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0) ─ 눈이 내리던 날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01|조회수576 목록 댓글 4



 상승군의 모습


 이수성이 다시 한번 상하이로 진격하기 이전, 그 정보는 두명의 서양인으로 인해 상하이에 전달이 되었습니다. 소식을 알리러 온 두 사람 중 한명은 찰스 거버스톤이라는 인물로, 잔뜩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상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거버스톤은 영국인으로, 잔뜩 술을 먹고 덜 깬 상황에서, 갑작스레 객기가 생겨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과 함께 태평군을 구경하러 그 진지로 다가갔습니다. 곧 그는 태평군 소대에 포위를 당했고 "술이 확 깰" 만큼 겁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태평군의 한 장수는 그를 죽이는 대신, 많은 술을 권해 두려움을 없애주고, 나흘간 머물면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의 내용은 상하이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는지, 주둔한다면 숫자가 어느정도인지, 중국인은 얼마나 있는지, 포 전력은 어느정도인지 등등이었습니다. 심문이 끝나자 태평군은 거버스톤에게 편지를 주어서 상하이로 가도 좋다고 했고, 태평군이 유럽인의 자산은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비록 술에 취하고 겁을 먹기는 했지만,"


 거버스톤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눈을 못 뜰 정도" 로 술에 취하진 않아서 볼 것은 다 봤다고 말했습니다. 거버스톤은 태평군의 병력이 약 1만 5천 가량 되며, 머스킷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태평군은 무장이 잘 되어 있었고, 다만 태평군을 위해 일하는 외국인들은 전혀 보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상하이가 함락 되면 "한몫' 챙겨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ㅁ라입니다.


 태평군의 소식이 들리면서 상하이에서는 부리나케 전투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조계를 둘러싸는 '톱니 모양의 성채'와 포대가 건설되고, 4천여명의 군사가 배치되었으며, 8척의 영국군함이 상하이 부둣가에 정박했습니다. 전투 준비를 위해 외국인 공동체에서는 8만 6천냥의 은을 모금했습니다.


 그러나 태평군도, 외국인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바로 날씨였습니다. 1862년 1월 26일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약 58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내렸고, 76cm이상 쌓였으며, 집중적으로 쌓인 곳은 그보다도 심했습니다. 1월 30일이 되자 기온은 섭씨 영하 12도까지 내려갔으며, 모르긴 몰라도 체감온도는 더 심했을 것입니다. '노스차이나헤럴드' 지는, 날씨란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폭설에 이은 그 같은 혹한의 엄습은, 상하이의 기상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패턴이다."


 상하이의 시골은 폭설에 이은 혹한에 3주 가량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태평군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태평군은 방한복이 부족 했으며, 눈을 헤치고 내륙으로 들어갈 수도, 강을 막고 있는 얼음을 꺨 수도 없었습니다. 이수성은 그 절망스러운 상황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우리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1862년 초의 중요한 몇개월 동안, 태평군은 날씨 때문에 여세를 전혀 몰아가지 못했고, 강화된 방어시설을 뚫는데 실패했습니다. 특히, 상하이의 상승군과 합류한 회군의 이홍장은 각지에서 태평군을 막아내었습니다. 이홍장은 난후이(南滙)에서 태평군을 항복시켰고, 상하이 남서부의 쉬자후이(徐家匯)에서는 직접 아군을 지원하여 태평군에 역습을 가해 대패를 안겨주었습니다. 당초 이홍장과 회군이 상하이에 들어올 무렵 서양인들은 그들을 가소롭게 여겼지만,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이홍장은 혼자의 힘으로 쑹장(送葬) 일대를 해방시켰습니다.


