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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84) ─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04|조회수627 목록 댓글 3




 양수청에게는 어떠한 목표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목표가 높은 곳에 있고, 그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이미 있다면,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권위가 너무나 대단하여, 함부로 손을 대기 힘들다면, 우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 사람과 가까운 '주위'의 사람들을 먼저 공격하는 일입니다. 1853년 12월을 기점으로 홍수전과 가장 친밀한 동료 두명이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한 사람은 북왕 위창휘이고, 또다른 사람은 홍수전의 절친한 친구 친르강입니다. 그 두 사람은 광시에서부터 홍수전과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동지들입니다. 


 양수청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자신의 권리를 사용해서 북왕 위창휘에게 여러 모로 모욕을 선사했습니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면, 양수청의 여자 수행원들은 북을 쳐서 북왕을 호출했고, 위창휘가 조금만 늦게 당도할 경우, 그는 '양수청의 몸에 강림한 하느님' 으로부터 계시를 받는것이 아닌, 양수청의 여자 수행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이야기를 들어야 했씁니다. 양수청이 가마에서 빙의상태에 빠져 있으면, 위창휘는 그 옆에서 걸어가야 했고, 가마를 타고 가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양수청의 시종들에게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하면, 그들은 태평천국 북왕의 요청을 거절했고, 양수청의 빙의가 끝났는지에 대한 질문조차도 확인해주지 않았습니다. 친르강도 위창휘와 비슷한 처지였고, 심지어 동왕의 가마를 메고 궁전계단을 오르는 일까지 도와야 했습니다.


 양수청과 위창휘.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홍수전. 이들의 대립은 점점 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표면화 되었습니다. 양수청은 자신의 '도덕성' 을 강조하는 포지션에 있었고, 반면에 위창휘는 '도덕성'을 내세운 양수청의 말에 반박하며 홍수전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한 사건을 보자면, 어느날 양수청이 홍수전에게 궁전에 자수품과 예복이 넘쳐나며, 더 구입하지 말고 얼마간 절약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북왕 위창휘는 동왕 양수청을 무시하며 홍수전에게 말했습니다.


 "이형(二兄)은 천하민국의 진정한 군주이시며, 사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넉넉히 가지고 계십니다. 예복과 의관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더 만들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보더라도 위창휘가 양수청에게 대항 ─ 표현을 바꾸자면 저항 ─ 하는 것입니다. 양수청은 도전에 대하여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저는 이형께서 이 어린 아우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아우가 직설적으로 주청한 점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만약 의복이 불충분하다면 옷을 더 만들 필요가 있을 테지만, 충분하다면 의복제작을 늦추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형의 절용, 애인의 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우 정(북왕)은 왜 계속해서 옷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청하는 것일까요?"


 아마 눈치를 보았을 홍수전은 양수청을 칭찬했습니다.


 "아우 청이여! 너는 틀림없이 옛 사람들이 말하는 대담하고 강직한 신하다. 그리고 아우 정아, 형을 사랑하는 너의 충정은 알겠으나, 너의 말이 정직하고 솔직한 청의 말처럼 칭찬받을 정도는 아니다. 앞으로 어린 유주의 시대, 모든 신하들이 아우 청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본받아,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바란다."


 명목상으로는 천왕 홍수전을 제외한 다른 왕들은 모두 동급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왕은 북왕을 자신과 같은 급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이야 익왕 석달개에게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일단 석달개는 서정군을 이끌고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느라 현실적인 위협은 못되었습니다. 1854년, 양수청의 측근 고문 두 명이 양수청의 명령으로 집필한 천정도리서(天情道理書)에서, 양수청은 "태평천국의 최고 조언자, 최고 관료, 굶주리고 병든 자를 구하고, 온 세상 모든 나라의 형제, 자매드를 다스리기 위해 천부상제가 친히 명하여 세상에 내려보낸"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왕'들도 각각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었지만, 그들의 '출중함'은 양수청의 '신성함' 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다른 왕들의 마음이 단순한 '아량' 이라면, 양수청은 특별한 '친절과 관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854년 3월 2일. 하느님이 양수청의 몸을 빌려 또다시 지상에 강림했고, 다섯명의 왕을 제외한 가장 높은 태평군의 최고위직 관료들이 양수청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악에 대한 설교를 받았으며, 게중에 한명은 처형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남녀분리정책을 내세운 태평군의 규율을 어기고 아내와 동침했다는것인데, '하느님'은 침실의 교제행위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음으로서, 곧 '양수청'의 정보망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준 것입니다.


