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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3) ─ 양무(洋務)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18|조회수499 목록 댓글 6




공친왕 혁흔, 이홍장, 좌종당


 태평천국 운동은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스스로를 홍수전에 비기던 미래의 '직업적 혁명가' 쑨원, 석달개의 전설을 이야기하던 미래의 '홍군의 아버지' 주더. 결국 처절할 정도로 장엄하게 ─ 동시에 완벽하게 무너진 태평천국 운동의 긍적, 부정적인 부분을 합치고 보면, 그 마지막에서부터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는 새로운 폭풍이 다가오기 전까지, 약 반세기에 이르는 중국 역사의 주역들은, 어떻게든 태평천국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쑨원이나 주더같은 사람들은 태평군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이와 맞서던 청나라 측의 인사들도 그 폭풍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애처로울 정도로 허약한 청나라의 정규군은 거진 1세기전부터 추태를 보이고 있었고, 근래에 이르러선 조롱거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는 태평군의 막강한 힘으로부터 구원 받았지만, 그것은 자력의 힘이 아니라 상군(湘軍), 초군(楚軍), 회군(淮軍) 등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청나라 조정의 병사들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베이징의 권위에서 묘하게 벗어나 있는 존재들입니다.


 태평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활약을 한 주체들은 이들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또다른 문제가 있다면, 이들을 움직이는 사상 입니다. 사람은 사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입니다.


 그 당시 중국은 태평군과 격돌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양 제국주의와 격돌했습니다. 그러나 1차 아편전쟁부터 애로호 사건으로 시작된 2차 아편전쟁에 이르기까지, 과거 가장 화려하고 위대함을 과시하던 중화 제국은, 서양 제국주의에 처절하게 부서졌습니다. 철함, 거포를 앞세운 열강은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무리한 요구를 제시했고, 중국은 대항할 힘이 없어 영토를 할양했으며,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래선 안된다. 이대로 가면 중국은 멸망하고 만다. 커다란 굴욕과 막강한 힘에 짓눌린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국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과거 중국이 위대함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이 고난을 겪고 있는 이유도, 압도적인 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전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예전의 힘을 길러야만 합니다. 철함과 거포를 내세운 서양의 물질문명이 두렵다면, 그것을 도입하는것이 선결과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무파(洋務派)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큰 틀에서 본 양무파의 사고 방식이 이러하다고 볼때, 그 양무파는 또 두가지 그림으로 나뉘어 집니다. 한쪽은 새방파(塞防派) 였고, 다른 한쪽은 해방파(海防派) 였습니다. 미래의 중국을 위협하는 그 적은, 과연 육지에서 오는가, 아니면 바다에서 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인 것입니다. 이는 기본적인 군사 형태에서부터, 외교적 전략의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육지에서 적이 온다. 따라서 적을 국경선에서 막아야만 한다는 것이 새방파의 생각입니다. 새방파의 근간을 마련한 사람은, 다름아닌 임칙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칙서가 영국과 대립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로 보일 수가 있지만, 임칙서는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통상 이익 때문이라는 점을 눈치챘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임칙서는 신강(新疆)으로 좌천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임칙서는 낙담만 하고 있거나 좌절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여 외국을 연구했고, 특히 이리(伊梨)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는, 눈 앞의 거대 제국 러시아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이후 그는 섬감총독(陜甘總督)으로 복귀했는데, 3년간 거듭한 사색을 모아 아라사국기요(俄羅斯國紀要)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국조선정사략(國朝先正事略)등을 저술하고, 이후 증국번의 막하에 들어가는 이원도(李元度)는, 특히 영국을 두려워하여 임칙서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임칙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서양(영국)은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중국에 최종적으로 우환이 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일 것이다. 나는 늙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들은 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칙서는 가상의 적으로 영국이 아닌, 러시아를 지목한 것입니다. 


 러시아에 대해 임칙서가 모은 자료는, 동료인 위원에게 전해졌습니다. 위원은 이를 바탕으로 해국도지를 썼습니다. 훗날 임칙서가 운귀총독(雲貴總督)으로 부임할 당시, 운남에서 죽은 부인의 영구를 세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지고 갈때, 배 안에서 그는 다름 아닌 좌종당을 만났습니다. 좌종당은 (이 시점에서 보면 미래의 일인) 태평천국의 일을 진압한 사람 중에 한명이자, 양무파의 일원입니다. 