회군이 상하이에서 이수성의 군단을 막아내고 있을 무렵, 상군은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군하면서 양쯔 강 남북 양안의 태평군 진지를 모조리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있는 증국전은 파죽지세로 태평군의 영채들을 짓밞았습니다. 상군과 회군의 움직임은 서로서로에게 이득이 되었는데, 이홍장이 이수성을 막고 주변을 소탕하면서 태평군의 보급품과 병력의 움직임을 차단했고, 증국전이 태평군을 공격하면서 상하이를 공격하던 태평군 역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수성의 상하이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태평군이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상군과 회군이 태평군을 압박하며 주변을 소탕했던 이 1년 동안, 상하이에서 쑤저우를 거쳐 양쯔 강을 따라 여행한다거나, 혹은 천경까지 가려는 외국인과 중국인은 육로와 수로를 막론하고, 암울한 풍경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80km에 달하는 구간을 지나가는 동안 여행자들은 무수하게 많은 파괴된 가옥을 볼 수 있었고, 성인 남자와 소년들이 이 부대 저 부대에 강제로 징집되고, 여자들은 끌려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본 광경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하얗게 변한 인골이 포탄 사이사이에 널려 있고, 홀로 남은 노인들은 잔해 속에서 먹을 찾아 헤맨다. 폐허가 된 가옥, 오물로 가득한 거리, 공터나 연못이나 저수지에 방치된 채 썩어가고 있는 시체 밖에 없다."


 거리에는 고통과 절망에 가득한 사람들이 죽 늘어서서 얼마 되지도 않은 식량을 팔고,  어떤 사람들은 "태평천국"이라는 네 글자를 얼굴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장에서 도망쳤다가 잡혔다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을 기록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인적 없는 마을을 걸어서 통과했고, 폐허가 된 마을 속에 동물들만에 어슬렁거리며 먹을 것을 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비교적 나은 경험으로, 어떤 선교사는 타고 있는 배가 강에서 썩은 채 떠나디는 시체를 치우느라, 천천히 항해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또다른 선교사는 쑤저우 근처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진저리를 칠 만큼" 많은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광경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뇌리에 남이있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굶어 죽은 한 어린 아이가, 의자 같기도 하고 요람 같기도 한 물건 위에 기대 앉은채, '버려져' 있었다."


 파괴된 건물, 황량한 길, 늘어져 있는 시체, 폭력과 죽음, 피와 광기의 짙은 냄새. 심지어 세계 각지의 전쟁을 경험했던 노련한 영국 출신 장교들조차, 곧 선교들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장교들은 그런 모습을 무수히 봐왔고, 또 선교사들은 대체로 그런 참상을 과장하려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러한 '감상적인' 태도를 빈정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끔찍했습니다.


 영국군 원정대의 병참감이었던 가닛 울즐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모든 장소' 에서 목격한 주민들의 고통과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가족이 낮고 작은 천막같이 생긴 오두막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살을 에는 북풍이 불 때마다 찬바람은 갈대로 엮은 오두막의 엉성한 틈을 비집고 오두막 안으로 밀려들었다. 주민들은 혐오감을 일으킬 만큼 지저분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노인들은 실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으며, 허약해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굶주릴 때 나타나는 특유의 간절한 표정이 어린 아이들의 여윈 얼굴에 분명하게 보였다. 이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은, 누구나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상하이에는 공포에 질린 중국인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공포에 질려 헐레벌떡 달려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진채 터벅터벅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피난민 사이로 병사를 들여보내 내부에서 공격하는 전술은 태평군의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많은 중국인들은 출입이 통제당한 채 버려졌고, 상하이 내부에 들어온 중국인들도 격리 조치를 당했습니다.


 돈을 위해 태평군에서 일하는 몇몇을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서양인이 마지막으로 '천경' 에 들어선 일은 1863년 초, 한 선교사의 방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간왕 홍인간과 접견기회를 가졌는데, 홍인간은 여러 사태의 모습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서양과 태평군은 완전한 적이었고, 처음에 신임받던 간왕의 지위도 이제는 홍수전에게 배척 받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간왕은 태평천국 근대화의 기획자이자 태평군의 공동 지도자로서의 위치 대신,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의 교육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맡고, 홍인간은 "너무나 노심초사하여" "눈물을 흘렸" 습니다.


