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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96) ─ 조선풍운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3.31|조회수597 목록 댓글 4


 원세개


 생소한 조선으로, 그것도 여행도 아닌 군인들의 소요 상태를 진압하기 위해 떠난다, 평범하게 몸을 보신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사람이라면 손사래를 칠 일이었지만, 거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던 24세의 청년, 원세개는 오히려 몹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원세개의 생각에 조선행은 자신의 성격에 꼭 맞을 뿐더러, 무엇보다 공을 세울 기회가 무궁무진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배가 조선 해역에 닿자마자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우선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진입하자, 다른 나라에 온 일부 군사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조선에 온 청나라군의 지휘관인 오장경은 이런 사태가 이어지면 군대의 군기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원세개에게 감독의 일을 맡겼고, 원세개는 명령을 받은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시하고, 조사하여 규율을 위한반 병사들을 과감하게 처단해 군기를 세웠습니다.


 그 무렵, 오장경은 해군을 이끌고 온 정여창(丁汝昌), 마건충(馬建忠)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를 벌였습니다. 지금 청나라가 임오군란에 대해 개입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개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는 이때 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일본에 강경하게 맞선다면, 이는 일본의 무력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건 이홍장이고, 북양군이었습니다.


 오장경 등은 일단 대원군을 납치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먼저 대원군을 만나 인사를 한 다음, 대원군이 답방을 하러 오자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데려가, 보정(保定)에 감금시켰습니다. 원세개는 이 계획과 이후 대원군의 잔당을 토벌하는 전투에도 참여했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몸을 피해 일본으로 가는 일본인들을 묘사한 우키요에(浮世繪)


 임오군란은 평정되었지만, 오장경의 부대는 계속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이유였는데, 일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원세개도 부대에 남았습니다.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은 청 군대에 일단 감사 표시를 해야 했기에 오장경과 그의 참모 장건(張謇), 원세개등을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가끔 단독으로 원세개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원세개가 조선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 보람이 있어, 오장경은 원세개가 "부대를 엄격히 다스리고, 책략이 뛰어나며, 용감하여 항상 앞장서 싸운다." 고 칭찬하면서 관리로 추천했습니다. 이에 이홍장은 원세개에게 동지(同知)라는 벼슬을 내려주었습니다. 드디어 관료의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행은 원세개의 운명을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원세개의 어머니였던 우씨는 아들이 워낙 보고 싶기도 하고, 소문을 듣자니 곧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치룬다고 하자 더욱 불안해져서 어서 귀국하라고 성화였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이 출세하려면 오장경의 옆에서 꼭 붙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의 요청을 뿌리치고 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884년 5월, 이홍장은 오장경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에 있는 6개 청나라 대대 중 3개 대대를 이끌고 귀환하라는 연략을 전했습니다. 오장경은 남은 부대의 통솔을 오조유(吳兆有)에게 맡겼는데, 원세개는 조선에 남은 사람들 중 오조유 다음에 가는 위치였습니다. 오장경이 떠난 지 두달 쯤 될 무렵부터 원세개는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입니다. 오장경의 측근이었던 장건에 대한 호칭도 처음에는 "선생님" 이었지만, 곧 "어르신" 으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장형"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장건은 격노하여 수천 구절도 넘는 편지를 써서 원세개를 질책했고, 둘은 절교했습니다.


 이렇게 원세개가 조선에서 승승장구 했던 1884년은, 곧 프랑스와 청나라가 청불전쟁을 치룬 시점입니다. 일본은 이를 호기로 삼았습니다.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개입 여부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 조선 정부의 실권을 가진 민씨 일파는 임오군란의 영향으로 친청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는 틈을 타 조선에서 정권의 성격을 바꿔놓는다면, 그 일도 훨씬 쉬울테고 이후 청나라의 개입도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File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일본의 의도는 조선의 친일파 정객들을 지원하여, 청나라와 가까운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습니다. 이에 중점이 되는 두 인물 중 한명은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 였고, 그는 이후 도쿄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또 한명은 친일 정객이었던 김옥균으로, 다케조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정객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 친일정객들은 정책의 성격으로 보자면 급진 개화파로,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임오군란 이후 그 간섭이 약해지기는 커녕 더욱더 노골화되고 민씨 정권의 반개화 움직임도 극에 달하자 심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사는 1884년 12월 4일 벌어졌습니다. 때마침 그때는 한성의 우정국(郵政局)이 낙성되어 축하연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우정국 근처에 불을 질러 연회장을 혼란에 빠뜨렸고, 창덕궁에 들어가 고종에게 '청나라 군이 변을 일으켰다' 고 보고하여 경우궁으로 옮긴 후, 다케조에가 데리고 있던 병력을 이용해서 왕궁의 수비를 요청했습니다.