 이 만남의 시간, 임칙서의 나이는 65세였고, 좌종당의 나이는 37세 였습니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나는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뻘이나 다름 없었지만, 배 안에서 밤이 새는지를 모르고 서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좌종당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일을 이야기 하기를,


 "강에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에 이르렀으며, 미치지 못한 바가 없었다."


 고 회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특히 서북의 정서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당시 임칙서는 아편전쟁과 그 이전 광저우에서 보여준 용기로 인해 전중국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고, 좌종당은 일개 거인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구심여지병법(究心輿地兵法)이라는 책을 써서 어느정도 명성이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여지학(輿地學)은 곧 지리학인데, 이런 방면에 커다란 관심을 가진 임칙서는 아마도 이 책을 먼저 읽어 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좌종당은 임칙서로 인해 소위 새방파로서 눈을 떴습니다. 좌종당 외에 유명한 새방파라고 하면 심보정(沈葆貞)이 있는데, 그는 임칙서의 사위입니다. 새방파는 임칙서의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이홍장


 새방파와 대치되는 해방파의 거두는 이홍장입니다. 지난 아편전쟁 기간 동안 중국을 유린한 눈 앞의 적은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였습니다. 이들은 바다에서 왔고, 거함과 거포로 무장한 엄청난 강적이었습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천지가 요동치는 와중이었지만, 베이징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인물들은 이적, 소위 외국 오랑캐를 대단히 혐오했고, 왠만하면 베이징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처리했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습니다. 지난 2번의 아편전쟁에서 청조가 호들갑을 떨며 외국과 부랴부랴 협상에 나선것은, 모두 적의 예봉이 베이징 가까이에 왔기 때문에 이를 모면해보려고 동기였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현장(개항장)에서 처리하는것이 좋다며 천진이나 상해로 넘겨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전까지 보정(保定)에 머물던 직례 총독은 천진으로 이동해서 북양(北洋) 통상 대신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하게 양광 총독은 남양 통상대신을 겸했습니다. 1870년 부터 북양통상대신, 즉 북양대신(北洋大臣)은 직례 총독과 겸임하는 자리가 되었는데, 이 당시 직례 총독은 2년 전 염군 토벌로 명성이 대단한 이홍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양대신을 겸한 양강 총독은 증국번이었습니다. 훗날 양강 총독은 좌종당, 심보정, 증국전 등으로 바뀌었지만 지례 총독은 줄곧 이홍장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홍장이 자리를 잡게 된것은 증국번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 동안 가장 명성을 쌓은 인물도 증국번입니다. 그런데, 왜 이후 정계에서 주로 보이는 이름은 증국번이 아닌, 이홍장이나 좌종당의 이름일까 하는 점입니다.


 증국번이 태평군을 쳐부수고 우창을 수복했을 무렵, 함풍제는 간만에 들려온 통쾌한 소식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군기대신을 맡고 있던 기준조(祁雋藻)라는 인물이 이렇게 상주했습니다.


 "필부가 여염에 머물며 한번 외쳐 궐기하면, 이를 따르는 자가 만여명이니, 이는 필시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증국번은 그 당시 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해 있던 상태였으므로, 일개 필부, 즉 민간인일 뿐입니다. 그런 필부가 소리를 한번 치자 1만여명이나 모인것은, 꼭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상소에 증국번을 견제하고자 하는 점 등에 담겨 있기야 하겠지만, 그 자체로 사실이기도 합니다. 청나라는 이미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이수성 등이 탈주할 당시, 일부에서는 증국번이 상군을 이끌고 북상, 청 왕조를 뒤엎을 것이라는 전망도 보였습니다.


 증국번은 마음만 먹으면 북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황제를 자처하는것은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증국번에게 협력했던 인물인 팽옥린(彭玉麟)은, 태평천국이 평정된 후 수수께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동남의 반벽(半璧)은 주인이 없다. 노사(老士)는 그것에 대해 뜻이 없는 것인가?"


 반벽은 곧 옥의 절반 입니다. 완벽은 물론 중국의 전체를 말하는 일이고, 여기서 말하는 반벽은 중국의 동남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동남부는 무주공산이고, 증국번은 반벽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증국번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증국번이라는 인물의 개성입니다. 증국번은 대단히 조심스러웠고, 항상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30대 무렵부터 이야기를 많이 하지 못한다, 말이 수십 마디에 이르면, 곧 숨이 차고 정신도 혼미해진다."


 이렇게 증국번은 일기를 썻는데, 심장이나 호흡기 질환을 달고 다녔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30대 중반부터 머리의 옴에 시달려 죽을때까지 고생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병을 가지고 있고, 오래 말하기도 힘겹다 보니 자연히 내성적이고 신경 과민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증국번은 항상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조금만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있으면 잠을 설쳤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린 후에는, 이것이 정신력이 쇠약해진 탓이 아닌가 하여 또 그점을 염려했습니다.