1863년 초, 증국번과 증국전이 천경을 압박하고 있음에도, 이수성은 서쪽으로 군단을 진격시켰습니다. 그 주의를 분산시켜 보려는 것이 이수성의 계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이수성의 여러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일도 의도치 않은 변수로 인해 완전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폭우가 내렸으며, 진흙탕은 부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가로막았습니다. 양쯔 강 북안 일대는 그간 너무나 많은 전투를 치르느라 완전히 파괴되어 곡식은 없었으며, 싸움터로 적군을 끌어내려고 하는 노력도, 청군이 철통같이 방어태세를 유지하기만 하여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863년 5월, 구원 요청을 들은 이수성은 실패한 서정을 포기하고 양쯔강 북안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막 강을 건너려던 순간, 바로 그때 청군이 나타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청군은 이전보다 강해져 있었고, 무장도 좋았습니다.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이홍장의 동생 이학명(李鶴章)이 군사를 이끌고 있었고, 태평군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수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통스러운 어조로 회고했습니다.


 "이 시기는 양쯔 강이 한창 범람할 때였다. 홍수로 인해 도로는 파괴되었고, 진군을 계속할 방법이 없었다…… 태평군은 엉망이었다. 전투지휘관들과 군대, 그리고 말이 먼저 배로 강을 건넜다. 거의 대부분이 강을 건넜을 때에도, 승선이 거부된 일부 노인과 어린아이들 및 몇 마리의 말은 강기슭에 남았다. 물에 잠겼고 병사들이 묵을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쌀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밥을 지을 땔감이 없었으므로, 수많은 인원이 굶어 죽어갔다. 바로 이때, 중국전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파견했다."


 당시 태평군에서 복무하던 서양인 용병의 언급은, 그 참담함에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평군이)그들의 수도가 눈 앞에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도 이 불운한 사람들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적군의 습격을 받고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굶주리고 쇠약한 상태의 태평군 부대는 강기슭에 도착한 순간, 포함에서 쏘아대는 끊임없는 포격세례를 받았다. 태평군이 강기슭에서 거의 3km 정도 길게 늘어선것을 본 적군의 수병들은, 태평군을 살육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태평군은 믿기지 않을만큼 의연하게 각자의 위치를 지켰고, 한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또, 밀집해 있는 자기네 무리를 향해 사정거리 내에서 퍼붓는 무시무시한 포격에 직면해서도(대부분은 영국산 대포) 그들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승선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강기슭 곳곳에서 바라보게 되었던 그 끔찍한 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극도로 쇠약해져서 제 몸 하나조차 가누기 힘든 대다수 병사들은, 그토록 힘들게 애쓰고 고생하여 도착하게 된 목적지를 눈 앞에 두었건만, 남은 이제 이제 죽음뿐이었다. 이런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들의 동지들은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적의 면전에서 그들이 강을 건너도록 도와줄 수 없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섬뜩하게 포탄 떨어지는 '쿵''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몇몇 지점에 조밀하게 몰려 있던 사람들은 뒤에서 미는 바람에 강물에 빠져 쓸려갔다.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은 1천 척 이상의 포함에서 쏟아대는 포격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포탄을 맞아 토막 난 동지들의 몸뚱이들을 헤치고 빠져 나오는, 기진맥진한 생존자들의 힘겨운 노력은 쳐다보기조차 괴로운 장면이었다. 한떄 화려한 위용을 자랑했던 군대의 패잔병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것도 날마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본다는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강변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적군의 무자비한 발포에 의해 빠져나갈 샛길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들 모두는 무력하게 참고, 또 참고 견딜 뿐이었다."


 수천도 아닌, 수만명이나 되는 태평군이 조각난 주검이 되어 강의 흐름을 막을 정도로 널부러졌습니다. 


 홍수전은 이 패배에 대해 위로나, 격려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홍수전은 하늘의 말을 현세에 전하지 않았습니다. 훙서준의 부인, 어머니, 그리고 형들이 각자 꿈에서 본 내용을 말한다 하더라도, 홍수전은 그 내용을 공표해서 신도들과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홍수전은 천경에서 쓴 자기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지상에 내려온 시점부터 과거 소조귀의 몸을 빌려 전해준 모든 가르침을 회고 했습니다. 그는 소조귀가 부상을 당했을때, 예수가 그의 몸을 빌려 말한, "고통이 클수록 더 성장할 수 있다." 는 말을 책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양수청이 남긴 마지막 말도 옮겨 적었습니다.