 왕궁에 들어선 김옥규 일파는 민씨 일족의 요인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차례 차례 살해했습니다. 살해된 인물들은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이조연, 윤태준, 한규직, 유대현 등의 중신들이었습니다. 다케조에의 일개 일본군 한개 중대 병력이 조선에 친일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해버린 셈입니다.


 다만 문제는, 역시 청나라의 개입이었습니다. 일본은 김옥균을 도와 친청정권을 타도하고 친일정권을 탄생 시키는 일은 성공했지만, 병력은 고작 300여명 가량이었던것에 비해, 조선에 머물고 있던 청나라 병력은 1,500명이 넘었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패배는 기정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전력의 열세에서도 급작스럽게 일을 추진한 것은, 앞서 말한대로 청불전쟁의 영향이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전쟁 때문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벙력이 이동할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을 진실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홍장은 프랑스와 강화를 하고 싶어했던 입장이었기에, 굳이 부대를 옮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케조에나 김옥균은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하면 성공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못했습니다. 다케조에는 원세개의 나이가 어리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원세개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우정국으로 향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단 물러난 원세개는 다음 날 고종에게 편지를 보내 오조유 등과 함께 입궁하여 호위 하곘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물론 고종 주변을 장악했던 김옥균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원세개는 우선 여순에 있는 자신의 당숙이었던 원보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의 한성과 청나라의 천진에는 전보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단 원보령에게 최대한 빨리 편지를 보내 이홍장에게 전보를 치라는 의미였습니다. 원세개는 이홍장이 속히 지원부대를 파견해 주라고 요청했습니다. 


 3일 째 되는 날, 아직 화를 당하지 않았던 친청파들은 원세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미 정변의 이야기는 사방에 퍼졌고, 온갖 뜬소문들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원세개는 다케조에에게 편지를 보내보았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사태는 급박한 상황이고, 정보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원세개는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청의 우위를 확인시키고, 본인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일단 과감하게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조유 등은 일본 군대와 청나라 정규군이 충돌하게 되면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여겨,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할까봐 일단 이홍장의 지시를 기다리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원세개는 이홍장의 지시는 언제 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정세는 급박하니, 더 기다릴 시간은 없소!"


 마침내 원세개는 오조유 등을 설득하여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밀어닥쳤습니다. 당시 고종은 12월 5일 환궁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다케조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창덕궁으로 귀환한 상태였습니다. 1개 대대 병력을 거느린 원세개가 궁문 앞에서 고종을 보호하러 왔다고 말하자, 일본군은 총을 쏘았고, 원세개는 곧바로 반격 명력을 내리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숫자의 열세에 몰렸던 일본군은 조금식 후퇴했는데, 저녁 무렵까지 격전을 벌이던 원세개는 더 밀어부치면 고종이 다쳐서 일이 번거로워 질까봐 우선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승패는 결정된 셈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다케조에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점을 깨달았고, 궁에서 일본군을 이끌고 나와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무런 자체 역량 없이 오직 일본 하나만 보고 거사를 일으켰던 김옥균 등은 낭패에 놓이고 만 셈입니다. 친청파 세력이 친일파를 눌러버렸고,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살해되었으며,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 공사관은 불탔고 난리 속에 일본인 수십명도 죽었습니다. 


 이후 도쿄대 교수가 된 다케조에는, 훗날에도 다른 사람들이 갑신정변의 일에 대해 물어보면 입을 굳게 닫았습니다. 다만, 이 한 마디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어리석어 원세개에게 당했다."


 훗날 골수 친일파가 된 박영효는, 동경에서 윤치호가 이때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이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대로 돈을 빌려 물스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상감을 꼭 붙잡고 있어야 했는데, 김옥균이 어름어름하다 놓쳐버렸다."


 정변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박영효가 말한 실패의 원인은 '엉터리(김옥균)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렀다.; 는 것입니다. 다만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방탕하게 지내던 김옥균에게 질린 박영효가 생활을 바로 잡을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김옥균이 듣지가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만일 서로의 사이가 대단히 나빠졌다면, 박영효가 악평을 퍼붓는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서재필이 말하는 실패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언론인 김을한과의 대화에서, 정변의 실패 원인을 백성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


 즉 갑신정변을 일으킨 본인을 비롯한 세력을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면서, 무식한 백성들이 자신들 선각자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강만길은 여기에 대해 "실패의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 에 돌렸으나, 개화파의 정변 자체가 민중세계에 뿌리를 박지 못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백성들은 무식하고, '선각자'의 뜻이 구구절절 옳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적어도 그 엘리트들이 무식한 백성을 이해시키려는, 현실적이 문제와 크고 작음을 떠나 그런 의도가 있던 행동이 약간이라도 있었는지 ─ 혹은 그 '무식한 백성' 을 의식이라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한가지 확실한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자체적인 역량이 전혀 없었던 개화파들이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에 의지해서 정변을 일으켰지만, 일단 외세의 개입이 없어지자 아무런 힘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는 점입니다.