 증국번의 일기는 "바둑을 지나치게 두었다." 라던지, "규방을 드나드는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라던지, 스스로를 반성하는 말들이 경쟁하듯 가득합니다. 증국번은 전쟁터에서도 항상 부하들과 바둑을 하루에 한판 씩 두면서 정신을 수양했는데, 이런 점 또한 그의 섬세한 성격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증국번은 스스로 영웅은 두 종류가 있다고 글을 썻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고 황제가 될 수 있는 영웅은 활달한 사람이고, 어지로운 세상을 구제하는 영웅은 심력을 기울이고 노고를 기울이는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증국번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고, 전자는 결코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천경 함락 당시에도 그렇지만 태평군과의 싸움에서 자신보다 주로 동생인 증국전을 내세웠던것도 너무 두드러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기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앞에 서면 주로 패배하는 일이 많다는게 명분이었습니다. 태평군을 진압한 후에 증국번은 천하무적 상군을 해산시켰고, 주요 간부를 이홍장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만약 증국번이 좌종당이나 증국전같은 상군계 인물에게 상군의 유산을 물려주었다면 이때문에 의심을 받았겠지만, 증국번은 그런 점까지도 교묘하게 피해버렸습니다. 다만, 증국번과 좌종당이 언쟁을 벌인 후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는 점도 이유이긴 할 것입니다.


 태평천국을 진압한 후에도 증국번은 양강 총독으로서 강남에 머물 뿐, 중앙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최고직은 직례 총독이었습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해야만이 강력함을 유지할 수 있는데, 직례, 산동, 산서, 하남의 네 성을 통치하는 직례 총도은 대단히 강력했고, 실질적인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증국번은 직례 총독은 될 수 있으면 피했고, 잠시 맡다가도 금세 양강 총독으로 복귀했습니다. 


 이로서 오랫동안 직례 총독을 맡은 이홍장은 사실상의 재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양계초는 이에 대해 이렇게 평론했습니다.


 "이홍장과 증국번의 관계는 관중과 포숙아, 한신과 소하의 관계와 같다. 뿐만 아니라 이홍장은 학문, 견문과 지식, 일처리 모두 다 증국번이 도와줘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이홍장은 증국번의 문하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홍장이 증국번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한다. 그러나 유학자 증국번에게 외교 업무를 맡겼다면 이홍장의 교묘한 지혜와 빠른 눈치를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증국번은 만족을 알고 그칠 때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지켜, 때가 오면 결단성 있게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혈기가 왕성하여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당연히 자신이 맡아서 처리했다. 증국번처럼 어려움을 두려워 하여 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홍장의 장점이다."


 그렇게 이홍장은 실질적인 재상으로, 육군과 해군의 전력 향상에 심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상의 성과들이 이홍장이 이뤄낸 성과들입니다. 초기에는 군사적 방향에 집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광공업과 교육 등 근대적인 부분 등에 손을 대고 있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양계초는 이홍장이 '양무' 때문에 "천박한 유학자들에게 비난을 당했다." 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홍장의 정책은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홍장이 그렇게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점은, 든든한 지지자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함풍제가 과거 아편전쟁 당시 열하로 도망치고, 이후 곧 사망하는 대혼란과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친왕과 서태후는 각각 손을 잡아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서태후(西太后) 섭정 체제를 구축,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과정을 굳이 자세히 열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중요한것은 스물 일곱 살의 서태후가 당대 중국의 일약 실력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이 무렵의 서태후는 이홍장에게 신임을 보였고, 두각을 나타내는 뛰어난 군사지휘관, 이홍장은 이를 바탕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를 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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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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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3.19 참.. 글 편하게 잘 쓰시네요. 의문 하나. 북양과 남양을 나누는 기준이 뭔가요? 북양이 단순 서해라고만 생각했는데..
  • 답댓글 작성자타마네 | 작성시간 13.03.21 산동 이북을 북양, 절강 이남을 남양이라 합니다. 각각 황하와 양자강 하류지역인 걸 보면 강이 기준인 듯 ㅇㄹㅇ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13.03.21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어서 올려주신 자료의 출처가 궁금해서요. 혹시 책의 이름을 알수 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신불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22 량치차오(양계초)의 리훙장 평전입니다.
  • 작성자유럽제패 | 작성시간 13.03.27 하지만 서태후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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