킬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역으로, 이는 지역의 농민들을 한계점까지 학대하고 수탈하는것이, 전 제국의 안보 기반을 침식하는 도미노 현상을 (바로 직접적으로)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 제국을 아우르는 연결은 점차 약화되었고, 개별적인 부패, 공금유용, 허위 보고와 곡물 비축 태만이 이를 뒤따랐습니다. 


팽창기 동안 청의 통치자들은 점점 중앙집권화 되고, 조직화된 관료제를 만들어내 행정개혁을 시작했고, 관료제는 경제 발전이 안보상의 필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상업 자원과 농업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청은 필요에 의해 유럽의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측지 기술을 이용하여 포괄적인 제국 지도를 제작하라고 의뢰했고, 유럽의 공인 무역회사와 일정 부분 유사하게도 서북 변경에서 상업 침투를 촉진하기 위하여 상인들과 제휴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상평창에 곡식을 공급하기 위한 논쟁, 지방세 징수의 합리화를 증진한 옹정제의 개혁, 수리 관리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등의 창조적인 진보등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국의 정보 교역, 상품등의 흐름을 관리하는 능력은 증가했습니다.



 청나라의 이러한 사회 유기체적 동력은 정점에 달한 그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고, 퇴보하였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피터 퍼듀 교수는, 그 정확한 시점에 대해 1760년이라는 시기를 제시했습니다. 즉, 1760년, 청조의 통치자들은 자신드르이 프로젝트가 완수되었다고 여겼고, 그 시점부터 앞으로의 전진이 아니라 뒷걸음질, 최소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 이것은 근대화에 관한 담론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청대 중국에 통합적 시장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에 대해 논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Chuan Han-sheng와 Richald Kraus등이 말한, 소위 시장경제라고 하는것이, 이미 당대 청나라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었으며, 광동, 복건, 절강, 강소 등 동남연안 지역의 면방직을 위주로 하는 특화된 수공업 제품과 안휘, 강서, 호광, 사천, 광서 등의 내륙 지역의 잉여 미곡이 교환된다는 시스템 ─ 소위 '베와 쌀의 교환' 시스템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왕업건이 주장한 내용으로, 1738년 ~ 1740년 사이 15개 성, 1개 도시의 양가(糧價) 동향을 살펴보면, 장강 삼각주 ~ 안휘, 복건, 광동 ~ 사천,호광, 광서 에서 양가가 일정한 격차를 보였는데, 이는 장강 상류로부터 장강 하류로 이동하는 미곡 유통의 특성상 운송비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따라서 장강 상, 중, 하류 지역의 양가 간에는 강한 연동성이 확인되기 때문에, 청대 후기로 갈수록 미곡 시장의 통합도가 증대되었고,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장강을 중심으로 한 중국시장의 통합 정도가 동시대 유럽의 그것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는 주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물론 이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상당함 역시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에 동의를 한다쳐도, 분명하게 보이는 흐름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여러 시장들의 통합적인 경향이 느슨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창장 중류와 강남의 연계는 이전보다 느슨해졌고, 청나라의 수자원 관리 시설이 퇴조하면서 화북의 많은 지역들이 중심부와의 연계망을 상실했습니다. 그리하여, 20세의 산둥성 같은 경우는 몇 개의 통화 지대로 나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행정력에 의해 여러성의 시장들이 하나의 시장처럼 서로 순환하고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근대로 접어들수록 제국이 자급자족 적인 경제 활동의 모습으로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모든것은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사건 등으로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요인은 수백, 수천가지이고, 그에 대한 분석은 오랜시간동안 정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1760년이니, 팽창의 종결이 그 시점이니 하는 이야기조차 딱히 관계가 없을 이야기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건, 청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퇴보하고 있었고,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793년, 영국인 매카트니 경이 목격한 청나라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문제는 오직 한명의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이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면, 비난을 퍼붓는 일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이는 건륭제의 이야기입니다. 건륭은 점차 늙은 추물, 형편없는 인간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12.15 음... 인상깊은 진단입니다. 마침 후쿠야마의 정치질서의 기원으로 레포트 작성 중인데, 이 부분이 상당히 도움이 될꺼 같네요. 언제나 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12.15 저 호자들이.. 투르키스탄 눌러앉은게.. 샤이바니에게 사마르칸트지역을 뺏긴 차카타이 칸국에서 초빙한건데.. 그 호자 후손들이 칸을 몰아내고 신정정치를 펼쳤드랬죠.. 나중에 배다른 형제가 갈라먹는데.. 흑산당, 백산당였나.. 나눠지다가.. 준가르에 의해 백산당은 절멸당하고.. 흑산당이 이어지는거로 압니다.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12.15 신불해//혹시 저 호자가 나중에 그레이트게임에 활약한 그 호자들의 선조들인가요?ㅋ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