 "너희 하느님의 성이 불타오르리니, 그것을 구할 길은 없도다."






 가장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모두 몰려드는 상하이는, 그 소란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유럽식 호텔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프랑스 조계에서는 훌륭한 객실을 가진 황실해운호텔을 신장개업 했습니다. 미국인이 만든 호텔을 보수해서 1863년 7월에 문을 연 클래런던 호텔에서는, 최신식 볼링장이 있었고 아스토리아 호텔에서는 신식 당구장이 있으며, 경마장은 확장 공사를 마친 뒤 호주에서 경주말을 이송시켰고, 왁자지껄한 예능 단원들이 상하이 시내에서 공연을 하면, 관객들은 환호 했습니다.


 그러나 항구를 빼곡히 늘어선 선박에서는 탈영병, 건달, 유랑민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경찰서 업무일지에서는 이들을 '곤궁한 신민' 또는 '부랑자' 로 기록하였는데, 어떤 경우에는 애처로울 정도로 경미한 사안들입니다. 빵 조각, 고깃덩이, 복숭아 몇 개, 또는 양말 몇 켤레를 훔친 절도죄가 기록디었고, 더 나아가면 성추행에서 소년들의 유괴, 칼부림, 살인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비참한 자들은 모여들어 희망없는 하루를 보내던 피난민들입니다. 영국공사는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또 한번 피난민으로 넘쳐나고 있다. 이번에는 전보다 수가 더 많다. 피난민들은 현재 주택가 앞의 와이탄 및 석교 근처 노상에서 야영을 하고 있다. 수많은 여자, 노인, 아이들이 야외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며, 별로 풍족하지 않은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태평군의 공격 때문에 상하이 내부의 물자 자체는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별 문제가 안되었지만, 피난민등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들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본명 대신 단지 박애자(Humanitas)라는 서명만 남긴 한 관찰자는, 피난민들이 대나무로 엮어 만든 여섯 채의 오두막 안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 야위고 비참한 모습이었으며, 일부는 만조 때마다 강물이 차올라 질퍽거리는 진흙바닥에 누운 채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패의 진행 정도가 각기 다른' 시체들과 뒤섞여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는 일어날 기운이 없어 바닥에 누워 있고, 그녀 옆에는 벌거벗은 채 죽어 있는 그녀의 어린 두 딸이 '눈 녹은 물과 진흙에 덮혀' 누워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입니다. 


 눈이 내리던 날, 태평군을 정찰하기 위해 길을 나선 한 서양인 관찰자는 머리에 창이 정통으로 박힌 채 죽어있는 한 중국인 시체를 피해 조심스레 발길을 옮기다, 우연히 사람들의 발자국이 눈 위에 나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한 무리의 촌민들이 폐허가 되어버린 집들 속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내일로 다가온 춘절의 아침을 축하하기 위해서 입니다.


 살고 있던 집은 페허가 되었고, 모든 것이 부셔졌으며, 굶주리고,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가 '성가신 장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피와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러나 눈 내리는 차가운 하늘에는, 내일을 축하하기 위해 끓이는 따뜻한 차의 연기가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오늘에도, 내일을 위한 삶은 계속 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Reichskanzler | 작성시간 13.03.01 폐허속에서도 한 잔의 차를 마신다..... 감사합니다. ^^;;
  • 작성자제국의명장 | 작성시간 13.03.01 임용한 교수가 홍건적을 태평천국군에 비교하여 설명할 때 저 서양인 용병의 기록을 인용했지요.
  • 작성자철마 | 작성시간 13.03.02 아흑... 안구에 습기가....
  • 작성자청계천거대쥐전설 | 작성시간 13.03.02 ㅜㅜ 지옥이 있다면 바로저기네요 ㅠㅠ 그래도 한잔의 차를 마신다는게 ㅠ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