 교리의 설계자라는 측면에서, 본래 유학자 출신이었던 홍수전은 그러나 그 반동으로 인해 점차 유학에 대해 과격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교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자는 여러차례 경멸되었고, 하느님에게 공개적으로 모멸을 받는 장면들까지 생겨났지만, 양수청은 이러한 홍수전의 교리에 대해서도 또 타격을 가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입을 빌려서 말입니다.


 "……이전에 요괴의 책으로 비난했던 고대의 전적들 중에서도, 사서(四書)와 십삼경(十三經) 같은 책들은 하늘의 성정과 진리를 옹호하고 있다. 이 책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훈계한다. 그래서 동왕은 이 책들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너희들은 진리, 효, 충에 부합하는 책들은 간직하되, 육욕과 어리석음을 찬양하는 책들은 없애도록 하라. 역대의 사서는 권선징악과 충효를 장려해왔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주살하고픈 마음을 갖게 했다. 사서가 옹호하는 절대적인 도덕기준은 인심과 윤리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더구니 짐이 천지를 창조한 이래, 내려보낸 충신과 영웅들은 대부분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이 영웅들이 반드시 요괴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이름은 갖가지 저작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속된다. 너희들이 어찌 그런 책들을 없애고 이런 인물들의 이름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느냐?"


 천경은 거대한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그들에게 양수청은 이제 학문과 역사라는 영원한 가지의 보존자로서 자신의 명성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홍수전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는 만큼, 홍수전조차도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음성을 전하는 자로서 양수청의 권위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서의 논리.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양수청. 둘 중 무엇이 더 강렬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것인가? 7월 7일, 또다시 강림한 하느님은 그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짐이 내려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외국에서 전래한 신약과 구약이 수많은 거짓말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너희들은 이 사실을 북왕과 익왕에게 고하고, 그들이 다시 동왕에게, 동왕이 천왕에게 고할 수 있도록 하라. 이 책들을 배포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문맹이면서 동시에 백전노장이었던 태평군 장수 한명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학자로서 수련을 쌓은 바 있던 다른 장수는 눈치빠르게 '양수청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천부와 천형께서 내리신 성지에는,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양수청과 (지금은 죽은, 그래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는)소조귀가 지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진정한 계시' 인데 반하여, 책에 기록된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홍수전과 그의 신도들에 대한 도전은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에 이르게 되어, 성서 속의 하느님 말씀은 멋대로 수정되고 고쳐진 내용이지만, 양수청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느님 말씀은 하나하나가 다 옳고, 그 누구도 감히 바꿀 엄두 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성서의 발행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태평천국 지도자들과 이론가들은 성서의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북벌군은 뒷걸음질치다 죽어갔고, 증국번으로 인해 후난에서 쫒겨난 서정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양수청은 병을 앓아서 누웠지만, 그의 권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고, '황금침대'에서 공포되는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며, 혹은 밤중에 "꿈"을 통해 하느님이 방문하면 양수청은 다음날 그 사실을 이야기했고,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그리고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와 양수청의 입을 빌려 발할때 벌어지는 행솨의 의식은 점점 화려해졌습니다. 동왕의 친인적은 자기 신분에 걸맞은 궁정예복을 입고, 양수청의 전용 가마 양 옆에 늘어섰습니다.


 그 화려한 권위 앞에서 사람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모진 바람, 눈보라를 견디며 '성스러운 말씀'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홍수전은 이제 궁전 입구까지 동왕을 마중하러 부리나케 움직였고, 동왕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며, 양수청은 편안하게 앉아있었습니다. 홍수전의 일상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간섭은 끝이 없었고, 그는 불효자라는 욕을 얻어멎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양수청은 독단적으로 움직였습니다. 홍수전에 의해 임명되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장수들은 양수청의 손으로 처리가 되었으며, 북왕 위창휘는 하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밤이든 낮이든 끊임없이 소환되어, 조금만 늦어도 나태함을 이유로 비난받았습니다. 친르강은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투옥되어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협박을 당했습니다.


 태평군의 고참 장수들은 천경 거리에서 양수청 집안의 관료들을 만났을때, '적절한 예'를 갖추지 않으면 매질을 당했고, 사과를 거부하면 처형되었습니다. 때마침 1856년 6월, 양수청의 주장으로 시도된 천경 동쪽 측면에서 벌어진 전투가 대승을 거두자, 양수청은 더욱더 오만해졌습니다. 동왕은 '구천세'인데 비하여 천왕은 '만세' 입니다. 양수청은 그 호칭이 탐이 났습니다.