 혹은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었던 창덕궁으로 고종을 보내주어, 거기서 전투를 벌어지만 않았어도 적어도 3일 보다는 더 길게 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지만, 박영효는 여기에 대해서 "어름어름 하다 놓쳐버렸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상감을 붙잡는것 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다케조에의 일방적인 결정이라면 이는 개화파의 자체적인 역량이 그만큼 형편없고, 일본은 단순히 지원을 해주는 협력자가 아니라 간섭까지 할 수 있는 주체였다는 이야기 밖에 안될 수 있습니다.




원세개



 한편 앞서 원세개의 급보를 받았던 원보령은 이홍장에게 전보를 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여순에서 즉시 호응할 준비를 해야 하며, 각 군을 집결해 바다를 건너 마산에 주둔시켜 일본의 공겨을 막고, 베트남에서 전쟁 중인 청나라와 화해하여 병력 운용에 숨통을 트게 하고, 남북양 각 함대를 모아 조선으로 진격시키고 대원군을 귀국시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느 것입니다. 또한 지금 조선의 국정이 어지로우니, 청이 이를 보호하면 청나라의 심복이 될 것이라는 식이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그만 하고 싶었던 이홍장은 이 원보령의 의견을 조정에 제출했습니다. 원세개의 경우는 들뜬 기분으로 이홍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조선을 청에 복종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원세개는 하루 빨리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청나라가 통제해야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파견해야할 관리가 누구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았으나, 실상은 자기를 추천하는 속내가 담겨 있었습니다. 다만 이홍장은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져 전쟁이 벌어지고, 북양군이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에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원세개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하간에 득의양양했던 원세개였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첫번째 일은 오조유가 원세개가 병사들의 급료를 빼돌려, 갑신정변 중 사망한 조선 대신들에게 위로금으로 주었던 일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고소장을 본 이홍장은 이것은 순전히 돈으로 조선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병사들에게 원세개가 돈을 물어주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원세개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두번째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난리를 양국이 서로 수습은 해야 했는데, 일본 쪽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한것은 원세개 때문이라면서 모든 책임이 원세개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분하고 짜증스러워진 원세개는 마침 어머니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이야기를 드자, 이를 핑계 삼아 휴가를 내어 귀국해버렸습니다. 고향에 가기 전 잠시 여순에 들른 원세개는 숙부 원보령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벼슬을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원보령은 원세개를 타일렀습니다.


 한편, 귀국한 원세개는 이홍장도 만났습니다. 이홍장은 조선의 정세에 대해 자문을 구했고, 원세개는 이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고종은 우유부단한데다 변덕스러워 남의 부추김에 잘 넘어가니, 높은 관리를 한성에 파견하여 단속하지 않는다면 청을 버리고 일본과 러시아에 붙어서 독립할 겁니다." 


 "대원군은 지모와 재능이 고종보다 뛰어나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대의에도 밝으니 대원군이 귀국하여 고종과 힘을 합치게 한다면 조선에는 이로울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홍장은 원세개가 마음에 들고 해서 조선에서 계속 일을 하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출세길은 열어 놓았고 다시 조선에 가서 복잡하게 일하는것도 싫어진 원세개는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이유로 울면서 거절했습니다. 이홍장은 그런 원세개를 핀잔했지만, 원보령도 통사정을 하자 별 수 없이 원세개가 하남에 모친을 만나러 가게 허락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한편,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파견하여 '한성조약'을 맺고, 1885년 3월 경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이홍장을 만났습니다. 둘 모두 영어를 할 수 있었으니 통역이 없더라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양국 주둔군을 철수 시키며, 장차 한쪽이 출병할때는 사전에 통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만남이 꽤 인상 깊었는지, 훗날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천진에서 만났던 이홍장의 위엄 서린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천진조약도 동아시아의 폭풍을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은 10년에 가까운 세월 뒤,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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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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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cdde74 | 작성시간 13.03.31 이홍장에 대한 일본 인사들의 평가는 대부분 매우 후하네요..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중국관리들에 대한 평가에 비하면 대부분 극찬일색...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더니..이토 또한 칭찬을..
  • 답댓글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3.31 유럽인들이 이홍장에대한 평가도 후하죠..
    비스마르크 또한 이홍장을 만나서 이홍장에게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평가했죠...무슨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이홍장은 중국을 대표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acdde74 | 작성시간 13.04.02 한국에 이홍장 전기 번역물이 없는게 안타깝네요
  • 답댓글 작성자유럽제패 | 작성시간 13.04.02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높게 평가 했지요. 영국 방문할때 일본에서 암살하려하다가 미수에 그쳤을 때 유럽 열강은 이 영감님에 대한 동정이 극에 달했고요. 세계 여행할 때 유럽 방문하는 곳곳곳에서 이슈가 되었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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