 일련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이전에, 그는 홍수전의 장기말들을 모두 주위로 흩어놓았습니다. 석달개는 서쪽의 후베이 성으로, 친르강은 장쑤성 단양으로, 위창휘는 장시성 남창으로 떠났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양수청은 자신도 '만세'의 칭호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주위에 홍수전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홍수전은 그러한 주장을 승인했고, 다만 두달 뒤에 양수청의 생일이 있으니, 그 날에 이 일을 기념하면 참으로 좋을 것이라 말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왕' 을 한곳으로 소환했습니다. 석달개, 위창휘, 친르강은 '반역자' 양수청을 처단하라는 천왕의 명령을 받고,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태평천국 시기가 배경인 영화, 명장


 양수청의 야심은 이제 완전히 노골화되었으며, 홍수전은 양수청을 (몰래) 반역자로 규정했고, 모든 '왕'들은 천경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 이 일련의 혼돈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설명을 해주는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 인 입니다. 그 아일랜드 인은 거의 문맹이었고,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856년, 그 혼돈의 소용돌이에 있었던 아일랜드인은 그 해 말, 레이놀즈라는 이름의 한 선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중국을 잘 아는 사람으로, 아일랜드 인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시기, 태평군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여러명의 외국인도 천경 주변에서 어슬렁거렸습니다. 일부 외국인들은 태평군에 용병으로 복무되기를 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용병들 중에는 '흑인 세명' 도 있었고, 안토니, 또는 안토니오라는 이탈리아인도 있었습니다. 그는 힘이 장사로, 10kg 가까운 칼을 사용하고 다녔습니다. 문제의 아일랜드 인으로 말하자면, 무기를 잘 사용했으며, 상하이에서는 삼합회와 싸운적도 있고, 청군과도 대치한 적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육로를 통해 태평군의 거주지로 들어간 그는 거의 중국말을 할 수 없고, 통역해줄 사람도 없었지만, 태평군 지도자들에게 절을 함으로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습니다.


 아일랜드 인은 미국 보스턴에서 온 '찰스 톰슨' 이라는 동료와 함께 양저우에서 미곡 수집을 도와주었고, 그 후에는 태평군에 가담한 다른 유럽인 두명과 함께 친르강의 부대에 배속되어 여기저기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런 전투 중에서 찰스 톰은 가슴에 부상을 당하고 사망했고,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태평군에서 3개월을 지내느니, 차라리 미국의 감옥에서 3년을 보내는게 나았을텐데……"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받은 아일랜드 인과 동료는 친르강을 직접 접견하는 '영광' 을 누렸습니다. 친르강은 천경으로 갈 수 있는 말과 통행증을 그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천경으로 향해 몸수색을 당한 뒤 양수청을 배알 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별다른 대화를 할 수 없었지만, 이후 영어를 말할 수 있는 통역자를 찾아낸 뒤에는, 좀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일랜드 인은 양수청을 그저 '이인자' 라고 칭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6시경, 우리는 이인자 앞으로 불려갔다. 그는 우리가 주먹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싸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칼과 화기를 모두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곤봉 1개를 주었고, 우리는 그에게 곤봉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공격과 수비 동작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에게 잔을 들어 마시는 동작을 취하면서, 취했을 때에는 주먹을 사용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권투를 조금만 해보라고 했고, 우리는 하라는 대로 했다. 이것은 이인자인 '왕'을 즐겁게 했고, 그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영국산 권총을 주면서 약 45m 떨어진 곳의 벽에다 종이 한 장을 붙여 놓고, 나에게 그곳을 쏘아보라고 했다. 나는 종이의 정중앙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조준하는 동안 내 뒤에 서 있던 이인자는, 내가 무기를 다루고 있을 때 긴장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대단히 화려한 그의 궁전을 둘러보고 구경하자,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황제 역시 자신의 궁과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물론' 우리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일랜드인은 양수청이 개인적으로는 매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고 묘사했습니다. 양수청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것 같았다. 실물은 굉장히 귀티나 보였고, 호감이 가는 외모와 온화하고 상냥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 습니다.


 아일랜드인과 유럽인 동료는 양수청이 마련해 준 거처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물건을 구입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연히 찾아낸, 포르투갈어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중국인 남자아이를 구한 탓에 그들은 좀 더 주변 정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석달개, 위창휘, 친르강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고, 이 사실을 알아차린 양수청의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아일랜드 인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문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856년 8월 15일 공포된 '하느님' 의 두 말은, 양수청의 고민과 절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친르강은 요괴를 돕고 있으며……진승용(陳承鎔 진옥성의 숙부)도 요괴를 돕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성을 불태운다. 이것을 구할 방법도 없다."


 두번째 조서는 오후에 공포되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어떤 힘도 없다. 그들은 진정한 존경심을 가지고 상제이신 진정한 하느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양수청이 친르강과 진승용이 직전의 싸움에서 패배한 사실을 언급한 것인지, 밀정으로부터 왕들의 회군을 들었기 때문인지, 혹은 무언가 좋지 못한 예감으로 사태를 직감한 것이닞는 알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인은, 우리의 뇌리에 들어올만한, 인상적인 한 장면을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가 그(양수청)을 마지막으로 보았을때, 그는 약 3천여 명의 광저우 사람들을 상대로 공공장소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싸우러 나가길 망설였다는 것을 들었다."


 1856년 9월 1일 한밤 중, 마침내 북왕 위창휘가 3천여명에 달하는 군단을 이끌고 천경에 도착했습니다. 친르강으로 말하자면, 그는 이미 특별한 정예부대와 함께 찬경 내부에 들어와 있던 참입니다. 두명의 왕(친르강은 홍수전에 의해서 잠시 왕이 되었지만, 양수청에게 곧 해임되었습니다)은 홍수전을 만나 짦은 대화를 마치고, 아직 당도하지 않은 익왕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행도에 나섰습니다. 만약 석달개를 기다린다면, 양수청이 자신에게 협력하는 6천 이상의 군사를 모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동왕에게 수많은 수모를 당했던 북왕의 지휘 아래, 군단은 파도처럼 동왕부로 밀고 들어갔고, 양수청이 '구멍 뚫린 벽장' 속으로 미처 달아나기도 전에 그를 베어 주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양추엉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 '벽장'을 만들어 놓았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친르강과 위창휘는 양수청만을 제거하자고 홍수전과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군대는 몇시간 동안 남녀, 지위,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동왕부에서 발견된 양수청의 가족과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동왕부 근처에 있던 아일랜드인과 친구는 새벽 4시 쯤 갑자기 들려오는 대포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들은 숙소에서 길가로 뛰어나왔고, 친르강과 위창휘의 군대행렬이 죽 늘어서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병사들은 두 명이 숙소를 나오지 못하게 했고, 해가 뜰 무렵에서야 외출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리에 '이인자의 위병, 장수, 악사, 서리, 노복'의 시체가 가득하며, 동왕부가 약탈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거대한 궁전과 건축물이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동왕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6천여명에 달하는 충성스런 추종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5년 이상 배상제회를 위해 신앙을 바친 신자들이었고, 광시에서부터 온 가장 오래된 고참들었지만, 총성의 대상이 양수청인지, 홍수전 인지는 불분명 합니다. 홍수전과 위창휘 등은, 미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천왕 홍수전은 한 장의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동왕부에서 벌어진 대학살과 약탈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위창휘와 친르강은 체포되어 목에 사슬이 감긴 채 궁전 앞으로 꿀려왔고, 이들은 장형 500대라는, 죽으라는 명령에 처해졌습니다. 홍수전의 궁녀들은 성문 앞에서 천왕의 결정을 위압적으로 낭독합니다. 살아있는 동왕의 추종자들은 나와서 그 글을 읽었고, 글을 모르는 사람도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양수청의 추종자들은 홍수전의 천조궁전 담장 안에서 집행될 장형 참관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제 양수청의 추종자들이 궁 안으로 들어섰고, 문제의 장군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습니다. 추종자들은 관례에 따라 궁전 안으로 들어오며 자신들의 무기를 문 밖에 놓아두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추종자들이 모이자, 갑자기 장형이 중지되었습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크고 작은 문들은 하나, 둘씩, 그리고 모두 닫혔습니다. 양수청의 추종자들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그들에게는 잔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인은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이들을 가둔 감옥과 문과 창문이 열리고, 죄수들에게도 몇 개의 화약 주머니가 투척되었다. 입구는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병사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모조리 학살했다. 다른 건물에서는 죄수들이 담과 건물 사이의 벽에서 뽑아낸 벽돌을 들고 싸웠다. 그들은 거의 여섯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병사들은 그들에게 소총뿐만 아니라, 탄환의 무게가 약 1kg인 포도탄을 쏘아댔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마지막에는 옷까지 벗어던졌고,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마침내 서열 5위와 7위(위창휘과 친르강)은 이인자의 추종자와 자신의 부하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오른쪽 소매를 걷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돌진해 들어가 나머지 사람들을 학살했다. 곧이어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세상에나! 그런 끔찍한 장면이 있을 줄이야……"


 "어떤 곳에서는 시체가 5~6겹으로 쌓여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을 메고 죽어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병사들이 투척한 화약주머니의 폭발로 인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시체들은 들판으로 옮겨 그대로 땅바닥에 버러졌다. 이후 성안에서 모든 가장은 자기 집에 남자, 여자, 아이가 총 몇 명이 살고 있는지 보고 해야 했다. 그들 모두에게는 가슴에 달고 다니는 작은 패가 지급되었다."


 "또 만약 이인자의 추종자가 발견된다면, 잡아들어여 했다. 몇 주에 걸쳐 이인자의 추종자들은 다섯 명, 열 명, 백 명, 천 명을 단위로 형장에 끌려나와 모두 처형되었다. 이인자가 주는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모두 고통을 당했다."


 그리 오랜 예전도 아닌, 몇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풍운산이 꿈을 위해 광시성의 산으로 들어갔을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순박하고, 그리고 살기 힘들고, 하루하루에 찌들이면서, 그저 단 한조각의 희망만을 갈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풍운산은 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작은 행복을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곧 홍수전이 나타났고, 소조귀가 나타났으며, 찢어지게 가난한 숯쟁이 양수청이 합류했고,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풀던 위창휘가 합류했으며, 꿈이 넘치던 청년 석달개가 따라갔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작은 공동체로, 행복을 위해 몰려든 대장장이, 목수, 방앗간의 쌀 짛는 사람, 떠돌이 이발사, 점쟁이, 약장수, 소금장수, 광부, 도부장수, 뱃사람, 나무꾼, 숯쟁이, 행상, 날품팔이, 그들이 처음 그곳에 있었을때는, 이런 미래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꿈을 위해 살아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었습니다. 같이 기도하던 사람들이 한쪽을 감금한채 화약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며 학살했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쪽은 벽돌을 뽑아서 내리찍고 싸우다가, 결국 팔이 잘리고 죽어나갔습니다. 서로를 위해 물건을 나눠주던 동지들이 한쪽을 피해 숨어들었고, 곧 발각되어 끌려나와 처형되었습니다. 같이 깃발을 들고 행군하던 동지들이, 한쪽에는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눈을 벌겋게 뜬채 약탈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는,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도 말입니다. 


 서너달 정도 혼란의 한복판에 있던 아일랜드인과 그의 동료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보았습니다. "사태가 혼란에 빠지고 목을 자르는 것이 그 당시의 질서" 였으므로, 그들은 서둘러 중국 옷을 입고 천경 ─ 지금에 와서 보면, 정말 아이러니한 이름의 그 도시를 빠져나왔습니다. 두 명은 때로는 손수레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빌린 배를 타고, 지방농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어떤 때는 사기를 당해가며 열흘간의 험난한 여행 끝에 간신히 상하이에 당도했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들은, 그때 날짜기 "겨우" 1856년 12월 10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경험들의 그들의 시간감각을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날짜를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대략 1857년 2월 쯤은 될 것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위창휘와 친르강이 과거의 동지들에게 학살을 자행한지 한달이 지난 시점. 양쯔 강의 상류지대를 지나, 북왕이나 친르강보다 훨씬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그의 군단을 거느리고 귀환하고 있던 익왕은, 이 25살의 젊은 영웅이자 아직 '그 시절' 의 꿈을 기억하고 있던 석달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창휘와 친르강 ─ 더 나아가면 홍수전 ─은, 이제 경악하여 달려오고 있는 석달개의 분노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는 "형제" 들의 죽음을 좌시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곧 그들을 만난 익왕은, 바로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너희들은 동왕과 그 주된 장령들을 죽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가? '우리를 위해' 싸워 온, 이렇게 많은 '형제'들을, 어찌하여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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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3.02.04 이거야 원 난장판이군요. 신불해님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2.04 영화 '명장'이 태평천국의 에피소드들에서 많은 컨셉을 얻은듯 합니더....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관군의 입장에서 얘기를 풀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혼돈의 카옷스지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2.05 오! 태평천국이 내분과 민간 의용병, 외국군대에 의해 시들어갔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랬던 거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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